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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수필]옥상 야경

2004.06.15 01:5406.15

  옥상 야경

  모처럼 초여름 더위가 기를 쓰는 모양인지 저녁인데도 꽤 덥다. 마침 답답하고 적적해서 옥상에 올라가 있으려니까 잔기침 소리가 나며 아버지 올라오신다.
  담배 태우러 오신 모양이다. 문득 라이터를 찾으신다.
  요행 옥상에서 라이터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 건네 드렸더니
  
  “너도 담배 태우냐.”

  홀짝이고 있던 커피를 내리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확 하고 내뿜는 담배 연기에 가득한 피로의 편린이며 찌든 스트레스 냄새.

  “아버지가 숨겨두신 거예요.”
  
  “맞다. 넌 담배연기 싫어하지?”

  고개를 돌리시며 그 독한 연기를 삼키신다. 오늘따라 커피도 쓰다.
  
  “옥상엘 자주 오는구나.”

  부전자전이다. 서로 애용하는 시간대가 다를 뿐이지. 옥상에서 부자가 마주치는 일이 없다곤 못하겠으나 퍽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찌는 날씨가 부자 상봉에 한 역할 했다. 아버지는 일에 겨워 일찍 주무시니 석식 후에 옥상을 들리시고, 나는 졸음이 쏟아지는 새벽녘에 잠 깨러 잠시 옥상에 기웃거리는 처지인데, 오늘은 마침 중간다리를 짚어 서로 만난 것이다. 약속도 없이 한데 모인 것이 신기하고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집안에서도 얼굴 보기 어려운 우리 부자는 이런 이벤트마저 썩 낯설다.
  서로 쓴맛을 삼키며 침묵. 타인의 사색에 간섭하지 않는 아름다운 배려.
  
  담배연기에 달이 젖는다.
  초저녁에 올라온 옥상은 늘 고요에 잠긴 새벽녘 옥상과는 좀 다른 맛이다. 멀지 않은 시내 야경이 대번 훤하다. 정신없이 번득이는 네온사인, 개미처럼 줄을 잇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귀화처럼 점멸하는 가로등, 아파트, 가정집, 상가, 유흥주점……활기가 가득한 역동성의 방류.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사람과 사람, 관계와 관계, 술, 욕정, 별을 말리는 인공의 빛, 오늘의 실질적인 말소신고인 석양을 잡아먹은 하늘, 늙어 퇴직한 회사원의 착잡한 심정만큼이나 고요히 가라앉는 어스름. 하지만 빛을 밝히는 곳은 어두운 곳일 뿐, 아직 병폐에 침잠하지 않은 인간의 사회, 그 말단의 파노라마. 야경.

  “어디에 응모한다던 그 글은 다 썼냐.”

  “보셨어요?”

  “접때.”

  “어때요?”

  “쓸 만하더라.”

  잠시 쓴 글을 되짚어보던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상한걸 보셨구나.

  “글 쓰는 거 힘들지 않냐?”

  “글쎄, 조금요.”

  무심코 거짓말을 해 버린 나는 앗차, 뜨끔한다. 실은 사방이 꽉 막혀서 어디 한발 디딜 데도 없는 형편인 것을. 그것은 한밤의 야경처럼 막막하고 아득하고 꿈처럼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은, 어떤 질서도 세워지지 않은 혼돈의 한 가운데인 것을.
  프림이 빠진 커피처럼 밍숭맹숭,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고요의 일색.
  밤이 깊으면 옥상의 야경은 환골탈태 한다. 저녁의 야경이 주로 먼 시내와 인간 사회를 위주로 한 것이라면 한밤중의 야경은 주로 하늘과 주위, 기필코는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달이 밝고, 별이 뜨고, 세상이 모두 꿈으로 가득한 것만 같은 바야흐로 개벽의 코끝에 닿은 자정의 야경. 녹음의 한 가운데 떨어진 듯한 상쾌한 기운과, 저 멀리 개 짖는 소리, 곤충 우는 소리, 마치 빗속에 잠긴 듯 정적인 소음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하얀 원고지 속에서 쳇바퀴를 굴리는 듯 지겹고 답답한 침묵과 단 하나의 소망, 내일이 있다는 것. 그 희망의 최전선에서 아슬아슬한 교태를 부리고 있는 것이 한밤중의 옥상인 것이다.
  아버지는 담배 한대를 기어이 다 태워죽이시곤 가래를 거르륵하고 뱉어 버리신다. 그리고 한숨처럼 짧은 마지막 연기를 보이지도 않게 흩어 버리시고는

  “열심히 써라. 글쟁이가 네 천직이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할 테다.”

  하고, 무심하게 들어가신다.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머그잔을 어루만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득한 어스름에 잠겨 별도 달도 없는 그 하늘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 지켜보고만 섰다. 네 손바닥 같은 원고지에 옮겨 쓸 줄도 모르는 생각은 해서 뭣에 쓰느냐, 라고 자신을 나무라고 나무란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위선자에 도망자이고 에고이스트인 나는 질문 하나 답변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비겁은 무엇을 위해 비겁인가, 노상 부르짖던 그 시집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언제까지 이 고요 속으로 도망치려느냐.’

  종국에는 문득 떠오른 질문에 씁쓸히 웃는 것이다.    

200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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