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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2007.12.24 21:2912.24

산타는 대기실 벽에 걸린 대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았다. 작지만 반짝이는 푸른 눈은 예리하고 이지적인 빛을 발하고, 가슴까지 늘어뜨린 희고 풍성한 수염은 온화해 보인다. 특별한 날에만 꺼내 입는 붉은 색 고급 정장에는 한 톨의 먼지도 미미한 구겨짐도 없다. 산타는 헛기침을 하며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거울을 통해 알현실 입구에 놓인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윈티엘- 크리스마스와 착한 어린이들의 수호자이며 하느님의 비서 역할을 맡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스크린과 3차원 투영 지구본 너머로 그녀의 살짝 웨이브진, 길고 부드러운 연보랏빛 머리칼과 안경 너머의 상냥하고 따스한 두 눈, 단정한 회색 치마 정장에 감싸인 날씬한 몸매가 보였다. 1년 내내 계속되는 격무로 인해 피부도 좀 까칠해지고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진 못하고 있었다. 산타는 윈티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윈티엘, 여전히 아름답군.”
  “어머나. 고마워요, 산타. 기다리느라 지루하셨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하느님께 면회신청을 하신 거에요? 동북 아시아 지역이 크리스마스잖아요 요즘, 바쁘지 않아요?”
  살풋 미소 지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산타는 45도 각도로 씨익 금니를 드러내 보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아아, 주님께 꼭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부탁이요…? 희한하네요, 서기 350년 이후 연장 근무를 신청하시고서 한 번도 그런 경우 없었잖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윈티엘. 그런 그녀를 보며 산타는 멋적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좀 특별한 부탁이라서. 주님께 확답을 듣기 전에는 뭐라고 못하겠어. 그건 그렇고… 일 언제 끝나? 에덴 동쪽 포도나무 산지에서 출하된 최고급 와인이 한 병 생겨서 말야, 대접하고 싶은데.”
  윈티엘은 미소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요, 곧 퇴근하긴 하는데 선약이 있어서요.”
  입맛을 다시는 산타를 외면하며 윈티엘이 허공의 스크린을 향해 손가락을 두어 번 까딱이자 화면이 바뀌었다.
  “음, 50억 8345만 2731회 차 천상 연말 결산 보고는 일단 끝났고… 내년 1/4분기 예산안 결재가 아직 남긴 했는데, 들어가 보셔도 되요. 면회 신청은 아까 하셨죠?”
  “음? 어, 불쑥 들어가도 되는 거야?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분명 게으름 피우고 계실 테니. 좀 놀라게 해드릴 필요가 있어요.”
  헤죽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 산타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이고는 알현실 문을 노크했다.
  “산타입니다 주님, 들어갑니다!”
  벌컥. 책상에 발을 올려놓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던 예수는 산타가 들어오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걸 등 뒤로 숨겼다.
  “어, 응!? 어, 오랜만이야 산타. 그래, 무슨 일로 면회 신청을 한 거야?”
  산타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며 예수를 바라보았다. 잘 단련된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나는 상체에 딱 달라붙는 쫄티와 어깨에 새긴 ‘Love and Piece'라는 문신,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대조적으로 지저분하게 기른 머리칼과 수염. 산타의 시선을 의식한 예수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탁자에서 발을 내렸지만 지구 궤도 상에서 프록시마 켄타우리의 기상 예측을 할 수 있는 산타의 예리한 시각은 예수의 발끝에 걸려 까딱대고 있던 양털 슬리퍼를 놓치지 않았다. 산타가 한숨을 푹 내쉬는 걸 보며 잔소리할 기색이라는 걸 알아챈 예수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산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뗐다.
  “주님, 제발 체통 좀 지켜주시면 안 됩니까? 그 머리며 수염은 다 뭡니까? 지구에서는 은둔형 폐인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는데, 명색이 지구를 포함한 물리 세계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그러고 계시면 인간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맙소사, 게다가 그 옷차림, 끔찍하게 안 어울립니다. 주님이 무슨 히피입니까? 지구 미국에선 그 패션, 30년 전에 유행 지난 거 아시죠?”
  “괜찮아, 인간들은 내가 천상에서 이러고 다니는 줄 몰라. 게다가 이게 편하다고 난.”
  산타는 발을 굴렀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최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 극본이 지구에서 새로 쓰였다던데, 그걸 쓴 작가 꿈에 나타나서 그런 옷이 마음에 든다고 하신 것 모를 줄 아셨습니까? 그거 주님이 하신 것 맞죠? 맙소사, 저 지구 TV로 그거 보고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 문신, 새기려면 철자나 좀 맞게 새기시죠. ‘사랑과 쪼가리’라니! ‘사랑과 평화’ 아닙니까?”
  예수는 하품을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난 인간 몸으로 태어났을 때 팔레스타인 출신이었어, 영어는 잘 몰라.”
  “아시려고만 하시면 바로 아실 수 있으시잖…. 아니, 요점은 이게 아니고! 등 뒤에 숨긴 그건 뭡니까?”
  예수가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며 산타는 뒷목이 당기는 걸 느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이리 주시죠, 저번에 뵈었을 때는 10대 청소년들이나 볼 만한 포르노 잡지를 보시며 킬킬거리고 계시더니… 이번엔 뭡니까?”
  “어, 별 거 아냐. 닌텐두DS라고, 지구 일본에서 최근에 만든 물건인데 짐승의 숲이라는 아주 유익하고 건전한 소프트웨어가….”
  “하느님!”
  참다못해 산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예수는 태연히 한 손으로 탁자 위에 닌텐두DS를 내려놓으며 다른 손으로 귀를 후볐다.
  “소리 안 질러도 돼, 너구리가 백화점 짓는 데까지만 하고서 빌려줄 테니까. 아니, 이건 게임 스타일상 빌려서 하기가 좀 그런가? 음, 안색이 안 좋은데? 아침 먹은 게 잘못됐나봐?”
  “…….”
  “아, 이런 정적인 게임은 산타 취향이 아닌가 보지? 그 나이 먹고서 에로 게임하며 하악하악 거릴 거 같진 않고, 쏘고 썰고 베고 때려 부수는 종류가 더 마음에 드는 거야? 어디보자, 닌텐두DS는 가족용을 컨셉으로 나온 거라서 그런 건 적당한 소프트웨어가 없긴 한데….”  
  도저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에서 거품만 뽀골 뽀골 피어 올리는 산타를 보고는 예수는 히죽 웃으며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훅 불었다.
  “자자, 밀레니엄- 이 밝아 온 지도 별로 안 됐잖아. 벽두부터 피곤하게 핏대 세우지 말고 용건을 말해 봐, 나도 노는 건 이쯤 해두고 예산안 검토해야 되니까.”
  예수는 다리를 꼰 채 턱에 손을 괴고 상체를 앞으로 끌어 당겼다. 그 말에 잠시 놓을 뻔 했던 정신줄을 간신히 다시 움켜잡은 산타는 헛기침을 하며 근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예수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그런 예수의 얼굴을 밉살스레 쳐다보던 산타는 입술에 침을 축이고, 드디어 말을 꺼냈다.
  “휴가 신청을 하고 싶어 찾아 왔습니다.”
  “…어?”
  예수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지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날인거야?”
  “…아닙니다.”                
  탁자 위로 한 달음에 뛰어 올라 예수의 목을 잡고 앞뒤로 흔들어 대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산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후우, 진정하자. 흥분하면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다. 진정하자, 산타. 이 일하면서 초딩들도 숱하게 상대해 봤잖아. 주님이 괴이한 농담을 즐기시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어….
  “아시다시피… 제가 지구에서의 연장 근무를 신청한지 165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근, 태업도 없었다는 건 잘 아시라 믿습니다. 지구적 규모로 늘어난 초딩들 때문에 속도 많이 썩였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었고요.”
  “아하, 산타가 에로 게임에 관심이 없어 보였던 건 어린애 취향이라 그랬던 거군. 발가락질을 해 주곤 싶지만 참지. 게임은 아니지만, 시스터 프린세스라고 해서 여동생 계에 획을 그은 명작 애니메이션이 있긴 한데….”
  …어쩌면 참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도 이젠 지쳤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올해 마지막인데, 이젠 그만 좀 쉬고 싶어요. 보십시오, 지구의 둘레는 40192Km고, 제 전용 선물 운송 셔틀인 Rudolf Mk-2는 최근 쿠커콜라 사의 뽐뿌질 결과 붉게 도색한 이후로 3배 빨라져, 1초에 지구를 9바퀴 돌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사실 지구를 돌며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산타는 뒤에 이어질 말의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잠시 말을 쉬었다.
  “…거의 연중 지구의 어느 한 지역은 크리스마스라는 겁니다. 1년 내내 실시간으로 지구 전체의 착한 어린이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면서 시대 변화에 따른 ‘착함’의 기준을 새로 설정하고, 지역 별로 여전히 약간씩 차이가 나는 그 기준을 임의로 적용해 선물을 배송하고, 크리스마스가 겨울이 아닌 지역을 고려해 적절한 복장도 마련해 뒀다가 그 때 그 때 갈아입고, 그렇게 고생을 해도 핀란드에 있는 지구 산타 지부에는 불공정 배송이라고 전 세계 초딩들의 악플들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이젠 어지간한 악플 정도는 철근처럼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단련이 되긴 했지만….”
  “훠이, 훠이.”
  "…저기, 갑자기 손을 내저으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단어들이 좀 많이 허공에 떠다녀서.”
  참지 못하면 지는 거다. 산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단련이 되긴 했지만, 솔직히 최근 몇 백 년 들어 회의가 많이 듭니다. 물론 천상의 어떤 부서든 늘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지만, 능력과 인격이 검증된 인간을 사후 천사로 임명해 인력난을 줄이는 혜택을 산타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산타는 문득, 사후 천사 임명을 받은 첫 번째 성인이었던 에녹을 떠올렸다. 그 친구, 메타트론이라는 간지 나는 이름까지 받고서는 기대에 부풀어서 대외홍보부에서 일하게 됐지만 천상 행정이 끝없는 야근과 잔업의 연속이란 걸 알고 난 뒤에는 좌절해서 삐뚤어진 성격이 되 버렸지. 그 바람에 인간들 사이에 전해지는 외경에서는 메타트론이란 이름이 거의 사탄에 필적하는 마왕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버렸고. 아, 안경에 습기 차는 이야기다….
  “흐음….”
  예수는 진지한 태도로 수염이 난 턱을 긁었다. 그러나 저런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터무니  없는 농담을 하는 걸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산타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파업을 선언하고 나가 버린다 해도, 주님께서는 저를 꾸짖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랄까… 음, 저는 여전히 제 일을 사랑하고 있긴 합니다만… 조금 지쳤다는 겁니다. 아니, 꽤 많이요.”
  “…….”
  “저기… 지금 혹시 눈뜬 채 졸고 계신 거 아니죠 주님?”
  “아냐, 계속 말해 봐.”
  예수는 진중한 시선으로 산타를 바라보며 코를 후볐지만, 그 태도가 너무도 엄숙해서 산타는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주님, 저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산타는 하던 이야기를 끝마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구에서 유행하는 대로 세 줄 요약해서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착한 어린이들에게 1년에 한번 씩 선물을 줌으로써 꿈과 희망을 잃지 않게끔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몸으로써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하건만 그간의 격무로 인해 심신이 너무도 지쳤습니다. 장기적으로 보아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필경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터, 이에 1년간의 휴가원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엄숙하게 코를 후비던 예수는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산타는 순간 움찔했지만, 일어선 예수가 심오하게 엉덩이를 긁는 걸 보고서는 자신도 에녹처럼 삐뚤어져 버릴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일리있구만, 그렇게 해.”
  햄릿의 그것에 필적하는 고뇌에 잠겨 있던 산타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거죠?”
  “…취소할까?”
  “아, 아뇨! 감사합니다!”
  산타는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을 지그시 억누르며 빠르게 예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말해 놓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뻥이라느니 그런 소리를 할지도 몰라. 예수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인터폰을 두들겼다.
  “어이, 윈티엘! 산타가 사직원 쓰고 싶대, 인사부에 알려서 새 산타 지원자 뽑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주님.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주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산타, 장난이었는데 그런 울 거 같은 표정 지으면 미안하잖아, 흠흠. 어이, 윈티엘? 방금 한 이야기 말인데….”
  -농담이셨죠? 예측했습니다.
  인터폰에서 울려 나오는 윈티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예수는 투덜거렸다.
  “…패턴을 바꿔야겠군, 망할. 진지한 척 하다 삼천포로 가는 영국식 말장난은 한계가 있어, 일본식 만담은 태클 넣어줄 상대가 없어서 무리고, 양키 변태 개그로 전향해볼까…. 아무튼, 1년간이랬지?”
  “예, 주님.”
  예수가 서랍을 열자, 깜짝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피에로처럼 두툼한 서류철이 튕겨지듯 솟아올랐다. 그 중 하나를 집어 예수는 방금까지 귀를 팠고 그 다음으로는 코를 후볐고 마지막으로는 엉덩이를 긁던 손가락에 침을 발라 페이지를 팔랑 팔랑 넘겼다.
  “늘 고생하는 것, 알고 있어. 사실 좀 안쓰럽기도 했고… 안 그래도 내년이나 내후년 쯤 좀 쉬다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좀 빨리 줘도 뭐 괜찮겠지.”
  예수의 손가락을 주시하며 기왕 하는 김에 배꼽에 침칠까지 하신다면 참 적절할 텐데 하는 망상을 잠시 하던 산타는 제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휴가인 건가? 예수는 서류를 흝어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귀찮으니 휴가원 제출은 생략하라… 고 말하고 싶지만, 천사들도 공무원 근성이 몸에 배어서 말야, 서류가 없으면 일을 하려고 들질 않거든. 좋아, 올해 포함해 앞으로 5년이면 되겠지? 휴가원은 오늘 중으로 윈티엘한테 주고, 그럼 끗. 나가봐도 돼. 뭐 더 할 이야기 있음?”
  “예, 감사합니다!”
  루돌프가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산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예수가 외쳤다.
  “아참, 어디 놀러 가기 전에 네 선물 공장에 잠깐 들러 봐!”
  “알겠습니다 주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산타는 휘파람을 불며 알현실을 나섰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짓는 윈티엘에게 윙크를 보내며 그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아, 비록 작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별로 상관없어. 5년이라, 첫 휴가인데 뭘 하면서 놀까. 우선 안드로메다에서 개념 수거하고 있는 친구 놈에게 찾아가 염장이나 좀 질러주고, 그 다음에는 말머리 성운 은하 경마장이나 가볼까. 그러고 보니 게 성운 특산 우주 꽃게도 못 먹은 지 한참 되었구나. 아참, 윈티엘도 고생이 많을 텐데 장미 성운 화훼 공판장에서 은하 장미 한 다발 주문해서 깜짝 선물이나 할까.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비죽비죽 절로 새어 나온다. 서류 더미를 품에 끌어안고, 다른 한 뭉치는 몸 옆에 둥실둥실 띄워 놓은 채 복도를 지나치던 천사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산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선물 공장에 도착한 산타는 싱글벙글 웃으며 정문으로 들어섰지만, 순간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걸 느꼈다. 이거, 왜 이래? 멈춰 있는 생산 라인을 둘러보던 산타는 문득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일하고 있는 알프(Alf)들이 하나도 없다? 어, 물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생산 라인이 멈추긴 하지만 그래도 지역 별로 선물 분류하고 루돌프에 갖다 싣고 하느라 한참 북적여야 하는데? 다들 어디 간 거지?
  내가 휴가 받은 걸 미리 알고서는 다들 좋은 기회다 하고 놀러 가 버린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면서 산타는 공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텅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컴퓨터나 콘솔 게임기를 비롯한 전자기기 생산라인도, 미취학 이전의 유아들을 위한 보다 클래식한 장난감 생산라인도, 생산 구획 너머 포장 및 분배 구획도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루돌프가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셔틀 격납고까지 둘러 봤는데도 일하는 알프들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걸 느끼며 자신의 집무실로 향할 때 쯤 산타는, 혹시 하느님이 알프들에게 미리 연락을 넣어 둬서 고도의 낚시질을 시도하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쾅-!
  집무실 문을 힘껏 열어 제친 산타는, 텅 빈 집무실 안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긴장으로 굳은 손으로 편지를 조심스럽게 뜯은 산타는 내용물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산타 클로스 사장님께.
  하느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면서, 그 분의 가호가 있길 바랍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간략히 적겠습니다. 저희는 크리스마스가 생기고, 크리스마스는 착한 어린이들에게 산타가 선물을 주는 날이라는 인식이 지구상에 널리 퍼진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뼈 빠지게 일해 왔습니다. 물론 1년 내내 격무에 파묻혀 지내는 건 천상의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 성령들이 다들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적어도 지구에서 유명하며, 하느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크리스마스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인간들조차 사장님의 이름과 사장님이 어떤 일을 하는 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연중 지구의 어느 한 장소는 거의 항상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고, 지구의 기업체들은 사장님의 이름과 이미지를 팔아 장사를 합니다. 물론 사장님도 배달 임무에 힘에 부치시리라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장님은 대단히 유명한 분이며, 지구의 인간들에게 널리 환영 받습니다. 안티도 물론 많고, 사장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인간들도 숱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장님에 대해 알고는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어떻습니까. 1년 내내 매일 같이, 하루 종일 장난감을 조립하고 포장하고 분배하고 루돌프에 갖다 싣는 일들, 한 마디로 노가다는 저희가 다 합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사장님의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받고 싶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서 사장님은 좋은 분입니다. 임금 체불도 없고, 하루 8시간의 휴식도, 특근 수당도, 기타 잡다한 야식이나 그런 것들도 꼬박꼬박 챙겨 주시지요. 하지만 저희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도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속에 사장님과 루돌프와 함께 출연하고 싶고, 지구 어린이들이 저희도 사장님만큼 사랑해 주고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진정 바라는 건 온기와 애정입니다. 이전부터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던 데다 최근 사장님이 업무 외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하여 부득불 기습 파업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결국 저희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장님께 저희의 의지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저희는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 그 동안 신경써주지 못했던 가족과 친지, 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축하를 주고받고자 합니다. 사장님이 저희의 뜻을 이해하시겠다면 저희 집으로 찾아오세요, 선물도 주신다면 더욱 좋고요. 사장 대 노동자가 아니라 같은 천상의 주민으로써, 동등한 입장에서-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산타 선물공장 노조 위원장 김알프 서명. 알프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산타께 이 편지를 전합니다.

  편지를 다 읽은 산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담배는 나오지 않았고, 그제야 산타는 오래 전, 자신이 니콜라스 대주교라고 불리던 인간으로써 지구에서 살던 시절 이미 담배를 끊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당사자인 하느님은 물론 나도, 천상의 모든 천사와 성인들과 성령들도, 지구의 어린이들도 모두 함께 이 날을 축하하며 즐거워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특히, 내가 그 동안 너무도 무심했던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알프들에게도 역시 그 권리는 있다.
  이번 휴가는 알프들과 함께 보내볼까. 아이고, 하느님. 이럴 걸 미리 아시고서는 공장에 들러보라고 하신 거였습니까. 그냥 그렇다고 말씀을 해 주실 일이지. 알프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과 하느님에 대해 심술을 부리고 싶은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산타는 집무실을 나섰다. 알프들의 집이 천상 어디에 위치해 있는 지는 루돌프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단지 알 필요가 없었기에 그 동안은 알지 못했을 뿐.
  루돌프에 올라탄 산타는 초공간 컨테이너에 선물들이 모두 빼곡히 채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루돌프의 AI가 말을 건넸다.
  -알프들에게서 저간의 상황은 이야기 들었습니다. 알프들의 집을 방문하실 거지 말입니다?
  “어, 알프들에 대한 미안함과 하느님께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중인데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발진 준비!”
  -옛!
  지구의 아이들아, 너희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크리스마스 선물은 부모님께,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졸라 보거라. 그리고, 너희도 크리스마스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통 때는 크리스마스를 결코 즐길 수 없었던 일용직 노동자들. 그들에게 너희의 관심을, 온정을 조금만 더 베풀어 줬으면 한다. 비록 사소한 거지만, 앞으로 그런 것들이 많이 필요할 거다. 산타는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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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기획 원고 용으로 썼던 거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제 때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orz

다들, 해피 크리스마스&메리 뉴이어!
세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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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97 단편 dispell 불타는 밀밭 2007.11.26 0
2296 단편 신처용가 나길글길 2007.11.27 0
2295 단편 인디언 타임 나길글길 2007.11.28 0
2294 단편 <b>당신의 고양이를 보여주세요</b> - 3월 31일 마감2 jxk160 2007.12.03 0
2293 단편 웃음 스위치2 Mono 2007.12.03 0
2292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2291 단편 즐거운 나의 집 파악 2007.12.11 0
2290 단편 하지 파악 2007.12.12 0
2289 단편 뮤즈의 속삭임(본문 삭제) Inkholic 2007.12.20 0
2288 단편 Velouria 파악 2007.12.24 0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세뇰 2007.12.24 0
2286 단편 가래 노유 2007.12.30 0
2285 단편 도깨비 숲1 노유 2007.12.30 0
2284 단편 호수에서2 해파리 2007.12.31 0
2283 단편 용의 알2 세이지 2008.01.05 0
2282 단편 까마귀를 위하여4 세이지 2008.01.18 0
2281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2280 단편 설녀5 세이지 2008.01.22 0
2279 단편 망령의 외출3 구르토그 2008.01.27 0
2278 단편 잃어버린 화요일4 해파리 2008.01.2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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