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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디언 타임

2007.11.28 11:2611.28

◎인디언 타임◎

하드 타임 맨(Hard time man), 얼핏 듣기에도 딱딱하게 들리는 영어 단어 조합은 아버지의 젊었을 적 별명이었다.

이름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조금 과장을 붙이면 1초의 늦거나 빠름도 없이 시간을 지키는 남자였다. 아버지의 버릇은 집안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나의 경우에는 아침 7시까지 일어나야 했고, 취침 시간은 늦어도 10시 까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보다 일찍 일어나셨다.

딱딱한 성격인 아버지와 결혼했고, 공군 소장인 외할아버지의 군인 기질이 유전된 모양인지 민간인인 어머니마저 행동마다 반듯하게 각을 맞추게 되어가니, 아마 하늘이 내린 인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부터 열까지 원리원칙을 지키고 딱딱 맞춰서 기계처럼 사는 재미없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살을 부비면서 늙어가는 일이 아들인 내가 보기에도 용하기만 했다. 나에게는 외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시간 지키기 유전자가 없는 모양인지 융통성을 부려서 시간을 여유롭게 쓰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집안 분위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언젠가 집안에 어른이 아무도 없을 때에 아버지가 책상 위에 풀어놓은 손목시계를 가지고 놀다가 2층에서 1층 바닥으로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물론 시계는 박살났고 일층으로 허둥지둥 뛰어 내려간 나는 시계판과 유리 뚜껑이 깨어져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운데, 많은 톱니들이 안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 속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긴 바늘이 틱틱 대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부분 주변의 톱니들만 유독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나머지들은 조금씩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불현듯 검고 무서운 감각이 덮쳐 와서 시계를 내버려두고 후닥닥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날 저녁에 귀가하신 아버지는 박살난 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나를 불러서 네가 한 짓이냐고 물었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렇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건조한 표정으로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는 말만 한 다음에 바닥을 뒤져서 시계와 부품을 찾아들고 옆집에 다녀오시더니 불과 이틀 만에 깨지기 전 같이 멀쩡한 시계를 차고 계셨다.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기계들, 자유를 희망하고 속박을 거부하는 신세대적인 나와 꽉 짜인 기계 부품처럼 짜여 돌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행해진 규율에 익은 구세대적인 내가 서로 다투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나는 복잡한 기계들을 멀리했다. 일례로 내 방은 무척 살풍경하다. 나무 책상과 의자, 전등, 3단 책장이 가구의 전부이고, 조그만 자명종 시계와 트랜지스터라디오 외에는 아무런 기계도 없다. 다른 친구들 방에는 전축이나 전화 같은 기계들이 있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그러나 가정교육이 제일 무섭다고, 환경 때문에 나도 점차 기계처럼 되어갔다. 이성은 그러지 않겠노라고 해도, 본능은 반대였다. 친구들로부터 깐깐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 몸에 밴 원칙을 지키려는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고, 머리칼이 셀 정도로 오래 갔다. 다만 아버지, 어머니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홀로 쓰는 작은 내 방은 두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는 작은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건너편 집에서는 간혹 돌돌 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외가댁에 가면 할머니가 발로 밟는 발재봉틀의 그 소리와 닮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기계 소리라는 걸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은 40대의 아저씨였고, 그는 뛰어난 시계 수리공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제사떡을 한 접시 가져다주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에서 비롯되었다.

떡 접시를 들고 가면서 몇 조각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인절미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기에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침 현관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마른 체구에 작은 키의 중년 사내였다.

“무슨 일로 왔니? 꼬마야.”

그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떡 접시에 쏠렸다.

“맛나 보이는 떡이로구나. 나한테 주려고?”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이라면서 떡 접시를 내밀었다.

“그래. 잘 먹겠다고 말씀 드려라. 가만… 접시를 비워 줄 테니 잠깐 기다려라.”

사내는 떡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두컴컴한 현관 안쪽을 응시했는데, 거기에서 발길을 끄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심코 현관까지 접근해 봤다. 집 안을 들여다보니 수 십 개의 다양한 벽걸이 시계가 현관부터 어둡고 좁은 거실을 지나 어느 방까지 이어지면서 재깍재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 주방에서 중년 남자가 빈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왜 그러고 서 있니? 아, 이 시계들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구나.”

그는 나에게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괜찮으니까 안으로 들어오너라. 원한다면 시계를 구경시켜주마.”

가슴 속에 있는 복잡한 기계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서 갈등하다가 나는 결국 빈 접시만 받아들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재깍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왔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며칠 뒤에 다시 한 번 옆집을 찾아갔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현관마저 누구든 들어올 수 있게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았다. 나는 수월하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과 같이 시계들이 벽에 달라붙어서 재깍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현관에서 바로 맞은  편에 방이 하나 있었는데, 방문이 아이 머리 하나가 들어갈 만큼 열려져 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열린 틈으로 방안 광경을 살폈다.

불빛이라고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전등이 전부였다. 천정에 백열등이 달려있었지만 꺼진지 오래되었는지 먼지가 두껍게 앉아있었다.

방 안은 거실보다 더 복잡하고 많은 시계로 도배되어 있었고, 몇 개는 뚜껑이 벗겨져 있어서 복잡한 톱니바퀴와 내부 부품들이 적나라하게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혐오감을 느낀 건 잠시 동안에 불과했다. 이내 편안함으로 변했다. 왜 그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무 책상에 앉아서 조심스럽고 정밀한 손놀림으로 시계를 수리하던 아저씨의 등이 편안하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아저씨의 팔 너머로 구경을 했다. 아저씨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손에 공구를 든 채로 계속 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한 쪽 눈에 안경을 낀 그의 눈은 날카로웠고, 손놀림은 복잡한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기계보다 더 세밀해 보였다.

나와 아저씨는 그렇게 친해졌다. 최신 시계든, 하질 없이 오래 된 세월이 바늘에 묻어난 낡은 태엽 시계든 상관없이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처럼 느릿느릿 가다가도 아저씨의 손이 한 번 거치면 젊은 달리기 선수처럼 힘차게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깨트려 먹은 아버지의 시계를 고쳐준 사람도 아저씨였다.

나는 아저씨의 작업대 위를 보고 싶어서 두 다리로 힘껏 폴짝폴짝 뛰면서 두 팔로 책상 모서리를 붙들고 까치발을 디뎠다. 그러면 간신히 눈높이로 책상 위 광경이 보였다.

아저씨가 톱니바퀴라고 가르쳐준 크고 작은 둥근 것들이 서로서로 밖으로 뻗은 많은 손을 붙잡고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율동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허허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저 큰 바퀴는 뚱뚱한 영석이, 저 작은 바퀴는 키 작은 도철이, 검은 바퀴는 새까맣게 타서 살결이 거무스름한 문식이, 가장 작고 귀엽게 보이는 바퀴는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친구인 문아, 그리고 절반은 덮은 저 뚜껑은 비 올 때 쓰는 색 우산이라고 이름 지을까. 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놀았다.

“아저씨, 영석이하고, 도철이하고, 문식이하고, 문아가 함께 돌아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영석이, 도철이, 문식이, 문아라니?”

나는 그들이 내 친구들이고, 바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렇구나. 네 친구들 이름을 붙여주었단 말이지. 함께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단다.”

대답을 들어서 궁금증이 풀린 다른 궁금한 걸 질문했다.

“그런데 아저씨. 저 시계는 왜 저러죠? 이상해요.”

아저씨의 작업실 방에 있는 시계들 중에서 특별한 시계가 있었다. 그 시계는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없었다. 시계 바늘은 처음 봤을 때부터 한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약하지만 전등 빛으로 주위의 사물들이 자연색을 지녔음을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계속 흑백이었다. 바로 흑백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흑백 사진 속의 시계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실제 시계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다른 데가 몇 군데 있다. 바로 숫자판이었다. 위는 12, 아래는 6, 왼쪽은 9, 오른쪽은 3이고, 작은 숫자가 1씩 커지는 법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른 시계와는 다르게 숫자들의 위치가 제멋대로 이었다. 그는 내가 가리킨 사진을 한 번 보고는 대답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미국 서부 어딘가에 있다는 시계인데, 책에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뭔가 오는 느낌이 와서 잘 오려서 걸어두었단다.”

아저씨는 입을 다물고 손을 몇 번 놀려서 고치던 시계를 뚝딱 고쳤다. 뚜껑을 닫고 태엽을 감아주니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시계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늙어서 이 일에서 은퇴하면 저 시계를 찾아서 미국으로 가 볼 생각이다. 꼭 한 번 보고 어째서 저런 모양을 했는지 소유자에게 물어보고 싶거든.”

아저씨는 의자를 90° 돌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려다가 문득 맨 아래 서랍을 뒤져서 굵기와 길이가 아저씨 중지보다 긴 갈색 담배를 꺼냈다. 그는 담배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다가 가위로 양 끝부분을 잘라낸 뒤에 간신히 불을 붙였다.

아저씨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담배를 오른쪽 이로 문 채로 등을 뒤로 젖히고 거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떠냐? 아저씨, 알 카포네 같지 않니?”

미국 갱스터 영화에서 본 알 카포네라는 남자는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고, 시가를 문 살찐 사내였다. 아저씨는 모자 따위는 쓰지 않았고, 낡은 퍼렁 작업복을 입었고, 마른 체구의 사내였다. 괴리가 상당했다.

나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의사 표시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저씨의 표정이 경악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순간이 볼만했다.

학생이 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도 아저씨는 미국 서부로 가지 못했다.

재정적 문제도 문제이지만, 건강상의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18세가 되던 해에 아저씨는 위암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골초였고 폐암보다 위암이 찾아온 게 이상했지만 아저씨는 병원 침대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는 홀로였다. 아내도 자식들도 없었다.

평소에 마음 씀씀이가 좋았고, 훌륭한 기술로 저렴한 가격에 빨리 시계를 고쳐주던 그를 떠올리며 동정했는지 마을에서는 집마다 돌아가며 아저씨의 간병인을 자처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지나자 돈을 모아서 시간제 간병인을 고용하는 쪽으로 선회했고, 아저씨는 혼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나도 문안할 겸 찾아갔지만 두 번 정도 밖에 가지 않았다. 학생의 본분과 중 3과 고 3이 핑계거리로 적절할 것이다.

고 3의 험난한 1년이 지나고 나는 대학 합격 증명서와 주스 박스를 들고 아저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코를 찌르는 클로로포름 냄새가 가득했고, 어깨 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 병실 창가에 아저씨가 누워있었다.

아저씨는 몹시 초췌했다. 두 볼이 처량하게 보일 정도로 움푹 들어갔고, 실 같이 뜬 듯 만 듯한 두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자리 잡은 탓에 훨씬 퀭해 보였다. 얼굴 전체에 골이 깊게 파여서 무척 안쓰러웠다. 침대 옆에 놓인 링거 병에서 액체가 비닐관을 타고 아저씨의 팔로 들어가고 있었다. 병세가 곧바로 중환자실에 옮겨야 할 상태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푼푼히 모은 돈으로는 병실을 옮길 수 없어서 계속 일반 병실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저씨.”

시체 같은 정지된 눈동자가 나를 보기만 할 뿐, 입조차 여는 게 힘겨운 모양이었다. 입술이 잠깐 달싹거리기는 했는데 “으으….” 하는 여린 신음소리 외에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저 이번에 대학에 합격했어요. 아저씨는 언제쯤 일어나실 거예요.”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죽은 생선 같이 퀭하고 공허한 눈으로 하얀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손목을 흔들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태엽 시계이지만 고교 입학 때에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항상 차고 다녔지만 고교 겨울이 지나갈 즈음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저씨가 아버지 시계를 고쳐주셨죠? 고등학교 입학식 때에 제가 그 시계를 받았어요. 지금 제 손목에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시계가 고장 났어요. 이리저리 흔들어 봐도 세 달째 안 가고 있어요. 아무도 고칠 수 없대요. 아저씨가 고쳐주셔야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초 동안 띠― 하는 소리와 함께 위태위태하던 맥박 계측기가 잠깐 동안 크게 뛰었고, 손가락 두 개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계측기가 뛰는 것은 모두 보지 못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는 건 보았다. 분명히 오른 검지와 중지가 움직였었다.

뺨에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돌고 있었고, 입이 벌어져 있었다. 무엇이 그에게 시계에 대한 집념을 생기게 했을까. 나는 두려움과 경의를 한 번에 느꼈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아저씨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저… 아저씨. 저 다음다음 학기 내에 미국에 한 번 배낭여행을 가볼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맥이 2초간 크게 뛰었다. 몇 번 더 해보려고 했지만 뒤에서 다가온 의사가 제지했다.

“중환자에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뿔테 안경을 끼고 광대뼈가 튀어 나와서 신경질적인 인상의 의사는 귀찮은 파리 쫓듯 손을 홰홰 저어서 나를 쫓아냈고, 병상의 아저씨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못생긴 간호사가 찢어진 눈을 흘겨봤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재빨리 병원을 빠져 나왔다.

그 뒤로 나는 현실적 조건 때문에 한가로이 외국 여행이나 떠날 새도 없었다.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학 등록금을 전액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야 했다.

한 학기에 공부와 갖은 일을 병행하여 땀 흘려서 번 돈은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몽땅 들어갔다.

2학년 개강 일에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학부 사무실로 갔다가 만난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과 친구와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값도 싸고 양도 많고, 맛도 좋아서 학생들에게 ‘지존 메뉴’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잔치 국수를 마주 앉아서 먹었다. 친구는 국수를 젓가락으로 거칠게 휘저으면서 대학과 사회를 욕하며 불평을 해댔다.

“대추나무 같은 건 시급이고, 대나무 싹 같은 건 등록금이야.”

그는 농촌 출신이었다. 그에게 대추나무가 그리도 늦게 자라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실수 중에는 느린 편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일이야. 할아버지께서 집 마당에 대추나무를 한 그루 심으셨지. 그게 빨리 먹고 싶어서 매일 같이 할아버지를 채근했어. 성격이 급해서인지 대추 열리기까지 10년은 걸린 것 같았어. 대추가 열린 모습을 봤을 때는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 그런데도 그해 겨울에 먹은 말린 대추는 왜 그리 달았던지….”

친구는 잠시 추억을 회상하는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해 학기를 마치고 국민의 의무를 2년 간 수행한 뒤에 복학해서 1년 반 뒤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몇 년의 백수 생활을 겪었고 지인의 소개로 한 무역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과 밤늦게 퇴근을 거듭하면서 매달 말일에 은행에 가서 통장을 정리해 보고는 대추나무 같이 오르는 연봉과 대나무 싹처럼 인상되는 각종 세금을, 신문과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일을 남의 집에 난 불처럼 여겼는데, 직접 느끼니까 불이 내 집에도 옮겨 붙었음을 실감했다.

회사 동료 한 사람은 이렇게 중얼거린 적도 있다.

“농부 아저씨들은 모내기철에 스타킹을 신는다고 했지. 누가 우리 월급쟁이들에게 왕 찰거머리 네 마리가 달라붙지 않게 질긴 스타킹을 주지 않으려나.”

사람들의 불만을 바로 옆에서 듣고 보고, 스스로도 느끼니 발등에 불똥이 떨어질 때 신발 위에 떨어진 게 아니라 바로 살 위에 떨어진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인간관계, 즉 동기들이나 선후배 사이와는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상사 특히 직속상관인 부장과는 사소한 일로도 자주 다투는 편이었다.

그날도 저녁 6시가 가까워지자 나는 책상 정리를 시작했고, 등 뒤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부장이 내게 불만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유 대리. 오늘도 칼 퇴근인가?”

나는 부장과 손목시계와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들여다보고 말했다. 내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다. 고장 난 시계는 영영 고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손목에 차고 있다. 누구도 내 시계가 고장 나서 멈춘 시계라는 사실을 모른다.

“가족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노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려야죠.”

지금쯤 어머니가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애호박을 썰어 넣고 계실 것이다. 부장은 팔을 저으며 사무실을 가리켰다.

“자네 동료들은 전부 퇴근 대신에 야근 할 준비를 하고 있네.”

동료들은 나와 부장을 동시에 원망하고 있었다. 약 올리는 자나 협박하는 자나 창밖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미울 것이다. 그리고 쓱 째려보는 부장의 모습이 나에게 무언중에 압박을 주고 있었다. 계속 정리를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능률이 오르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오늘 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자네 일만 다하면 끝인가?”

나는 책상 정리를 마치고 양 팔을 활짝 벌려보았다.

“주어진 하루 일을 하루에 마친 자는 달콤한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무실의 부장과 동료들에게 이야기 했다.

“인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신 유 찬식 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야근을 하는 것은 바로 우둔함과 나태함의 상징이라고요.”

동료 중 한 명이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고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그러지 않아도 그럴 거라고 말했다.

“하루에 할 만큼 일을 재지 못했으니 우둔한 것이고, 하루에 끝마치지 못했으니 분명 잡담이나 하고 게으름을 피워서 나태한 것이라고 위대한 철학자 유 찬식 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내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던 동료 대리가 말했다.

“그 철학자 분의 성함이 자네 아버님 성함과 똑같은 걸?”

이를 들은 부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 있었다.

“우리 세대는 매일 같이 회사에 대한 충성으로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조국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네.”
“예. 그렇죠.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그때가 같을 리 없잖아요? 지금은 창의력의 시대입니다. 창의력은 말랑말랑한 두뇌와 열성적인 집중에서 나오죠. 적절한 휴식은 마치 뻑뻑한 문틈에 기름을 쳐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내 입을 꿰매고 싶을 정도로 미울 것이다. 부장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자네가 회사에 충성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회사를 사랑하나?”
“물론입니다. 다만 연봉에 따라서요.” 라고 말한 다음에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어깨를 흔들며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서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나는 마음으로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건가?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부장의 말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씩 웃어보였다.

“업무 전에 책상을 가지런히 정리해두면 능률이 오르지요.”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이번에도 현실은 상상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언제나 상상은 현실에게 배반당한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업무를 시작했으나 30분도 안되어서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부장은 없으면 찾아서라고 하라고 윽박지르듯이 지시하는 것이었다.

“아뇨. 내일을 위해, 창의성을 회복하기 위해 저는 이만 퇴근해야겠습니다.”
“월급 도둑 같으니! 창의성, 창의성 하지만 자네가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대체 뭘 더 바라시는 겁니까?”

나는 삶과 품위를 유지하고, 자기 능력 계발의 터전이 아닌, 포승줄 같이 사람을 칭칭 옭아매려는 서류와 업무라는 잔인한 고문 도구가 즐비한 사무실을 뛰어나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끔찍한 사원들의 정신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무실을 빠져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7층에서 내려오다가 4층에서 멈췄다.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한 남자가 탔다. 낯익은 사내였다. 나는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조 대리. 이제 퇴근 하는 건가?”
“일찍 퇴근하는군. 또 땡땡이인가. 유 대리.”

나는 눈썹 사이를 살짝 떨었다.

“오늘도 열심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끝마쳤지. 게으른 바보들은 나를 무책임한 놈으로 몰고 가고 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도대체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을 모르는 천하의 멍텅구리들일세.”
조 대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 받았다고 소중한 몸을 알코올과 지방으로 망가뜨리고, 업무 능률은 더 안 오르고, 이건 국제 경쟁력도 낭비하는 거야. 신문을 봤는데 미국에 비해서 업무 시간은 우리가 더 길지만 효율은 훨씬 떨어진다고 하잖아?”
“우리가 바꿔야 해.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바꾸는 가이지.”
“무능한 주제에 높은 의자만 차지하고 있는 돌대가리들을 끌어내지 않는 한은 무리일걸.”

조 대리는 문득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정장 소매를 걷어 올려서 손목시계를 봤다.

“내 핸드폰 밧데리가 닳아버리고, 시계는 멈춰버렸어. 지금 몇 시인지 아나?”

시계가 흘러내려서 손목에 걸려있는 걸 보고 물었으리라. 나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시계는 뭐야? 장식인가?”

나는 대답했다.

“응, 장식 맞아.”

나는 조 대리의 눈높이로 손목을 들어 올려서 시계를 보여주었다. 구식 태엽시계인 그것은 시침과 분침이 2시 10분을 가리키고 멈춰있었다.

“명품도 아니고, 평범한 구식 시계인데 왜 차고 있는 거야? 추억거리라도 있나.”

나는 대충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잡담을 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1층에 닿았다.

“입구에서 기다려 주지 않겠어? 맥주나 딱 한잔씩 하고 가지.”
“어이, 소중한 몸을 알코올과 지방으로 망가뜨리려고?”

조 대리는 그럼 그냥 가야겠다고 멋쩍게 웃었다. 나와 조 대리는 작별 인사를 했고, 조 대리는 한 층 더 내려갔다. 나는 집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걸어서 가도 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조그만 호프집이 있다.

회사 바로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왼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골목 들어가는 길목에 파란 작은 간판을 내건 호프집인데, 내가 세 가지 때문에 애용하고 있는 술집이다.

첫째로 손님이 적어서 조용하고, 둘째로 생맥주를 훌륭하게 보관해서 맛있고, 셋째로 멋진 재즈 음악을 틀어주기 때문이다. 두 발이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호프집으로 향하고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가게 문 앞에 선 뒤였다. 조 대리에게 몸을 알코올로 망가뜨리려고 했냐고 충고했지만 오는 길에 매연과 나쁜 공기를 마시다보니 목구멍을 적셔주고 오염물질을 씻어 내려줄 청량한 음료를 목구멍이 지금 당장 공급해 줄 것을 절실하게 요구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서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조금 어둡지만 푸르고 아늑한 조명 속에서 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의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홀을 메우고 있다.

주인은 분홍색 와이셔츠에 파란 나비넥타이를 매고, 역팔자 콧수염을 기른 조금 느끼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이다. 자극적인 붉은 전등이 양쪽 위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에서 흰 천으로 잔을 닦고 있다. 그는 단골인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봉주르 무슈, 이틀 만에 오셨군요.”

프랑스 유학파라고 자처하지만 어눌하게 들리는 프랑스어와 느끼한 표정은 적응하기 힘들지만 음악 고르는 센스와 맛있는 술을 맛볼 수 있기에 참고 있다. 내가 바에 앉자 특유의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목소리로 내 귀를 괴롭힌다.

“오늘은 무엇부터 드릴까요?”
“일단 편하게 맥주부터 줘요.”

뒷벽에는 사람 허리께 높이로 좌우로 트는 손잡이가 달린 꼭지가 있다. 주인이 그걸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맥주가 주르르 쏟아진다. 예전에 벽 너머에 대체 뭐가 있느냐고 물어봤었는데, 고전적인 오크통과 내용물을 최대한 잘 보존할 수 있는 자동 온도 센서가 부착된 옛 지혜와 현대 과학이 하나가 된 명품이라고 대답했었다. 보여 줄 수 있냐고 청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컵 위로 올라오는 흰 거품부터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출입구 근처가 어두워서 처음에는 키 작은 사내로만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오면서 불빛에 비친 모습을 보니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고, 허리가 조금 구부정한 초로의 인디언 사내였다. 팔에 짐승의 가죽을 아무렇게나 잘라서 대충 박음질한 작은 가죽 배낭을 들고 있었고, 머리에 깃털이 꽂힌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선 채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곧장 바에 다가와서 앉았다. 들고 있는 배낭을 바닥에 정리하는데 등에 피리 같은 악기를 지고 있었다.

“처음 오시는 손님이시군요. 무엇을 드릴까요?”

인디언 사내는 품에서 돈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맥주나 큰 걸로 한 잔 주시오.”

주인은 맥주를 한 잔 따라주었다. 사내는 마르고 작은 체구였는데도,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하고 단숨에 한 컵을 비워버렸다.

“마실만한 맥주로군. 한 잔 더 주시겠소?”

주인은 새로 맥주를 채워서 건네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

“술을 잘하시는 모양입니다.”

내가 영어로 말하자,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기분에 따라 잘 들어갑니다. 특히 기쁠 때와 우울할 때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 안에 털어 넣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우울한 때입니다.”

나는 그의 등에 둘러매어진 피리에 시선을 던졌다. 생김새가 우리네 단소와 비슷했지만 입을 대는 부분이라고 추측되는 부분에서 조금 아래쪽에 새 머리 닮은 작은 장식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것이 달랐다.

“당신은 음악가인가요?”

인디언 남자는 등 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식입니다. 나는 하프를 연주하고, 이건 아내의 유품이지요.”
“그럼 하프는 어디에 있습니까?”
“줄을 잘라버렸지요.”

그리고 남자는 잔을 내밀어서 한 잔 더 시켰다.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지만 취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 피리, 전혀 불지 못하는 겁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안타깝다는 듯 말한다.

“한 곡 분다면 한 잔 공짜로 주려고 했는데.”

인디언 남자는 주인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번 듣고 싶은데요. 멜로디는 연주 할 수 없어도, 음색은 들려줄 수 있겠지요?”

그러자 인디언 남자는 빈 잔을 뒤집어 보였다. 나는 주인에게 맥주 하나를 청했다.

“자, 한 잔 마시고 생각해 보시죠.”

내가 술을 사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경우가 있는 친구로군. 음계 정도는 들려줄 수 있소.”

남자는 피리를 꺼내서 취구에 입을 대고 천천히 불기 시작했다. 이내 낮고 애절하게 느껴지는 높낮이의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다가 마지막에 5초 정도의 짧은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남자는 취구에서 느리게 입을 떼었다.

“방금 전은 내가 아내의 유품으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멜로디요. 하늘과 독수리, 고향의 바람을 연주하는 것이지요.”

남자의 눈빛에서 쓸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이 피리로 불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요. 내 아내의 넋이 피리에 붙어있기라도 한 건지….”

사연은 흥미로웠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인디언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를 찾으러 왔다면서 내게 되물었다.

“당신은 영혼이 있다고 믿으시오?”

인디언 남자의 물음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건 진실이라고 믿고 있소?”

나는 피식 웃으며 그건 당연한 거라고 대답했다.

“그럴 거요. 그건 누구나 다들 인지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인디언 남자는 말 꺼내기를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세상은 불공평하오. 사실이라고 느낄 거요.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오. 1초의 어긋남도 없이, 24시간은 60억의 사람들에게 주어지지요. 만일 불평등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지요.”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 겠소이다. 내가 죽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찾는 게 대체 뭐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가방을 들고 어깨를 휘적휘적 저으며 가버렸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손님.”

나는 블랙 러시안(Black Russian)을 주문했다. 손아귀에 쏙 들어갈 만한 종 모양의 유리잔에 엷은 커피색 액체 위에 얼음이 둥둥 떠 있었다.

“골머리를 앓을 때는 언제나 이걸 드신다고 하셨죠?”
“네. 달콤한 커피 맛이 엉키고 엉킨 실타래를 일시적으로 지워버리죠.”

문득 고르디어스의 마차 매듭이 생각난 건 우연일까. 나는 한 번에 커피색 액체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비워버렸다. 살짝 취기가 오르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새벽 6시가 되자, 자명종이 띠르르하고 울렸다. 일어나기보다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내 손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항상 두는 머리맡 가운데쯤에 있는 위치는 기억하고 있다. 몇 차례 더듬어서 자명종 위에 달린 버튼을 눌러서 벨을 껐다.

눈을 살며시 뜨자,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아직 어두컴컴한 밖이 보였다. 더 자고 싶었지만 나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엎드린 자세에서 두 팔에 힘을 주어서 바닥을 밀었다.

“우우… 그래. 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야.”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가서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끓여서 책장에 꽂혀있는 많은 책들 중에서 눈을 감고 아무거나 집히는 책을 펼쳐들었다. 내가 집은 책은 『럭셔리한 ⃝⃝⃝ 부자가 되는 법』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도로 책을 집어넣고 다른 책을 골랐다. 하나만 지키면 되는 위대한 진리를 굳이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나눠서 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책은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나는 우주와 시간에 관련된 과학 서적을 집어 들었다.

7시 반 경에 어제 술에 취해 들어왔다며 어머니가 끓여준 콩나물국에 밥을 한 숟갈 말아서 후루룩 마시고 총각김치 한 조각을 우적우적 씹은 다음에 회사로 출근을 서둘렀다.

아침부터 많은 차들이 도로 위를 오가고 있었다. 그들이 뒤꽁무니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코를 자극했다. 냄새가 독해서 숨을 쉬지 않으려고 했고, 손바닥으로 코를 감싸 쥐기도 했다. 물론 소용없었다.

회사가 있는 빌딩 안으로 들어가서야 간신히 호흡 간격을 정상으로 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나를 보는 동료들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마치 길가에 엎드린 거지를 동정하는 듯한 측은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부장이 오늘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유 대리. 내 윗분들과 상의 끝에 자네에게 포상을 내리기로 결정했네.”

부장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직감을 한 나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포상은 무슨 포상이랍니까? 별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부장은 씩 웃으면서 오른손 검지로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살짝 밀었다.

“자네는 무척 겸손하군. 회사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주게.”

그리고 내 책상을 가리켰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서류 탑이 쌓여있었다. 순간 딸꾹질이 났다. 부장은, “오늘 내로 다 끝마쳐주게.” 라는 말을 남기고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면서 자기 책상으로 걸어가서 털썩 앉아 버렸다.

나는 한 눈으로 부장을 흘겨보면서 속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책상에 앉았다. 동료들이 지나가면서 위로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넸지만 그다지 힘은 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절망하고 있었지만 힘을 내어서 서류의 산에 손을 댔다. 외주 요청과 연간 매출자료 정리, 회의 따위에 사용될 PDF 제작 등이 대부분이었다.

업무 시작 전에 부장은 손뼉을 쳐서 직원들의 시선을 모은 뒤에 또 한 마디의 충격적인 말을 했다.

“불시에 인사 관련된 사내 감찰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일 열심히들 하게. 이번에는 결과도 본다는 말이 있네.”

이 악마 부장 같으니! 라는 말이 하마터면 내 입에서 튀어나올 뻔 했다. 서류 몇 장이  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어쩌면 인사 반영뿐만 아니라 구조에도 적용될지 모른다네. 소문에 불과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순간 내 어깨가 떨렸다. 그와는 별개로 내 손은 펜을 잡고, 눈은 서류에 가 있었다.

동료들의 동정의 눈길에 애써 괜찮은 척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자리 잡으려고 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꿈틀거리면서 암세포처럼 성장하려고 있었다.

서류의 산은 줄어들 줄 몰랐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감찰과 평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키보드를 두드리면 오타가 많이 났고, 1+1 간단한 수식 계산을 하는데 3이 나오는 등 엉뚱하고 바르지 않은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한계에 다다른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유 대리, 일 안하고 어디를 가나?”

부장이 시계를 보고 말한다.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점심시간 다 되어가는 데 지금 가는 건 뭔가? 급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게.”

애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서 부장 면상 앞에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을 확 틀어서 박박 문지르며 거칠게 세수를 하니,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진정되면서 맑아졌다. 거울을 노려보면서 머리도 매만지고 나오는데, 잠깐 사이에 점심때가 되었는지 회사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쉬어야지.” 하고 중얼거리고 사람들과는 따로 계단을 통해서 건물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심은 나무들 밑에 설치된 원형 벤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까?”

당연한 일이지만 고장 난 손목시계로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 지금껏 공공 시계를 활용하거나, 어림짐작으로 생활해왔다. 불편함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시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누군가가 돌아앉은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내 뒤에 앉았는데, 돌아보니 머리띠를 두른 남자의 뒤통수가 있었다. 등에 피리 한 자루가 둘러메어져 있었는데, 어제 밤에 본 인디언 피리가 분명했다. 남자의 차림새도, 등에 맨 가죽 배낭도 인디언의 것이었다. 내가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는데,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옥수수를 먹어야 할 시간’입니다..”

내가 어이없는 시선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보는데 계속 말을 잇는 것이었다.

“저는 매우 정확한 생체 시계를 쓰고 있습니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연거푸 두 번이나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점심을 먹으러 갈 텐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지요. 기꺼이 가겠습니다.”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늑대처럼 벌떡 일어나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있으니까 입맛도 없어져서 점심은 근처 빵집의 빵으로 대충 때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가려고 했었다.

인디언 사내와 빵집에 들어가서 쟁반과 플라스틱 집게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하고 나는 계산대와 가까운 샌드위치 코너로 갔다. 빵이 큰 것과 안의 햄과 채소 등의 내용물이 소복하고 신선한 걸로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산이 지나가서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인디언 사내가 빵으로 산을 쌓고 있었다.

조그만 체구라서 별로 많이 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남자가 빵을 집게로 집어서 던져 올려서 받는 모습이 흡사 물체를 두 손 아귀 안에서 돌리는 묘기인 저글링을 하는 곡예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곰보빵과 옥수수빵을 주로 쌓고, 큰 우유팩도 수북하게 쌓아 와서 내게 계산해 달라고 청했다. 점심값으로 예상치 않은 많은 돈이 나가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자청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인디언 사내 것까지 지불했다.

나와 인디언 사내는 빌딩 근처 공원으로 돌아와서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빵을 먹었다.

회사 일 때문에 힘이 없는 내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왼손은 샌드위치를 꽉 쥐고 있는데, 정확하게 입을 찾아서 샌드위치를 천천히 안으로 디밀었다.

반면 인디언 사내는 걸신들린 듯이 꾸역꾸역 빵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다가 목이 막혀서 우유를 급히 마시고는 사레가 들러서 내가 등을 두들겨주기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더미 같은 빵을 다 먹어치운 인디언 남자는 짧은 트림을 하고, 고개를 숙여서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말 고맙소. 당신에게 그레이트 스피리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나는 따지는 건 포기하고 궁금한 걸 물었다.

“다른 맛있는 빵들도 있는데, 왜 곰보빵과 옥수수 빵만 먹었죠?”

인디언은 가방에서 담뱃대를 꺼냈고, 가방에서 전병 통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어서 엄지와 검지로 안의 내용물을 약간 집었다. 그것은 담배 잎이었다. 대통에 잘게 썬 담뱃잎을 이겨 넣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물부리를 물면서 말했다.

“곰보빵은 울퉁불퉁한 겉이 어머니 대지를 닮았고, 옥수수는 우리의 주식입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마신 다음에 후 하고 허공에 내뿜는다.

“그런데 식후 땡은 만국 공통인가요?”

인디언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뭐요? 한국의 문화요? 동양권의 문화요?”

나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해 본 소리라고 대답했다.

담배가 반쯤 타들어갈 시간이 흐르자 인디언 남자는 고개를 돌려서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걱정거리가 많은 얼굴이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 좀 있어서….”

상관 말라는 투로 말했지만 그는 흥밋거리라도 생긴 양 계속 질문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니 결국 포기한 듯 말한다.

“그렇다면 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현대 도시에 사는 문명인들의 고민은 성냥갑 같은 도시 건물들처럼 획일화 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뉴욕, 런던, 파리, 모스크바, 베이징, 도쿄 등의 이름 있는 대도시들을 죄다 돌아다녀봐서 도시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 대충 상대 속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모름지기, 모든 생물은 어머니 대지와 떨어지면 안돼요. 사람도 마찬가지요. 스스로 땅에서 나는 검은 물로 어머니와 차단을 하고, 어머니의 기운을 차단하는 금속을 섞어서 지은 돌 벽으로 아버지와도 인연을 끊으니, 무슨 수로 어린 자식들이 살 수 있겠소?”
“하지만 현대 도시인들은 도시를 떠나면 살 수 없어요.”
“인간은 의외로 뛰어난 적응력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한국인들은요. 동북아 3국 사람들은 어딜 가나 다 있더군요. 두려움을 가지면 될 일도 안돼요. 용기를 가지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처음에는 고달프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편안해 지고 행복해 질 거요.”

나는 통장에 쌓아놓은 돈을 떠올렸다. 차도 사지 않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끼고 아껴서 모든 돈이 두 사람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조그만 빌라 하나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모였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인디언 사내는 말했다.

“불도에 이르기를, ‘미련이 있으면 깨달음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에 이르길, 마태복음에 두 번이나 나오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불교이십니까? 기독교이십니까? 어느 쪽이시죠?”
“그레이트 네이쳐(Great nature) 입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시선이 내 손목에 향해 있었다.

“시계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입니다. 웬만하면 벗어서 던져버리기를 권합니다.”

시계를 내려다보고 그에게 멈춘 지 오래된 바늘 들을 보여주었다.

“이 놈은 멈춘 지 10년 이상 된 녀석입니다.”

그러자 인디언 사내는 싱긋 웃는 것이었다.

“됐습니다. 형제여. 시계는 보지 마십시오.”

나는 시계와 사내를 번갈아보았다.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인디언 사내는 빙긋 웃기만 할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가 침을 삼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사내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쫓기고 있습니까?”

나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다시 물었다.

“지금 당신은 쫓기고 있습니까?”

고심 끝에 내가 생각한 것은 산더미 같은 일이었다.

“쫓기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가면 절망적인 분량의 일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일은 언젠가는 끝낼 수 있어요. 털어낼 수 있는 거지요.”

남자는 배낭에서 주머니를 꺼내서 담뱃재를 툭툭 털어 넣었다.

“일개 인간에 불과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짜증스러움과 저기압이 돋아났던 나는 남자의 말을 듣고 모르는 사이에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네. 짧지요. 너무나 짧습니다. 팬티 고무줄 늘이듯이 강제로라도 늘리고 싶다니까요.”

인디언 사내는 잘 변하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정중한 말투와 함께 팔을 까닥이는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일을 잊은 채로 한참동안 사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깨닫고 나서야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일을 오늘 내로 마쳐야 하거든요.”

인디언 사내는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작별 인사로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그럼 잘 가십시오. 형제여. 우리의 만남이 인도하면 다시 만납시다.”

그의 손을 맞잡고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짜증나는 부장의 말소리기 들려온다.

“일도 많은 주제에 점심을 그리 오래 먹으면 어떡하나? 유 대리.”

나는 나의 인내심에 찬란하게 빛나는 챔피언 벨트를 수여하고 싶었다. 질풍같이 달려가서 부장의 턱에 어퍼컷을 꽂아 넣지 않은 인내심에 스스로 무한한 경의를 표했다.

막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을 슬며시 밀며 누군가가 들어왔는데, 그는 인디언 사내였다. 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 오셨습니까?”

인디언 사내는 씩 웃었다.

“통하고자 하면 다 수(修)와 도(道)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형제여. 우리는 아직 서로 통성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딱 쳤다.

“그런 건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왔다고요?”
“흘러간 냇물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듯이, 지나간 시간과 만남 또한 언제 또 만날지 모릅니다.”

만일 인디언 사내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면 사무실 사람들 대부분이 오오~ 하고 탄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몇몇 사람들만 알아들어서 통역을 해준 뒤에야 사무실은 짧은 탄성으로 가득 찼다. 사내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이브닝 크라잉 콕(Evening crying cock) 이라고 합니다.”

나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서 사내의 손을 잡았다.

“아, 저녁에 우는 닭 씨. 내 이름은 유 진이라고 합니다.”

동료 대리 한 명이 일어나서 이브닝 크라잉 콕에게 물었다.

“이브닝 크라잉 콕 씨.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제가 인디언 이름 중에서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이라는 이름을 아는데, 당신의 이름은 어떤 거죠?”

아마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디언 이름과 비교를 하고 반응을 보고 싶어서 바쁜 도중에도 농담을 건넨 것일 것이다.

“1500년대부터 ‘늑대가 달리는 달’에 초원을 질주하는 늑대들이 네 발로 뛰지 않고, 시필립스(Syphilis) 춤을 추면서 초원을 달렸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요.”

동료 대리는 피식 웃으면서 인디언 식 농담이냐고 물었다.

“물론 그렇소. 백인을 향한 인디언 식 블랙 유머(Black humor)요.”

순간 이브닝 크라잉 콕의 눈동자에 분노와 증오심이 섞인 빛이 번뜩하고 스쳐 지나감을 볼 수 있었다. 눈에는 8월의 사막 열기 같은 열기가 이글거렸고, 입가에는 12월 겨울에 얼어붙은 강 같은 냉소가 머금어졌다.

“내 이름은 나 스스로 지은 것인데, 그들 문명과의 불일치(不一致)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동안 입을 꾹 다물어서 사무실 분위기가 묘해지기까지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걸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은 이브닝 크라잉 콕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유 진씨. 내일 남쪽으로 가기 전에 꼭 줄 것이 있습니다. 오늘처럼 정오 무렵에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점심시간 무렵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나는 승낙했다. 이브닝 크라잉 콕은 고개를 숙여서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이상한 놈이로군. 정체가 뭐지?

부장이 물었지만, 나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음악가 같습니다.” 라고만 대답했다.

“확실한 정체를 모른단 말인가? 불법 체류자 아냐? 경찰에 신고해야하지 않나?”
“아마도 아닐 겁니다. 음악가면서 동시에 개똥철학자이기도 할 테니까요.”

나와 가까이 있던 여 대리가 내게 물었다.

“유 대리, 그럼 어느 쪽이라는 거예요?”

잠깐 생각한 나는 대답했다.

“아마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나의 이 대답은 사무실 동료들에게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으나, 모른다는 말은 진실이었기에 그 이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언제나 야근을 피하려고 도망칠 꾀를 생각하던 나였지만, 이번만은 8시까지의 업무를 피할 수 없었다. 우유 한 팩과 사과 한 알로 저녁을 때우면서 집중한 결과는 서류 산더미를 완전히 허무는데 성공했다.

“우우, 겨우 다 했다.”

군 시절, 투스타의 명령으로 작은 동산을 소대 인원들이 야삽 만으로 하루 만에 뭉갠 역사 이래, 가장 힘든 일이라고 몸이 기억해 두었다. 내일 아침에 출근한 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을 나잇살 붙은 얼굴을 상상하면서 쇠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비척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반드시 마주치게 되어있는 단골 술집 네온사인이 꺼져있었다.

1년 365일 열던 술집이 오늘은 열지 않아서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에 종이쪽지가 붙어있었다. 거기에는 흰 종이에 검은 매직펜으로 ‘무기한 휴업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약속을 지키려고 회사 뒤쪽으로 나갔다. 사원 몇 명이 따라 나왔다. 그런데 이브닝 크라잉 콕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다 끝나갈 즈음에 벨레벨레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저편에서 일부러 목울대에 힘준 것 같은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술집 주인을 붙잡고 있다. 그의 술을 마시고 싶으면 짐을 꾸려서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미국으로 와라.”

나는 시니컬한 투로 대사를 툭 내뱉었다.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회사 사무실 오른쪽 창문에서 두 번째에 있는 내 책상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당장 세계 일주라도 가지.”

저쪽에서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스터, 무슨 유치한 짓입니까?”

낮은 목소리는 허둥지둥 변명했다.

“내가 아닙니다. 그가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에요.”

내가 ‘그’와 통화하기를 원했는데, 원래대로 바꾼 마스터의 목소리에는 흥분기가 들어있었다.

“하나만 알아줘요. 나는 드디어 벗어나려고 합니다!”

마스터의 말이 끝나고 전화 상대가 바꾸어졌다.

“안녕하십니까. 형제여.”

음성의 높낮이며, 말투가 저녁에 우는 수탉이 분명했다.

“이보세요. 학자 씨, 대체 뭘 계획하고 있는 지 물어도 될까요? 아니, 그전에 왜 정오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미안합니다. 실수였어요. 저는 자연 생체 시계를 씁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느지막한 식사를 했는데, 정오 시간이 되어도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시간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더 잘되지 않았습니까? 좋은 벗과의 기다림은 언제나 기쁜 법입니다. 그 기쁨을 당신과 저 자신에게 더 주었습니다. 또 외로운 긴 여정에 함께 할 말벗이 필요했습니다. 한참 설득하니 그는 내 생각에 동조해주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따질 거리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묻자, 저녁에 우는 수탉은 대답을 회피했다.

“내 이야기가 듣고 싶으시면 폭군이 내민 밧줄에 스스로 옭아맨 상황에서 벗어나 아메리카 서부로 오십시오. 거기서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것이라며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그는 괴물의 손아귀라고 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아마 손아귀라고 했으니,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크거나 힘이 세거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길 건너를 보았다. 어두운 밤 속에서 고층 빌딩들이 몸에서 빛을 내는 괴물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폭군 같았고, 흉포한 괴물 같아보였다.

나는 뛰었다. 갑자기 눈앞에 닥쳐온 어둠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가방도, 정장 상의도 벗어 집어던지고 도망쳤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도중에도 시계만은 오른손으로 꼭 붙들었다.

― 인디언 타임 완(完) ―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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