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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망령의 외출

2008.01.27 10:0401.27

  등 뒤로 철컹 하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에브릴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문을 차고 긁고 밀고 당겨도, 문 옆의 패널을 누르고 후비고 두드리고 때려도, 두께 550mm의 일급 보안 티타늄제 문은 다시 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이런 바보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담? 방 안의 기기들이 파손된 것을 보면 바깥쪽 문의 고장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른바 지구 최고의 두뇌로 불리던 명색이 이런 한심한 짓을 하다니.

  약 반 시간에 걸친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그녀는 미끄러지듯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색의 야광등 불빛 아래 보이는 황량한 시설 복도의 잔해뿐.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철근과 스티로폼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고, 군데군데 무너진 잔해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일단 당장은 통째로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듯 했다. 외부의 모든 변화, 심지어는 ‘지금 이런 상황’까지도 상정해서, 모든 것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지하 구조물이니까.

  뭐, 그 탄탄한 구조와 보안 덕분에 방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계절은 아마도 여름일 터였지만 지하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옷장에 걸려 있던 실험용 가운 한 벌만을 걸치고 나온 터라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배도 고파왔다. 이 폐허가 된 건물에 뭔가 살지 않는 한, 음식이 될 수 있을만한 유기물을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야겠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 에브릴은 일종의 살아있는 타임박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먼 과거, 아직 핵미사일이 최강의 무기이던 시절, 인류의 궁극적인 발전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범지구적인 프로젝트의 산물. 매 세기마다 다시 부활해,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 다시 잠드는 존재. 지상의 권력이나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후대에 전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자. 이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인류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던 그녀가 선택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한한 미래를 향한 인문학적 호기심이 끝없이 계속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섰고, 그래서 그녀는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런 과부하에 가까운 기억을 한 인간의 육체와 두뇌에 전부 맡긴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충분한 기억을 모아들이며 십 년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뇌 속에 저장된 모든 기억을 전자 기록으로 바꾼 다음 육체의 생명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 세기가 와서 그녀의 새 클론이 준비되면, 새로운 육체의 뇌에 이전의 전자 기록을 각인시키는 식으로 기억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완전히 자동화된 프로그램에 의해 일정 시간마다 수행되도록 하였고, 기술자들이 몇 억 년도 버틸 수 있다고 자부한 자가 발전 시설이 동력으로 장착되었다. 그리고 그 어떤 외부인도 작업 과정이나 전자 기록화된 기억에 접근할 수 없도록 시설 전체에 몇 겹의 프로텍터가 설치되었다.

  지난 몇 세기 동안은 프로젝트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양기 안에서 깨어났고,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고, 모든 것이 변한 듯 보이나 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인간들의 삶을 경험했고, 십 년이 지난 후에는 이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매번의 삶이 순탄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권력자가 그녀를 선전물로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많은 협박과 암살의 위협에 쫓겨다니기도 했다. 마음을 뒤흔드는 사랑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그 모든 위험과 장애, 삶을 향한 유혹을 이겨내고, 다음 세기에 깨어날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내가 보지 못한 지난 구십 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시설은 반파되었고, 그녀가 눈을 뜨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 자신의 존재가 외부에 잊혀진 것만은 분명했다. 세계의 권력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거나, 문서 기록이 사라졌거나, 심각한 전지구적 지각 변동이 있었거나, 아니면... 기억해 줄 인간들이 모두 사라졌거나. 첫 삶의 오십이 년에 십 년씩 여덟 번, 도합 백삼십이 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한두 번씩은 생각해 봤던 상황이었다.

  섣부른 추측은 그만두자고. 에브릴은 푹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나가서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 육체적 욕구를 해결한 다음에, 천천히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해 봐야겠지. 다른 무엇보다 먼저 출구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지하에서 혼자 비참하게 말라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지금 위치는 아마도 지하 5층.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맨발로 조심스레 콘크리트와 금속 부스러기가 없는 곳을 골라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배양기 밖의 땅을 딛기 시작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부드러운 발바닥은 짜증날 정도로 통증과 압력에 민감했다.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듯한 시큰함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다행히 계단은 파손이 심하지 않았다. 몇 번 크고 작은 콘크리트 파편들을 타고 넘어야 하기는 했지만, 지하 1층에 도착할 때까지는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물론 배양기에서 갓 나온 그녀에게는 이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소를 들이마셔 본 적이 없는 폐는 조금만 몸을 빨리 움직여도 터질 듯이 헐떡였고, 제대로 움직여 본 적이 없는 근육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간신히 로비에 도달한 그녀는 바닥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이곳은 아래쪽에 비해서는 파손이 심하지 않은 듯 했다. 뿌옇게 돌가루와 먼지가 앉은 리셉션 데스크와 탁자, 소파 따위가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브릴은 문득 탁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트가 한 권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뻗어 노트를 집어들다가 멈칫했다.

  <에브릴 블라스미코프에게.> 그녀가 처음 눈을 감기 전에 사용되던 몇 백 년 전의 글자가 노트 겉표지에 적혀 있었다. 곡선이 있는 부분에서 조금 떨리는 듯, 그러나 깔끔하고 지적인 글씨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글씨체였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노트 첫 장을 넘겼다. 누렇게 떠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것이, 미백제를 넣어 만든 전 시대의 종이인 듯 했다. 조심해야지, 부서지지 않도록. 나 다음으로 올 사람들도 계속해서 봐야 할 안내서니까.

 아니, 사실 글자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노트 표지에 적혀 있는 자신의 글씨를 본 순간,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된 것이다. 계기판이 부서져 버렸는데도 안일하게 딱 백 년이 지났다고 생각해 버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 내 힘으로 열지 못한 문이 십 년이 지난다고 쉽사리 다시 열릴 리도 없었다. 프로젝트는 망가져 버린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이전에 나왔던 다른 모든 에브릴들도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각자 자신만의 기억을 자신의 머릿속에 남겨둔 채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모든 다른 내가 실패했다면, 지금의 나 역시 저 방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겠지. 웃기는 일이다. 타임박스도 전지자도 아닌, 백 년마다 한 번씩 망령을 제조해 내는 시설이 되어버린 거잖아, 이건.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사고와 행동, 그리고 머나먼 과거의 백삼십이 년 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백 년마다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망령.

  처음 부분의 설명은 읽다가 말고 넘겨버렸다. 어차피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이 노트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수백 년이 지났다면 바깥세상에서도 수십 세대가 지났을 터,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 놓았어도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몇 쪽 뒤부터는 그녀의 경험담이 적혀 있었다. 문명이 사라지고 야만으로 퇴보한 세계이기는 해도, 그녀는 나름 행복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몇 쪽을 더 넘기자 글씨체가 바뀌었다. 보다 갈라지고 산만한 글씨체. 의무감이 아니었다면 쓰지도 않았을 것 같은 힘겨운 문체로 짤막하게 자신의 경험을 적어놓았다. 두 번째 작성자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첫 작성자만큼 바깥 세계에서 운이 좋지는 못했던 듯하다.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의 글이 이어졌다. 필기구도, 글씨도, 문체도, 그리고 경험도, 같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 읽기가 힘겨워졌다. 탁자 위에 노트를 내려놓고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노트에는 모두 일곱 명의 글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여덟 번째라는 말은 아니었다. 처음 작성자가 진짜 처음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바깥세상에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문득 다시 노트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가져갈 필요는 없다. 자신이 돌아올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으니까, 다음 자신을 위해서 안전하게 이곳에 놓고 가는 편이 낫겠지.

  그녀는 천천히 입구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자 복도 벽에 기대어 누워 있는 뽀얗게 백태가 앉은 해골이 한 구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싹했으나, 자세히 보니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빠진 이빨 자리에 검은 금속으로 때워 넣은 흔적이 있었으니까. 의복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이 벗겨 입고 나갔기 때문이겠지. 이 사람은 어떻게 이곳으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죽기 직전까지도, 이곳 말고는 다른 안식처를 찾지 못했던 걸까?

  계단으로 통하는 두터운 철문을 힘겹게 밀어 열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긁히는 소리가 났다. 위쪽에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그녀는 복도에 누워 있는 해골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밖에 나가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십 분 안에 시체가 되어 구를 수도 있고, 일이 년 정도 적당히 살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운이 좋아서, 자연이 내게 부여한 생명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살아남게 된다면,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돌아와서는, 저 다 삭아버린 비망록에 나의 글을 몇 줄이라도 덧붙이고 싶어질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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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1.29 13:00 댓글 수정 삭제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단계가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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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토그 08.01.30 09:49 댓글 수정 삭제
    넵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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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키 08.02.16 11:23 댓글 수정 삭제
    우선, 구상단계는 너무나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참신하고 흥미를 끌기에 충분합니다. 오히려 너무 지나친 상상력이 아니라서 아기자기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문체도 무난하고 매끄럽게 이어져 읽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만.
    자, 지루하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 결말이 무엇일까' 하며 맹목적으로 의미없는 문장들이나 주인공 혼자만의 사색을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네요. 이런 단조로운 글에는 마지막에 큰 임팩트를 주는 결말이 정말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거기까진 작가분의 역량이겠지만요.

    전체적으로 큰 기대를 했는데 아쉬웠다-라는 평으로 요약할 수 있었겠네요.

    본문에 나오는 매력적인 소재들. 즉 그러니까 해골의 주인이나, 노트의 정확한 출저등을 새롭게 설정하셔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결말을 창조해 보시는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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