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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언더워드(7) - 완결

2004.01.04 14:5401.04

#
  
우리는 가장 단아한 결과를 선택했다.

불타오르는 책들로 이루어진 도서관.

혼란과 질서를 모두 포함하는 세계의 표상.

텅빈 열람실에서 <그>와 <나>는 마주보고 있다.

  


#

그의 오른 팔에는 <소녀>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그 머리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단지 너에 대한 <금지>일뿐.

  <그>의 입에선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내것을 돌려줘"

  내 오른팔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른쪽이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그>를 향해 꿈틀거리며 기어갔다.

  곧 그것은 <그>의 비어있는 왼쪽어깨에 결합했다.

  나는 그것이 남긴 핏자국, <나>와 <그>사이를 잇고

  있는 검붉은 흔적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내가 승리하는 장면이다.

   <그>가 <열렸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내가 격렬히 미워하는 단어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 안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단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곧 내가 찾던

   단어가 나타났다. 과거에서 시작하여 미래로 사라지는

   그것을 향해 나는 손을 뻗었다. 맹인이 점자를 더듬듯,

   나의 혀는 그 이름을 음소에서부터 철저하게 핥아냈다.

   손을 들어 내 입술을 훔쳤다. 아슬하게 걸려있던 다른 단어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것은 가식적인 체념이다.

   나 또한 그에 걸맞는 무의미한 분노를 담아,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니 <나>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는 파괴되었다.

    

#

   사랑과 증오를 담아, 두 세계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내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너져내렸다. 그를 이루고

   있는 것에서 나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은 어찌보면 예정된

   것이었다. 나의 세계는 복원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그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결과 나는 지금 우리집 화장실의 변기를 붙들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문밖에서는 식구들이

   언제나처럼 나를 재촉한다. 거기서 나와!

   지금은 내가 승리한 후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변기를 들여다본다. 그 물위에 떠있는

   단어들을 본다. 그것은 나의 이름으로 오염되어 있다.

   문득 <소녀>를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결코 정확할 수 없을 단어들이

   어떤 얼굴을 만들어내려고 애를쓰며 엉겨붙고 있다.

   나는 그 얼룩을 보았다. 그리고 물을 내렸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 그 단어뭉치들이 무엇을 닮았든,
  
   닮지 않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더 아래에 있다.
  


  

   마침.





  
후기_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공정하게 평하자면
  이 이야기는 단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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