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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환각

2023.02.28 18:3002.28

누군가가 욕을 내뱉었다. 입에 담거나 글로 쓰기도 어려운 상스러운 욕이었다. 두려웠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제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만 났다. 린은 입을 다물고 노트북으로 온라인 쇼핑몰 홈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본인이 운영하는 쇼핑몰이었다. 나는 이번 달에 회사가 얻은 이익금을 표로 만들어서 정리했다. 그걸 린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이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린은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조곤조곤했다. 평소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씨지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은 빼고 업무시간 동안 린은 필요한 말만 하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된다. 이곳에 입사하고 한 번도 린이 업무시간에 딴짓하거나 잡담하는 걸 보지 못했다. 린의 이름은 박아린이었는데 그녀는 자기 성씨와 이름을 싫어했다. 어감이 안 예쁘다고 했었나. 박아라, 뭐를 박아라. 그렇게 들린다고 했었나. 박아린 앞에 두 글자를 빼고 린이라는 새 이름을 만들었다. 회사 홈페이지 맨 아래에는 ‘박아린 대표’라고 적혀있지만, 옷을 입고 나온 모델은 항상 ‘린’이었다. 회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린과 박아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린은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생 시절 모아놓았던 돈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었다. 취업 사이트를 보다가 이 사무실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가깝고 새로 생긴 회사라 들어가기 쉬워 보였다. 입사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하루가 안 되어서 사무실에 면접 보러 오라고 답장이 왔다. 면접을 본 곳은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일인용 소파가 네 개가 둥근 탁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휴게실로 들어가는 출입문 왼쪽 벽에는 싱크대가 있었다. 싱크대 옆에는 컵이 몇 개 있었다. 바닥에는 분홍색 상자가 있었다. 안에는 커피믹스 봉지랑 녹차 티백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옆에는 파란색 상자가 있었는데 보아하니 쓰레기통이었다. 커피믹스 봉지와 녹차 티백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커피로 잠을 깨우고 녹차로 마음을 붙잡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상자들의 색이 예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린이 내 앞에 앉았다. 소파에 앉아서 면접을 봤다. 사무와 상거래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력서를 미리 이메일로 보냈었다. 나는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고 컴퓨터활용능력 1급 자격증도 가지고 있었다. 린의 말을 들어보면 면접 중에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여기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돌아가지 않도록 붙잡는 듯했다. 아무튼 그 면접에서 합격했고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쉽게 합격해서 일이 힘든가 걱정했지만, 아니었다. 노트북을 쓰는 평범한 업무였다. 나는 상업고등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다. 웹사이트로 벌어들인 금액에서 세금을 뗀 값을 계산하고 웹사이트 유지 비용을 계산하고 택배사와 계약해서 낼 돈을 계산했다. 계산만 하는 일은 지루했지만 괜찮았다. 일하다가 잠깐 쉬면서 커피를 마셔도 됐다. 점심시간도 한 시간으로 넉넉했다. 어쩌다가 점심시간이 끝나고 몇 분 늦게 왔다고 누군가가 질책하거나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집과 사무실은 건물 두 블록 거리였다. 출퇴근하기 편했고 지각할 일도 없었다. 회사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직업은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에는 린과 나 말고도 두 직원이 있었다. 둘 다 여자였다. 이름은 성미와 은지였다. 두 사람은 스물다섯이었다. 나는 스물하나였다. 겉보기에 세 사람은 나이 차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성미는 옷을 디자인했다. 스케치한 도안을 옷을 만들어주는 업체에 보냈다. 업체에서 만든 옷을 택배로 회사에 보내면 그것은 재고가 된다. 그래서인지 웹사이트에서 옷을 소개할 때는 제휴업체라고 썼다. 은지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인지 사무실에 잘 보이지 않았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가운데 절반은 은지가 찍은 것이다. 가끔 사무실에서 노트북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나보다는 일이 적어 보였다.

옷의 모델은 거의 린이 맡았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여자치고는 컸다. 날씬하고 팔다리도 길어서 옷맵시가 있었다. 옷 사진의 모델은 한 번 부르는데 보통 몇십만 원이 들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대표가 직접 모델을 했다. 린은 옷을 어디론가 들고 가서 사진을 찍어 왔다. 나도 따라가서 사진 찍는 걸 몇 번 봤었다. 촬영 장비를 옮겨줄 건장한 남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건강하지 않아요. 당뇨도 있고 어지러워요. 말하려다가 참았다. 촬영장에서 흰색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몇 번 사진을 찍어줬다. 린이 일당을 주고 부른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다. 남자 옷 사진이 필요하면 일당을 주고 남자 모델을 불렀다. 사진들을 파일별로 분리하는 건 내 일이었다. 사진을 모아서 웹사이트에 올렸다. 가격을 매기고 옷을 팔았다. 새 옷을 출시하면 그달은 장사가 잘됐다. 매출이 올라간 달의 마지막 날에는 린이 종이로 인쇄한 실적표를 보고 웃었다. 평소에는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잡담했다.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 치아를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서 ‘쉬는 시간의 잡담’이라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성미는 노트북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너 몇 살이었지?”

“스물하나요.”

“군대는 안 다녀와?”

“면제에요.”

“왜?”

“당뇨가 좀 심해서요.”

거짓말도 참말도 아니다. 당뇨가 있었지만, 면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나에게는 당뇨와 별개로 심각한 질병이 있다. 바로 환각이다. 병역판정검사 때 조현병이 있다는 진단서, 생활기록부, 임상심리검사 결과지를 검사관에게 냈다. 검사관은 몇 분 만에 전시근로역이라고 말했다. 전시근로역은 면제랑 거의 같았다. 나는 5급이라고 적힌 병역판정서를 가지고 검사장을 나왔다. 환각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환각’ 그리고 ‘현실과 구분할 수 있는 환각’이다. 나는 후자였다. 자주 보는 환각은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항상 자기가 내 애인이라고 주장했다. 밥을 먹을 때도 나와 같이 있었고, 잠을 잘 때도 내 옆에서 잤다. 여자는 이름이 없었다. 일단 서아라는 이름을 지었다. 서아를 처음 본 해에 여자 신생아에게 가장 많이 붙이는 이름이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내가 본 걸 말했다. 의사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무언가 입력을 마친 의사는 가운의 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의사는 몇 가지를 물었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간관계는 어떤지, 오늘이 며칠인지였다. 아는 대로 대답했다.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의 한숨인지 고민의 한숨인지 모르겠다. 의사는 말했다.

“조현병의 초기 증상입니다.”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조현병은 환경이나 정신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호르몬 이상이나 선천적인 이유로도 생깁니다.”

약을 처방해줄 테니 한 달에 한 번씩 오라고 했다. 손을 들어서 다섯 손가락으로 진료실 벽에 있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문 너머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 있던 프린터에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진료순서표라고 적혀있었다. 간호사는 종이를 건네면서 1층으로 내려가서 접수하라고 했다. 체크카드로 결제하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약은 효과가 있었다. 약을 먹으면 적어도 세 시간은 환각을 보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끝까지 올리는 일도 없어졌다. 이유 없이 거실을 도는 시간도 줄었다. 대신 그림을 그렸다. 나는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림을 잘 그렸다. 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에게 그림을 유독 잘 그린다고 칭찬받았었다. 교내 미술대회에서 3등도 했었다. 내 그림은 원근감이 좋았고 구도가 정교했다. 다만 미술을 직업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림 그리기는 즐겁지 않았다. 그릴 때마다 팔이 아팠다. 날을 잡고 그림만 그리면 팔이 상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 돈을 벌 수 있는 특성화고등학교를 골랐다. 일반계고등학교를 가지 않은 이유는 대학입시와 야간자율학습이 싫어서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하고 싶었다. 비싼 돈을 내고 대학에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 알약을 회사 가져와서 먹는다. 아침을 먹지 못하면 휴게실에 잠깐 들러서 주전부리를 먹고 당뇨약과 항정신병제를 먹는다. 다른 직원이 무슨 약이냐고 물으면 당뇨약이라고 한다. 서아는 집에서만 나타났었지만, 최근에는 회사에서도 나타났다. 내가 노트북을 보고 있으면 옆에서 “뭐 해?”라던가 “같이 놀아줘”라고 말한다. 환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무시한다. 집에 있을 때는 심심해서 같이 놀아주지만, 일할 때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 주문된 옷들을 포장하러 창고로 갔다. 투명한 비닐에 감긴 옷들이 선반마다 쌓여있었다. 꺼낸 옷 가운데 검은색 카디건이 하나 있었다. 서아와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흰색 원피스와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생각에 잠겼다가 금방 후회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으니까. 서랍에서 택배 봉지를 꺼내서 옷을 포장했다. 오후에 택배사에서 오니까 기다리면 된다. 회사가 끝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출입문 옆에 있던 린이 같이 술 먹자고 했다. 환각 때문에 웬만하면 집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지만 가겠다고 했다. 서아가 종일 귀찮게 해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게다가 퇴근 직전에 빵과 함께 약을 먹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린은 소주를 좋아했다. 나는 스무 살이 된 1월 1일에 소주를 마셨지만. 맛없어서 못 삼킬 뻔했다. 그날 후로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대신 시원하고 탄산이 있는 맥주를 마셨다. 맥주잔을 입에 붙이고 있었다. 린은 소주를 다섯 잔 마셨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회사 차려서 이렇게 잘살고 있다. 나는 정말 대단해. 이렇게 말했다. 린은 적게 마시고 많이 취했다. 나도 쉽게 취하는 체질이지만, 술버릇은 거의 없다. 말없이 술을 마시는 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에게 무슨 약을 먹냐고 물었다. 당뇨약을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약이 든 봉투가 두 개냐고 물었다. 언제 그걸 봤었나. 조현병 약이라고 말하려다가 우울증 약이라고 고쳐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항정신병제에 항우울제가 섞여 있으니까. 린이 그런 정신상태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쏘아붙이거나 더 이상 회사에 나오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린은 최대한 좋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힘들었겠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린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건배를 하자고 했다. 잔을 맞부딪혔다. 술을 단숨에 마셨다. 다섯 번째 맥주잔을 비우자 술 안에 있는 알코올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뇌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했다. 알코올이 시신경까지 파고들려고 하자, 나는 이제 일어나자고 했다. 더 이상 마시면 환각을 보겠다. 린은 많이 취했다. 붉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나는 집까지 걸어갔다. 십 분만 걸으면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을 여니 서아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출근할 때 텔레비전을 끄고 집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텔레비전은 꺼져 있다. 서아는 검은 화면을 보고 실실거렸다.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다. 내가 소파에 앉자 서아는 오랜만에 남편을 본 여자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내 목을 팔로 감쌌다. 처음 환각을 느낄 때는 서아를 만지지 못했는데, 지금은 서아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서아의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게다가 차가웠다. 목이 서늘해져서 놀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느끼는 환각이 서아 말고도 더 생겼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피투성이에 귀신같이 생긴 게 욕조 안에 있었다. 앞머리가 워낙 길고, 복슬복슬한 산발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보였다. 무시하고 양치하고 세수했다. 씻고 옷을 입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길을 걷다 보면 길바닥에서 서커스를 하는 광대 복장의 남녀도 보인다. 그들은 나에게 후원금을 조금만 달라면서 고철로 만든 통을 흔들었다. 낄낄 웃고 있었다. 출근할 때와 병원에 가기 직전에 환각을 많이 본다. 약이 떨어졌을 때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원래 있었던 병원 예약을 미루는 일이 잦았다. 원래 금요일에는 빨리 끝나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가끔이지만 이미 먹었던 약을 한 시간 뒤에 다시 먹는 일도 있었다. 약을 못 먹은 지 오래돼서 조심스러웠다. 병원 계단 하나하나를 오를 때마다 벽에서 뭐가 튀어나와 나를 해칠지 몰랐다.

그래도 몇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내 조현병은 약했다. 먹는 약은 나에게 잘 맞았다. 지능이 낮아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환각이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사도 환자들 가운데 드물게 있는 사례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약을 줄일 수 있었다. 의사는 내게 직업이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의류 회사에서 일하고 취미로 미술을 한다고 했다. 의사는 그게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의사는 이제 가보라고 했다. 약국에서 내놓은 약을 확인해봤는데 저번 달과 큰 차이는 없었다. 약을 먹으면서 큰 문제는 사라졌다. 의사는 먹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네모난 녹색 알약 덕분이란다. 그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졸렸다. 익숙해지면 아무리 먹어도 잠이 안 온다. 노란색 알약도 잠이 오게 했지만, 잠이 오는 부작용이 있는 게 아니라 잠을 푹 자게 해주는 약이었다.

약을 늘리기 전에는 망상도 있었다. 아마 한 달 정도 망상에 시달렸다. 성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망상이었다. 성미가 커피를 가져다주거나 말을 거는 건 다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성미와 연인 관계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나는 여자와 오래 함께 있으면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 짝사랑은 커졌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든다. 여자를 바라보면서 좋아하고 있다가 갑자기 여자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성미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한 달 동안 성미에게 쿠키를 나눠주거나 생일선물로 유리컵을 주는 친절만 보였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성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성미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했고 업무 이외의 이유로는 말을 잘 걸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친한 동료로만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캔버스와 이젤을 샀다. 캔버스는 알지만, 이젤은 뭔지 몰랐다. 캔버스라는 천을 받쳐주는 받침대였다. 이때 캔버스가 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옛날엔 캔버스가 종이인 줄 알았다. 캔버스는 4,000원이었다. 이젤은 비싼 줄 알았지만 20,000원이었다. 붓과 물감과 팔레트는 사무실 근처 문구점에서 샀다. 접었다 펼 수 있고 칸막이가 있는 금속 팔레트를 사려다가 도마처럼 생긴 나무 팔레트를 샀다. 금속 팔레트는 뭔가 꺼림직했다. 잡다가 모서리에 찍혀 상처가 나면 어쩌지. 멋있지도 않았다. 자연스러운 게 필요했다. 화가에게는 부드러운 질감의 나무 팔레트가 어울린다. 성미에게 모델을 부탁하려다가 거절할까 무서워서 포기했다. 성미 대신 서아를 그렸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서아에게 잠깐 누우라고 했다. 정말로 소파에 누웠다. 그 자세는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본 프랑스 미술관의 서양화 같았다. 얼굴은 하늘을 향해있었다. 허리를 적당히 비틀었다. 상반신은 비스듬했다. 멋진 자세였지만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현실 같은 그림보다는 인상 깊은 그림이 좋았다. 선이 거칠었다. 인체 비율도 실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림 속 척추뼈는 열다섯 개였다.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었다. 대신 그림은 생동감이 넘쳤다. 그림을 완성했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 분쯤 생각하다가 「첫 번째 소녀」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림을 사진으로 찍었다. 온라인 화랑에 이메일로 사진과 연락처를 보냈다. 사흘 만에 그림을 사겠다고 연락이 왔다. 화랑이 제시한 값은 150,000원이었다.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이 돈만 있으면 카페에서 커피를 사거나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그림 가격을 듣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전화한 직원이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스물하나고 대학은 안 다닌다고 했다. 직원은 믿을 수 없다며 그림을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 나무로 된 액자까지 사서 소포로 포장해서 보냈다. 배송비와 액자값까지 합해서 계좌에 165,000원이 들어왔다. 나흘 뒤 온라인 화랑에 들어가서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 내 그림을 300,000원에 팔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얼마 없는 정통파 화가라고 쓰여있었다. 그림을 확인하고, 회사에 출근한 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성미에게 들려줬다.

“그림을 잘 그리면 한 번 그려봐.”

성미는 자기가 쓰던 전자 그림판을 나에게 건넸다. 옷을 디자인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나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성미의 책상에서 그림을 그렸다. 적당히 원근감과 구도가 잡혀있는 여자를 그렸다. 르누아르의 그림 같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은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같았다. 물론 구도가 그랬다는 거다. 실제 서양화와 똑같지는 않았다. 점심시간 동안 그런 완벽한 그림은 완성 못 한다. 선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성미는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림을 SNS에 올려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했다. 성미는 그림을 인스타그램 프로필로 해놓았다. 한번 접속해봤다. 프로필은 정말 내 그림으로 되어있었다. 그 밑에 성미의 게시글도 눈에 띄었다. 꽃, 음식, 자기 얼굴 사진을 잔뜩 올려놨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 좋았던 점이 있다. 아무도 나를 정신병자로 몰지 않았다. 친구들과 거리를 뒀었던 학창 시절과 달랐다. 애초에 회사는 학교와 달랐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언제든지 화장실에 갔다. 나는 방방 뛰고 싶거나 욕을 내뱉고 싶을 때,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았다. 귀에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환청을 지우고 머리를 비우게 해준다. 주로 듣는 건 높은 목소리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알아먹지도 못하는 가사의 노래였다. 가사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였다. 노래를 듣는 동안 뇌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럽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노래가 끝나면 팔다리를 떨고 기지개를 켰다. 그때마다 한의사가 직접 몸의 뼈와 관절을 제자리에 맞춰주는 것처럼 시원했다. 사무실로 돌아갔다. 직원들은 화장실에 십수 분이나 있었다고 따지지 않았다. 근무 시간에 짧은 휴식이었다.

오후 4시가 좀 넘어서 빵 하나를 먹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크림빵이었다. 우유 대신 정수기에서 떠온 물로 메인 목을 내렸다. 목에 있던 음식물이 위를 채웠다. 아무리 독한 약을 먹어도 미리 먹은 음식물이 위를 지켜준다. 주머니에서 약이 든 봉투를 꺼냈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약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회사에서 약을 먹는다. 항상 약 봉투를 항상 가방에 넣어놓고 다녔다. 집에 가면 가방을 바닥에 던져놓아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종종 잊어버린다. 차라리 회사에서 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에 두 번, 세 번이었다가 결국 평일에는 항상 회사에서 약을 먹게 되었다. 직원들은 내가 약을 삼킬 때마다 걱정했다. 보기에는 약이 크고 많았다. 당뇨약과 항정신병제를 모두 한 손에 담으면 탁구공 하나 정도였다. 먹다 보니 한 번에 약을 삼키는 요령이 생겼다. 주저하지 않고 약을 삼켰다. 물은 조금만 입에 머금으면 된다. 약을 먹는 건 무섭지 않았다. 약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따로 있다. 약을 먹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자르거나 일을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퍼졌음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직원들은 내가 필요할 때 일을 줬다. 월급도 적당했다,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덕분에 걱정 없이 병원에 다녔다. 회사가 일찍 끝나는 금요일이나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었다. 그때는 토요일이었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인사했다.

“이제 환각이 딱히 없어요.”

“아예 없나요?”

“아예 없지는 않아요.”

사실 환각이 모두 사라지진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헝클어진 머리를 한 피투성이 귀신은 이제 거의 안 보인다. 길가에서 광대 분장을 하고 춤추는 남녀도 없다. 구름 대신 날개 달린 오징어가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오로지 서아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마다 서아는 항상 집에 있다. 소파에 눕거나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지 않았다. 가끔은 바닥에 누워있기도 하고 현관문을 열면 내 눈앞에 서 있기도 했다. 많은 환각이 사라졌지만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사는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약을 써야겠다고 했다. 조현병이 어느 정도 나았을 때, 사용하는 약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약을 받았다. 직육면체처럼 생긴 알약이 있었다. 종이로 된 갑에 담겨있었다. 이번에 약을 바꾸면서 한 가지 결심했다. 그림을 자주 그리자. 그럼 환각이 끝날 때까지 한 점이라도 더 남길 수 있다. 나는 약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서 서아의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를 여러 장 사놓길 잘했다. 서아는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소파에 정면으로 앉아있었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중세 유럽처럼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림이 완성될수록 서아가 환각이라기보다는 미술인으로서 능력이 아닌가 싶었다. 비록 한 명의 여자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보는 건 대단했다. 나는 그림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환각을 보기 위해서 약을 거르지는 않았다. 약을 거르면 무슨 참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 조현병이 심했을 때, 벽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스스로 잇몸을 때리기도 했다. 서아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정신병이 없는 삶이 더 좋았다.

정신병은 사라져갔지만, 그림 실력은 점점 좋아졌다. 그림을 사 갔던 온라인 화랑은 300,000원을 제시하며 그림을 또다시 사 갔다. 며칠 만에 그린 그림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이번에는 직접 직원을 보내서 그림을 가져갔다. 직접 내 집에 찾아왔다. 내가 지금까지 그린 작품은 다섯 점이다. 이러다가 정말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될 정도로 온라인 화랑에서 내 그림을 조금 비싸게 팔았다. 그림에 이름을 지은 적이 없는데 온라인 화랑은 「첫 번째 소녀」 말고도 「다섯 번째 소녀」까지 이름을 지어서 내 그림을 홍보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소녀」와 「네 번째 소녀」는 팔렸었다. 만약 내 그림을 산 사람이랑 만날 수 있다면 그림에다가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사인을 해줄 테다.

성미에게 그림을 화랑에 다섯 점이나 팔았다고 이야기했다. 성미는 타블렛을 건넸다. 한 번 더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성미는 내 옆에 앉았다. 성미와 몸이 가까워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말했다.

“성미 선배는 저랑 남녀로 만나볼 생각이 없어요?”

“미안해. 그냥 친한 선후배로 지내자.”

펜을 멈출 뻔했다. 숨을 멈췄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림을 계속 그렸다. 여자에게 사랑을 거절당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착잡하고 속상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좋게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날 오후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림을 잘 그려서, 일을 잘해서 여자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에 시선을 맞췄다. 화장실을 다녀온 린은 내가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이상했는지 힐끔힐끔 보았다. 며칠 동안 성미는 내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성미는 입이 무거운가. 내가 사랑을 고백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성미는 나를 평소처럼 대했다. 필요하면 말을 걸었다. 퇴근하면 인사했다. 고백받은 걸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도 들었다. 퇴근 시간이 되고 나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문 옆에 린이 서 있었다. 린은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성미와 은지는 일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으니 둘이서 마시자고 했다. 좋다고 했다. 술값을 나한테 내려는 속셈이다. 이제 월급날이니까. 내가 월급을 받을수록 린의 돈은 줄어든다. 우리는 회사에서 가까운 술집에 갔다. 저번에 술을 마셨던 맥줏집이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가장 출입구 바로 앞 탁자에 앉았다. 직원이 내놓은 진미채 구이를 적당히 조각내서 입에 넣고 씹었다. 그걸 보고 있던 린이 말했다.

“나랑 사귀자.”

“무슨 말씀이시죠?”

“너는 괜찮은 남자 같아. 나도 슬슬 시집가야 할 거 같아서.”

“죄송해요. 제가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그렇구나.”

말을 끊고 싶었다. 나는 맥주잔을 내밀면서 오늘은 건배하고 마음껏 마시자고 했다. 린은 자기 잔을 들고 건배를 받았다. 린은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혼자 소주 두 병을 비웠다. 둘 다 술에 잔뜩 취했다. 택시를 불러 그녀를 집으로 보냈다. 린이 탄 택시의 기사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창문 너머로 택시 기사에게 50,000원을 건넸다.

“택시비에요. 잔돈 생기면 그냥 가지세요.”

택시를 보냈다. 나는 걸어서 집에 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서아는 보이지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에 섰다. 서아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나타나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세탁기 옆에 던졌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다가 여행 프로그램이 나왔다.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알프스산맥. 차라리 사람 대신 풍경화를 그릴까. 스마트폰을 켰다. 산맥 사진을 검색했다. 조금 훑어보고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만 해놓고 잤다. 그림은 오늘 완성하지 못했다. 졸리고 취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선이 휠 것이다.

아침이 되자 그림을 놔두고 회사에 출근했다. 성미와 린은 안녕이라고 했고 나도 인사했다. 자리에 앉았고 그녀들은 평소처럼 모니터를 보며 일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기로 약속했나.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왔나. 아니면 고백한 것도 고백받은 것도 거절당한 것도 거절한 것도 전부 망상인가. 잘못된 기억인가. 환각인가. 생각에 잠겼다가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퇴근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도했다. 다행히 오늘은 움직이거나 어디를 오가는 업무가 없었다. 노트북 앞에 오래 앉아있으면 잡생각이 줄어서 좋다. 시간도 빨리 흐른다. 집중만 하고 있더니 업무가 남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집에 갔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서아가 있었다. 평소의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 아니었다. 서아는 주름치마와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세련되고 예쁜 옷차림이었다. 왜 그런 차림이냐고 물으려다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아는 창문을 그대로 통과해 3층 밖으로 떨어졌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서아의 몸이 흰색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공기와 섞여 사라졌다. 그 연기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투명한 물에 퍼지는 잉크 같았다. 색감이 좋았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 서아는 나에게 작별인사하러 잠깐 집에 왔나. 사실 서아는 환각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초월적인 존재일지도. 아니 잘 모르겠다. 과거에는 조현병 환자를 신들린 사람,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고 여겼다고 들었다. 서아는 요정인가 악마인가. 나는 서아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색을 그림으로 옮기기로 했다.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풍경화를 냈다. 온라인 화랑의 운영자는 80,000원을 불렀다. 저번보다 싼값이라고 따졌다. 그림이 작아서 이 정도 가격이라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림을 팔았다. 입금된 걸 확인했다. 스마트폰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정수기에 뜨거운 물을 따르고 커피를 타 마셨다. 카페인이 신경을 타고 퍼졌다. 이게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인가. 커피 열매가 처음에는 종교인들의 수행을 도와줄 때 썼다고 했으니 얼추 맞는 말이었다. 그래 나는 깨달았다. 정수기 옆에 있는 선반을 열어서 은색 포장지에 감겨있는 약을 꺼냈다. 의사가 저번에 처방했던 서아를 죽였던 약이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약이 두 알 남았지만 버리고 싶었다. 책상에 앉아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다음에 의사를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적어놓아야지.

약을 바꿔주라고 했다. 의사는 부작용이 있었냐고 물었다. 뭔가 울적하고 힘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키보드 옆에 놓인 종이에 볼펜으로 무언가 썼다. 나는 눈을 흘겨 그 종이를 보았다. 어느 나라 언어인지 모를 의학용어라서 읽지 못했다. 의사는 가보라고 했다. 진료가 끝나고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에는 지난달에 받은 흰색 알약은 들어있지 않았다. 약이 바뀌었지만, 서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환영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나에게 귀신도 광대도 날개 달린 오징어도 없다. 조현병이 깔끔하게 낫지는 않았다. 환각과 망상이 거의 사라졌지만 다른 증상이 하나 생겼다. 시간이 나면 뜬금없이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다. 편지였다. 문구점에서 돈을 주고 산 말끔한 흰색 편지지. 금속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수성펜. 내가 쓴 편지였지만, 편지를 누구한테 썼는지, 편지를 받는 사람이 실존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항상 무의식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 봉투에 담아서 둥그런 붉은색 스티커를 붙였다. 원래 붉은색 촛농을 떨어트린 다음 도장 같은 걸로 누르려고 했지만, 화상을 입을까 무서워졌다. 편지의 첫 번째 단어를 ‘To’로 할지 ‘Dear’로 할지 잠깐 고민했다. ‘Dear’가 더 멋있어 보여서 ‘Dear’를 썼다. ‘Dear’ 뒤에 적는 이름은 때마다 달랐다. 어머니일 때도 있었고 누나일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분명했지만, 누나는 친누나인지 아는 누나인지 허구의 인물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정신과 의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누구에게 편지를 썼든 간에 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옷을 담는 파란색 뚜껑의 수납함이 있었는데 편지가 완성될 때마다 거기에 넣었다. 어느 날은 내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는지 궁금해서 수납함을 열어봤다. 처음으로 꺼낸 건 어머니에게 쓴 편지였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글을 반복해서 썼다. 성미와 린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언제 쓴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성미에게는 너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네가 불편해할 거 같으니까 그냥 편지를 안 보내고 가지고 있을게. 린에게는 고백을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너를 좋아해. 이렇게 적혀있었다. 왜인지 어머니에게도 상사에게도 반말이었다. 네 번째로 편지지를 꺼냈는데 그건 서아에게 쓴 편지였다. 너는 실제로 있지도 않은 사람이었고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지만, 조금이나마 놀아줘서 고마웠어. 이렇게 적혀있었다. 의사에게 이 편지들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걸 보여주면 의사가 내 병을 심각하게 생각하겠지. 게다가 약을 다시 늘릴 거야. 의사는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약이 잘 통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신질환은 증세가 멈춘 후에도 6개월은 약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약을 받았는데 약 봉투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말은 없었지만, 의사는 약을 조금 줄였다.

회사 점심시간 때 성미가 일을 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린과 은지가 성미에게 위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위암이라도 걸렸나 싶었지만. 대화를 들어보니까 위암이 아니라 위염이 맞았다. 린은 병문안이라도 갈까 중얼거렸다.

“그건 안 될걸요.”

내가 말했다.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린이 왜냐고 물었다. 입을 안 보고 있었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린이 한 말이다.

“위염은 스트레스에 약해서요.”

나는 ‘우리가 가면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그랬다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예의 없는 말을 했다고 후회하게 된다.

집에 돌아왔을 때, 스마트폰을 보았다. 성미가 게시글을 올렸다고 알림이 왔었다.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사진이었다. 얼굴은 나오지 않았고 새하얀 팔과 바늘만 보였다. 위가 너무 아파서 쓰러질 지경이라는 글도 빠트리지 않았다. 정말 괴롭다기보다는 인스타그램을 하기 위해서 쓴 글 같았다. 우는 얼굴을 표현한 귀여운 노란색 이모티콘이 있었고 해시태그도 달아놓았다. 스마트폰을 끄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책상 옆에 놔뒀던, 편지지가 들어있는 수납함을 옮겼다. 욕조 안에 편지지를 모두 부었다. 창고에 넣어둔 캠핑용 토치를 가져와서 불을 붙였다. 편지지는 열을 만난 눈송이처럼 사그라들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욕실의 공기가 뜨거워졌다. 편지지는 형태조차 남지 않고 불탔다. 샤워기를 틀어서 불을 껐다. 이제 편지지 더미는 남김없이 재가 되었다. 왜 이때까지 편지를 썼는지 깨달았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필요 없었다. 창고에서 거울을 하나 꺼냈다.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환각이 아니라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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