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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5.

  
박제천의 사무실에서 나온 병옥은 차 안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늦가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물감을 칠한 듯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낮인데도 산들산들 불어오는 실바람 덕분에 그리 덥지는 않았다.



가로수 그늘 덕분에 병옥이 탄 차 안도 그렇게 덥지는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때문에 실타래가 뒤엉킨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박제천이 죽은 지금, 실종된 여자 아이의 행방 또한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여자 아이가 실종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돼간다. 애석한 일이지만, 실종 신고가 접수된 이후 경찰이 본격적으로 나서 수사했으나 이렇게까지 실마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면 사실상 여자 아이의 상황은 무척 암울하다고 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여자 아이의 실종에 그들이 관련돼 있느냐는 것이다. 죽은 박제천에게서 발견된, 그들과 관련된 명함 한 장이 정말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문제는 이 연결고리를 무언가에 이어야 하는데 마땅히 이을 것이 없었다.



박제천의 사무실을 나선 이후 병옥은 박제천이 그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것은 부동산 거래를 위한 판매자로서의 노력이 다른 곳에 비해 너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 환경은 어지간한 생활비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물론 심증만 가지고 이렇게까지 비약하는 것은 너무 앞서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박제천이 병옥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 아니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하다면 그는 그 더러운 노예 시장의 구매자 였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조카딸이 실종된 이후 박제천은 심한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다고 부인이 털어놨다. 게다가 자살로 발견되기 사흘 전, 그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만약 박제천이 조카딸에 관한 어떤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간 것이라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아는 박제천은 그토록 아끼던 조카딸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박제천이 그들의 짝패라는 전제하에 추측하는 가정이지만, 병옥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조카딸의 실종이 꼭 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건 위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병옥의 추측대로 그 여자 아이가 그들에게 붙잡혀 간 것이라면 한 가지 큰 의문점이 뒤따라 올 수밖에 없었다.



왜 박제천의 조카딸을 납치한 것일까. 만약 박제천을 협박할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조카딸보다는 그의 아들을 납치하는 게 더 맞는 얘기였다. 병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저기 뻗은 나뭇가지처럼 이런저런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어쨌든 조카딸의 실종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전제하에 생각한다면 한 배를 탔던 박제천과 그들 사이에 어떤 불화가 일어났다는 걸 암시했다. 어떠한 이유에서 박제천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것이 결국 조카딸의 실종까지 이어진 것이라 병옥은 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조카딸을 납치해 과연 박제천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는지 였다.



박제천이 일주일 전 부인에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난 건 아마도 그들에게 조카딸을 볼모로 어떤 협박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박제천은 사흘 뒤 차 안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병옥은 그의 차 안에서 발견된 명함과 과거에 겪었던 경험을 근거로 그의 자살이 그들에 의해 위장되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박제천이 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는 의문이었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건 그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으윽.”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하자, 억지로 참고 있던 두통이 다시 두개골을 깰 듯이 병옥을 엄습해 왔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며 사건에 대한 고민에 빠진 병옥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번 사건 역시 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우울한 예감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이런 일의 결말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병옥은 그런 경험을 숱하게 겪었다.



최악의 경우엔 실종된 여자 아이를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설사 찾는다 해도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오래 전 자신의 딸아이도 그렇게 사라졌다. 늘 그렇듯 병옥은 차 안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이 비정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태엽을 감은 시계처럼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현실은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비정할 정도로 잘 흘러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 아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했다. 박제천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 이었다. 정말로 조카딸의 실종 뒤에 그들이 배후에 있다면 박제천이 죽은 지금 조카딸의 이용가치는 사실상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곧 누군가에게 상품처럼 팔려 나간다는 걸 의미했다.



만일 박제천이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면 필시 자신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대비해 어딘가에 그들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남겼을지도 몰랐다. 병옥이 김 형사에게 명함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박제천의 집을 방문하고, 사무실을 방문했던 것도 그 단서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중 가장 편리한 수단이라고 여겼던 컴퓨터를 조사해 보려고 했으나 집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중요한 부품들이 도난당해 버린 뒤였다.



관리소장은 십대 짓이라 서둘러 단정 짓고 도난사건을 얼른 덮어버리려 하고 있지만, 병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무실의 잠긴 문은 전문 보안 업체의 시스템이 설치돼 있었다. 침입 당일 정전이 나서 경보시스템이 꺼져 버렸고, 때에 맞춰 잠긴 문을 열 장비를 챙겨와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것도 가출한 십대 아이들이 말인가? 그것은 너무 성급하고 억지스러운 결론이었다.



병옥은 죽은 박제천이 무언가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하드 디스크를 떼어 간 것이라 추측했다. 아직 박제천이 그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정확히 결론 내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가 검은 시장의 구매자로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협력자 였다면 이번 사무실의 침입은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병옥은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주어진 시간은 다 타버리기 직전의 양초마냥 매우 촉박했다. 이 쉽지 않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병옥은 박제천의 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한 친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한 때 잘 나갔던 정부 요원이었던 그는 병옥과 비슷한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힌 그의 정보망은 은퇴한 지금도 훌륭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병옥이 그 친구에게 박제천의 과거와 최근 행적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전화를 건 이상 빠른 시일 내에 그에 관한 좀 더 면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 어떤 자세한 정보가 입수될지는 모르지만, 안개가 자욱이 끼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난국을 조금이라도 타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병옥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어렵고 힘든 난관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실종된 여자 아이의 부모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두개골이 깨질 듯한 두통은 점점 커져 갔다. 병옥은 조수석 바닥에 내팽겨 쳐진 두통약 통에서 두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물도 마시지 않고 두통약을 아작아작 씹어대면서 병옥은 오른 발에 힘을 주어 가속페달을 지그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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