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신처용가

2007.11.27 15:2411.27

  나는 10시 반 경의 짧은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이 시각이면 집에 있을지 모르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침을 삼키면서 내장이 눌릴 정도로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최근 계획된 대형 프로젝트 때문에 밤늦게 들어갔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메모지에 흔적만 남기고 시간을 쪼개어 손수 끓인 된장찌개만 남기고 새벽에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최근에 아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있는 걸 느지막이 알아챘다.
뚜르르 하는 전화 신호음이 열 번이 넘게 들렸지만 누구도 받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마찬가지였다.

  출근하는 심리 상담 센터 일이 바빠진 모양이라고 넘겨짚기 전에 최후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배경음악이 5초간 연주되다가 드디어 딸깍하는 연결 음이 들렸다.

  “이제야 전화를 받는 군! 여보, 나야!”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짧게, 찌르는 가시처럼 들려왔다.

  “지금 바빠요. 끊어요.”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아내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 여보.” 하고 애타게 불렀지만 그녀의 대답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내려놓는 내 뒤통수에 부장의 날카로운 눈길이 머물고 있었다. 휴식시간은 진작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대학 후배가 팔꿈치로 내 팔을 쿡쿡 찌른다.

  “작은 악마가 선배님을 노려보고 있어요.”

  두 마리의 악마가 있다. 한 놈은 크고, 한 놈은 작다.

  큰 놈은 사각형의 시멘트 안감과 검은 타일 바깥 감으로 이루어져 있고, 작은 놈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 두 악마는 나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혹사시킨다. 혹자는 이들에게 직장 또는 회사라는 동의이음어로 발음되는 이름을 주어서 큰 놈을 부르고, 못된 상사라는 이름을 주어 작은 놈을 부른다.

  세상을 살다보면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한 없이 책상에 쌓이는 직장에서의 일과 은행에서 내 집 마련을 위해 대출받은 대출금과 그 이자이다.

  작은 악마, 신에게 저주받을 직함인 부장이라 불리는 상사는 끝없이 나를 쪼아댄다. 그는 오늘도 나에게 한가득 일을 떠 안겼다.

  “박 대리. 퇴근 때가지 이 보고서들을 다 처리해 두게.”

  아랫도리가 저려온다. 오냐. 다 처리할 테니까 지옥에나 떨어져버려라. 대놓고 표정에 드러내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자리로 돌아오니 옆에 앉은 후배가 은근히 화를 돋운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퇴근하고 데이트 약속과 학원 강의가 없었더라면 끝나지 못할 일거리를 도와드렸을지도 모르는데….”

  위대한 천사의 발바닥에 짓이겨지면 좋을 후배는 내 자리를 위협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 1호이다. 겉으로는 실실 웃고 있으나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윗자리로 치고 올라갈지 잔뜩 생각하는 능구렁이와 같은 놈이다. 녀석은 내가 오늘 저녁까지 일처리를 다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이를 북북 갈면서 한 장이라도 더 끝내기 위해 아랫배에 기합을 넣고 일에 착수했다. 그 전에 맞은편에 있는 여사원에게 커피 한잔을 청했다.

  “조영희 씨. 미안하지만 커피 진하게 블랙으로 타다 주겠어요?”

  조영희라고 불렸고 입사 10개월이 넘은, 부서 신입 여사원 중에서도 고참 급에 속하는 이 여사원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다가 일어서서 종이컵에 커피 몇 스푼을 넣고 물을 타 왔다.

  “여기요. 뜨거울 때 후룩후룩 마시세요.”

  나를 곯려주려는 의도가 틀림없다. 커피가루는 잔뜩 탔고, 그에 비례해서 물은 적었다. 검고 걸쭉한 액체가 졸아든 한약처럼 보였다. 나는 쓰게 웃으면서 “그러고 보면 요즘 설탕을 반 스푼 타서 마셨어.” 하며 정수기로 가서 물을 더 붓고 가까이에 있는 설탕을 조금 타 왔다.
조영희는 나를 보며 웃는다. 비웃고 있다. “항의할 밸도, 자존심도 없는 놈.” 이라고 비웃고 있다. 후배의 예언대로 나는 일거리를 정시까지 끝내지 못하고 추가 야근을 하게 되었다.

  기쁘게도 나 외에 야근이라는 ‘백마고지 전투’에 버금가는 혈투를 함께 수행할 전우가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남 씨 성을 가진 사원이고, 또 한 사람은 같은 대리이다.

  “박 대리. 힘들겠어. 자네나 나나. 허구한 날 야근이니.”

  그는 오 대리라고 한다. 그나 나나 부장에게 무슨 미운 털이 박혔는지 황송하게도 부장에게서 매일 같이 선물을 받는다. 바로 산더미 같은 일의 선물이다. 사원은 입사 2개월의 신입인데, 일처리가 굼뜨다. 한 번 일을 맡기면 빈틈없이 정확하게 해 내지만 신속성이 떨어져서 업무 효율이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포즈로 나란히 앉아서 야근하는 세 남자들의 뒷모습을 건물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한 번 쓱 보고 다른 데를 먼저 청소하려고 문을 닫고 갔다.

  한참 야근하다가 심심해졌는지 오 대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 병장. 홍보 부분 서류에 무제한적 지원 포격을!”
  “오 병장 님. 지원에 앞서서 6월 판매량 데이터 페이지 3, 줄 12 위치에 하얀 폭탄을 깡그리 떨어뜨리라는 명령이지 말입니다.”
  “박 병장. 탱크를 끌고 가서 적진을 빈대떡처럼 뭉개버려! 남 병장. 올 때 지짐판이랑 식용유 보급품을 싣고 오기 바란다.”
  “알겠다. 곧바로 적진으로 돌격하겠다. 지원 확실히 안 해주면 나의 주포가 너희들 엉덩이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

  미리 약속을 하고 오랫동안 함께 해 와서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밤 9시 정각이 다 되어서야 세 사람은 일을 마쳤다. 그들은 피곤하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불 꺼진 회사 건물을 뒤로했다. 오 대리는 뒷목을 매만지며 얼굴을 찡그리고 걸었다.

  “요즘 너무 피로해. 피곤이 쌓인 걸까?”
  “그러다 만성피로가 될지 몰라. 주의 해. 우리나라 남성들의 돌연사 확률이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거 알지?”

  오 대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화가 나면 입이 거칠어진다.
  “니미럴. 좆같이. 그렇다고 해도 술에 담가먹을 일상생활이 여유롭게 쉴 시간이나 줘? 직장에서는 위에서 딴죽 걸고, 아래서 옷 잡아채고. 집에서는 마누라가 벌써 밤일이 시원찮아지냐고 면박을 주고, 자식 놈들은 매일 같이 돈돈 돈타령을 해대고. 뭐, 좋다. 딴 건 다 참아도 이 엿 같은 정부는 일도 잘 못하면서 왜 항상 세금은 칼 같이, 걷어가는 거야?”
  
  가다보니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오 대리가 나와 사원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세 명을 그리로 이끌었다. 허름한 포장마차에는 이미 와 있는 두 명의 막노동꾼들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안주용 족발을 썰다가 손님 세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 어서 오라고 지나가는 투의 인사를 했다.
  
  나를 비롯한 세 남자들은 자리에 둘러앉아서 소주와 꼼장어를 몇 마리 시켰다. 그들은 특별 안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사회 욕과 반구 얹은 집에 사는 사람들 흉보기, 직장 상사 뒷다마까기 라는 직장인들의 영원한 안주였다.

  “다음 달에 4대 보험은 얼마나 오른댔지?”
  “흡혈귀 사천왕은 3%랍니다.”
  “고귀한 땀과 보석 같은 눈물로 얼룩진 우리의 연봉 상승률은?”

  남 사원은 무척 당연하다는 듯이, 짧고 호기롭게 외쳤다.

  “전무(全無)! 얄팍(薄)!”
  “예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한강 중류 섬에 둥지 튼 치들이 하는 일은 대체 뭐라 생각하나?”
  “뭐하긴. 적게 일하고, 많이 놀 궁리나 하고 있겠지.”
  “우리의 악마 부장과 그들을 비교하면 어떨까?”

  오 대리의 의문점에 내가 대답했다.

  “비교하면 안 되지. 그래도 부장은 집에서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는 가장이야.”
  “쳇. 한국 남자들은 여러 가지로 손해 보는 것 같아. 무뚝뚝하네. 매너 없네 해도 결혼하면 생명과 바꿔서라도 가정과 아내와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황소 같은 사람들인데. 마치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산화한 무명용사들 같아.”

  소주 다섯 병을 비우자 세 사람은 취할 대로 취해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만 집에 돌아가자며 배가 탁자에 닿아있는 둘을 흔들어 깨웠다. 가장 심하게 취한 오 대리가 다 내겠다는 걸 간신히 말리고 각자 돈을 걷어서 술값을 냈다. 돈을 받아드는 손짓과 표정에서 아주머니는 심하게 주사 부리지 말고, 정확히 가격만 치루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세 사람은 포장마차 앞에서 헤어져서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사원은 비척거리면서 안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서 송화기에 대고 이야기를 한 가득 늘어놓고 있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인 모양이다. 마마보이 인건 아닌지 생각 될 정도로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비척거리면서도 집까지 왔다. 18층짜리 32평 아파트에 내 집은 5층에 있다. 오늘따라 불이 다 꺼져있고 16층쯤에 불이 딱 두 개 켜진 모습이 어둠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두 눈만 둥그렇게 뜬 거인 같다. 죽 늘어선 베란다가 보이는 쪽은 간격이 좁아서 도둑이 집에서 집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부녀회에서 건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베란다에서 베란다로 옮겨 다니는 검은 그림자를 목격했다는 사례가 몇 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에 방범창을 달고 있다.

  아파트 입구를 지키는 경비 아저씨가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가 취한 걸 알고 부축해주려고 밖으로 나왔다.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많이 취하신 모양인데, 걸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전 항상 이성이 남을 정도만 마십니다.”

  나는 비척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 경비 아저씨가 한 발 먼저 달려가서 버튼을 눌러줬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복 받으세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서 경비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퇴근하시고 친구 분들이랑 소주하고 얼큰한 순대국밥이라도 사 잡수세요.”

  아저씨는 손을 홰홰 젓고 나의 손을 도로 민다.

  “아서요. 부인께나 맛있는 거 사드리도록 해요.”

  억지로 아저씨 바지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밀어 넣고 잽싸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5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가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대고 소리친다.

  “아참, 스파이더맨이 오늘밤에도 나타났답니다. 창문 단속 잘하세요.”

  스파이더맨이란 아파트 사람들이 베란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도둑을 가리키는 별명이다.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아내가 자고 있을 수 있고, 밤도 깊어서 이웃에게 폐가 될지 모르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집 안은 컴컴했다. 아내는 벌써 자고 있는 모양이다.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다.

  벽을 더듬어서 불을 켜니 정돈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 탁자에 과자 그릇이 놓여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 손님이 왔다 간 모양이다. 벽에 몸을 의지하면서 침실로 향했다.

  침실 손잡이를 잡았는데, 얼어붙을 정도로 싸한 냉기와 끔찍스런 위화감이 놋쇠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왔다. 문을 열면 한낱 보통 사람의 뇌와 정신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광경과 대면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침이 올 때까지, 나의 두려움을 몰아내 줄 위대한 태양빛과 마주할 때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바쁜 삶 도중에 잊고 있었던 신을 떠올리고 가슴 위로 성호를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님. 부디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문을 닫고 한참 후에야 물체의 윤곽 식별 정도가 가능해졌다.

  방 오른쪽에 부부 침대가 있다. 아내가 혼수로 사온 침대인데, 오크 원목으로 만든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제작된 침대다. 온돌에서 생활해 온 나는 침대의 푹신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때로 바닥에서 잔다.

  자세를 낮추고 움직이지 않고 귀를 세워보니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색색거리며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끄트머리에 눈을 바짝 대었다. 아내의 발은 작고 귀여우며 보드랍다. 나는 아내의 발을 쓰다듬고 오랫동안 애무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왼쪽에 사람의 발 같은 게 있었다. 아내의 발보다 크고, 내 발바닥만하고 합판 같은 발 두 짝이 이불 밖으로 비죽 내밀어져 있었다. 한 침대에 발이 네 개였다. 나는 헙! 하고 헛바람을 삼키고 말았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서 발코니에 서서 고민했다. 학창 시절에 배운 향가 한 구절이 생각났다. 처용가 한 구절을 개사해서 불렀다.

  내 것을 남에게 빼앗겼으니 이대로 복수할까?

  달이 밝지 않았지만 반달이 구름 낀 하늘에 떠 있었다. 드러난 다리는 분명히 네 개였다. 몇 번 드나들었음에도 깨어나지 않는 부정한 아내와 턱에 어퍼컷을 수 십 방 먹여준다 해도 시원찮고, 쳐 죽어도 찝찝할 정부(情夫)는 세상모르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냉정하게 현재 벌어진 사태의 원인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최근 일이 바빠서 퇴근이 늦어졌고 피곤했다. 따라서 부부 간의 애정 어린 대화가 줄어들었고, 부부 관계도 몇 번 없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제 결혼 3년차이다. 바람을 피울 정도로 애정이 식기에는 이르다.

  나는 다시 방으로 가서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부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틀었다. 팔이 아내의 배 위에 얹혀졌다. 그걸 보고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오오, 처용이여.’

  나는 이성적으로 되자며 옛 선배인 처용을 찾았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서 발코니 문을 열어놓고 정장 상의를 벗어놓은 다음, 거실에 가로 놓인 소파에 앉아서 중앙에 놓인 대형 TV를 틀어놓고 음량은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줄여놓은 다음에 케이블에서 보여주는 음악 채널을 틀었다. 막 어느 밴드의 뮤직 비디오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걸 보고 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좋아하는 걸 열정적으로 즐기는 모습 같다.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손가락이 부러져라 기타를 쳐대고, 손목이 꺾이도록 드럼을 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서 현관과 가깝고 창고로도 쓰는 방으로 향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뒹굴어 다니는 이 방에 추억이 담긴 물건이 하나 있다. 불을 켜고 더미를 이루어 길을 방해하는 물건들을 딴 데로 옮겨놓고 정면의 받침대에 올려진 골판지 상자로 향했다. 받침대에서 끌어낸 그것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고, 뚜껑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대강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길쭉한 나무 스틱과 북채 한 쌍이 들어있었다. 나는 스틱을 꼭 쥐어보았다. 차고 거칠게 깎은 나무의 감촉이 생생했다. 양 손에 북채와 나눠 쥐고 흔들어보았다. 그대로 상자 째로 가지고 거실로 돌아와서 음악 채널에서 방영하는 젊은 음악가들의 열정어린 손짓을, 특히 뒤에 있는 화끈한 드러머의 두드림을 따라해 보았다. 공백 기간이 길었지만, 이내 거의 똑같게 따라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는 한때 실력 있는 드러머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교 시절에 음악이 좋아서 1학년 겨울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구성한 적이 있었다. 그때 드럼과 북을 맡았다. 서양식 드럼과 동양식 큰 북과 작은 북 5개를 합해서 이루어졌고, 연구 끝에 음계를 짜서 완성된 체계는 아니고 조잡하게 맞춘 악기였다. 친구들과 결성한 밴드는 한국식을 지향 목표로 삼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막대를 쥐고 뭔가를 두드리는 걸 좋아했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을 들었었다. 피아노 같은 섬세한 악기보다는 드럼과 북 같은 호탕한 악기에 끌렸다. 채를 쥐고, 가죽과 고정시킨 못이 튀어나오고, 찢어져 버릴 듯이 치는 걸 좋아했다.

  으레 어린 사회의 구성원이 그렇듯이 성인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 물도 먹어보고, 군대도 갔다 오며 나와 친구들이 깨달은 건 녹록치 않은 사회 현실이었다.

  당시에 나와 밴드 친구들은 5평짜리 지하 방에 아지트를 마련해 놓고 음악연습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이 세상은 열정만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없는 걸까?”

  연습하다 말고 기타 치는 친구가 한 마디 던진 말이었다. 그는 지금 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보컬이자 베이스 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친구가 말한다.

  “우리 같은 뮤지션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팬들의 성원을 먹고 사는 거야.”
  “꼭 매미 같군.”

  바이올린을 켜는 친구가 악기를 조율하면서 툭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렇잖아? 이슬만 먹고 사는 매미 말이야.”

  보컬을 맡은 친구가 바이올린 친구를 힐책하듯이 묻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벌써 열정이 식기라도 한 거냐?”

  바이올린 친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건 아냐. 단지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구.”

  5평짜리 지하 방에 4인의 뱃속 거지들이 일제히 깡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덧붙여서 그는 한 쪽에 있는 사무실 겸 식당 겸 침실로 정해놓은 방으로 가서 노트 한 권을 가지고 왔다. 그걸 친구들 앞에서 펼쳐 보였는데, 말미가 온통 빨간 글씨 투성이였다.

  “악기 구입비․수선비, 뒷공작비, 식비, 교통비, 그 외 온갖 잡비 등을 포함해서 매달 재정에 비상이 걸리고, 붉은 잉크 펜으로 결산 및 내용을 써야하는 게 우리 밴드의 현실이다.”
  “뜻은 대강 알 것 같다. 그럼 의견이나 대안을 말해봐라.”
  “오버해서라도 무대 몇 탕 더 뛰던가. 아니면 알바를 해서 자금을 모으던가 해야 하지 않겠어?”

  그 친구의 의견대로 시행하자 몇 달간은 그럭저럭 나아졌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고, 어떤 일이든 오래가지 못했다.

  아지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양 손목에 덴 화상이 인상 깊은 할머니가 경영하는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친절을 베풀어서 식대의 외상 처리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거기서 멤버들은 가득 시어버린 김치를 씹고, 소금 김치찌개와 말라비틀어진 나물 섞인 비빔밥에 물을 부어 달게 먹으면서 과거와 현대의 음악과 가수들을 비교 토론하고, 유일하게 먹을 만한 구수한 누룽지를 마시며 논평과 불평을 식당 바닥에 눌어붙어서 시루떡을 형성한 때 덩어리들만큼이나 늘어놓았다. 큰 신세를 졌는데, 지금도 그 식당이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결성 2년 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바이올린 친구가 군대를 가더니 2년 후에 전역함과 동시에 유학을 가버렸다. 운 좋게 면제 판정을 받은 보컬을 제외하고 전부 군대에 입대하여 밴드는 일시해산 상황을 맞이했다. 나도 전역했을 때는 아무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음악을 포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집안의 강권과 등쌀에 못 이겨서 다른 길을 찾았다. 몇 년 만에 한 사기업에 입사함으로서 입에 풀칠은 하게 되었지만 대충대충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사는 느낌이 드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유일한 위안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이었다.

  드러머 시절에 채가 부러져라, 북 가죽이 찢어져라 내리치던 내 손은 펜을 살며시 잡고 서류 위를 내달리고 있다.

  다른 길을 가고 있음에도 나의 과거는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신입사원 환영식부터 시작해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취하면 젓가락을 들고 술병과 잔을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취하지 않았어도 긴 작대기 두 개를 손에 쥘 때마다 드럼을 치는 듯한 행동을 보여서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에게는 취미생활로 했었다고 둘러대었지만 가끔 무의식적으로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면 평소 이상의 실력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뭔가 한두 개 깨먹고 변상하는 일은 흔했다.

  취해서 그릇을 깨먹고 허탈감에 잠겨서 탁자에 상반신을 누이면 보컬 친구가 입에 자주 담던 말이 생각난다. 밴드 결성 초기에 도원결의처럼 꽃 그림을 앞에 갖다 놓고 슈퍼마켓을 하던 기타 친구가 가게에서 몰래 가져온 소주를 따라놓고 잔을 부딪치면서 약속하던 일을 떠올린다.

  “고난은 앞날을 위한 훌륭한 자산이고, 두 번째로 위대한 스승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음악에 영혼을 불태우자.”

  이 약속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단지 기타 친구가 창업했다는 사업장을 물어물어 찾아 갔다가 중국으로 이전했다는 소식만 듣고 왔다.
과거를 떠올리니 괜히 기분만 더 울적해졌다. 스틱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우울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와서 음악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정이 있고, 먹여 살려야 할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옛 생각에 머리가 뜨거워져서 밖으로 나왔다. 찬 밤공기 때문에 옷깃을 꼭 여미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의 버릇인데, 고민거리가 있어도 남에게 털어놓지도, 상담을 요청하지도 않고 하루 종일 끙끙 앓으면서 밤을 새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내와는 전역 후에 미래를 설계하는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고민하거나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 맨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눈에 가시가 돋을 것 같던 설레던 때에도 미래의 일에 고민이었고, 나의 눈은 사랑하는 여자의 눈동자를 그윽한 눈길로 보지 않았고, 먼 산을 보듯이 흐리멍덩한 눈빛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요즘 따라 표정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보여요.”

  그녀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평상복과 정장을 하루 차이를 두고 번갈아 입는 모습을 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빠르게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밴드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 취직난 사이에 있는 적령기의 사내로서 험한 파도를 향해 헤엄쳐가는 서퍼(Surfer) 같은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가끔 격려의 말을 건네면서 나를 뒤에서 지켜보았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런데 벌써부터 배신을 당하니 견딜 수 없이 슬펐다.

  늦은 밤인데, 불 안 붙인 담배를 물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경비 아저씨는 아니었고, 두 집 건너에 사는 청년이었다.

  비록 문과 문 사이에 일곱 발자국 거리를 둔 이웃사촌이지만 성이 최(崔) 씨라는 것만 알고 이름이 무엇인지, 무얼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갈 때마다 등에 검은 사각 케이스를 걸머진 등을 보아서 악기 따위를 연주하는 직업 같다. 주말마다 등산 배낭을 메고 나가는 모습도 발코니에서 본 일이 있다.

  30평에 달하는 집에서 혼자 살고, 본가는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집안 같다는 말도 있고,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라는 소문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수다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그런 것 치고는 30평 아파트에 홀로 사는 건 과분하다. 여러 가지로 미스터리가 많다.

  청년은 내가 혼자 쓸쓸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뱃속에 며칠 묵힌 녀석을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내려 보냈거나 골머리 썩히던 일을 단칼에 잘라버리듯이 해결한 뒤에 만족감에 찬 황홀한 표정이다.

  “아저씨. 아직 날이 쌀쌀한데 왜 그러고 서 계세요. 옷도 얇은 걸로 입고.”

  나는 정장 바지와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난 상관없네. 이대로 내 몸이 얼어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실험해 보는 것도 좋겠는걸.”

  청년은 이대로 나를 두고 가기가 안쓰러웠는지 다가와서 내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담배와 담배 연기를 무척 싫어하는 나는 그냥 있는 게 편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나를 한 번 보는 청년에게 말했다.

  “괜찮네. 난 끽연 자들의 권리도 보장해주는 편이라네. 단지 좀 떨어져있어야 하지만.”

  옆으로 세 걸음 움직여서 담배연기가 미치지 않을 거리를 두었다. 머쓱해진 청년은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어 커피를 사다 줄 것을 요구했다.

  “괜찮다면 요 앞 편의점에서 따끈한 캔 커피라도 사다주지 않으려는가? 자네도 마시고.”

  청년은 돈을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층에 도착해서 빠른 걸음으로 백여 미터 떨어진 편의점까지 갔다 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머니에 있고, 데워져서 따끈함이 전혀 식지 않은 캔 커피를 거스름돈과 함께 내게 건네주었다.

  청년은 커피 대신에 데워진 옥수수차 캔을 들고 있었다. 자신은 커피의 카페인과 다량의 설탕이 들어간 제품을 섭취하면 살찐다며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캔 커피의 함량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커피 섭취를 줄이는 방안을 생각했다.

  손에 들어온 캔 커피를 따서 마시다가 나는 청년에게 물었다.

  “궁금했었는데, 자네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청년은 밝고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뮤지션입니다. 밴드에서 드럼과 하모니카를 하고 있지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한때 밴드에서 드럼을 했노라고 청년에게 말했다. 그는 동지를 만난 반가움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지금도 드럼을 하시나요?”

  나는 고개를 홰홰 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현실이란 냉혹했어. 나로 하여금 손에 익은 스틱을 버리고 볼펜을 쥐게 했으니.”

  청년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새삼스럽지만, 음악을 좋아하셨나요?”
  “그런 것 같았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길쭉한 걸 쥐고 온갖 물건을 두드리는 걸 좋아했지.”

  심지어 나무젓가락을 들고 밥그릇과 컵을 두드리며 깔깔거리기 좋아했다는 어머니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도 계속되는 술버릇은 자신의 관심이 거기에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왜 계속 악기를 들지 않고, 넥타이를 매셨나요?”

  심장 가장 깊숙한 쪽에 자리 잡고 흐르는 혈관을 미세한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오는 질문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의 말을 청년에게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음악 동지라는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이라. 그러나 가정사는 꼭꼭 숨겼다.

  “자본주의 현실 때문일세. 돈 없이는 음악도 할 수 없었거든. 악기든 밴드 동료든,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처럼 다 흩어졌고.”

  그러자 청년은 잠시 기다리라며 집에 들어가는데, 때마침 따르릉하는  전화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잠시 뒤에 그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거기에는 청년의 동료인 듯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네 명의 젊은 뮤지션들이 찍혀있었다. 배경은 매우 허름하지만 ―벽은 페인트로 낙서가 가득하다. 바닥은 깨끗하다― 청년들의 표정은 밝았다.

  “세상에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순간, 청년의 눈은 샛별처럼 반짝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예술 계열이 배고픈 건 아시잖아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음악으로 밥 먹고 사시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큰 망치로 머리를 몇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청년은 빙긋 웃으면서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내 친구가 있습니다. 음악가는 아니고, 소설가예요. 물론 무명이지요. 단지 글 쓰는 게 좋아서, 자신이 쓴 이야기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즐거워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는 녀석이에요. 자기 입으로 독자 60억 명을 위해서 계속 글을 쓰노라고 지껄이는 허풍 센 녀석이에요. 여차하면 시로 전향해서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성을 찾아서, 그 1명에게 봉사하며 찬미시를 쓰겠다는 녀석이에요.”

  나는 그 대목에서 웃고 말았다.

  “대단한 자신가로군. 그리고 남자로군! 그가 부럽네! 자네도 부럽고. 길을 찾은 이들이 부럽네.”

  청년은 길게 하품했다.

  “졸리군요. 전 그만 가서 자야겠어요. 잘 주무세요. 아저씨.”
  “그래. 자네도 잘 자게.”

  전화벨 소리는 청년이 하품을 하면서 문을 열었을 때도 들리고 있었다.

  청년이 집 안으로 들어간 뒤에 나는 시멘트 난간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나도 언젠가 아버지가 될 것이다. 태어난 자식을 안아들고 맨 처음에 해줄 말은 내 핏줄로 태어나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일 것이다. 그 다음은 무슨 말을 할까? 아직 정해놓지 않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과 함께, 아버지로서의 중압감은 함께 찾아온다. 나는 아들딸에게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미래를 위한 교육과 뒷바라지를 해줄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낳으면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가끔 그들에게 키워낸 값을 톡톡히 받아내겠다고 별러도 보상 없는 아가페적 사랑과 관심은 그야말로 무제한적으로 베풀어질 것이다. 이기주의에 의해 조금씩 퇴색되어지는 면이 있어도 아직은 위대한 사랑임이 틀림없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큰 바위를 등에 지고 벼랑 끝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다. 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 비슷한 처지일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일일이 나열하면 체 구멍을 하나하나 셀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은 과연 보석 같은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의 길을 찾아서 걸어갈까? 이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어떤 길이든 태어날 자식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보람찬 표정을 지으며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은 참 복 받은 행운아들이다.’

  주위의 조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자는 진정 행복하다. 대단한 행운을 가진 사람이다.

  생각의 가닥 끝이 아내에게 미쳤다. 한 명의 성인이자, 어엿한 사회와 가정의 구성원인 아내는 자신의 진로와 운명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가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법은 물론 도덕적 규율과 의무에서 어긋나는 행동은 너그럽게 봐주기가 힘들다. 의무를 이행하는 건 영예로운 일이며, 뇌가 빨려나간 저능한 이들은 우선 권리를 주장한다. 남편으로서, 인생의 반려자이자 파트너로서 사랑하는 아내가 길을 이탈하려고 하면 바로 잡아줄 의무가 내게 있다. 배우자에게 정조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다음이다.

  내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자 청년은 살짝 집안에 들어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검푸르게 변해오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결심을 했다. 즉시 온 집안을 뒤져 긴 포장용 끈을 손에 넣었다. 침실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보니 아직도 아내와 정부가 잠들어 있었다.

  끈을 침대 네 귀퉁이에 묶고, 간 크게도 나와 아내만이 누울 수 있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뻔뻔스러운 정부 놈의 사지를 단단히 묶었다. 스틱과 채를 가져와서 놈의 발바닥을 호되게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놈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곧 네 팔다리가 묶여져서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아내도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불을 켰다. 방이 밝아지면서 아내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들은 날 쉽게 식별할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을 식별할 수 있다. 정부와 아내의 얼굴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내의 정부인 자는 바로 조금 전까지 나와 대화했던 옆의 옆집 청년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함을 느꼈다. 나는 홈즈 같은 명탐정이 아니라서 뇌가 산 낙지처럼 되더라도 정확한 추리가 힘들 것 같았지만, 집 앞에 있던 내 눈을 피해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가 될 수 있는 창문을 보고 혹시나 해서 열고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긴 등산용 자일이 내 집 베란다와 청년의 집 베란다 난간에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나의 집과 청년의 집 사이에 있는 건 텅 빈 집이다. 성인 남성 한 사람이, 매주 산을 타는 산악인이 빈 집을 통과하고, 간격이 불과 1여m 남짓한 베란다를 넘어서 저쪽 집에서 이쪽 집으로 건너오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다.

  “계속해서 내 침대에 누워있었다면, 모두 당신이 조정한 것이겠군. 당신만큼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녀는 죄책감과 원망이 반반씩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애정표현에 소홀한 당신이야말로 잘못은 없느냐고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옮겨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자비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옛 사람인 처용처럼 용서를 해줄까 생각하다가 그에게 청량감이 담뿍한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실로 자네에게는 고맙다고 할 수 밖에 없네. 거의 죽어있던 드러머의 혼을 다시 깨워줌과 동시에 아내에게 소홀했던 상황을 일깨워주었고, 또한 아내를 계도할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남편으로서의 권리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일석 사조가 아닌가.”

  나는 옛 시절로 돌아가서 청년의 발바닥을 드럼 두들기듯 신나게 두들겨주었다. 차츰차츰 위로 올라가서 배와 가슴도 두드렸다. 비명 소리에 아파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내다봤고, 그중에 누가 신고한 모양인지 얼마 뒤에 경찰이 도착했다. 그 즈음 청년은 죽지는 않았는데 발을 많이 두들겨 맞아서 탈진하여 늘어져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은 심야에 소란을 피운 잘못만 적용시켜서 경고조치만 주고 훈방 시켜주었다.

  경찰서를 나오면서 나는 배웅해 주는 경찰에게 담배를 청했다.

  “경찰관 나리. 사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무척 피우고 싶군요. 한 대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찰관은 안쪽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손바닥에 툭툭 털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죄송합니다. 돗대입니다.”

  나는 담배를 얻지 못하고 구시렁거리며 새벽 찬 공기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 길을 걸어갔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곧바로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의 사과를 받아내었다. 그리고 곧장 이혼하자며 입으로 말하고 나중에 서류를 보내겠으니 친정에 가있으라고 쏘아붙였다.

  나는 회사는 계속 다니면서 사원 복지를 위한 밴드 동아리에 가입신청서를 내밀었다.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던 내가 제 발로 찾아와서 가입하겠다고 하자 밴드 원들은 놀라면서도 나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오랜만에 드럼 앞에 앉아서 스틱을 양 손에 쥐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전화번호가 액정 창에 뜨고 있었는데, 아내의 전화번호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예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밴드 원들의 악기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스틱을 높이 치켜든 나의 마음은 이미 무아지경에 도달해있었다.

― 신처용가 완(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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