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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래

2007.12.30 19:4712.30

가래가 나온다.

초록색 끈적거리는 것이,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 본 점액질의 괴물이 연상되는 가래였다. 한 번에 내뱉은 양이 엄지손톱만하다. 손으로 만져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손가락에 들러붙어 본드같이 늘어진다. 밭은기침이 난다. 목이 무언가에 꽉 막혀있고 이따금 초록색 가래가 뛰쳐나온다.

목이 아프고 미열이 난다.

며칠 전부터 몸살기가 있었다. 하지만 연말이라 여기저기 술자리에 불려나가다 보니 그것이 심해진 듯 했다. 어젯밤의 노래방이 타격이 컸다. 인자하신 주인아저씨는 우릴 죽이려고 하신 것 같았다. 10시에 들어가서 기침 콜록콜록 하면서도 한 시 넘어서 나왔으니. 또 내가 부르는 노래가 평범한 창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종류라서 목에 무리가 더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목안에 가득 차있는 가래를 뱉어내지 않으면 잠조차 잘 수 없었다. 재떨이에 물방울처럼 고여 있는 가래에 가래를 더해 나갔다. 덩어리는 점점 커져갔다. 나는 가래 모으는 재미에 맛 들리고 말았다. 가능한 한 침이 섞이지 않게 누렇고 끈적끈적한 가래만 쌓아갔다. 남이 봤더라면 꽤나 역겨워할만한 꼴이었을 것이다. 가래는 한 숟가락정도 모였다. 내가 뭐 하는 거지 하면서도 이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어난 것도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였지만 부서지는 듯한 머리를 가눌 수 없어 나는 다시 드러눕고 말았다.

꿈속에서 나는 가래를 보았다. 가래는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재떨이를 채우고 넘치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도망갔다. 가래는 더욱더 커져 내 방 창문을 깨고 거리로 나가고 말았다. 가래는 골목길을 돌면서 점점 커져나갔다. 사람들이 뱉은 가래 같은 것을 받아먹으면서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사람을 습격하여 직접 가래를 뽑아먹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래에게 한번 ‘먹힌’ 사람이 다시 가래를 뱉으면 그 가래 역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꿈틀거리는 가래는 점점 많아져갔다. 서로서로 합쳐가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어느덧 온 동네는 가래 덩어리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신 경보 방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집안에만 들어박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된 것이 내 책임은 아닌가 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을 간신히 차려보니 나는 이불속에서 식은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좀 전만 해도 꽉 막혀있던 목이 이제는 많이 풀려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오늘 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일어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번 머리를 일으켜 보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스르르 정신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맘 편히 하루 종일 누워있기로 했다.

다시 눈을 감기 전, 재떨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뱉어놓은 가래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어머니가 치우셨나?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가신다고 했다. 나는 다시 몽롱한 기분으로 잠에 빠졌다.
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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