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즐거운 나의 집

2007.12.11 22:3912.11

향후 이 '탈공간'을 이끌어갈 '탈공간의 세대들'은 이전과는 다른 정치·문화·경제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이전의 질서가 죽은 무덤 위에 꽃피울 전망과 두려움의 세대가 될 것이다.
                   - 함성호, 건축의 스트레스


평신 부동산중개업 사무소

 "그 집은 귀신들린 집이요."

 난 제대로 못 들은 건가 싶어 잠자코 있다가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복덕방 주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귀신들린 집. 귀신들린 집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뒤따를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복덕방 주인은 몸을 뒤로 제껴 소파에 묻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뻗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큼. 거 여기가 재개발되기로한 거이 최근일이고 이 동네 집들은 다들 지어진지 한참된 편이요. 특히나 그 집은 정말 한참되었지. 듣기로는 일제 때부터 있었다덩가, 뭐 그렇수다. 그러니까… 에… 우리 집안이 말요, 벌써 몇대째 여기 토박인 줄 아우? 왜정 때도 육이오 동란 때도 그 힘든 속에서도 악착같이 이 동네에서 버텨왔어요. 내 고조부에 고조부에… 암튼 옛적 어르신이 벼슬자리 얻어 한양 오시면서부터였지. 그게 다 묫자리를 잘 봐서 그런게요. 여하튼간에 고렇기땜시롱 지금 토박이인 우리 집안이 이곳 땅을 사고 파는 건 당연하다 이거지. 사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말요……."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가려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자 복덕방 한 구석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 이거 사설이 길어졌구만. 암튼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못이 박히게 들어온 얘기요. 그 집은 귀신들린 집이라고. 그 집이 지어진 게 일제 때 뭔 도시 계획인가 뭔가하면서요. 오래된 한옥을 부수고 그 자리에 신식 집을 짓기로했지. 아, 근데 그 집자리에 살던 사람들이 못 나가겠다고 버텼지 뭐요. 아 그래도 어쩌겠어, 총독부에서야 막무가내지. 장비 끌고 와서 그 집을 밀어버리는데 그 사람들이 드러누운 거요. 이 집을 부수면 조상이 노하신다고. 아, 근데 글쎄 거 쪽바리 놈들이 기냥… 밀어버렸다는 거 아냐. 어이고, 소름끼친다."

 추임새까지. 혹시 이거 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판소리는 아니겠지? 일곱시간짜리 '귀옥가'를 완창한 희대의 명창. 각혈은 듣는 사람이 했어요.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수다."

 복덕방 주인은 입맛을 한번 짝 다신 뒤 말을 이었다.

 "밀어버린 자리에 들어선 게 요 이층집인데, 여기에 처음 살게 된 건 사업차 조선에 온 일본인 가족이었지. 젊은 친구였다는구만. 이쁜 마누라랑 어린 딸이랑 고 큰집에 들어갔는데, 아 글쎄 몇년 잘 살다가 갑자기 다른 식구들이 사라져 버린 거요. 그래 소문으로만 돌다가 알고보니 이 사업가가 미쳐서 가족들을 죽이고 묻어버린 거지. 헌데 그 친구가 어디 당시 높은데다가 손을 써서 재판은 피했다는구만. 아, 그러고 이 집을 재빨리 처분하고 본국으로 튄 거지.
 그러고나서 이 집에 들어온 건 총독부에서 일하던 조선인 가족이었어. 거 뭐 작위도 받았다나 암튼 그렇고 그런 나쁜놈이었지. 그런데 이 친구들도 몇년 살다가 갑자기 뭐가 씌인 모양이야. 전재산을 사이비 종교에 홀랑 바치고 빚까지 져서 쫓기는 몸이 됐지. 결국 어디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나.
 해방하고서도 골치 아팠다우. 그 집에 들어온 독립군 장교 출신이 좌익으로 몰려서 죽기도 하고, 이후에 주인은 육이오 동란 때 피난가다 폭격 맞아 죽고. 아요 그 난리 때는 더 정신없었다지. 요기를 점령하는 군대가 바뀔 때마다 그 집 주인들이 제일 먼저 즉결재판에서 죽어나갔으니까."
 
 난 기담작가나 가십에 목매여하는 스포츠신문 기자가 아니었기에, 변색된 복덕방 벽과 뭔가가 들러붙은 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슬슬 지루해졌지만 복덕방 주인의 말은 끝날 기색이 없었다.

 "아, 그렇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다니까. 어디 그 때가 좀 무섭던 시절이우? 그래서 뒤져보니까 정말로 그게 나왔던 거지. 삐라가. 근데 또 몰라, 중정 애들이 미리 묻어놓은 건지도. 그러다 아무튼 유신이 끝나고 이번엔 줄 잘서는 사람이 들어왔어요. 물장사하는 사람인데, 정치 쪽 구린 구석을 다 알고 있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전기 난로가 틱틱 소리를 내며 빨갛게 타들어갔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복덕방 안은 낡고 단촐했다. 몇십년째 관심도 못 받고 시들어가는 것 같은 캐비닛과 잡동사니들 사이로 오래된 서함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단정하게 옻칠이 되어있고 가지런히 경칩이 박힌 그 서함은 복덕방의 한결같은 조잡함 속에서 의연하게 빛났다. 서함에 채워진 묵직한 신형 자물쇠 때문인지 이질감은 한층 더했다.

 "그래, 그 친구들도 결국 못 견디고 떠나버린 게야. 그러니 별 수 있나. 일단은 그 사람 조카가 집을 받아들었지. 그렇지만 그 사람도 영 께름칙한지 와서 살진 않더라고. 결국 요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처분해버렸어요. 일단은 내 명의로 받아두기로 했어. 그게 한 육년됐나?"

 말이 끝났나 싶어 잠자코 복덕방 주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 무슨 말할지 알아요. 집을 팔아야하는 처지에서 어째 요로코롬 이상한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느냐 하는 거겠지? 그게 그래요. 이번에 이 동네에 뉴타운 들어서는 건 알죠?"

 몰랐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뉴타운이 들어서는데, 신형 아파트 한 단지가 사실 조선시대 공동묘지 자리였다, 하는 소문이 난 거야. 당연히 입주자들이랑 땅주인들은 집값 떨어진다고 방방 뛰었지만 값이 떨어지는 건 별 수 없었지. 이런 소문이 나면 확실히 올 사람도 안 와요. 그런데 그 소문이란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거든. 더군다나 이 집은 정말 대대로 소문난 집자리니까. 내가 이런거 말 안하고 팔면 나보고 사기쳤다고 어쩌고 하거든. 전번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우선 먼저 이렇게 으름을 놓고 보는 거요."

 복덕방 주인은 게걸스럽게 식은 커피를 들이키며 내 눈치를 살폈다. 더 이상 여기 있다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우선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다.

156-17 번지

 집은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들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1차선 도로에서도 꽤나 들어가야했다. 뾰족한 철창이 늘어선 담장 뒤로 세간살이들이 보이는 비슷비슷한 크기의 낡은 개인 주택들도 가까이 하기 싫다는 듯 그 집에서 몇블록 떨어져 있었다. 공용 주차장과 동네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의 틈바구니에서 그 집은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작게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외관은 그럴듯했다. 나름대로 자그마한 마당도 있었고,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담벼락은 알 수 없는 덩쿨줄기들이 휘감고 있었다. 큼직한 돌로 오밀조밀 쌓아올린 고전 양식의 이층집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서 한걸음 떨어진 이름 모를 나라에 온 것 같았다.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들로 뒤덮힌 정원과 흐릿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먼지쌓인 유리창을 보고있자니 살짝 을씨년스럽기도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험, 이제 들어갑시다."

 복덕방 주인은 멍하니 선 날 채근하며 주섬주섬 열쇠뭉치를 꺼내 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문의 비명이 텅 빈 집안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들어선 밝은 빛에 오랫동안 쉬고 있던 내부의 벽들이 신음하는 것 같았다. 복덕방 주인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휘청휘청 들어갔다.

 "요 어디쯤 스위치가 있었는데……."

 곧 주인이 스위치를 찾아 켜자 둔중한 소리를 내며 몇번의 깜빡임 끝에 불이 들어왔다. 머리 위에서 힘들게 빛나는 원형 램프가 꼭 떨어져내릴 것처럼 보여서 불안해졌다.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복덕방 주인은 익숙한 동작으로 집 이곳저곳으로 날 이끌었다.
 안 그래도 넓은 집안은 아무도 살지 않아서인지 더 넓어보였다. 이전 주인은 가구를 처분할 생각도 없었는지 오래전에 유행하던 디자인의 냉장고와 티비 같은 것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보니 아직도 그것들이 작동할지 의문스러웠다. 넓은 방들 사이로 울려퍼지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집안 구석구석은 낯선 방문자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이 집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시간의 지층 한 지점에 매몰되어 이미 죽어버린 듯 했다. 이 케케묵은 유적지에서는, 굳이 복덕방 주인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누구든 음침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집의 내부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크기였다. 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집의 크기만 확인하면, 나머지 조건은 다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복적방 주인에게 서둘러 계약을 하자고 말했다. 이 집에 귀신이 있다해도 날 반겨주진 않겠지. 내겐 어차피 더 저주 받을 것도 없다.

2층 서재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노련하게 배치해놓은 책장과 책들을 바라보며 잠시 어떻게 정리할까하다 그만두고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예전처럼 잘 분류된 책들을 집어 읽으며 오후를 보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이삿짐들은 이곳에 들어올 때의 모습 그대로 이곳에 머무를 것이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거품 포장지들을 바라보면서, 이곳에 별다른 감정을 품지 못하는 건 이곳을 그저 지나가는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저 잠시, 일이 제대로 풀릴 때까지만. 이 큰 집에서 혼자 우두커니 버려져 있는 건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 삶처럼, 내게 이 집이라는 공간은 정상적인 삶과 다른 정상적인 삶 사이에 끼여있는, 의미를 부여할 가치도 없는 과도기일 뿐이다.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들 사이에서 액자를 발견하고 무심코 집어들었다. 오년 전의 모습 그대로, 아내와 딸은 봄날의 공원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습관처럼 어디에 걸어둘까 싶어 벽 이곳저곳에 대보다가 곧 관두고 책상 위에 엎어놓았다. 당분간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고 싶지 않았다. 현재의 문제만으로도 난 충분히 괴롭다.
 그러고보니 벽 한쪽에 벽지가 뜯어진 부분이 있었다. 벽지를 다시 펴서 벽에 붙이다보니 표면의 벽지 뒤로 수겹의 벽지가 겹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집이 여기 서있던 시간의 반증이었다. 순간, 이곳을 거쳐간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 세월 나처럼 여기서 이 벽을 바라봤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 곳을 거쳐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여기가 종착점이었을까. 잠시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사람들처럼 난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집과 함께했을 뻔한 절망과 희망의 순간들을.
 다시 옛날 생각이 나려고하길래 배나 채우기로 했다. 뭔가 배달시켜 먹으려 했지만 아는 음식점 번호가 없어서 잠시 당혹해하다 아까 동네 어귀에서 중국집 하나를 본 기억이 났다. 재킷을 걸치고 삐적거리는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을 가득 채운 파동계가 은은한 저음을 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1층에도 2층에도 온전히 날 위한 공간은 없었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잘 작동하는 파동계를 쓰다듬다가 밖으로 나왔다.

중화요리 전문점 만리장성

 중국집 내부는 좁았다. 저녁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에 손님은 나뿐이었고, 나이든 주인은 연신 주문전화를 받으며 배달원들을 닥달했다. 가게 한 구석에 놓인 티비에서는 세계명소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멍하니 성가족성당을 보고 있으려니 주인은 던지듯 짜장면 그릇을 놓고 가버렸다.
 되는대로 짜장면을 비비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더 이상 혼자 밥 먹는 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의 내게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귀찮을 뿐이지. 새로운 곳에 왔으니, 아마 커다란 이층집에 혼자 틀어박힌 중년의 남자에게는 불편한 경계와 그보다 더 불편한 친절, 그리고 수많은 구설들이 뒤따를 것이다. 신경 끄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귀찮을 때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만 버티면 된다. 시큼한 단무지가 입 안에서 아삭거렸다.
 많이 돌아다닐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리나 익혀둘겸 동네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골목에는 선거철도 아닌데 요란한 플래카드들이 걸려있었고, 시장 한구석엔 '연대서명 받읍니다'라고 쓰인 천막도 있었다. 아마 복덕방 주인이 말했던 뉴타운 문제랑 관련있는 것 같았다. 주민이 힘을 합쳐서 권리를 되찾고 재산을 지키자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뻔한 이익 다툼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난 이곳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았다. 원래 있던 티비가 잘 나오길래 가져온 티비는 꺼내지도 않았다.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패널들은 쉴새없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고 난 조금씩 초조해졌다. 물건이 오기로 한 건 새벽 한시였다.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 시간으로 정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밤 중에 소란스러우면 더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 동네 방음도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은데.
 어느새 지리한 토론도 끝나고 광고가 나오는 사이 티비 화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하다 파동계 때문인가 싶어 돌아보았지만 파동계는 평상시처럼 얌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티비를 쾅쾅 쳐대고 있자니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려왔다.

어두운 골목길

 트럭에서 두 사람이 내려섰다. 한명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고, 다른 한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사람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이고, 이거 오랜만입니다."

 멋쩍게 웃는 그를 보니 일단 짜증이 났다.

 "좀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는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보이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아아, 당연히 그런건 조심해야죠. 그런데 어차피 이런거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긴 힘들어요. 그래도 지금 선생님이 이사오신지 얼마 안됐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삿짐이거니 하겠죠. 그럼 일단 이거 서둘러 집어넣고 갑시다. 네?"

 그는 말을 마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트럭 문을 열어 상자들을 끌어내렸다. 모두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상자들이었다. 그것들을 놓을 곳을 알려주자 그들은 신속한 동작으로 상자들을 2층 현관으로 옮겼다. 분주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위험한 거 아니겠죠?"

 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사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글쎄 선생님께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저 잠시 요걸 맡아두시기만하면 됩니다. 그럼 저쪽에서 또 금방 요렇게 찾아갈거니까요. 아무 걱정도, 의심도 없이 그냥 원래 있던 거다 하면서 지내시면 돼요."

 그는 다시 상자를 집으러 가다 1층을 가득 채운 파동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저게 더 위험하겠네요. 처음이라 그런 거에요. 앞으로 좀 하다보시면 그런가보다 하실 겁니다. 뭣보다 짭짤하잖아요."

 그는 음침하게 웃었다. 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층계참

 2층과 1층을 잇는 작은 층계참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어느 단편에선가 계단에서 올라가야할지 내려가야할지를 고민하다가 대형사고를 일으킨 주인공이 나왔다. 그걸 읽던 '정상적인 시절'에는 내가 짐들에 밀려 끼인 신세가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1층 거실은 파동계가, 2층 거실은 알 수 없는 상자들이 간신히 지나다닐만한 틈을 빼곤 빼곡히 차있었다. 그대로 계단에 주저 앉으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당장 돈이 궁해서 받아들이긴했지만 원래 확실하지 않은 것과는 거리를 두는 성격이었다. 저 상자 안에 든 것이 마약인지, 불법 정치자금인지, 테러조직이 쓸 폭탄인지 어떻게 아나. 하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잠시 이 집을 스쳐지나가는 건데 뭘, 나처럼. 며칠을 지내보아도 이곳은 내 거처가 아니었다. 좋았던 과거와 좋은 미래 사이에 구겨진, 불확실한 현재가 힘겹게 스며든 장소일 뿐이다. 이 공간은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지금의 나는 어딘가에 안정되게 몸을 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니까. 어차피 저 상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어도 더 잃을 것도 없다.
 그 생각을 하고서 난 1층을 가득채운 파동계를 바라보았다. 분명 내겐 더 이상 과거의 잔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저 무식한 물건을 빼고선. 파동계는 지금도 평온한 지표를 향해 일정한 파동을 내보내며 지진위험도를 계측하고 있었다. 이제 저런 물건은 아무 소용도 없다.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해왔으면서도, 한번의 자잘한 실수로 공금횡령이 들켰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기에도 넘어갔다. 어제의 파트너들은 오늘의 적이 되었고, 날 반겨주던 사람들은 모두가 등을 돌렸고, 날 든든하게 지켜주던 내 지위는 순식간에 날 옭아매는 사슬이 되었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가족들은…….
 수없이 손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층계에서 일어났다. 이 커다랗지만 내겐 좁은 집에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간다해도 굳이 갈 곳도 없지만 끔찍스런 물건들로 가득찬 집은 더없는 지옥의 감옥이었다. 덜컹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작스레 파동계가 요란스럽게 요동쳤다.

1층 거실

 파동계 이곳저곳을 훑어 보았지만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녀석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다만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보일 수 있는 정상적인 작동을 보일 뿐이었다. 집을 무너뜨릴 것처럼 큰 소음을 내며 진동하는 파동계를 진정시키려고 이런저런 조작을 해보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오작동이 분명했다. 파동계는 한시간 전부터 격렬한 신호를 보내왔다. 파동계에서 내보내는 파동이 지표로 전해지고 돌아오는 거리를 계산해봐도 지금쯤이라면 분명 파동계가 예고하는 대형 지진이 왔어야했다. 하지만 파동계의 진동을 제하고는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진동 때문에 지진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 끔찍스럽게 앓고 있는 파동계를 바라보다 전원을 내렸다. 집안에 울려퍼지던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그 자리를 메웠다.
 다시 기계 내부를 살펴보았지만 분명 고장난 부분은 없었다. 아무래도 프로그램의 문제인가 싶어 전원을 올리면 파동계는 미친듯한 진동을 울려댈 뿐 도저히 제어하거나 문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파동계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오작동을 일으킬만한 요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 부근에선 분명히 그럴만한 요소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거나, 지하철이 지나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주택공사도 쉬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현재의 문제를 안고 한동안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나만큼이나 이 기계도 지친걸까. 모든걸 잃고 도망다니는 와중에도 끝끝내 지켜온 물건이건만, 갑자기 쓸모없는 고철이 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기계를 뜯어내며 부속들의 위치를 바꿔댔지만 그런다고 바뀔 것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파동계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해도. 나나 이 녀석에게나 이 곳을 거쳐 갈 곳 같은 것은 없을지 모른다. 미친듯이 진동하며 죽어버린 건 스스로에 대한 기만감일지도 모른다.

현관

 안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추웠다. 난방시설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큼직한 그림자를 드리운 물건들 뿐이다. 1층의 파동계와 계단 너머로 보이는 2층의 상자들을 보면서, 음식을 배달해 먹는다는 게 얼마나 경솔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똑같이 무언가를 물어보는 시선이긴 하지만, 매일 찾아가는 음식점 주인의 눈길이 더 편안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 상자의 갯수를 세어보았다. 분명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숫자였다. 적이 안도가 되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이 상자들의 수를 헤아려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있었다. 처음에 무심코 숫자를 세고 기억해두었는데 언제부턴가 상자의 수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에 든 것이 무엇이건 그걸 가로챘다는 의혹을 받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상자는 다시 제 갯수로 돌아왔지만, 다시 갯수가 틀리기가 일수였다. 다시 돌아온 상자는, 열어볼 수는 없었지만 같은 무게감이었기에 처음에는 뭔가 착각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스트잇에 번호를 써 상자마다 일일이 붙여두었다. 다음날이 되니 특정 번호의 상자들만 사라져있었다. 도난당한 건가 싶었지만 어딘가에 신고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밤새 경계를 하다 잠깐이라도 조는 순간이면, 상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오고, 사라지고, 돌아오고를 반복했다. 그 일상 속에서 난 그저 무기력하게 상자의 수를 세어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2주가 넘게 찾으러 오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볼 생각도, 상자의 물건이 뒤바뀐 것을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웅웅거리며 1층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후다닥 내려가니 역시나 파동계가 멋대로 작동해대고 있었다. 또 다른 일상이었다. 처음 오작동을 일으킨 이래 파동계는 끊임없이 오작동을 일으켜왔다. 처음에는 한번의 오작동 이래 멀쩡했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기계는 다시 미친듯이 울려댔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하는 수 없이 전원을 꺼놓고 지내기로 했다. 이웃의 항의를 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생긴 건 이후에도 파동계가 진동하곤 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전원선을 분리했는데도 어느새 파동계에 전원이 들어와 작동한 것이다. 아마 파동계의 비상전원이 작동해 일어나는 일일테지. 기계를 해체해 놓는 방법도 있겠지만,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같은 파동계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다시 몸부림을 치고 있는 파동계를 바라보며, 현관턱에 얌전히 앉았다.
 넓은 집 곳곳으로 진동음이 덜컹거리며 퍼져나갔다.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벽들과 진동음이 마주치며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기만이라는 이름으로 잊고 있었던 내 삶의 균열. 어느새 전체를 좀 먹을만큼 커져버렸을. 거쳐간다는 핑계로 모든 곳에 관심을 끊고 이 요새에 숨어 살면서 어느새 그 불안한 균형도 깨져가고 있었다. 오작동을 일으키는 기계와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어쩌면 내 남은 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복덕방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미쳐간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여기서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갑자기 몇번 불이 깜빡였다. 천장의 등을 바라보았지만 아직 멀쩡했다. 전력공급에 문제가 있나 싶어 몸을 일으켰지만, 불은 완전히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채 정신없이 규칙적으로 점멸했다. 그에 맞춰 파동계는 더더욱 심하게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간 많은 감각들에서 유리되어 살았지만, 살짝 긴장이 되었다. 미친듯한 진동음과 빛들 사이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래였다. 노래?
 단숨에 층계참을 걸어 올라갔다. 오디오 설비가 있을 서재로 가다 멈칫했다. 오디오는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노래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 판단과는 상관없이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서재 쪽이었다. 침입자일까? 난 서둘러 내달리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상자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 아까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봤는데. 하지만 일단 거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상자들을 피해 서재로 향했지만, 몇걸음 못 가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몇번 반복되자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상자들을 피해 빈 공간으로 발을 내딛으면, 그 곳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2층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로 가는데만도 하룻밤이 걸릴 것 같았다. 일단 그대로 멈춰서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복덕방 주인 말대로 귀신이 들리거나 뭐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분명 이건 인간이 만들어내는 장난이었다. 그게 어떤 기술과 환각을 이용한 건지는 몰라도. 이 이상한 일들을 통해 내게 알리려는 사실이 무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게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은 많았다.
 무엇보다 이대로 있으면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 집에서 나와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층계를 굴러떨어지다시피하며 간신히 내려와 현관의 신발을 집어들고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골목들

 동네는 시끄러웠다. 여기저기를 작은 트럭을 타고 다니며 확성기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댔다. 보아하니 아마 뉴타운 문제와 관련해 오늘 집단행동이 한번 있을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좁은 골목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내려갔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복덕방 너머에선 예의 그 주인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다시 지나가려는 찰나, 주인은 장기판에서 눈을 떼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걷기 시작했지만 주인의 오묘한 표정은 잊혀지지 않았다. 꼭 뭔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아직 용케 남아있구나 하는 듯한 득의만만한 미소였다.
 퍼뜩, 복덕방 주인이 뭔가 협박할 요량으로 날 가지고 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가능성은 현실성이 없었다. 나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을텐데, 나에 대해 조사하고, 집 안에 장치를 해두고, 그 집이 괴상한 집이라고 미끼를 던져놓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한낱 복덕방 주인일 뿐이잖는가.
 좀 더 가능성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선 '비정상적인 생활'로 내 신경이 이상해져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해놓는게 좋았다. 나를 노릴 사람들의 리스트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전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청부를 받아 날 추적하고 있을 사람들, 물건의 청탁자들, 청탁자들의 뒤를 밟는 사람들. 내게 상자를 맡긴 사람들에게 우선 연락을 해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잠시 더 고민해보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시내로 향했다.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맞춰 후배는 술집으로 들어섰다. 하는 일과 다르게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는 녀석이다. 아직까지 나를 만나주고, 내가 무언가를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물론 그건 아직 내게 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허무맹랑하거나 내가 이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녀석에게 얘기를 전했다. 미소를 띈채 고개를 끄덕거린 후배는 전해준 정보들을 끄적끄적 받아적더니 큰 목소리로 안심하라고 말했다. 곧 그 집과 형님 신상에 걸리적 거리는 것들을 정리해줄테니 자기만 믿으라고. 일단 준비해온 돈을 착수금 조로 주고 나니 후배는 만족스러운듯 헤벌쭉 웃어보였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다.

집 앞

 녀석을 만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만취한 채 돌아왔다. 나름 손이 큰 후배는 할 수 있는한 호화롭게 대접하는 게 자신을 돋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듯 했고, 난 언제나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름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 걸음걸이가 굉장히 불안정하게 보일 거란 걸 안다. 오늘 녀석은 언제나처럼 밤이 새도록 대접했고, 다른 향흥도 제의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녀석은 집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할 거라고 말했고, 나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 다른 곳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아침이면 후배의 직원들이 그 집으로 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부디 내 삶도.
 그리고 집 앞에서야 무심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새벽 다섯시 쯤일까, 맞은편 집에서 약수통을 들고 나온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갔다. 어지러운 시선을 다 잡으며 내 앞의 집, 그 집을 바라보았다. 처음보았을 때처럼 조금은 스산하게, 그리고 지극한 무심함을 담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취기 때문일까, 만용을 부리고 싶었다. 대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집을 마주했다.

 "하하, 어디 잡아 먹어 보시지!"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며 난 집의 하얀 벽을 힘껏 걷어찼다. 발에 전해지는 통증도 깨닫지 못한 채 연거푸 벽을 걷어찼다. 알 수 없는 승리감이 찾아왔다. 세상이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지만, 넌 내게 이길 수 없어. 더 이상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다시 한번 벽을 걷어차기 위해 발을 들었을 때.
 집이 일어섰다.

내달리는 골목

 처음엔 취해서 잘못 본건 줄 알았다. 잘 맞지 않는 초점을 억지로 맞춰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다시 득의양양하며 걷어차려할 때, 집은 굉음과 함께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작은 정원이 파헤쳐지고, 마당에 심어져있던 활엽수의 시든 잎들이 모두 떨어져내렸다. 기둥들이 땅위로 완전히 하얀 모습을 드러냈고, 창문들이 열렸다 닫았다 하며 기이한 용트림을 내뱉었다. 더 생각해볼 겨를없이 본능적으로 열려진 대문으로 뛰쳐나갔다.
 집은 기둥을 움직여 몇번 기우뚱거리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곧 집을 둘러싼 낮은 담벼락이 집을 향해 모여들더니 덩쿨들을 흩뿌리며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집을 휘감았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집은 다시 한번 문들을 열어젖히며 굉음을 내뱉었다. 집이 몸을 일으킨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보였다.
 한번 포효한 집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서있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둑어둑하던 동네는 어느새 환히 밝아져있었다. 시끌벅적한 난리통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달려나와 집 주위로 모여들었다. 난 조용히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귀찮은 질문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긴 사람들은 다들 일어선 집의 기이한 모양새를 보며 할말을 잊은 눈치였다. 다들 넋이 나간듯 불안하게 선 집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지막히 말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이내 기가 질린 듯 수그러들었다.
 이후로도 그 집은 한참동안이나 그 상태로 서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와 그 모습을 찍거나,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댔다. 곧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골목으로 모여들었고, 어디선가 경찰차와 소방차, 방송국 보도차량도 나타났다. 이 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이 집의 형식상 주인인 나를 찾을 것임을 깨닫고 슬금슬금 골목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라고 달리 답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 집이 귀신들린 집이라잖아. 난 다시 과거를 묻어두고, 짐들을 더 안은채 도망가야겠지.
 그 때, 집이 다시 움직였다. 땅 위로 솟은 기둥들을 다리인 마냥 천천히 움직이면서 골목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집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 집의 궤적을 따라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골목으로 나온 집은 다시 한번 포효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조금씩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더더욱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저 집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었다. 가야해.
 내가 다시 골목을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이자, 그에 맞춰 그 집은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집이 몇걸음 걷고 나자, 내겐 그 집이 원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집은 다시 한번 포효했다. 아냐, 지금은, 아니 난 아냐. 너랑 관계될 이유가 없어. 난 걸음을 빨리했다. 곧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집이 달리기 시작했다.
 집은 온 몸을 덜컹거리며 골목의 벽들을 부숴대며 날 향해 질주했다. 더 볼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온갖 소음과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곧 거대한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웠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집이 균형을 잃고 내게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훌쩍 앞으로 뛰어 간신히 집에 깔리는 건 피할 수 있었다. 먼지구름이 골목의 입구에 흩뿌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쓰러진 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기침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집이 꿈틀거렸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꿈틀거리던 집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벽들을 움직여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되었다. 내부의 벽을 그대로 드러내며 기이한 모습으로 우뚝 서는 집을 멍하니 바라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다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동네의 평온하던 아침은 무참히 깨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 뒤를 보고 경악하며 내달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동네의 골목들 사이를 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내 옆으로 달려나가던 사람과 발리 엇갈려 넘어졌지만,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몸에 전해진 고통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니 원래보다 훨씬 거대해진 그 집이 창문을 떨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집이 지나온 자리에서는 다른 무너진 집들마저 몸을 일으키고, 거리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리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잠시 지켜보았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집들은 일제히 포효하고는, 자신들이 가진 문들을 활짝 열어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달려나오는 집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다시 건물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렸다간 이곳까지 여파가 오는 건 순간이었다. 다시 사람들 틈에 섞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렸지만 가망은 없었다. 집들은 사람들을 집어삼킬 뿐 아니라, 서로 몸을 섞고 재조합하며 더 커다란 새로운 건물로 재탄생했다. 집들은 사람들을 포획하기 위해 적절한 형태로 끊임없이 변형했고, 사람들이 도망가는 자리로 앞서 무너져내리며 그곳에 있는 건물들과 몸을 합쳤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도망치는 사람들은 1동을 지나 2동으로 들어섰다. 번화가가 있는 2동에 귀신들린 건물들의 행렬이 도착하자 더 큰 공황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어디로든 도망치려했지만, 결국 건물들의 포위망에 갇혀 한 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구청 앞이었다. 그 앞 공터에 모여 뉴타운 문제와 관련된 집단행동을 하던 사람들은 소란에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건물들이 공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곧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졌고, 제일 먼저 달려나간 사람들은 주변의 건물들에게 삼켜졌다. 난 더 달릴 힘도 없이 그 아비규환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제일 먼저 일어난, 그 집, 내 집은 구청을 향해 쓰러져 벽들을 확장하고는 구청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곧, 구청 쪽에서부터 엄청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몇번의 진동 끝에 충격파가 아스팔트를 가르며 뻗어나왔다. 난 다른 사람들과 건물 잔해들이 섞인 충격파에 휩쓸려 멀리 나가떨어졌다.
 간신히 아픈 몸을 추스리고 흘긋 고개를 들어보니 구청과 한 몸이 된 그 집은 조용히 재조합을 계속하고 있었다. 난 내 곁에 있던 몇 사람과 함께 큰 길가에 쓰러진 가로수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길들, 이제는 건물들이 사라진 공터들 위로 끊임없이 몸을 변형시키는 건물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건물들의 집중공격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삼켜져버린 것 같았다. 건물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커텐 뭉치와 장롱 다발 같은 것들을 펼쳐내 여기저기 숨어있는 사람들을 잡아 삼켰다. 침을 삼키며 다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자니 건물들 사이로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분명 복덕방 주인이었다. 그는 아직 다른 건물들과 합치지 않은 자신의 복덕방 건물 위에 올라탄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유심히 보았지만 실성하거나 공포에 질린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환희에 찬 몸짓이었다. 다른 건물들은 그런 그를 집어 삼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행진하는 건물들의 둔중한 발과 촉수들을 힘겹게 벗어나며 가까스로 복덕방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복덕방 주인을 큰 소리로 부르며 그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자신의 앞을 보며 팔을 흔들어댈 뿐 내 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앉은 지붕 외에 복덕방의 다른 부분들은 끊임없이 변이를 계속하고 있어서 쉽사리 그 쪽으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
 순간, 변이하던 복덕방이 뒤집어지는 중에 처음볼 때부터 마음에 걸리던 서함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그 서함을 잡아챘다. 그 서함을 끌어안고 다시 가로수들 뒤로 달리려는 찰나 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오른발이 촉수 하나에 잡혀 있었다. 한 손으로는 서함을 붙든 채 그 촉수를 끊으려 노력을 했지만 전선 다발로 이루어진 그 촉수는 도무지 끊어질 태세가 아니었다. 속절없이 대롱거리다 마침 변이 중이던 다른 건물의 벽에 날 잡은 촉수가 부딪혀 날 놓치고 말았다.
 난 허공으로 떨어져내리다 어딘가 푹신한 바닥에 부딪혔다. 몸에 부러진 구석은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 매트리스들이 모여있는 부분인 것 같았다. 내가 놓인 건물이 다시 변이를 시작하며 자칫하면 건물 안에 갇힐 것 같았기에 재빨리 몸을 날려 도로 위로 떨어져내렸다.
 다리 위였다. 건물들이 날 발견하는 건 시간 문제였기에 아래로 내려갈까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높아보였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내 곁을 지나던 건물이 내부에서 소파더미를 뱉어냈고, 난 그 더미에 휩쓸려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피난처

  내부는 정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들이 무작위로 뱉어놓은 부속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다리 아래 마련된 잡동사니 동산의 내부에 모인 몇몇의 사람들은 다들 지친 기색이었다. 순식간에 알 수 없는 참사를 겪었으니. 먼지를 한가득 뒤집어쓴 사람들은 음울하게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대책을 논했지만 나올 건덕지는 없었다. 건물들은 너무나 강하고, 우리에겐 그에 대항할 무기도 없다. 더군다나 저들이 움직이는 이유도 목적도 모르지 않는가.
 난 피난처의 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있었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 난리통에서도 용케 끌어안고온 서함을 바라보면서. 굳게 매인 자물쇠는 여전했지만 경칩은 다 떨어져나갔기에 그리 힘들이지 않고 덮개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힘을 주어 서함을 열어보니 그 안엔 다 떨어진 지도 한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난 허망하게 그 지도를 바라보았다. 복덕방 주변동네의 정보를 담고 있는 양면 지도인 것 같았다. 달랑 이걸 자물쇠까지 채워놓고 애지중지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도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빛에 비춰보며 숨겨진 구석을 찾았지만 뭔가 더 다른 게 있어보이진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의 논의는 끝나지 않았고, 난 그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지도를 괜히 뒤척거렸다. 그러다 순간 멈칫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우연히 접혀진 지도의 면과 면에 써있는 지명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도를 이리저리 접어보고나서, 기본 규칙을 알 것 같았다. 둘레를 한번씩 한쪽으로 접고, 그 상태로 다른쪽으로 접는다. 그런 식으로 지도에 숨어있는 문장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해석한 문장은…….

 "다들 빨리 여기서 나와요!"

함정

 나와 몇몇 사람이 나오자마자 도피처는 그 안의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변이를 시작했다. 다리 밑 여기저기엔 이미 변이를 마친 도피처들, 새로운 건물의 자식들이 확장을 위해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확장되는 감각의 거리 혹은 위험한 벽들의 미로

 우리가 그 안에 있던 몇 시간 동안, 동네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이 죄다 폭주해버렸으니까. 한번의 폭주가 지난 뒤라 그런지, 이상하게도 동네는 조용했다. 건물들도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은채 멈춰버렸고. 우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거리를 걸었다.
 건물들은 하나도 멀쩡한 게 없었다. 하나같이 제각기 내부와 외부가 뒤틀리고 일정한 형태로 규정할 수 없는 기이한 모습들이었다. 마치 가우디가 맘 먹고 만들어놓은 계획도시에 온 것 같았다. 우린 경계를 늦추지 않은채 멋대로 구부러진 골목을 걸었지만, 쉽사리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어디에 안전하고 멀쩡한 곳이 있을런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골목들 사이에 있는 것보단 나아보였다.
 몇번 골목을 헤맨 끝에, 우린 골목들에 표시를 하며 나아가기로 했다. 걸어온 길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면 다시 헤맬일은 없을 것 같아서. 길에 굴러다니는 락카를 주워 길바닥과 벽에 선을 그으며 사람들이 앞장서 가는 동안, 난 지도를 접어가며 해석하는 일에 집중했다. 접혀진 선들 속에서도 의미 없는 단어가 종종 해석을 가로막곤 해서, 꽤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간신히 몇개의 문장을 해석했을 때, 사람들이 멈춰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우리가 칠한 빨간 락카칠로 뒤덮혀 있었다. 뭔가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지도는 조금씩 접어들어가며 읽고, 결국엔 더 접을 수 없는 작은 종이 뭉치가 된다. 우리가 들어선 기이한 골목들은 우리가 지나쳐가고 나면 모양을 바꾸고 몇개의 다른 골목들을 차단하며 우리를 포위해 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없는 작은 골목 하나에 갇힌 몸이 되었다.
 이미 좁혀들 때로 좁혀든 골목은 하늘의 대부분을 가린채 우리를 향해 잡다한 선과 탁자들이 섞인 벽들을 낼름거려왔다. 우린 뒷걸음질을 치다 서로 등을 부딪쳤다. 멋대로 휘어진 벽들이 일순간에 쩍 벌어지며 자신의 내부에 감춘 것들을 드러냈다. 멍한 표정으로 박제된 사람들이 벽들 안에 늘어서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도 저들처럼 이 골목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서둘러 출구를 찾아내야했다.
 벽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어떤 규칙도 찾아낼 수 없었다. 벽들은 계속 낼름거리며 표면의 잡동사니들을 움직여댔고, 어디에도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싶어 체념하려는 찰나, 손 안의 지도가 접혀진 모습이 꼭 작은 문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지도로 들어갈 시도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난 그대로 골목의 한쪽 끝을 향해 달려가 건물들에 쑤셔 박혀 있던 문을 뽑아내 막다른 벽에 박았다. 곧 다른 사람들이 주섬주섬 내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고정된 문을 열고,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출구

 우린 그 골목에서 빠져나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위험한 집들의 밖엔…….

입구

 그 밖엔 다른 안이 있었다.

로비 혹은 광장

 그 안엔 지금까지 마주한 것보다 더 큰 규모로 미친 건물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끝간데 없는 공터 주위로 변이를 계속하며 서로 몸을 섞고 분리하는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어떻게 발을 옮겨보려해도, 이내 건물들의 위치가 바뀌며 길들의 형태가 변했다. 우린 몇걸음도 떼지 못한 채 멈춰서 버렸는데 어느 순간엔 건물의 내부에 있었고, 어느 순간엔 건물의 외부에 있었다. 어느 순간엔 광장의 중앙에, 어느 순간엔 집들이 엮은 작은 방에, 어느 순간엔 직선대로에, 어느 순간엔 방사형 골목들의 중앙에.
 변이를 계속하는 건물들 사이로, 다른 집들과 합쳐가며 높다랗게 뻗어가는 건물이 보였다. 어렵사리 그게 처음 몸을 일으킨 그 집, 내 집임을 깨달았다. 집 주위로 파동계가 선 바닥이 둥글게 회전하며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그 집의 꼭대기엔 복덕방 주인이 박제된 채 다른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집은, 내 집은 처음에는 이 건물들의 세계의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외곽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다른 건물들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이 기묘한 광경들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몇몇 건물들이 우리를 향해 촉수를 뻗어왔다. 우린 어딘가로, 어떤 장소를 향해 달려나가보았지만, 이내 이게 다 가망없는 움직임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뿔뿔히 흩어져 건물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난 홀로 남아 새로 나타나는 길들 사이를 헤매면서,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문득 궁금해졌다.

광야

 추위가 다시 몸을 엄습했다. 모닥불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탁자 부스러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남아있는 조각은 없었다. 잠시 고민 끝에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던져 넣었다. 탁탁 소리를 내는 지도를 향해 손을 뻗고 불을 쬐었다. 어차피 더 알아낼 것도 없어보였다.
 시작은 이런 것이다. 우린 애초에, 그러니까 지금의 존재로 살기 이전에는 일정한 거처없이 살던 존재였다. 어떤 거대한 기체의 집합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지구에 정착하면서 좀 더 정형적인 물체의 형태로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변이 중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해 예전의 기억들은 전부 잊어버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기체의 형태였던 그들의 도구는 이 문제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인간의 형태로 살게된 우리의 곁을 맴돌면서 우리를 지켜주기로 했던 것이다. 우린 외부의 환경에 노출된 채로는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놓일 수 있었기에, 우릴 안전하게 지켜줄 집을 지어야했다. 그리고 이내 인간의 다른 부분이 그렇듯 건물의 외부와 내부, 집들과 거리 같은 걸로 구분된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지도의 내용이다. 이 지도에 따르면 그 기체 도구들은 우리를 지켜주고 봉사하기 위해 우리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역시나 한심했던 우리의 전신들의 일은 문제투성이였다.
 우리의 도구들은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에 대해 관찰하고 우리를 위해 봉사할 일을 찾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도구들은 오류가 생겨났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태가 지속되었다. 결국 그들은 우리들을 지킬 최선의 방법은 더 이상 외부에 노출될 필요없이 인위적인 외부를 만들어 그 내부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의 집안에 영원히 가두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 바로 내가 계약한 그 집 말이다. 그 집에서 한동안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일을 하던 도구들은 자신들의 일을 알릴 존재를 찾았다. 그들이 바로 복덕방 가문이었다.
 우연히 지도의 외피를 한겹 벗겨냈을 때, 그 안에선 얇은 종이가 숨겨져 있었다. 거기엔 영험한 신들이 전해준 계시를 읽는 법과 대처법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복덕방 가문이 열심히 피실험체들을 제공해주는 동안 도구들은 마침내 우리를 완전히 보호할 방법을 찾아냈고, 결국 우리의 인위적인 외부, 건물들을 움직여 우리를 그 안으로 집어 삼켰다.
 이후의 일이 문제다. 왜 폭주 이후에 건물들은 변이를 계속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을까. 내가 생각한 결론은 이렇다. 도구들은 우리가 공포에 질리자 당황했다. 더군다나 집어삼켜진 우리가 공황상태에 빠져 제 구실을 못하자 아예 기계적으로 안전한 상태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를 박제시켜 건물의 내부에 담아 자신들이 보기에 안전한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박제라고 하지만 그들은 분명 살아있었다. 지금까지 마주한 수많은 박제들은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뿐 다들 숨을 쉬고 있었다. 뇌는 깨어있을 그들을 위해 도구들은 고정된 세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보여주려한듯 했다. 아마 우리가 예전처럼 특정한 구분에 의해 세계관이 좌지우지되지 않을 거라며 만족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숨이 나왔다. 나도 나지만, 다른 사람들이고 조상들이고 왜 이 모양일까. 난 건물들이 모두 떠난 황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물들은 특정한 장소에 밀집해 모여들었고, 나머지 지역은 구덩이로 가득찬 벌판으로 남겨두었다. 난 담요를 조금 더 꼭 끌어쓴채 조용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어떤 인위적인 선도 면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 위로 무겁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운 삶과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던져지는 것. 내겐 그것들 밖에 선택지가 없다. 아니면 여기서 얼어죽던가. 정말 더럽게 춥다. 지붕 밑에서 자본게 얼마만인지. 다 필요없으니 어디 따뜻한 방에서 이불 꼭 끌어안고 한번만 자봤으면 좋겠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97 단편 dispell 불타는 밀밭 2007.11.26 0
2296 단편 신처용가 나길글길 2007.11.27 0
2295 단편 인디언 타임 나길글길 2007.11.28 0
2294 단편 <b>당신의 고양이를 보여주세요</b> - 3월 31일 마감2 jxk160 2007.12.03 0
2293 단편 웃음 스위치2 Mono 2007.12.03 0
2292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단편 즐거운 나의 집 파악 2007.12.11 0
2290 단편 하지 파악 2007.12.12 0
2289 단편 뮤즈의 속삭임(본문 삭제) Inkholic 2007.12.20 0
2288 단편 Velouria 파악 2007.12.24 0
2287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세뇰 2007.12.24 0
2286 단편 가래 노유 2007.12.30 0
2285 단편 도깨비 숲1 노유 2007.12.30 0
2284 단편 호수에서2 해파리 2007.12.31 0
2283 단편 용의 알2 세이지 2008.01.05 0
2282 단편 까마귀를 위하여4 세이지 2008.01.18 0
2281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2280 단편 설녀5 세이지 2008.01.22 0
2279 단편 망령의 외출3 구르토그 2008.01.27 0
2278 단편 잃어버린 화요일4 해파리 2008.01.27 0
Prev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