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카페 프란스

2005.04.14 20:4604.14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외할머니가 굿을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개화했기 때문이다. 현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신다.

어머니는 가끔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을 가장 큰 공적인 것처럼, 그렇게. 처음에 할머니가 교회에 가셨던 날, 할머니는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셨단다. 병원에 가도 딱히 병명은 집혀지지 않았다. 다만 몸살일 뿐이었다. 평범한 몸살이었는데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왔다갔다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열은 내리고 할머니는 자리를 털고 훌훌 일어나셨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 할머니는 매일을 볓만 쪼이며 무기력하게 계신다는 것뿐이다.

무당 옷을 입은 할머니의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이미 빛이 바라고 모서리도 닳고닳은 것이었지만 사진 속 할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당당했다. 할머니는 탁무(鐸舞)를 추고 신을 받으며 작두를 타셨다고 한다. 그 장면을 못 본 것은 일생의 한이 될 터이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왜 기독교로 개종해야했는지를 물어본 일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많이 싸우셨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할머니가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사라져가는 솟대와 장승들을 지킬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아마, 할머니가 끝끝내 어머니와 결별하면서 무당의 위치를 지켰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무당은 애완용이다. 과거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무당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제된, 향수를 일으키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아버지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돈을 믿는다. 아버지는 자본가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덕본 것이 참으로 많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나를 먹여 살릴 돈을 가져오신다.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실 돈도 거기서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학비며 생활비도 모두 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어머니에게 교회를 강제 받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본다면 아버지의 덕이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믿지 않고도 잘만 살았고, 그것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고싶은 어머니에게 그 말을 참을 수밖에 없도록 했다. 외할머니가 같이 사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미안해서라도 충돌은 피하고자 했다. 우리 집에서는 부부싸움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어머니가 참는 선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셔도, 빨래를 산더미처럼 내놓아도 그저 한탄하실 뿐이었다. 아버지가 매일을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셔도, 심지어는 바람을 피우셨을 때도 눈물만 흘리실 뿐이었다. 나는 그 덕을 보았다. 어머니가 상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과 같이 안정적인 가정생활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봐, 너. 나와 임마. 남자 하나가 퉁명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운다. 손에 채워져있는 수갑이 영 거추장스럽다. 아직도 몸이 가눠지지 않아서 몇 번 비틀거렸다. 남자는 욕을 내뱉으면서 나를 부축해 다른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반대편에 가서 앉았다.

이 형사, 이 녀석 누구야. 젊은 놈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누군가가 내 등을 살짝 종이 뭉치로 두들기며 물었다. 남자가 - 아니, 이 형사렸다. 대답한다. 말도 마. 아주 황당한 새끼라니까. 아편에 술까지 하고 운전하다가 사람을 쳤어. 요란하게도 저질렀구만, 뒤에 있던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야, 정신차려. 이 형사가 나의 어깨를 툭툭 밀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하늘과 땅이 한데 엉켜서 창백한 얼굴들을 나의 눈가에 띄워놓았다. 너희 아직도 가지 않았구나. 속으로 되뇌어도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 자본가는 아니었다. 그래도 쁘띠 부르주아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곳저곳 정치하는 사람들과 조금씩 손이 닿아있는 것을 본다면 그보다는 높은 계급일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맨손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사업을 일으켜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능력에 찬탄을 보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일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서 골프나 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매일을 보낸다. 진짜로 일을 하는 것은 사무실의 직원들이다.

아버지는 그것이 접대라고 말씀하신다.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와 노는 다른 사람들도 결국에는 마찬가지. 결국 접대라는 이유로 작당하고 노는 것 아닐까? 아버지는 싫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즐거워서 마신다.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회계장부에 파묻혀있는 사람들은 싫어도 그것을 해야만 한다. 잠시라도 쉬고자 한다면 월급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일할 때는 그렇게 게으름피우지 않았는데 라는 말을 듣는다. 사업이라는 것. 능력 있다는 것. 그것은 타인에게 나의 노동을 넘겨버리고 그 성과를 가로채는 것이 아닐까? 열심히 일해도 누나들에게 남는 월급은 백여만원. 아버지는 접대의 대가로 얼마를 챙기는가? 어머니에게는 육백만원이 주어진다. 나의 등록금, 생활비를 포함하여 또한 그 비슷한 돈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의 월급을 짐작할 수 없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의 지갑에 언제나 수표가 가득 차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하게 먹는 날의 계산서에는 오십만의 숫자가 찍혀있을 때도 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지불한다.

정말로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도 우스운 숫자겠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진짜로 돈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숫자를 가지고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광판의 숫자를 다루겠지만, 정작 돈을 만지지는 않을테니까.

그것이 돈의 본질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테지.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닳고닳은 지폐에 붙어있는 귀신들을 - 내 돈을 헛되이 쓰지 말아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본다면. 그 사람들도 수학놀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텐데.

내가 언제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습무의 핏줄 때문일까? 나는 신을 받지 않았다. 그래도 볼 수 있는 거라면 할 말이 없다. 나에게는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하니까. 어머니는 붙잡고 기도나 할테고, 할머니는 웅얼거리기만 하시지. 다른 무당? 글쎄, 그들은 정말 해답을 알고 있을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남을 믿을 수 없다. 예언가와 사기꾼들로 넘쳐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귀신들이 보인다고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는 내 눈앞에서 있었지만, 단지 있을 뿐이다. 조금 지나면 울겠지. 그런다고 내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만. 나는 단지, 먹을 것이나 조금 들어주며 저승 갈 길을 배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죽은 사람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니. 야, 정신차리라니까. 이 새끼 완전 맛이 갔구만. 이 형사의 목소리가 시작도 없이 고막을 울리었다. 뭐랄까. TV에서 본 적은 있었다. 이름이네 뭐네 형사가 요구하는 것을 불러주고 처분을 기다리는 늙은 닭처럼 앉은 양아치들. 맡은 역할은 다 해야지. 몸을 바로 세우는데 휘청하며 허리가 뒤로 넘어간다. 나는 의자와 함께 땅으로 하강한다. 아아, 지폐이야기. 귀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뒤통수에 한 뭉터기의 충격이 전해져온다. 바닥에 뒹구는 몸은 남 같지 않으면서도 전혀 살갑지 않다.

나는 아버지가 가지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어머니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자양분으로 해서 성장했던 것도. 자본가인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돈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울기만 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분개하면서 - 어머니에게서 자유를 얻어왔다.

언젠가 남미에서 온 신부귀신 하나가 나에게 온 적이 있었다. 기관총으로 온 몸이 조각조각나서 걸을 때마다 몸을 챙겨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나에게 신의 말을 전해주었다. 신은 나에게 그렇게 살다가 죽어버리라고 했다.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 날 저녁, 신부귀신을 만나기 전에, 나는 무척이나 목이 말랐다. 그래서 제발 날 떠나보내지 말라는 귀신의 처연한 울음소리와 맞바꿔 코카콜라를 얻었던 것이다. 그래. 미선아, 효순아. 이만하면 너희 원한도 풀렸을 게다. 더 이상은 나라 경제 망친다. 나의 삶이 그런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므로.

결국 나는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면 산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죽어버리자. 그래 콱 죽어버리는 거다. 자동차가 무슨 대교를 건너갈 때면, 한강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강에서 죽고싶지는 않았다. 그곳은 너무 더러웠다.

죽을 장소라는 것. 생각보다 마땅하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사라진 것처럼 죽을 수 있는 곳이 과연 있던가? 죽는 마당에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은 죽고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귀신들은 나를 증오한다. 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나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죄를 지은 자들은 용서를 빌며 죄에서부터 벗어난다. 그러면 귀신들도 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죄가 없기 때문에. 사방에 세워진 신전들. 그 그늘 아래서, 이제는 죄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그렇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힘들게 되어버렸다. 귀신들은 나를 좋아한다. 내가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이 형사, 이리 좀 와봐. 무슨 일이에요? 나중에 하면 안됩니까? 지금 이 녀석 일 좀 끝내야 될 것 같은데. 이 형사가 나의 몸을 벽에 기대어 놓으면서 답한다. 있는 힘껏 부축을 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나의 몸은 비척비척 기울어진다.

그 녀석 놔두고 이리 와봐. 잠시면 돼. 할 수 없이 이 형사는 나를 대충 앉혀두고 어딘가로 간다. 그다지 먼 곳은 아닌 듯 했다.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으니까.

무슨 일입니까? 위쪽에서 당부가 내려왔어. 적당히 하고 끝내래. 아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 녀석 아버지가 손을 쓴 모양이야. 청장님이 직접 전화를 하셨어. 원만하게 처리하라고 하시더라고. 저 녀석은 살인자입니다. 마약까지 했어요. 죽은 사람은 노숙자에다가 무단횡단 하던 것은 그쪽 책임이야. 이런 제기랄. 그래서 뭐예요? 저 녀석을 그냥 놔주라는 겁니까? 적당히 훈방조치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쪽이 괴로워져. 이런 일 하려고 경찰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법이 원칙대로 적용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

이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대화하던 이의 다정한 목소리.

다 좋은 게 좋은 거야. 빨리 끝내. 아버님이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희미하게 봉투의 살각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이 형사는 나에게 돌아와서 수갑을 풀어주었다. 너 이 자식, 좋은 아버지 둬서 운 좋은 줄 알아. 다음 번에 만나면 국물도 없어. 알았어? 예, 예에.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그의 부축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자꾸 비척거리는 것은 아까와 마찬가지지만 이 형사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내내 침울하게 있었던 귀신이 갑자기 밝아진 얼굴을 한 것 같다. 그는 무엇인가를 웅얼거렸다. 아마도 시를 나에게 읽어주는 것이겠지. 카페 프란스. 나는 자작의 후손. 유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유식하시구먼, 패로 서방. 굿 이브닝.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의 등을 툭툭 두들기고, 이 형사가 하던 것처럼 나를 부축했을 뿐이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힘드셨던지 근처 벤치에 나를 앉혀놓고 옆에 앉으셨다.
한동안 여행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떠니? 예에. 그래. 그 편이 너에게도 좋을 것 같다. 예에. 외국에 가고싶다고 했었지? 예, 뭐 그렇죠. 아버지 친구가 유럽 어느 대학에서 꽤 목소리를 낸다더라. 네가 오고싶다면 한동안 머물 곳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어. 예에. 그럼 그렇게 알고 있어라. 대충 준비하고 있어.

아버지는 택시를 부르러 가시고 나만 혼자 벤치에 남았다. 귀신들이 벤치에 와서 앉았다. 더러는 내 머리 위에, 더러는 무릎에, 더러는 나의 옆에. 잘들 있어라. 나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 터전을 떠날 거야. 그 말에 귀신들이 성대를 울리며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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