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호수에서

2007.12.31 01:4812.31

바람이 차갑다. 이제 겨우 9월이지만 스코틀랜드의 바람은 이미 초겨울의 그것과 비슷하다. 따지고 들면 온몸이 젖은 채 호수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중인 사람이 추위를 안느끼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물이 종아리까지 오는 곳에 도달한 나는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호수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수주제에 가지고 있는 파도 때문인지 가끔 넘어질뻔 했지만 결국 별 문제없이 완전히 물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넓적한 바위를 골라 걸터앉은 후 떨리는 몸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관광객들이 보이긴 했지만 쌍안경으로라도 보지 않는 이상 내가 홍차에서 갓 건져낸 티백같은 상태라는 걸 알아보긴 어려울 것 같았다.

호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단지 파도만 보내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 없이 몸을 덜덜 떨며 호수를 지켜보기만 했다. 예전부터 이 호수는 이런 식이었겠지. 호수는 단지 호수일 뿐이다. 단지 사람들이 사라질 뿐. 10여분 전에 호수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따뜻한 몸을 가지고 살아있던 그녀는 이제 차가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시체는 발견될까?

그 전까지 가지던 그녀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순간 내가 가장 답을 알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  

호수로 가는 택시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참 편했구나, 라고. 어이없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둘의 사이를 방해하는 건 명확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이유. 변명거리로도, 인정거리로도 충분한.

그녀가 이별을 언급했을 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녀가 잘못한 것도 없다. 핑계 댈 만한 것도, 원망할 상대도 없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이별. 차라리 나보다 더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말하면 화를 내고 원망할 지언정 그녀를 포기할 용의가 있었다. 아쉬운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렇게 내가 납득하지 못하자, 그녀는 심판의 시간을 조금 연장해 주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어떤 호수에 데려가 주면 우리 사이를 다시 한번 고려해 보겠다고 한 것이다. 내 기억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듯이 익숙한 그 호수의 이름에 별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성은 어떻게 할 건가요?"

계속 생각을 하던 나는 택시기사의 질문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예?"
"호수만 보실 건가요, 아니면 성도 들릴 건가요?"

그제서야 그가 의미하는 것을 나는 이해했다. 가이드북에 호수 근처에 있는 성에 대해 나와 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 것이다.

"호수만 볼 거에요. 성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저도 그 쪽을 추천합니다. 가격에 비해서 볼 건 없는 성이거든요."
"하하,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택시기사의 말에 적당히 웃음을 곁들여 대답한 나는 창밖을 보았다. 관광지 치고는 한적한 분위기의 시내는 딱히 별 감흥을 주지 않았다. 계속 창밖을 보는 척 하면서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를 눈으로 쫓았지만, 그녀는 반대편의 창밖을 보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버스안에서도 그녀의 눈은 계속 창밖만 향하고 있었다.

대화 거절의 의미일까? 혹은 날 설득할 계획을 짜고 있는 중? 단순하게 스코틀랜드의 이국적인 풍경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나, 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그럴리가 있나. 산 넘어 산이 보이는 여기는 잘 쳐줘도 강원도랑 동급인 곳이다.

30분이 안 걸려 택시는 호수에 도착했다. 그 동안 서로 한마디도 말안하며 반대편의 창밖만 보고 있는 이 이상한 커플에 대해 택시기사가 의아해 할 법도 했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호수로 내려가는 계단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자기는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호수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반대편의 땅이 보이지 않았으면 여기가 바닷가라고 해도 난 믿었을 것이다. 물속의 자갈들이 전부 붉은 색인 것을 본 나는 필사적으로 붉은 색과 관련된 원소를 생각해 내려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 어깨 위에 달린 그건 이과용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했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자기 정체성의 재확인을 하는 동안 그녀는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바닥의 돌 중 하나를 집어 호수를 향해 던졌을 때야 나는 그녀가 '던지기 적당한 크기의 짱돌'을 찾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전하며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를 장거리 비행을 한 돌은 별 특별한 반응없이 그대로 수면에 낙하했다. 잠시 작은 파문이 일어나나 싶었지만 다음번 파도가 그 위를 지나가며 돌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렸다.

소심한 남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나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어디에도 '호수에 돌을 던지지 마시오.'같은 경고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쓰레기를 던지는 게 아닌 바에야 딱히 말릴 이유도 없어 나는 그녀가 두번째 돌을 집어들어 던지는 걸 보면서도 따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두번째 돌 역시 평범하게 날라가 평범하게 수면에 처박혔다. 잠시 그대로 서서 그 반응을 지켜보는 듯 하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손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실망과 초조가 적당히 섞인 감정이 그녀의 어깨에서 느껴졌다.

뭐 하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만 이제 적당히 하고 우리 사이에 대해 이야기나 하자 싶어 나는 그녀에게 걸어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몸을 움직여 호수를 향해, 정확히는 호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놀란 내가 그녀의 이름을 소리치며 쫓아갔지만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허리까지 잠기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따라잡아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을 땐 이미 우린 물속을 걷는다기 보단 헤험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물을 먹어가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그녀를 잡아 끌었다.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내...해."
"뭐?"

물에 잠겼다가 말았다가 하느라 혼란스러운 내 귀는 그녀의 말을 똑바로 잡아낼 수 없었다. 꽤나 노력한 다음에야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불러...내야...해."
"도대체 뭘?"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그 전에 다른 '무언가'가 대답했다. 저음이면서도 호수를 울리는 소리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놀란 내가 힘주던 팔을 풀자 그녀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처럼 움직이는 대신 가만히 수면에 뜬 상태로 입을 열었다.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갖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그럴듯하게 보이게 말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어이없음과 불평불만의 칵테일에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내가 좋아 했던 그녀의 입이 미소짓고 있었다.

"이게 내 이별선물이 될거야."

그녀의 뒤에서 물보라가 치솟았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 갈려 했지만 물에 휩쓸린 내 몸은 균형을 잃고 드럼세탁기속의 빨래처럼 회전했다. 그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싶었지만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아래가 섞이고 좌우가 혼란스러웠다.

죽기 싫어 발버둥 친 끝에 마침내 나는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데 성공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호수속에는 오직 나 뿐이었다.

그녀는 사라졌다.

-

적당히 온기를 되찾았다 싶은 나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사라진 채로였다. 차가운 바람이 이건 침대에서 꾸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도로와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것에 대해 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녀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은 모두 내가 그녀와 함께 여기 온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녀의 실종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그들을 증인삼아 나를 찾아올 경찰에게는? 울고불며 매달려 딸의 생사를 물을 그녀의 부모에게는?

아니, 일단은 먼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택시 운전자에게 할 말을 지어내야 했다. 호수에서 사라진 한 명에 대해서.
해파리
댓글 2
  • No Profile
    배명훈 08.01.24 11:37 댓글 수정 삭제
    음. 무슨 이야긴지 잘 모르겠어요.
  • No Profile
    해파리 08.01.25 01:08 댓글 수정 삭제
    아마 글을 쓰는 중에서 저 스스로가 이리저리 글에 휘둘려서 그런 듯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해도 결국은 변명이지만요)
    사실, 이건 원래 공포물로 쓸려던 소재였거든요.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97 단편 dispell 불타는 밀밭 2007.11.26 0
2296 단편 신처용가 나길글길 2007.11.27 0
2295 단편 인디언 타임 나길글길 2007.11.28 0
2294 단편 <b>당신의 고양이를 보여주세요</b> - 3월 31일 마감2 jxk160 2007.12.03 0
2293 단편 웃음 스위치2 Mono 2007.12.03 0
2292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2291 단편 즐거운 나의 집 파악 2007.12.11 0
2290 단편 하지 파악 2007.12.12 0
2289 단편 뮤즈의 속삭임(본문 삭제) Inkholic 2007.12.20 0
2288 단편 Velouria 파악 2007.12.24 0
2287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세뇰 2007.12.24 0
2286 단편 가래 노유 2007.12.30 0
2285 단편 도깨비 숲1 노유 2007.12.30 0
단편 호수에서2 해파리 2007.12.31 0
2283 단편 용의 알2 세이지 2008.01.05 0
2282 단편 까마귀를 위하여4 세이지 2008.01.18 0
2281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2280 단편 설녀5 세이지 2008.01.22 0
2279 단편 망령의 외출3 구르토그 2008.01.27 0
2278 단편 잃어버린 화요일4 해파리 2008.01.27 0
Prev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