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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옥의 허무를 머금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이 복도를 한가득 집어삼키고 있다. 어둠은 속을 게워낼 정도로 지독한 피비린내를 은은히 내뱉고 있었다. 어둠이 내뱉는 비린 숨결은 뒷구멍으로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에 섞여 있는 것들이었다. 이런 재수 없는 악취를 내뿜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누구의 원한이라도 산 듯 시체들은 성한 곳 하나 보이지 않고 갈가리 다져져 마치 고기 다짐 뭉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생고기 다짐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복도를 한가득 적셔놨으니 어찌 좋은 냄새가 날 쏘냐. 만약 살아있는 누군가가 이 복도에 다다랐다면 단연코 토악질부터 해댔으리라.
그런데 복도의 한 켠. 아무도 없을 거 같은 이 복도에 '살아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미스릴처럼 창백한 우윳빛 피부에 광대뼈가 보일정도로 마르고 갸름한 얼굴의 남자가 전신에 피 절임이 된 사내를 끌어안고 있다.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내를 내려다 봤고, 사내는 피가 흘러내리는 명치 곁을 쥐어 잡고는 근근이 이어지는 숨결의 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얼마간 사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사내가 입을 벌렸다. 얇고 옅은 분홍빛 입술이 열리고 그 속에서 예리한 비침 같은 송곳니 두 개가 번득거렸다. 남자의 송곳니는 사내의 오른쪽 목 언저리 정확히 경동맥과 목이 연결되는 부분을 뚫고 들어갔다.

“크억.”

사내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내는 마치 약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몸에 힘도 스르르 빠져나간 듯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꿀걱. 꿀걱. 꿀걱.
그렇게 흘렸는데도 아직 나올 피가 있는지 남자는 입 안 가득 피를 모아서 들이켰다. 남자의 목울대가 한번씩 크게 움직일 때마다 한 움큼의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는 야수의 숨소리마냥 낮고 음산했다. 피를 들이키는 남자의 눈앞에 하나의 영상이 떠오른다.

- 어째서 나를 피하는 건가요?

남자가 여인을 보며 물었다. 여인은 제법 담담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겁이 든 얼굴로 남자를 보며 답한다.

- 솔직히 나는 네가 무서워.
- 어쩐 면에서요?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당신한테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남자는 여인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약 45도 정도 돌려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여인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 그래, 고마워. 네가 나를 생각해주고, 나에 대해 많은 걸 해주려고 하고, 또 했고 한 것 알아. 알기 때문에 고마워. 네 친절을 정말 뭐라 표현할지 모를만큼 고마운데. 어느 순간에 그 무엇보다 무서워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폭발해 나오는 네 또 다른 모습에 나는 가끔 진저리처질 때가 있어.

남자는 여인의 말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엇인가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여인은 흔들거리는 아지랑이처럼 스르르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사내는 여인이 사라진 그 빈 공간을 멍하니 보며 나지막이 마치 혼자에게 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 나는 당신이 생각한 만큼 그렇게 잔인하지 않아요. 설사 내가 잔혹한 악마라 할지라도 자신이 정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잔혹함을 내비치고 싶진 않은 겁니다.

피를 어느 정도 양이 차게 마신 사내는 품에 있는 한낮 고기 덩어리를 턱하니 땅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이 음흉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며 남자는 누군가에 얘기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악마가 아니에요. 내가 진짜 악마였다면 당신들 때문에 이렇게 한심한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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