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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까마귀를 위하여

2008.01.18 21:5701.18

당신이 걷던 자리마다 대나무가 피었네.
당신을 닮아 한없이 푸른 그 대나무여.
무거운 눈에 쌓여 대나무 잎 날리는 이 시기에
그대 어디 있는가.

산을 향해 불러도 메아리만이 대답할 뿐.
아무도 그대 간 곳을 몰라...
다만 외로운 대나무 한 줄기만이 그대 있었음을 알릴 뿐...

그대를 부르노라.
지나간 정으로 그대를 부르고 불러...
저 바다가 마르고, 저 산이 바다가 될 때까지
나는 그대를 부르노라.

억겁의 시간이 흘러
그대의 넋 한조각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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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령은 고구려 사람이다. 세자루의 칼을 맵시있게 찬 그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삼국의 협객들과 가객들의 시선과 질투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고구려의 한 시대를 풍미한 검객이자 가객이었던 그는 한때 연정토의 휘하에 있기도 했는데, 연정토의 투항이 있기 한참 전 몸을 감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예지능력이 있는 의기있는 검객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자층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집어삼키고, 고구려를 공격해들어왔을 때 그 시들어가는 국력을 되살리는데 앞장서지 않고 도망갔는가라고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마령의 발자취는 뚜렷하지 않다.
그것은 신라의 마의태자의 행적과도 닮아, 훗날 고려시대쯤에 마령의 이야기를 귓바람으로 들은 사람들은 그것이 마의태자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하였다.
마령, 비록 잘 생기지는 않았으되, 날렵한 검무를 출 줄 알았고 거문고를 잘 타던 이.
말을 타고 호쾌하게 달려 나가면 그 모습이 마치 말과 하나인 것과도 같아 마인(馬人)이라 불리었던 이.
발을 높이 올려 춤을 추면 그 발끝만이 하나의 생물인양 뱅글뱅글 돌고, 팔은 하나의 깃발이 되어 펄럭이고...
그의 이야기는 망향의 전설이 되어 떠돌았다.
고구려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발해가 서고, 그 뒤에 뒤를 이어...
다시 고구려의 깃발이 펄럭이듯이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시작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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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밤에 꾼 꿈에 펄럭이던 깃발.
까마귀의 발자국이 나 있던 두 조각 난  그 깃발.
간밤에 그대가 두고 갔는가 싶어
좋아라 하였네.
하지만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그대 올까 싶어
싸두었던 밥그릇위에 난 고약한 까마귀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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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마령의 이야기에서 신선이 된 그의 이야기를 읽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패배해버린 도피자의 이야기를 읽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마령은, 아니 마령의 이야기는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마령이 연정토의 휘하에서 나올 당시 나이는 스물 두 엇.
한참 김유신에 대한 두려움과 신라에 대한 분노가 고구려를 싸고 돌 때 이 남자라고 해서 정세에 눈돌리지 말라는 법 없었다.
그는 거문고를 뜯기를 멈췄고, 세 자루의 검을 다섯자루로 늘리고,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기 위해서 원수의 산, 신라의 세력이 언제 타고올지 모르는 저 산 너머를 응시하기 좋은 산에서 수련에 들어갔다.
그런 그가 변했음을 깨달은 것은 지인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검을 준비하는 손에 힘이 빠지고,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높은 산위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고, 그가 늘 정해진 시간에 산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말을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시간을 짐작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소리로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거문고를 멈췄던 그가 다시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물론 최고의 춤꾼이고,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이다.
그러나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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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거문고는 변해버렸다.
강건함과 유쾌함을 잃어버린 채 한없이 꿈에 젖은 듯 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니 잊어버린 그 곡조...
사람들은 거문고가 그런 음색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그 음률에 빠져들었다.
어떤 것이 생각날 듯한 음색이었다.
낯익으면서도 한없이 낯선 어떤 음색.
미워할 것 같은 음악이지만 그래도 다정한...
사람들은 그 음색을 듣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는 것을 멈추었다.
그래서 후일 그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마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선이 되었다고.
그러나...그의 춤은 달랐다.
종종 하늘을 나는 새들은 그가 미친 듯이 산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몸을 공중에 날리면서 허리띠에 꽂은 검들이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검이 춤을 추었다.
세 자루의 검은, 네 자루의 검이 되었고, 네 자루의 검은 다섯자루의 검이 되었다.
새들 외에, 새들 외에는, 아무도 그의 춤을 보지 못했다.
그랬다. 새들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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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날 밤의 이야기.
눈내린 다음 날, 마령은 어떤 음악 소리에 잠을 깨었다.
낯익지만 조금 간드러진 것 같은 음악, 거문고와 닮은 것 같지만 더 여리고 화려하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마령의 잘 발달된 귀는 그 음악이 산 하나는 떨어진 곳에서 들린다는 걸 알려주었다.

“기이한 음악...”

마령은 검객이지만, 검객이전에 가객이었다. 음악에 휘둘리는 가객이라니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얼른 방으로 돌아와 거문고를 잡았다.
저 음악, 새로운 음악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저 음악에 귀를 둘 수는 없었다. 마령은 그 음악을 지워내기 위해서 거문고를 잡았다.
거문고의 음색이 방안을 가득 채워, 그 음악을 몰아내고서야 마령은 안도할 수 있었다.

“가증스럽도다...”

그것으로 마령은 그 음악을 귀에서 몰아냈다고 생각하고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착각.
그 다음날 그 음악은 다시 그의 귀에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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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뒤집어지고
땅이 붙어올라
하늘과 땅이
바뀌어도...

나는 그대의 것이고
그대는 나의 것.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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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이나 그런 신경전이 반복되었다.
굳이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방 하나를 두고서 종류가 다른 두 음악이 주고받아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절대로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음색만으로도 상대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그였기에 그는 상대를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방은 틀림없이 무에 능한 사람이며, 엄청난 공력의 사람이리라.
산 하나를 넘어서야 다다를 수 있는 산에 그 가냘픈 음색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령은 화가 났다.
검을 공중에 던지고 발로 받아올렸다. 화가 풀릴 때까지 그런 일을 반복했다.
단검을 날리고 팔꿈치로 쳐 올려 다시 손으로 받는다.
장검을 발로 차 올려 손을 잡고 옆으로 돌리면서 다시 단검을 위로 날리는 것은
도무지 음악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놀리듯이 가야금 음색이 계속 울렸지만 그날 그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산을 건너가야만 만날 수 있는 가객이라니.
그는 고국을 위해서 수련하기로 맹세한 몸이었다. 아까운 시간을 들여서 산을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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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가야금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는지는 중요치 않아.”

마령은 내 앞에서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먹었던 것이 풀리고 있다는 것이었지. 미워하는 마음, 원수로 생각하는 마음, 이때껏 멸시했던 음악을 받아들이게 된 내 마음. 그걸 참을 수가 없었지. 산 하나 넘어 저 산 너머 어딘가에...”

“그 자가 두려웠는가? 강할까 싶어서?”

내 말에 마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면...?”

“산 너머 저 쪽,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게 두려웠어.”

마령이 들을 수 있는 그 곡을 나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들의 귀에는 마령의 힘빠지고 구슬픈 거문고 소리만이 들렸다.
그러나 마령은 계속 저 산 너머에서 신라인의 가야금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얼굴이 내가 가장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라네...사랑하는 얼굴을 향해 검을 날릴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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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당신과 나.
내가 당신이 될 수 없듯.
당신 또한 나가 될 수 없어.
정이 세상만사를 정한 다 해도
이것만은 정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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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령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집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그가 장난삼아 끼적거렸을 노래들(그런것치고는 상당히 암울한.)과 가야금, 그리고...

“당신인가요...?”

한 여인. 파란색 옷을 입고 머리를 거슬러 올린 한 여인이 날 바라보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문고를 아무렇게나 들고 있는 날 보자 곧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군요...당신이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여자.
[당신]은 누구일까...
어색한 어투에서 [고구려]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건만, 나는 어째서 이 여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까.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산 밑으로 뛰어내려가버렸다. 그 산을 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마령의 귀를 괴롭히던 가야금 연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이 정한 배필이라 해도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차마 두고 가려 하네.

땅이 뒤집히고, 산이 사라져버린 후에도
용납할 수 없는 인연이라.
그리 버려두고 가려 하네.

내 마음에 흡족하게 여기려 해도
밤마다 꿈마다 꾸는 꿈...
다가가 손에 쥘 수 없는 것.]

마령이 고구려인의 꿈, 고려인의 꿈, 백제인의 꿈이 된 것은 아마도 그와 (단 한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연인인 신라녀의 이야기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마령과 그녀는 평생에 단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엇나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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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작품 중에서 좋아하는 건 없습니다.(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조협려는 읽었던 것 같은데, 딱 중간권이 분실되어서 다 못 읽었습니다.(그나마도 중간중간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도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버러럭. 도서관에 있는 거 다 가져간 건 누구여~)
그 중에 가장 감명깊었던 건 이막수였던 것 같군요...

신조협려와 와호장룡에서 약간의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만...
글쎄요...;;;;;;제가 하려는 말과 그 두 작품의 이미지가 달라 어떨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무협풍...을 의도했지만 과연...?;;;;;;;


세이지
댓글 4
  • No Profile
    배명훈 08.01.24 13:11 댓글 수정 삭제
    플롯도 사건도 전개가 좋았어요. 무협지를 잘 안 읽어서, 이게 무협 플롯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아래보다 훨씬 좋은 흐름이었어요.
  • No Profile
    세이지 08.01.24 18:49 댓글 수정 삭제
    음,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뭐,플롯을 따왔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따온 거라 아무래도 좀 흐릿할겁니다.
    신조협려에서 이막수의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하느뇨]에서 약간 따오고 -저는 양과보다는 이막수가 좋았거든요.(철저하게 이막수의 말을 지지하는 인간이기에)와호장룡의 모티브는...그러니까 영화에서 장쯔이가 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따온 거니까 뭐, 무협 플롯은 아닐지도요....;;;;;
    용의 알보다는 좀 낫다니 다행입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손을 좀 놓다가 요즘 쓰고 있는 중이라, 배명훈님의 댓글이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사실 못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저는 마냥 좋아요.(^^)한 몇년간은 평도 못 들을 줄 알았거든요.
  • No Profile
    배명훈 08.01.24 20:53 댓글 수정 삭제
    네. 그래서 가끔 염치 불구하고 댓글을 달곤 합니다. 글쓰기가 늘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 No Profile
    저도 이 글이 아래 용의 알보다 플롯이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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