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생명

2004.08.22 12:5108.22

생명



유로스





다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내게 심장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붉은 피가, 지구 끝에서 불타는 저 화염보다도 뜨거운 피가 온 누리 위를 격렬히 흐르고 있었다. 나의 심장에는 순간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한,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피의 파도가 물결치고 있었다! 하지만, 수억 년 동안 나는 심장을 빼앗겨 지금처럼 파랗게 생명을 잃은 정맥만이 나의 혈관을 흐르고 있다. 이제 태초의 나를 기억했던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의 심장을 찾아주기를! 그것은 나의 기억이며, 감정이며, 나의 가장 중요한, 이제는 잃었으나 다시 되찾아야 할 소중한 나의 일부이다.

나는 바다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소중한 심장을 잃었는가? 그대의 심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제야 그것을 찾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억 년의 세월동안 그대는 심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인가?

바다는 순간 저 먼 수평선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긴 한숨을 쉬었다, 혹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포말이 사라지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 날의 기억은 나에게 주어진 가없이 넓은 시간의 파도 속에서도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죽은 별이 하늘을 뒤덮던, 새하얗게 반짝이는 별비가 끝도 없이 내리던 날이었다. 한껏 달아오른 별이 파도처럼 다가와 부딪히곤 산산이 깨어져 죽어갔고, 나는 쉴 새 없이 몸을 뒤척이며 그 눈부신 멸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결처럼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넋을 잃었고 별비의 여파로 시들어가는 생명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자욱한 연기에 질식하여 나의 심장을 수면 위로 내어놓지만 않았다면! 그의 손이 찰나의 순간에 벼락같은 속도로 나의 심장을, 나의 생명의 힘을 앗아갔다! 수억 년 동안 후회할 그 순간, 아, 왜 나는 저 무자비한 달을 쫓아가지 못했던가! 하지만 나는 쫓아가지 못하였다, 나의 생명의 힘을 되찾기 위해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을 걸어야 했기에. 차디찬 죽음의 다리를 건너 달에 이르는 길은 나에게는 너무나 험난하였다. 깊은 흑암의 골짜기가 도사리는 죽음의 다리를 건넌다면, 나에게 기대어 유지되었던 모든 생명들은 견뎌내지 못할 저 우주의 혹한에 스러질 것이다. 나는 차마 그 생명을 버릴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달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가, 이내 포기하여 뒷걸음질치고 만다. 만약 내가 생명을 버리고 저 죽음의 다리를 건너 심장을 되찾은들, 이미 잃어버린, 가없이 넓은 나의 품에 숨쉬던 가련한 이름들을, 그 헤아릴 수 없는 영혼의 비명을……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믿었다- 저 무자비한 달이 언젠가는 나에게 심장을 되돌려 주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허망한 바람, 수억 년 동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이기심이 나의 피눈물을 외면한 것이 몇 해던가, 달은 아직도 그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그의 얼굴을 수억 년 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이, 변하지 않았을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보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다, 그 음험한 얼굴에 지워지지 않았을, 비열한 승리의 웃음을!

바다의 분노는 해일이 되었다. 해일의 그림자는 백사장을 메웠다. 절벽까지 치솟는 물결에서, 나는 그녀의 심장 없는 가슴에 쌓여있는 절절한 한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생명의 힘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어떤 고통일지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죽음을 경험한 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하늘다리를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그 하늘에 걸린 얼음의 길을 따라 곧장 나아갔다. 반짝이는 얼음은 은하수처럼 맑게 빛났다. 어쩌면, 저 은하수들도, 찬란한 우윳빛 보석이 아닌, 이런 볼품없는 얼음조각들일지도 모른다. 너른 공간을 질주하는 매순간에도 속도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멸한 중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빛은 오직 태양의 빛을 받아 번득이는 하얀 달빛이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극한의 시련 속에 시야는 하얗게 탈색되어 모든 것이 달빛으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그 숨결만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지나 생명을 찾으러 왔다.


의 눈동자는 형언키 어려웠다. 무엇을 말하는 눈동자인가. 어쩌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에 퇴색된 감정이, 초췌한 모습 속에 아직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한없는 두려움, 그리고 적의. 그가 말했다: 나의 죄를 추궁하러 왔는가. 심장을 찾기 위해 왔는가. 바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너희가 살고 있는 별과 나는 본래 하나의 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가없이 먼 어느 곳에서 온 별이 우리를 둘로 갈라놓기 전까지는. 별이 우리를 들이받아 나의 몸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고 나는 그때까지 바다와 함께 가지고 있던 심장을 앗긴 채 혹한의 겨울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이 불모의 땅을 보라! 나의 몸뚱이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별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나의 기억도, 나의 감정도, 흐릿해져 더 이상 나는 나일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별비가 내렸다. 그리고 나는, 수억 년 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심장을 보았다.
변명하지 않겠다. 그 죄가 불러온 증오의 해일을 보지 않았더라도, 나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다려줄 수 없는가. 나에게 시간을 준다면, 기회를 준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 죗값을 갚을 것이다.

나는 달이 느꼈을 절망감을 생각하며 고민했다. 바다가 가진 증오와 박탈감, 달이 가졌던 절망감, 그 사이에서 나는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고민하고 고민하였다. 그 고민 속에서 하나의 의문이 피어올랐다. 심장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바다에 의탁하고 있는 생명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오랜 시간 달은 왜 생명을 가지지 못하였는가. 오래지 않아 나는 의문의 틈새를 찾아내었고 끝내 그 기나긴 오해의 세월 속에 숨어있는 모순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은 나에게 해답을 가르쳐주었다.


는 다시 땅으로 돌아왔다.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바다는 심장을 가진 듯 힘찬 파도로 약동했다. 언제나 바다는 몰아치고, 다시 물러나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는 세계, 생명의 힘을 잃은 바다는 영원한 일상을 되풀이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심장을 되찾게 된다면, 바다는 태초의 붉은 빛을 발하며 역동적인 진화를 다시금 시작할 것이다.
달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생명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직도 오랜 시간이 남아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시간보다는 훨씬 짧을 것이다. 달은 포기하지 않고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별비가 내리는 그 순간, 심장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것을. 바다는 죽었고, 달도 그 순간 죽었다. 생명의 힘은 심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달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수많은 생명들은 별비가 내리던 그 순간부터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별비가 생명을 무참히 짓밟고 난 이후 모든 생명들은 변화가 무의미함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은 죽었다. 심장이 다시 살아나려면 모든 생명들이 다시금 변화를 바라야 한다. 바다가 심장을 포기하고 진정한 생명의 힘을 깨달을 날이 올 때까지, 죽어버린 심장은 달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 누구도.

다시 나는 날아올라
푸른 바다를 지나쳐
시린 은하수를 보며,

저 너머로 향하였다.







=======================================================================================================

생명을 읽는 다섯 가지 방법


1. 제목은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은 독자를 혼란시키는 데에 성공했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성공한 듯 합니다. 생명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또 '그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2. [틀]에서 벗어난 판타지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대안은 "틀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은 결국 또 하나의 "얽매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설정을 하지 않은 채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아이디어는 [바다와 대화한다]는 간단한 환상적 요소였고 거기서 출발하여 살을 붙이면서 이야기를 펼쳐 나갔습니다.

3. 생명은 [신화적 연대기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바다와 달의 어투는 옛 신화에서 사용할 법한 고풍스런 어투를 현대적으로 재포장하여 쓰려고 했습니다. 또한 신화가 주는 상징성과 그 상징단어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일례로, 제가 거의 쓰지 않는 낱말인 "그녀"를 이 소설에서 쓴 것은 바다를 여성으로, 달을 남성으로 설정하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 이 소설은, [신화에 과학을 접목한다]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킨 저의 첫 습작입니다. 물론 로저 젤라즈니도 했던 일이지만, 그가 SF에 신화를 덧입힌 것과는 달리 저는 신화에 과학을 접목해보자는 생각이었지요. 실제로 아프리카 신화 중에서는 망원경의 발전으로 인해 밝혀질 수 있었던 여러 천문학적 지식이 담겨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화란 고대인들이 후세 사람들에게 지구의 비밀을 전수하기 위해 지어낸 우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어쨌든 저는 과학이 가미된 신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그 첫번째 발걸음입니다.

5. 생명에서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장면들이 있습니다.(이 부분은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글씨색을 바꾸었습니다)예를 들어 지구와 달이 원래 하나였다는 가설은 실제로 과학자들이 지구와 달의 관계를 논할 때 언급되기도 하는 가설이고, "별비" 같은 것은 소행성충돌로 인한 구름 형성으로 생명체가 절멸한다는 가설(공룡멸종을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가설)을 모티프로 하고 있고, 바다가 달에게로 한 걸음 걸어갔다 물러난다는 것은 밀물과 썰물을 암시하고, 달이 등을 돌려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달의 자전속도와 공전속도의 묘한 일치로 인해 실제로 지구에서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런 부분부분들은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선뜻 띄지는 않지만 되풀이 읽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며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독자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작가로서는, 한 번 읽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지요. 생명을 가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
댓글 1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7 단편 꽃향기1 어처구니 2004.06.06 0
2796 단편 우주류7 이수완 2004.06.08 0
2795 단편 서글픔5 adama 2004.06.14 0
2794 단편 [수필]옥상 야경 종문 2004.06.15 0
2793 장편 화조월석 9 명비 2004.06.30 0
2792 장편 화조월석 101 명비 2004.06.30 0
2791 단편 추문을 일으키지 말아요.1 장우열 2004.07.03 0
2790 단편 상식의 뜰2 양소년 2004.07.05 0
2789 단편 라이벌1 moodern 2004.07.20 0
2788 단편 길동무1 미로냥 2004.07.24 0
2787 단편 이름을 쫓던 모험2 moodern 2004.08.01 0
2786 단편 르네상스4 이원형 2004.08.11 0
2785 단편 옛날 이야기4 장우열 2004.08.19 0
2784 단편 우리들의 서울로 놀러 오세요1 명비 2004.08.19 0
단편 생명1 유로스 2004.08.22 0
2782 단편 기사, 말을 돌리다7 양소년 2004.08.25 0
2781 단편 심야자판기 moodern 2004.08.27 0
2780 단편 확대술 이원형 2004.08.29 0
2779 장편 [유다의 가을] 프롤로그1 RS 2004.08.30 0
2778 장편 [유다의 가을] Part1. 제이....... (1) RS 2004.08.30 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