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스승님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남자고, 원래 기본 바탕이 있으니 나 같은 애의 마음을 모른다. 만약에 그가 우리 가족을 봤다면 왜 내가 주눅 들었는지 이해해줄까?  

지하철이 시청 역에 멈추자 사람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왔다. 넘어지려다가 앞 사람의 등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내가 닿은 게 기분 나쁜지 힐끗 보는 여자에게 씩 웃어보였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물러난다. 순간 나 역시 삼차신경통이 상당히 가라앉으면서 송곳니가 80%정도 완성됐다 는걸 느꼈다. 그녀는 내 왼쪽 송곳니를 본 게 틀림없고, 그에 당황한 얼굴로 아이를 잡아끌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송곳니를 들켰다는 게 찝찝하긴 하지만 생활의 원천이 마침내 나타났다는 기쁨 때문에 날아갈 듯이 계단을 올라 한강 둔치에 도착했다. 사람들도 많고 천막도 많았다. 몇 천 명은 되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돗자리를 펴고 풀 밭 위에 앉아 있었다. 달걀을 까먹기도 하고 수줍게 김밥을 입에 넣어주는 등 일상적인 유원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이제 내 머리에는 장애 수당을 받으러 주민자치센터에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으며, 그저 즐기고 싶다는 일차원적 생각만 남았다.  

[좀 비키지,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잖아]  

누군가가 내 몸을 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또래의 남자애가 손에 어묵국물을 들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 남자애의 체취가 코로 다가오면서 허기가 몰려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에는 내게 혈액을 제공할 사람들이 넘쳐난다. 담배를 안 피는 사람의 피가 제일 맛있고, 5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최고로 신선해 몇 백 년 된 위스키처럼 비밀리에 유통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 하나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지만 스승님은 나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명령 했다. 그건 뱀파이어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지만 전 뱀파이어고 장애가 있을지언정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목을 물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우아하게 스테이크라도 썰어먹을까요?]  
[혈액을 사면돼]  
[돈이 없어요]  
[벌어]  
[스승님도 일 하시나요?]  
[응]
[그럼 저도 그거 하게 해주세요]
[넌 내가 뭘 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아뇨. 모르지만..그게 뭐든 간에 가르쳐주시면 저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안돼. 일자리는 알아서 해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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