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하지

2007.12.12 02:1712.12

 모든 게 나에게는 거대한 농담처럼 여겨졌다. 신의 농담일지라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다만 이 웃지 못할 농담의 끝이 궁금했다.
                     - 천년의 왕국, 김경욱


하지 사흘 전


카시 하이클라의 기록

 사랑스런 키노!
 요샌 하지 축제를 준비하느라 여기저기 정신없는 모양이야. 난 언제나처럼 축제하면 좋지만 어른들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더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눈치가 뭐 안 좋은 일들이 있는 거 같아. 그래서 축제준비도 마지못해서 하는 것 같고. 그래도 축제 때가 되면 다들 신나게 놀겠지? 하지를 맞이해서 너에게도 선물을 준비했어. 뭐냐고? 히히 비밀! 앗, 잠깐만.
 언니 배웅하고 왔어. 에휴, 언니 괜찮은 걸까? 지금도 환하게 웃어주고 나갔지만 언니 요새 너무 힘없어 보여. 일이 많이 힘들어서 지친 거겠지?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음 좋겠다. 이런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있는 내가 한심해. 뭐라도 언니한테 힘이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뭐가 좋을까? 화티마랑 고민해볼까?
 아냐, 그 애는 나보다 더하지 뭐. 이제 언니도 나갔으니 그 애랑 놀겠지만 요샌 어쩐지 내가 그 애랑 놀아준다는 기분이야. 적당히 놀고 방 정리라도 좀 해야겠다. 앗, 안 그래도 화티마가 왔어. 나가자. 오늘은 너를 꼭 여왕으로 만들게.

마티 테아티스의 기록

 정오도 훌쩍 지났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대로의 열기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구호를 외치고, 한쪽에선 여전히 감정을 지운채 진압봉을 들고 대치 중이다. 이쯤에서 기록자로서의 나는 무력해진다. 오늘은 또 무엇을 써서 마감을 넘겨야할까. 나는 여전히 어제와 같은 파업 현장을 건조하게 서술할 것이다.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또 어제와 같은 구태의연함을 느끼며 지긋지긋한 일상에 몸을 파묻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대체 세상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푸념이나 늘어놓으면서 취재보다 대로 한 쪽에서 준비 중인 하지탑에나 더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면 편집장 말마따나 난 기자가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쓸 얘기는 뻔하다. 관리국에서는 연합노조에서 제시한 총량시간제와 이주민 차등제 폐지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고 연합노조는 전면적인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것이 표면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보의 불평등과 불안심리의 영향이 더 크다. 이번 근접기에도 어떤 우주선도 오지 않았고, 지구로부터의 송신기록이 공개되지 않은지도 넉달째다. 부식으로 인한 보수를 이유로 트램 운행이 멈춘지도 오래되었고 심해진 모래 폭풍으로 주변 도시들과의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주변 도시나 중앙 통제부 쪽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필수 요소들의 공급은 여전히 원활했기에 도시의 관리국끼리 무언가 음모를 꾸민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관리국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다 표면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 않지만 인종·종교적인 갈등도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어서, 조만간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들이 많다. 관리국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움직임들을 방치해두고 있는 건지, 뭔가 빌미를 노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음모라도 있는 건지. 사람들은 곧 전면적인 대이주가 있을 것이고 그에 맞춰 사회 시스템을 바꾸고 있는 것일 거라 말한다. 정말 그런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일반인들의 지구와의 교신만 재개해도 상황은 더 나아질 것이다.
 시위대는 여전히 의연하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날이 갈 수록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게 보인다. 사실 내가 지친만큼 저들도 지친 게 당연하다.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잖는가. 더구나 연합노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이니 체력적으로 힘들 것이다.
 치열한 시위의 현장 옆에서는 한가롭게 하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탑 아래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몸놀림에서 가장된 즐거움이 묻어난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예년처럼 성대하게 축제를 열 모양이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아무렇지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런 때는 좀 구름이라도 펼쳐주면 좋겠지만, 우리의 향수병 앓는 선조들께선 천구가 지구의 그것처럼 계절을 재현하길 바랐다. 저 거짓하늘의 평화로움처럼 벨로드의 공기는 너머의 부글거림을 가린채 무거운 침묵으로 넘실거렸다.

압둘 아지즈의 기록

 수아드가 일몰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오면 경내는 분주해진다.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대접할 이프따르를 준비하는 일은 라마단 기간이 되면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늘상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마침내 준비가 끝나고 해가 지면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은 사원 앞 마당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여느 때처럼 사원 앞 이프따르 장은 떠들썩하지만 이번 라마단 기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바이너리그램이 사라진 천구 밖 풍경만큼이나 칙칙하고, 떠도는 화제들도 그만큼 무겁다. 니피 호 지구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계속되는 시위에 참여 중이고,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도 도시의 문제들에 대해 저마다 고민거리를 한아름씩 안고 오기 때문이다. 관리국과의 문제들이나 주변도시에 대한 스캔들, 선이주민들에 대한 불만과 계파간 갈등, 점점 시원찮아지는 벌이, 끊임없이 나가는 각종 요금들, 어떤 희망도 가져오지 않는 지구의 침묵…… 늘어놓을 푸념거리들이야 한없이 많다.
 그들이 무거운 짐들을 풀어놓으며 나에게 묻는 시선을 보내면, 난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듣다가 알라께 기도 드리자는 말을 할 뿐이다. 미약한 나를 그래도 현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달리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우리 생각 속에만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자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동의다. 그래도 함께하면 더 낫다는 믿음.
 다들 착한 사람들이다. 어제 절도로 잡혀간 디우프도, 그를 잡아간 관리국 직원들도. 무엇이 그들을, 우리들을 궁지로 내몰고 있는 것일까. 신께서 우리에게 가능성과 함께 한계도 주신 것은 분명 이 세상을 더 의미있게 만드시려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만이 평범한 사람인 내게 불어올 뿐이다.
 사람들이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복잡한 마음을 잠재우려 몇번이고 예배를 반복하고 나온 참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코란을 한번 더 보려하던 내게 수아드가 물어왔다. 모두의 상황을 개선할 알고리즘을 찾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잠시 모니터에 비친 녀석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만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적인 사유라기보다 그저 조합에 의해 나온 말들이겠지만 마음을 괴롭히던 질문과 닮아있었다. 분명 신께서는 여러 해답을 만들어 놓으셨겠지만 어느 해답에 도달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선택이리라.

리디아 하이클라의 기록

 에카프 강 건너도 이 곳도 밤거리는 밝다. 다른 질감이지만 비슷한 정도의 환락과 애상을 안고서. 난 어디쯤에 속할까. 모르겠다 나도. 여기도 저기도 내겐 너무 낯설어.
 파업의 물결이 도시를 휩쓸고 있지만 우리 공장은 여전히 바쁘다. 어쨌거나 하지가 되면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 받을테고 그 중엔 내가 만드는 작은 인형도 상당수일테니까.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인형의 옷을 입히고 나서 우릴 기다리는 건 올해는 축제 보너스도 없고, 월급마저 감봉될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아직 돈을 벌 곳이 남아있다는 안도감이 먼저 머리를 스치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밀린 수도 요금 생각이 났지만, 그래도 즐겁게 농담을 주고 받았다. 다들 마찬가지일테지.
 일이 끝나고 공장 사람 몇몇과 오이다 거리에 있는 만두집에 가자는 피에나의 제안도 대충 둘러대서 거절하고는,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고서야 정신을 차린 곳은 네온이 반짝이는 서쪽 번화가였다.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를 안고 각자의 언어로 관리국을 저주하고 강 동쪽을 욕하며 비틀거렸다. 조금 더 네온 사이를 걷다보니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예전처럼 무릎을 배고 누워 지구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느 상황에서고 강한 분이셨다. 재작년 겨울 내가 맞이한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보다 삶에 지워진 무게감이었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거친 삶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생각에 난 어디에도 발을 닿지 못하고 부유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할머니를 보고 싶다. 이제 조금은 그 분을 이해할 수 있겠지. 지금도 나와 동생을 누구보다 걱정하실 거야.
 동생에 생각이 미쳤을 때, 난 문득 걸음을 멈췄다. 지금 내겐 나만의 고민은 사치로 느껴졌다. 어린 동생의 삶 또한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혼자 집에 남아 날 기다리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자연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는 길에 조각 케이크를 하나 샀다.
 집에 들어서니 동생은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다. 졸릴텐데도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동생을 보고 꼭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케이크를 보고 좋아하는 동생을 보니 흐뭇했지만 어쩐지 동생의 기쁨 너머로 한줄기 걱정을 본 것 같다. 나의 수심이 동생에게까지 전해진 건 아니었으면 한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가도 너만은 평화롭고 행복했으면!
 밤이 깊어가지만 거리의 불은 여전하다. 갈 곳도 없으면서 다들 어디를 그리 헤매는지. 동생이 새근새근 자고 있는 한켠의 이부자리는 지극히 평화로운 나의 처소지만 어쩐지 내일의 고단한 삶의 지속을 예고하는 판결문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 이틀 전


블라도 스미토의 기록

 커피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커피맛에 대해 논평하라면 올림푸스 화산만큼 써낼 수 있겠지만 내겐 이 커피 한 모금도 호사이니 그건 커피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내겐 종업원에게 줄 팁대신 늘어놓을 푸념만 잔뜩이다. 여보세요, 저는 동맹휴업으로 놀고 있는 언어학 강사인데요, 대체 이 먼지많은 행성에선 나 같은 놈을 어따 써야됩니까?
 옆자리 두 놈이 한창 열을 올려 떠들어대는 통에 펜이 짜증을 낸다. 잠시 귀를 기울여보니 대수 기호학에 대한 철지난 얘기를 또 하고 있다. 얘기할 거리가 없는 건 알겠는데 최소한 어제보단 참신한 게 좋겠습니다, 여러분. 난 녀석들의 무성의한 논의 뒤에 나와 같은 무력함이 숨어있는 것을 보고 짐짓 놀란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조금 있으면 이런 놈들이 한 트럭으로 슬금슬금 몰려들겠지. 다들 나랑 비슷한 날파리들이다.
 까페가 광장 구석에 자리 잡은 덕택에 광장은 한 눈에 들어왔는데, 참신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한쪽에선 파업시위 중이고 진압경찰을 사이에 두고 다른 쪽에선 후기 이주민들을 내쫓자는 시위가 진행 중. 저 사람들의 강경파들이 도시 한 구석에서 진행할 테러들까지 투시해보고 나선 다시 커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커피맛이 제일 재밌구나.
 어째 이 곳 커피맛은 미묘하게라도 계속 달라지고 있는데 사람 사는 세상은 달라지는 게 없다. 제 2의 지구가 될 거라고 야심차게 외치던 이주계획은 정말로 이 순결한 붉은 행성을 제 2의 지구로 만들어버렸다. 돈 좀 되는 선진국 애들이 먼저왔고 뒤늦게 온 3세계 애들은 여기서도 3세계에 놓였다. 다들 별 미련없는 사람들이 모였건만 다시 해묵은 계급들이 생겨버렸다. 저곳의 골치아픈 것들은 고스란히 여기까지 와서 놀아달라고 한다. 아니, 공전주기가 두배는 되는 곳까지 오면서 역법을 고쳐야한다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했으니 뭐. 조상님들은 왜 나무에서 내려오셨습니까. 덕분에 우린 기술 수준을 따라잡을만큼 정신 수준을 높이느라 고생 중입니다.
 광장 중앙에선 여전히 하지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맘때가 되면 무던하게도 저 짓을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하긴하다만 난 언제고 저 축제에 진심으로 함께해본 적은 없다. 초기 이주민의 심정은 알겠다만 지금와서 태양빛이 길어지는 게 뭐 대단하다고. 하지가 지나면 일광이 다시 쇠락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나? 뭐, 조만간 진탕 술을 마시긴 하겠네.
 그러고보면 나도 저 곳에서 지독시리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클리셰구나. 지식인의 무력함, 염세적인 자조. 아, 이런 개구리 꼬리같은! 닥치고 커피나 됐으면 좋겠다. 달달 볶아지는 커피, 향 좋은 커피! 아, 주인장 이걸 마시니 어째 세상살기 싫어지네요?

나와브 타킨의 기록

 감정이 겨우 추스려져서 겨우 글을 쓴다. 아니 아직 마음이 안 잡혀서…….
 제기랄! 싱이 죽었다, 싱이 죽었어, 싱… 미안……. 빌어먹을, 미쳤다. 미친 짓이다. 우리가 평소 그 빵집을 맘에 안들어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그저 빵을 살 생각일 뿐이었어. 빵집을 턴 건 우리가 아니란 말야!!
 강도 녀석들이 빵집에서 달려나오고 한참 뒤에야 그 지랄맞은 주인 새끼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왔지. 강도라고, 자기한테 칼을 들이댔다고 어쩌고 씨불씨불. 니미 보이는 칼은 그래도 낫지, 너흰 항상 우리한테 보이지도 않는 칼을 들이대고 있어.
 골목이 시끄러워지자 경찰들이 재빨리 나타났다. 그 놈들은 항상 이런 때는 빠르지. 우리가 위험할 때는 콧배기도 보이지 않더니. 경찰들은 더 물을 것도 없이 그 곳에 엄한 자세로 있던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내가 여기서 배운 것은 이 상황에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거지. 어차피 저사람들은 우리 말 따위에 기울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붙들려서 맞고 고생하더라도 도망만은 치지 말 것을……. 한참 좁은 골목을 내달리던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나랑 알리는 재빨리 담 위로 올라섰지만 싱은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다. 싱이 다시 담 위로 올라탔지만 이미 경찰이 코 앞에 닥쳐들었다. 나랑 알리는 계속 팔을 흔들면서 위로 올라오라고 닥달했지만 싱은 선선히 포기하더니 경찰들을 향해 돌아섰다. 바보같은 자식. 그 새끼들은 절대로 믿어선 안돼.
 싱이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 쪽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신분증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녀석이 손을 뒤로 돌리기 무섭게 총소리가 들렸고 싱이 무너져내렸다. 알리가 잡아끌고 나도 알 수 없는 눈물과 비명에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보았다. 한순간 고개를 든 싱의 원망에 찬 눈을. 싱은 천천히 너무도 천천히 쓰러졌다. 난 정신없이 몸부림치고 넘어지며 괴성을 뱉으면서도 보았다. 보았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쳐 죽일 놈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폐차장이었고, 모여든 녀석들은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우린 싱의 시체조차 챙기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갈궈대기만 했지만 그럴 때면 언제나 보이던 녀석의 바보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은 결코 잠들 수 없을 것이다. 녀석의 마지막 눈빛이 계속 맴돌았다. 두고보자. 너희 모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카시 하이클라의 기록

 사랑스런 키노!
 오늘은 굉장히 피곤하지만 이렇게 글을 써. 너도 아까 잠깐 봤겠지만 화티마가 많이 아팠거든. 퍼즐 조각을 맞추며 잘 놀던 애가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놀랐는지. 휴. 동네엔 어른들이 없어서 내가 돌봐야만 했어. 열은 계속 오르고 얘가 헛소리까지 시작하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정말 큰 병이라도 걸린 거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났지 뭐야. 계속 물수건 짜오고 부채질 해주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어서 정말 안타까웠어. 그냥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더라고. 다행히 화티마가 조금씩 열이 내리더니 잠이 들더라. 나도 어느새 곁에서 살짝 잠이 들었다 깨보니 화티마가 어느새 일어나 웃고 있더라고.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 나도 모르게 꼬옥 안아주었어. 그 애가 숨이 막혀 켁켁댈 정도로. 나중에 내 얼굴에 낙서를 한 걸 알곤 꿀밤을 주었지만.
 화티마가 바람이 쐬고 싶다길래 정말 괜찮은 걸까 고민하다가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싶어서 강변 쪽에 나갔다 왔어. 어른들이 강변 나무들에 등을 매다느라 바쁘더라. 작년처럼 등들이 이뻐서 한참 동안 봤어. 아마 이 등들이 한번에 켜지면 굉장할 거야. 우린 다가올 하지 축제 얘기를 하면서 괜히 신나서 팔짝거렸어. 이번에도 퍼레이드를 하겠지? 아, 생각만해도 좋다.
 할머니 얘기로는 원래 우리 가족은 지구에서 에스토니아란 곳에 살았대. 난 거기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할머니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가 꼭 내가 거기 살았던 것 같아. 그 곳에서도 하지 때가 되면 축제를 했었대. 그곳에서의 축제는 어땠을까? 이곳과 비슷할까? 언젠가 지구에 가보게 된다면 그 모습은 꼭 봐야지. 걱정하지마요, 꼬마 아가씨. 너도 데려갈 거야. 지구의 누구보다 예쁜 옷을 입혀 줄게.
 앗, 언니가 오는 게 보인다. 마중 나가야겠어. 이따 꿈에서 보자! 꼭 올거지?


하지 하루 전


압둘 아지즈의 기록

 예배를 끝냈을 때 수아즈가 방문자의 도착을 알려왔다. 어느새 정오였다. 방문자는 자신이 중앙통신 지부의 기자라고 밝혔다. 테아티스라고 이름을 밝힌 그 기자는 라마단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는 중이라며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오후에 특별한 일은 없었기에 나는 달갑게 응했다. 마침 점심 때라 음식을 내오려 했지만 기자는 자신만 먹는 것은 미안하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인터뷰는 의례적인 질문들로 이어졌다. 난 라마단 축제의 의의와 진행과정에 대한 말들을 했다. 이번 라마단의 단식종료제와 하지 축제가 같은 날이기에 더 의미가 깊고 즐거운 축제가 될 것이란 얘기도 나누고. 한동안 질답을 나누고 이제 인터뷰가 끝나가는가 싶을 때에 기자가 슬쩍 도시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자신은 즐거운 축제의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고 했다. 나름 성심껏 답했지만 내게도 해답없는 고민이어서 그런지 이야기는 계속 뱅뱅 돌았다. 비록 그것이 기만이라할지라도 환희의 순간은 사람들에게 고단한 삶의 빛이 될 것이다. 희망은 우리를 지치게할 때도 있지만 버거운 삶을 헤쳐나갈 원동력이 되어준다. 모여든 사람들이 부디 그 사이에서 희망을 더 많이 발견하길 바랄 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원을 나서던 그 기자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어왔다. 신에게 무슨 응답은 없느냐고. 나는 신의 응답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고는, 문득 대답이 멋쩍어 살짝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의 뒷모습만큼이나 내 마음도 쓸쓸해져 사원으로 돌아와선 다시 예배를 올렸다.

마티 테아티스의 기록

 이슬람 사원을 나와 늦은 점심을 해결할만한 곳을 찾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기후조절장치는 여전히 아무런 이상도 없이 숨이 막히는 초여름의 날씨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니피 호 지구와 레이지 쇼벨 지구 사이의 인도 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가게 안은 넥타이 맨 영국인들이 몇명 자리잡고 있었다. 대강 주문을 하고 기사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취재하면서 만난 무슬림들은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힘든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다. 배고파서 그런건 아니겠지. 오늘 만난 그 기품있는 성직자에게서 어쩐지 쇠락하는 제국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금 벨로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힘을 내보고는 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신들이나, 나나. 사는 것도 기사 쓰는 것도. 기자 일을 해나갈 수록 점점 기사 쓰기가 어려워졌다. 난 무엇하러 굳이 골치아픈 이야기를 들춰내려는 걸까. 아무 것도 달라지는 건 없는데. 그냥 눈 가리고 달려도 세상은 어렵다. 그냥 내일있을 하지 축제 가이드 기사 쪽을 선택할 걸 그랬다.
 식당 유리창이 박살났다. 누군가 돌을 던진듯 했다. 갑작스런 소동에 조용하던 음식점 안이 술렁거렸다. 밖으로 나가니 군중들이 큰 길을 행진하는 것이 보였다. 폭동일까? 군중들 사이로 연합노조의 깃발이 보였다. 갑작스런 연합노조의 강경함에 머릿 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합노조가 가두행진을 벌였고, 그에 갑자기 사람들이 불어나며 일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듯했다. 행진의 뒤로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음식점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잽싸게 식당을 나와 무리의 뒤를 쫓았다.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빌어먹을 습관으로 수첩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와브 타킨의 기록

 이 빌어먹을 세상을 끝내버릴 때가 왔다. 싱이 죽고 슬픔을 다독일 틈도 없이 우리는 인력시장에 나가야했다. 하지만 요새같은 불경기에 일거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답답한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다. 부자동네였지만 그런걸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못 올 동네는 아니잖는가. 잠깐 이맘 생각이 나서 미안해졌지만 지금은 신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
 한참을 시끄럽게 굴면서 술을 마셨지만 속에 있는 뭔가가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결국 우리가 들어설 때부터 재수없게 보던 그 새끼가 우리에게 다와서 뭐라고 씨부리니까 폭발해버렸다. 재수 없는 새끼들, 너희가 머리에 쳐바를 돈이면 우리는 하루를 난다. 그 자식의 일행들과 한바탕하면서 술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나서도 도무지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 자식들이 정신없이 내빼는 꼴을 보면서 곧 경찰이 올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되려 차분해졌다. 우린 각자 손에 무언가를 들고서 확 다 뒤집어버릴 생각이었다. 같이 있는 녀석들이 빵집을 조지자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빵집 주인 따위야 언제고 맘 먹으면 손 볼 수 있다. 난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다들 주저했지만 그보다 분노가 빨랐다.
 노조 사람들을 만난 건 바로 그 때였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하느냐고, 그들의 말이 귓 속을 파고 들면서 우릴 이끌었다. 난 분노의 행진에 앞장 섰다. 이제 당한만큼 돌려줄게. 광장에는 역시 진압경찰들이 관리국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채 늘어서있다. 이 녹음이 끝나는 즉시 난 앞으로 달려가 박살낼 것이다. 우리의 빌어먹을 처지를, 저들의 오만을, 사람들을 병신으로 만드는 개같은 세상을, 아니면 적어도 갈 곳을 모르고 뻗어나가는 분노의 불길을.

블라도 스미토의 기록

 전망 좋다. 관리국에서는 시내 곳곳이 잘 보인다. 어디서나 방사형 도로는 불온한 움직임을 잘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높으신 분들은 아마 불온한 모습이 나타나면 새디스틱하고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느끼겠지.
 도시 곳곳에 치열한 상처가 남겨져 있었다. 어제와 달리 좀 화끈해졌지만 그 열정도 허무한 결말도 다 뻔한 얘기다. 항쟁 혹은 폭동은 갑작스런 총격과 일제 검거로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의 분노감 혹은 불안감 혹은 뭐 복잡한 감정들은 저 길들을 따라 계속 뻗어나가는 중일 것이다. 맞은편 로드먼 빌딩 전광판에 커다랗게 '하지 D-1' 이라고 쓰인 글자가 반짝였다. 내일은 정말 멋진 하지 축제가 되겠구나.
 눈 앞의 직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가봐도 좋단다. 날 그저 어쩌다 폭동에 휩쓸린 얌전한 시민으로 일찍 판단내리고 조사의 대부분은 내 위상 기호학 모델을 도시관리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느라 보냈다. 미안하지만 그건 개소리요, 라는 말을 도로 위로 몰래 던지고 이번 사기로 좀 먹고 살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에게 살짝 윙크했다.
 아, 죽고 싶다. 커피가 너무 달아서. 관리국 입직 자격은 형편없는 미각이로군.

빈센트 스코프의 기록

 도시의 네온이 하나둘 켜지면 이 높은 곳의 쓸쓸함은 두배가 된다.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 난 결국 이렇게 시들어간다. 정보부장이 깨뜨리고 간 글라스가 더러운 카펫 위에서 빛난다. 덜 떨어진 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건 스스로의 공포심이 불러낸 환상일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린 거친 운명의 광풍에 몸을 내맡길 수 밖에 없다. 예외도 선택받은 자도 없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이해와 동정이지만 모두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엄청난 사치란 걸 이미 알고 있다. 모두 보이지 않는 힘에 질려버렸고 분명한 적이 필요하니까.
 텔레 캐스터는 오늘도 아무 말이 없다. 송신기록을 공개 안 하다니 그 무슨 헛소리인가. 누구보다 계시를 기다리는 건 나다. 지구가 그립다. 저기 반짝반짝 빛나는 저 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체수급은 아직 어느 정도 되지만 잔뜩 불어난 사람들과 수요량을 채우자면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곧 끝이 우리를 찾아온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벨로드의 자치수반도 도망칠 수 없다.
 내일이면 시작될 하지가 내겐 너무 힘겹다. 대체 사람들 앞에서 난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까. 여기저기 벌어지는 시끄러운 축제판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할까. 나도, 나도 그저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고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궁지로 내몰린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가교들을 끊을 준비를 한다. 그 결심이 세상을 파괴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파괴한다. 난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채 자유롭게 낙하하는 꿈을 꾸다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오늘 나는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리디아 하이클라의 기록

 이른 시간부터 공장 안은 술렁거렸다. 하지가 내일이니 바쁜 시간이었지만 직원의 대다수가 대규모 집회에 나갔다. 점심시간에 나간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내는 아비규환이었다. 피와 불의 난폭한 춤 속에서 내가 생각한 유일한 것은 카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서 하지나 라마단 같은 축제기간에 범죄가 벌어지는 횟수가 늘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난장판을 틈타 곳곳에서 방화와 강도가 벌어졌다. 서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 동쪽을 향해 몰려갔다. 하나같이 광분하고 있었다. 하지 퍼레이드가 시작할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광기가 사람들을 휩쓸었다. 그 사이를 어떻게 피해 나왔는지 모르겠다. 니피 호 지구로 들어서는 모퉁이에서 전자상가를 부수는 몇몇을 마주쳤다. 그 사이에는 나와브가 있었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언제나 무심한 척 편안하게 해주던 나와브는 그 곳에 없었다. 그 애의 타오르는 눈을 보고 미친듯이 집으로 달려올라갔다.
 다행히 동네는 조용했다. 사람들의 광기가 카시에게까지 다가가지 않기만을 바라며 집으로 뛰어 올라가 마당 위에 있는 동생의 평화로운 눈을 보았을 때,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동생은 별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난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다고 둘러대고는 화티마와 동생이 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동생은 계속 내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난 괜찮다고 하고는 그 애들이 노는 곁에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랐다. 동생은 내가 일찍 와서 너무 좋다며 내일부터 있을 연휴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난 잠시 그 애들의 놀이에 동참했다.
 해질 무렵이 되서 동네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는 끔찍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서쪽 공기생성기를 이용해서 독가스를 살포해 서쪽 사람들을 몰살시킬 거란 얘기도 있었고, 난리가 나는 동안 중국인들이 수도공급관을 전부 자신들 쪽으로 돌려놓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누구는 피비를 얘기했다. 작년 연쇄살인에 별다른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내몰려 죽은 그 애가 억울함을 풀려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는 광장 위 천구에 악마의 형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중에서도 화성의 미세한 먼지에 있는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얘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나같이 불분명하고 두서없는 이야기 뿐이었다. 모두들 당황하고 정체모를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한 쪽에서는 이럴 줄 알았다며 극렬한 분노감을 표출했다. 하지 전날이 이렇게 뒤숭숭한 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동생과 저녁을 먹었다. 별 다른 음식은 없었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그 애의 명랑함은 나까지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에 놀러 다닐 곳에 대해 동생은 이미 상세하게 계획을 세워두었다. 물론 그 시작은 내일 광장에서 있을 불꽃놀이와 퍼레이드였다. 듣기로 무슬림들의 단식종료제도 함께 벌어진다고 한다. 내일이 정말 즐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카시와 내게 모두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었으면.
 도시의 불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밝다. 시간이 갈 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의 뒷어깨를 꼬옥 안아주고 싶다. 할머니, 보고 계신가요? 우리 곁에 계시죠? 보고 싶어요…….

카시 하이클라의 기록

 사랑스런 키노!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잠든 언니를 눕혀 주고 오는 길이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무얼할까하다 이렇게 글을 써. 왼쪽 엄지를 다쳐서 글을 쓰기가 힘들다. 어쩌다 다쳤느냐고? 에이, 비밀이야! 토라지지 마. 내일 말해줄게.
 낮에는 광장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어. 걱정스러워하는 화티마에게 내일있을 축제를 준비하는 모양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나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어. 일찍 온 언니는 많이 힘들고 지쳐보였어. 내일부턴 쉴 수 있으니 다행이야. 아마 내일있을 축제 때문에 이렇게 잠이 안 오나 보다. 철 없는 소리겠지만 맨날맨날 축제만 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사람들이 고생할 일은 없을텐데. 하긴 그러려면 누군가는 계속 뭔가를 만들어야겠지?
 어서어서 해야 뜨렴. 아마 조금만 있으면 해가 뜨겠지? 하지의 해는 굉장히 오래뜨니까.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어른들도 내일은 진짜 웃을 거라는 거야. 다들 그런 건 나랑 화티마한테 배웠으면 좋겠어. 너만큼 이쁜 인형을 갖지 못해서 일까?
 아웅, 잠 올 때까지 티파티라도 여는 게 어때? 힛, 너라면 좋아할 줄 알았어.


하지


압둘 아지즈의 기록

 간밤에 흉흉한 꿈을 꾸었다.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사람들은 오전부터 일어나 모스크 주변에 마련된 놀이판을 구경했다. 박수치고 웃으며 기예를 구경하는 이들에게서는 초췌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난 조용히 광장 쪽 천구를 바라보며 코란을 암송했다. 바이너리그래머들의 실력은 나날이 늘고 있었다. 이젠 불꽃으로 어떤 것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 게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도. 하지만 진짜 실력을 써야할 곳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인 것을.
 사람들과 함께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긴 침묵에 휩싸였다. 난 작년 아메드가 퍼레이드에 뛰어들다 바지가 벗겨진 채로 신문에 실린 이야기를 꺼냈다. 아메드가 팔짝 뛰며 항변했고 사람들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분위기도 다소 화기애애해지고 광장에 가까워질 수록 시끌벅적함이 밀려와 다소 무거운 마음을 씻어주었다. 행복은 하시시가 아니라 천국의 강물이다. 신은 고난을 마련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이겨낼 위대한 선물을 주셨다. 농담이라는 선물을.
 광장은 이런저런 진귀한 물건과 음식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있었고 각자의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손에 깃발을 든 채 뛰어다녔다. 해가 져야 음식과 놀이의 환락에 동참할 수 있으니 아쉽지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 들뜬 게 분명해보였다. 난 그들을 잠시 내버려둔 채 광장 한켠에 마련된 단식종료제 회장으로 향했다. 모두가 어제 벌어진 일에 대해 얘기하는지 표정이 심각했다. 잠깐 나와브의 이름이 나왔기에 고개를 돌렸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난 여전히 그 애의 생사를 모른다.
 다른 교구에서 온 이맘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겼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이맘들은 근심을 얼굴에 띄운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눈길을 보냈다. 난 천구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천구는 태양빛을 줄이며 붉은 빛 하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꽃놀이와 퍼레이드에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중일 것이다. 이제 저 태양이 광장 위 천구의 중앙을 지나면 하지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나팔이 울릴 것이다.

빈센트 스코프의 기록

 아버지의 사진을 태워버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으라고? 적어도 그 분은 반평생을 지구 위 요트에서 보냈다.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자 짜증만 부릴 것 같아서 집무실에 조용히 처박혀있는 중이다. 갑자기 무력감이 몰려들어왔다. 하지? 뭐 빛과 평화의 향연? 다 소용없는 짓이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순 없어. 오늘의 긴 태양이 도시를 비추면 우리의 어두운 죄는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감추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할 것이다. 지구가 아무 말도 안해.
 창 밖으로 몰려드는 군중을 보니 두렵다. 원고 따위 없다. 난 저들 앞에 나서서 할 말이 없다. 광장에 나가 저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차라리 내게 돌이라도 한가득 던지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난 누군가 시간이 임박했다며 끌고 나갈 때까지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다.

리디아 하이클라의 기록

 "지금 하면 되는 거야?"
 "응. 어서 말해봐."
 "아아, 안녕? 난 카시라고 해. 여긴 내 친구 화티마고. 이 쪽은 우리 언니 리디아. 음… 근데 이거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오늘을 다시 떠올리고 싶을 때 보는 거야. 아마 조금 더 나이가 든 우리겠지?"
 "이잉, 난 잘 안나오잖아!"
 "그러니까 어서 키를 키워요, 화티마양. 내가 골고루 먹으라고 늘상 얘기하잖니."
 "어휴, 여기저기 너무 시끄럽네."
 "응? 언니 뭐라고 그랬어?"
 "어?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어때 맘에 드니? 이제 이걸로 너희들 모습을 많이 찍어놓을 거야. 언니가 큰맘먹고 마련한 거라고."
 "히잇, 언니 고마워!"
 "고맙습니다, 아줌마!"
 "얘는, 나보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사람들이 진짜 아줌마인 줄 알겠다."
 "화티마는 원래 누구나 아줌마야."
 "응. 아, 근데 이제 축제 모습을 좀 찍어야하지 않을까?"
 "엇, 언니 그 쪽말고 저기저기 드디어 용이 나타났어."
 "응 벌써 시작하" 우와아- 저기- 빨리와- 하늘 위에- 멋지- 사랑-
 "어? 뭐라고?!"
 "언니!! 하늘 위에!! 태양이 점에 들어오고 있어!!!"
 "아, 시작이구나. 이제 저 태양이, 어?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에에-?"
 "응! 아우, 여기가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래도 소리는 포기해야 되려나…. 앗, 카운트 시작이야! 어서 소원을 빌어!"
 "응!" "네!"
 "아악, 이봐요! 네? 왜요? 보다니 무얼… 이제 카운트가 시작…." 바앙- 하지 축제의 개막을 알리-
 "언니! 왜 올해는…" 거 좀 나도 봅시- 자치수반은 왜 안 나- 불꽃이 나올 때가-
 "응? 아아악!!"
 "언니! 괜찮아?" "괜찮아요?"
 "응, 괜찮아. 살짝 넘어졌어. 어휴 조금 더 일찍와서 좋은 자리를 잡을 걸… 이래서야 하나도 안 보이겠다."
 "어? 하늘에, 하늘 좀 봐!"
 "응? 저게 무슨, 아아! 밀치지 말아요! 아니 그만! 사람들이 왜 이…"
 "언니!! 사람들이 밀려나고 있어!" "내 곁에 꽉 붙어!!" "아, 아앙… 뭐야 이게 무슨…" "내 손 잡아, 화티마!"
 "아아악!!!!" 어디- 이야- 으악- 죽어라- 저기 신이- 너희가- 난 잘못 없- 조용히 좀 하- 저 사람이 그랬- 진짜 왜 이러냐고- 관리국은 대체 어디서- 잘 걸렸다 이 아랍놈- 아악 요, 용이 용이- 저기 봐 그 악녀가- 불이다- 불이 어- 난 이럴 줄 알았다고 이럴- 종말이 왔- 왜- 왜- 어디에 뭐가 있- 가만히 좀 있어 새- 가까이 오면 다 죽여버- 엄마- 독가스, 독가스- 엄마- 어디갔니 프렌지 아빠 여기있- 엄마- 저 놈들 총을 가지고 있- 아악 살려ㅈ- 뭉개고 있어 용이 뭉- 엄마- 아하하하하 이제 아하하-  잘 들어 살려면 죽여야- 엄마-
 "카시!!! 그냥 와!!"
 "잠깐만! 이제 주웠어!"
 "얼른 오라고!!!"
 "언니! 이거 화면이 깜빡대는데 왜 이러지?"
 "얼른 오란말야!"
 "아아아, 알았어! 아 잠깐 이거 꺼지는 거 같,"

마티 테아티스의 기록

 노트를 펼쳐놓고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까.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이상의 마감의 압박은 없으니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겠다. 후… 안녕하십니까, 중앙통신의 기사입니다. 제 2회 하지 축제를 밀착 취재했습니다. 아, 밀착하진 않았군. 난 로드먼 빌딩 옥상에서 축제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관리원에겐 취재를 위해서라고 둘러댔지만 광장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생각도 태양에 더 가까워질 생각도 없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 위에서 투신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맞은 편 관리국이었다. 창문은 모두 불투명 소재로 되어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지만 난 그 위에 어렴풋이 비치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듯하다. 일순간 눈높이의 창문이 깨져버렸다. 부서진 창문 너머로 한 사내가 골프채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취재차 한번 만나본 적도 있는 인물, 벨로드의 자치수반이었다. 그는 다른 손에 잡은 술병을 내 쪽을 향해 들어 건배하더니 한 모금 들이키고 아래를 잠시 바라보다 다른 유리창 너머로 사라졌다. 깨진 창문으로 피가 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오늘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양이 천구 중앙에 거의 근접할 때 광장 한 구석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있어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쪽에서도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천구를 보며 광장 밖으로 움직여갔다. 천구를 올려다봤지만 태양 뿐이었다. 광장을 꽉 메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련의 소동들에 무심한 채 태양의 입점만을 기다렸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축제의 소요는 점차 광장 중앙을 향해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관리국 요원들의 경솔한 행동이 불을 질렀다. 요원들의 거친 제지에 사람들은 서로를 밀고 넘어뜨리고 밟았다. 한무리의 요원들이 공포탄을 겨누자 사람들은 더 광분해서 날뛰었다.
 태양의 입점이 마무리되고 천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얀 빛을 붉은 하늘에 수놓았다. 나팔이 울렸다. 천구 위로 빛의 꽃들이 소용돌이치며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자치수반이 나와 얘기를 하고 퍼레이드가 시작되야겠지만, 자치수반은 저기 편안히 누워있다. 오늘의 하지 축제가 제대로 진행될 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광장에선 이미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는 통에 퍼레이드의 선두에 서있던 용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 같았다. 용은 화력이 조절되지 못한 불을 내뿜으며 질주했다. 용이 가는 방향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무대로 달려간 사람들 덕에 무대 위가 엉망이 됐다. 음악장비들이 죄다 망가지며 기괴한 소리를 내뿜었다. 이제는 광장 전체가 들썩였다. 무대 주변에서 총성이 울렸다. 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무리가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밀려나는 사람들과 함께 광장 오른쪽에 있는 바이너리그램 센터로 쏟아져 들어갔다.
 천구를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이 되었다. 천구는 이제 제멋대로 그림을 그려냈다. 갑자기 밤이 되었다가 번개가 치고 노란 하늘이나 빨간 구름을 내놓았다. 일순간, 바이너리그램이 투명해지며 화성의 하늘을 그대로 노출하기도 했다. 균형을 잃은 용이 옆으로 구르며 주변 건물들을 태웠다.
 빠른 속도로 광장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이제 소요는 온 도시를 휩쓸었다. 모든 지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기상 조절 장치에도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인한 사망자도 상당할 것이다. 강 서쪽에선 물 저장고가 파괴되며 건물들이 물에 잠겼다.
 난 잠시 나른한 기분으로 옥상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들이닥치지 않았다. 로드먼 빌딩에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누구도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기상 변화가 그치고 날씨가 고정되었다. 화창한 4월 쯤인 것 같았다. 피로 물든 에카프 강의 물이 서서히 줄어들며 바닥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잔뜩 등을 매단 유람선이 강바닥에 드러누웠다. 강 동쪽 뮌헨 탑 근처에서는 진압경찰들과 시민들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존속문제로 논란이 일던 자위 시스템 기지에서 날아오른 미사일이 근처 부촌을 쓸어버렸다.
 잠시 챙겨온 손가방에서 망원경을 뒤지다 맥주팩을 발견하고 한 모금 마시고는 던져버렸다. 망원경이 가는 곳마다 드러느운 시체와 파괴된 건물들 뿐이었다. 잠시 입맛을 다시며 습관처럼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봤다. 일단 가볍게 삼백 칠십 여섯가지 정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내 기사를 읽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된다.
  어느 정도 일이 진정이 된 건지 도시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분주한 쪽은 도시의 양 옆에 있는 트램역 뿐이었다. 이 곳을 빠져나가려는 듯 싶었다.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이해는 간다. 강 위쪽의 역은 때마침 쓰러진 뮌헨 탑에 깔려 파괴되었다. 아랫쪽 역에서도 불길이 치솟았지만 결국 트램 한 대가 빛을 내며 천구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 소동도 끝나자 도시는 이제 완벽한 적막이 다가왔다. 가볍게 소리를 지르니 메아리들이 나를 비웃었다. 난 옥상에서 내려왔다.
 관리국에 들어서자 어두운 실내를 모니터의 불빛들만이 비추고 있었다. 도시관리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아무 생각없이 무수한 계단을 올라 통제소로 들어섰다. 프로그램의 자가관리 시스템은 완전히 정지해 버렸지만 통신 제어와 도시 통괄의 조작은 여전히 가능했다.
 공개되지 않은 지구와의 송신 기록은 하나 뿐이다. '어떻게든 잘 하자.' 주변도시들과의 통신망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관리국의 의도적인 통신방해는 없었다. 자가 교신을 보면 관리국 사람들도 어찌할 줄 몰라한 게 분명했다.
 도시 통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각 구역에 비치된 카메라는 그저 아비규환을 묵묵히 담아냈다. 생명 유지 장치들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끝없는 파괴의 행렬에도 불구하고 산소와 물은 충분한 양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이제 그걸 쓸 사람도 없겠지만. 천구의 파괴도 미미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생명체 스캔을 시작했다. 암담했다. 동물원이나 식물군집지역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아주 미약한 한 점이 있긴 했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이제 벨로드는 유령도시다.
 관리국에서 나온 뒤 광장 근처 마트에서 맥주를 한 병 사 벤치에 앉았다. 팁까지 얹어놓았으니 누구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기록은 내 마지막 기사이자 유언장이 될 것이다. 난 잠시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해보았다.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유령도시의 관리인이 되어야겠다. 환경미화원이 되는 거다. 도시 곳곳에 널린 시체들을 모아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일 거리가 될 것이다. 거대한 무덤에 마지막으로 들어갈 사람은 내가 되겠지. 이제, 내 생의 가장 치열한 순간을 위해 발을 뗄 것이다.

블라도 스미토의 기록

 내 옆에 앉은 이슬람 사제 노인네는 계속 아무 말도 없다. 죽었나 싶어 돌아보니 자길래 그냥 글이나 쓴다. 아니 역 근처에서 책이나 읽고 자빠진 걸 겨우 잡아끌고 트램에 태워놨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네? 고맙다, 그런 건 있어야할 거 아닌가.
 하긴 뭐 내가 딱히 잘한 건지 모르겠다. 그 땐 거기에 이 양반을 두면 죽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제는 그 곳이 더 안전할 것도 같고…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 양반도 그다지 삶에 큰 집착은 없는 것 같다. 나처럼. 그럼 왜 난 트램을 이렇게 잡아탔을까?
 물론 그 이유도 올림푸스 화산만큼 써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다. 벨로드에서 볼 건 다 본 거 같아서, 이제 화성 다른 곳은 어떤가 구경 좀 해봐야겠다 싶어서다. 나야 뭐 늘상 욕해대지만, 사람이 북적대지 않는 도시에 얼마나 더 재미있는 일이 있겠나.
 창밖으론 거대한 먼지폭풍이 일며 붉은 몸체를 드러냈다. 한 때 나처럼 비비적대던 놈 중에 관리국에서 일을 받던 녀석이 있었다. 환경조성학자였는데 어느날 녀석이 넌지시 나에게 일러주기를, 화성에 이렇게 먼지 폭풍이 심해진 것은 전적으로 자신들 탓이란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발전방식을 상부에서 강행했기 때문이라나 그 비슷한 얘기다. 그 녀석은 나와바리 언어학자가 정말 그 얘기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한번 가동이 된 그 발전은 화성의 내부에서 스스로 에너지원을 공급하며 아무런 관리없이도 돌아간다고 한다. 먼지폭풍을 수없이 만들어내면서.
 한창 헛소리를 끄적이는데 옆에 있던 노인네가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한창 수다를 떨었다. 이거이거 꽉막힌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통하는 구석이 있다. 얘기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노인네가 예배인지하는 삽질을 하겠다며 식당칸으로 옮겨갔다. 나도 멍청한 겁쟁이만 가득한 객실에 남아있고 싶지 않아 함께 식당칸으로 왔다.
 한동안 바닥에 자빠졌다 일어났다 하는 꼴을 바라보다 식당칸 바로 앞에 있는 기관실을 슬쩍 들여다봤다. 트램 시스템이 의연히 반짝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괜히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아 커피가 어딨나 뒤지고 있을 때쯤 기내 방송이 울리며 역 정차 임박을 알렸다. 다른 칸에 있는 바보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역에 들어서자 반쯤 부서진 천구에서 불어온 먼지 폭풍이 건물들을 삼키며 만들어낸 모래 동산이 창 밖으로 펼쳐졌다. 이번 하지 축제는 정말 죽이는 구나. 기내 방송이 30분간 정차함을 알려왔다. 다른 객실의 바보들의 분란은 안 봐도 뻔했기에 식당칸의 문을 잠궜다. 삽질을 마친 노인네가 다가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섣불리 밖에 나가는 듯했다. 저런, 저런. 식당칸 뒤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로를 쥐어뜯던 사람들이 식당칸 문을 부술듯이 달려들었다. 난 잠시 기관실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움직이나 고민하다 커피를 찾기 시작했다. 트램은 튼튼하다.
 30분의 정차를 마치고 트램은 다시 레일 위로 미끄러졌다. 창 밖으로 날리는 먼지들을 바라보며 노인네는 자신이 사제가 되기 전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흥미롭게 들으면서도 갑자기 이 노인네가 주님믿고 구원받으세요, 이러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알라의 조화니 인간의 영혼이니 하는 얘기가 나온다. 난 그의 얘기를 뒤로 흘리면서 창 밖의 먼지폭풍에 신경을 집중했다. 트램은 먼지 속을 달린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붉은 먼지 위를 달린다. 나는 끝없는 달림 위에 있다. 달리고 달려… 먼지가 될 것이다. 순수한 하늘 위를 나는 붉고 아름다운 먼지.

카시 하이클라의 기록

 키노…
 화티마가 많이 아파……. 계속 찬 수건으로 닦아주고 약도 찾아 먹였는데 도무지 열이 내려가지가 않아. 어디 심각하게 아픈 곳이 있나봐. 어쩌면 좋지? 이젠…… 의사 선생님도 없을텐데. 그저 이렇게 옆에 앉아 어서 나으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만 있어.
 휴… 사실 화티마가 깨어나도 걱정이야. 화티마의 부모님은 축제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물건을 파는 중이었거든. 퍼레이드가 시작될 즈음에 만나기로 했는데… 이제 다시 만나기 힘들겠지? 어떻게 설명해줘야할까. 놀라서 다시 아프게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말은 하지만 나도 무서워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언니 손을 잡고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오느라 제대로 본 건 없지만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어. 집 안에 들어서자 문이란 문은 다 걸어잠그고 셋이서 꼭 끌어안고 있었단다. 밖에선 계속 끔찍한 소리들이 들렸어. 난 귀를 막고 언니에게 더 꼭 안긴채 어서 모든 일이 끝나기만을 바랐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튼 한참이 지나서야 바깥이 좀 조용해졌고 화티마가 아프기 시작했어. 휴우, 정말 정신없었어. 이제야 여유가 생겼다고.
 정신없이 화티마를 돌보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언니가 일어서면서 절대로 문을 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어. 금방 돌아오겠다면서. 난 계속 화티마를 돌보는데 집중했지. 사실 너무 무서웠어. 언니까지 없으니까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더라고. 그래도 울지 않고 열심히 화티마를 간호했어.
 언니가 돌아왔을 때는 화티마가 잠시 잠들었을 때였어. 문을 열어주니까 언니는 품에 잔뜩 든 음식들을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하는 거야. 계속. 계속. 하루 종일 울었어. 열심히 달래보고 노래도 불러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어. 언니는 계속 벽을 보고 울고 나를 안고 울고 화티마에게 물수건을 갈아주며 울었어. 울면서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 뭐가 그리 미안한지 모르겠어. 사실은 나도 언니한테 미안한 거 많은데.
 지금 언니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어. 얼굴에 가득한 눈물을 닦아주는데 언니가 뒤척이며 할머니의 이름을 몇번 불렀어. 나도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이젠 화티마도 조금은 나아진 것 같고, 잠이 든 거 같아. 뭐가 어떻게 된 거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번 축제 때 보고 싶은 것 많았는데… 투정부리면 안 될 것 같아. 키노! 무서워… 언제나 곁에 있을 거지?
 아, 내가 손가락을 왜 다쳤는지 알려줄까? 그래, 바로 네게 줄 선물을 위해서야. 어때? 맘에 드니? 초록색이 어울릴 것 같아서 만들었는데 역시 잘 어울린다. 언니가 인형옷 만드는 거 보고 나도 몰래 따라해본 거야. 사실 바느질은 처음이라 손이 다 상처투성이란다. 다음번엔 제대로 배워서 더 이쁘게 만들어줄게.
 음… 아까 잃어버린 네 팔은 언니가 괜찮아지면 살짝 부탁해볼게. 그 때까지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렴. 내가 도와줄게. 지금은 다들 할일이 너무 많아.
 잠이 안 온다… 자면 무서운 꿈을 꿀 것 같아.


하지 일주일 후


카시 하이클라의 기록

 사랑스런 키노!
 아까 마당에 나갔을 때 환경미화원이란 분을 만났어. 다른 사람을 만난 게 워낙 오랜만이라 언니가 한 말도 잊고 나랑 화티마는 후다닥 달려갔지. 미화원 아저씨는 놀란 것 같았지만 친절하셨어.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끄덕이면서 사탕을 주셨어. 자기가 도시를 청소하는 사람이라면서 무엇이든 너무 걱정말라고 하셨지. 도시가 많이 깨끗해지고 안전해졌대. 나중에 언니에게 산책가도 되냐고 졸라 봐야겠다. 아저씨는 가방을 뒤적여서 화티마한테는 작은 게임기를 주고 내겐 망원경을 주셨어. 히힛, 나중에 이걸로 지구를 찾아봐야지. 고맙다고 인사하는 동안 어느새 아저씨는 힘내라면서 아랫쪽 골목으로 내려갔어. 좋은 분인 거 같은데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렇겠지?
 언니는 여전히 말이 없고 화를 자주 내지만 그래도 점점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언제나처럼 아침을 먹고 나가서 한참있다 돌아와. 나랑 화티마한테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고서. 돌아올 때 언니는 먹을 것을 한아름들고 있고, 힘없이 주저앉아 한동안 말없이 사진첩을 뒤지거나 해. 어디에 다녀오는 걸까? 일을 하고 오는 건 아냐. 언니가 오늘 내게 말해줬거든.
 화티마가 잠든 사이 마당에 앉아있는 내게 언니가 슬며시 다가왔어. 씩씩하게 자란 내가 자랑스럽다더라. 헤헷. 나도 언니가 자랑스럽고 많이 좋아한다고 그랬지. 언니는 잠시 바닥만 바라보다 얘기했어. 축제날 뭔가 잘못되서 여기저기 불이 좀 났고,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고. 나는 어디로갔냐고 물었지만 언니는 고개를 흔들기만 했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언젠가 화티마도 부모님이랑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지금 여긴 우리 셋이랑 미화원 아저씨 뿐인가? 그럼 좀 심심할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언니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난 잠시 마당에 망원경을 들고 서있었어. 하늘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예전 언니가 지구라며 가리킨 곳을 찾았지. 우와, 대단했어. 망원경으로 보니까 정말 지구가 가까이서 보이는 거 있지? 눈 앞에 작은 구슬처럼 펼쳐졌어. 지구에는 바다라는 게 있대. 직접보면 좋겠지만 망원경으로 봐도 정말 이쁘더라. 빨간 바다가 까만 땅을 둘러싸고 있어. 꼭 체리쥬스에 빠진 초콜렛 같아. 그 어딘가에 에스토니아도 있겠지? 아아- 언젠가는 꼭 가야지.
 저녁을 먹고 셋이서 얘기하고 퍼즐맞추고 하면서 놀았어. 나랑 화티마가 연습한 노래를 부르니까 언니가 웃었어. 무엇보다 언니가 오랜만에 웃는 걸 보니 너무 좋았어. 내일쯤엔 네 팔을 부탁해도 될 것 같아.
 아웅, 이제 잘 시간이야. 오늘은 너도 나도 좋은 꿈을 꿀 것 같아. 키노 저기 하늘을 봐봐. 내가 도와줄게.
 저 별들 좀 봐. 어때, 정말 예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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