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문형은 왼손을 벌려서 엄지와 검지로 목의 경동맥 부분에 살짝 댔다. 오른손은 맥을 짚듯이 왼손 손목에 댔다. 맥이 심한 운동을 하고 난 뒤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단순한 미신이잖아?’




여행 전에 이런 식으로 맥을 짚어서 불길함을 점칠 수 있다고 어떤 책에서 읽었다. 다만 맥을 짚는 쪽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오래 되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2년 만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확실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심장이 이리 뛰는 거라고 정의를 내렸다.




왼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10분이었다. 마침 딱 맞게 벨 소리가 나면서 뉴욕 공항 발 인천 공항 행 0945시 비행기에 탑승을 준비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주머니가 많은 카키색 군용 재킷 밑에 하늘색 셔츠를 받쳐 입었고, 청바지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이 순박하게 생긴 동양인 청년은 트렁크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향했다.




“소지품을 모두 바구니에 담고 이리로 걸어오세요.”




검색을 맡은 히스패닉 계 여자 관리가 딱딱한 사무조로 명령하듯이 말한다. 문형은 지갑과 동전 두 개, 벨트까지 풀고, 신발까지 벗어 공항 직원이 내민 바구니에 모두 넣고 X레이 검사대에 가방을 올려놓은 다음, 검색대를 통과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귀찮다는 듯 손에 든 검색 봉을 움직여 어서 가라고 했다. 다른 흑인직원이 바구니에 담긴 물품을 건네주었다. 검사대에서 가방이 나오고 있었다.




검색대는 무난히 통과했는데 마침 검은 정장을 입은 선글라스 사내 두 명이 제대로 된 검사도 받지 않고 신분증 같이 보이는 것을 검색 관리에게 내밀어 통과하는 걸 봤다. 한 명은 키가 껑충한 젊은 남자였고, 한 명은 젊은 남자보다 머리 하나 반이 작은 통통한 체구의 중년 사내였다.




9.11 이후 대통령이 약간의 자유는 제한될 각오마저 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저 자들은 뭐 길래 그대로 통과한단 말인가? 문형은 그들의 분위기와 직원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비행기 감시 역으로 보내진 FBI 요원쯤으로 짐작했다. 어찌되든 일 없이 인천 공항에 착륙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검색을 마치니 9시 14분이었다. 타기 전에 재빨리 면세점에 뛰어 들어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줄 초콜릿 두 상자를 사서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잭이나 가브리엘라 같은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은 동양문물에 관심이 많다며 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기념품을 사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아예 쳉 린 같은 한류 추종자는 인기 드라마의 DVD 세트를 사달라며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선물을 사서 넣으니 그들이 생각났다. 인사동 같은 데에 가면 적당한 걸 구입할 수 있겠지. 음반점에 드라마 DVD는 널렸을 테고 말이다.




9시 15분이 되어 탑승을 시작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따라 지정된 창가 좌석에 앉았다.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들은 이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각선 앞으로 가운데 좌석에 착석했다.




9시 45분이 되어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였다. 몇 번 타 봤지만 이때는 몸이 흔들거려서 이상한 기분이 든다. 다른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고 있었다. 활주로에 다 와서 곧 이륙하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엔진이 최대 출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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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HS=시간이동+역사(픽션)+서바이벌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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