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인은 온 세상으로 난리였다. 남자의 멱살을 잡아 집어던지고, 땅을 구르다 넘어져 악에 받힌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내가 어떻게 널 만났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 증오를 심은 여인은 오직 단 하나만이 남지 않은 듯 하였다. 온 곳으로 악이 내린다. 비가 내린다. 흐르는 물들이 불이 되어 그녀의 주위로 타올랐다. 남자가 떨었고, 소년 역시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요.

 

소년이 아빠의 손을 잡아 여인에게로 간다. 온데로 타오르는 증오들로. 소년은 아빠와 함께 여인의 등을 품어주었다. 소년이 빌듯이 말하였다.

 

제게는 다른 집이 있어요.

저를 품어주고 받아준 곳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여인의 가냘픈 손이 억세게 소년의 자락을 잡아 놓지를 못한다. 여인의 애처로움으로 소년이 속삭인다.

 

전 그곳에서 너무도 행복했어요.

정말이에요, 당신의 울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 아....!

 

그러니, 그러니.

 

소년이 말한다. 떠나온 그 기나긴 곳으로. 한도 없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겁을 먹어 두려움에 떨었던 아빠와 그저 둘 곳이 없어 사방으로 가시들을 찔러대었던 저 여인에게로. 아니, 아니.

 

이제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

 

엄마에게로. 여인이, 아니 엄마가 목을 놓아 운다. 아빠도 참지를 못해 무릎을 꿇었고, 두 사람의 억센 감정이 발치로 모여들다 순간으로 쏟아져 강이 되었다.

 

안 돼, 제발 안 돼...!

 

엄마, 아빠.

 

소년이 울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엄마와 아빠에게로 말한다.

 

누나를 만나러 가요.

함께 만나러 가요.

 

지쳐 울음조차 흘리지 못하는 두 사람이 소년을 잡아 한껏 목을 놓는다. 너무도 놓아 마을이 떠나가도록. 이참에 떠나 아주 떠나서 이젠 저 세 사람만이 남도록. 하지만 시간은 가고 있었고, 생명은 틔어 한참을 자라고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곧 지켜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왕국에서 소년이 배운 것이 있다면 생명은 어떤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존재. 기다리는 존재. 그리워하는 존재. 무언가를 주고 또는 받고서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존재로 말이다.

 

그리고 전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절 기억하고 계셔서.

 

소년이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떨어져 한 발치로 물러난다. 그리고 꾸벅 허리를 숙인다. 그가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부모님.

 

그리고 셋은 다음의 빛으로 나아갔다. 다음의 곳으로 나아간다. 다음의 역으로, 종착지로, 또 흐르고 흐르는 끝이 없을 생에의 단편들로.

 

가요.

 

그가 포도나무 넝쿨 다리를 연다. 시야가 트이고 해변가의 소리가 들려온다. 밭내음과 저녁 빛깔들. 저곳이, 저곳이.

 

저기에 누나가 있어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소년이 누나를 데리러 가고 남은 두 사람, 엄마와 아빠는 이제 자신들에게 남은 생에의 자욱들을 손으로 담아야만 하였다. 증오가 자리하여 떠는 손마디로,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후들대는 다리로. 둘은 일어나 눈을 감았다. 멀리로 낯선 이의 말들이 들려온다. 사박사박. 그리고 발걸음이 들려온다. 사박사박. 그리고 옷자락들이 바람들에 스친다. 사박사박. 두 사람이 눈을 뜬다. 엄마와 아빠의 앞으로 아들과 딸이 서있다. 아들의 손을 잡고서 딸이 서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항상 죄인의 마음으로 견뎌왔던 저 아이가. 두 아이가 말한다.

 

다녀왔습니다.

 

아들과 딸이 집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연과 정한은 자신들이 있던 아이들의 왕국.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일을 털어 놓았다. 어색하게 선 엄마와 아빠는 두 손을 옴짝거렸다. 아들, 정한이 두 사람의 손을 끈다.

 

함께 생각해봐요.

 

연의 옆으로, 오래이 잊고 지낸 딸의 옆으로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앉는다.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제 모습들에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 웃음기가 돈다. 아빠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주인들의 편지가 필요하다며.

그럼 그 주인들을 만나야하나?

 

그건.

 

정한이 머뭇거리자 누나가 대신 설명하여 주었다.

 

주인분들을 일일이 다 만날 수가 없어요.

게다가 언어도, 문화도 다 달라요.

 

아빠가 화들짝 놀란 눈을 한다.

 

그럼 그 장난감 아이들도 다 다른 언어를 한다는 말이잖니!

 

그건.

 

이번엔 연의 말이 막힌다. 정한이 누나 대신 말을 이었다.

 

왕국에선 모든 말이 통해요.

그곳엔 언어가 없어요.

그저 나누고 소통을 하죠.

 

그건 참, 동화 같은 설명이구나.

 

아빠가 예의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적막. 별다른 대안이 없다. 공기가 아래로 흘렀고 조금은 무거웠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존재했고 좀처럼 쉽게 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용기를 내어보았다.

 

그러면 말이다.

 

아빠가 제안을 하나 한다.

 

편지를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편지를 받자꾸나.

그리고 우리가 그 편지에.

 

정한이 눈을 빛낸다.

 

직접 답을 하는 거지.

 

연은 툭 말을 뱉었다. 조금은 까탈스럽게.

 

지어내자는 거예요?

 

크흠.

 

아빠가 기침을 한다. 정한은 곰곰이 턱을 짚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에게로 정한은 꽤나 긍정적이게 답하였다.

 

괜찮은 방법이네요.

 

뭐?

 

정한의 답에 연이 버럭 소리를 친다.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을 이어간다.

 

저희가 아이들을 위해 편지를 적어요.

함께, 함께 적어요!

 

 

 

 

 

정한은 왕국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진짜 주인의 말조차 아니었지만. 그저 혹시나 있을 소망을 위해. 그리고 남은 사람들로 그 소망이 또한 닿기를 왕자는, 아니 정한은 바랐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바람으로 연과 아빠, 엄마는 함께 집으로 남아 잠을 청했다. 한 밤으로 연은 목이 말랐다. 잠시 방을 나온다. 짐이 든 박스들과 먼지들로 쌓여있던 자신의 방. 그 한 켠으로 연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짓거리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걸. 언제고는 다시 집을 떠나야 한다는 걸. 정한의 일을 돕고 나면 다시 떠날 일이다. 그 애의, 그 왕국의 일만 끝나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원래의 세상으로. 그 애가 다시 떠나면, 그때의 그곳으로.

 

방의 밖, 거실의 한 쪽으로 엄마가 있다. 밤이 부는 창과 어느 편으로 그저 앉아 눈을 감고 있으시다. 그녀의 기척에 놀라 연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물을 꺼내 마신다.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냥 지금 떠날까. 지금의 밤으로 아주 떠나 남은 그들의 평안을 빌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왜냐면 난. 연의 목이 숨을 삼킨다.

 

난 잘못 태어난 아이였으니까.

 

얘.

 

연의 귀로 그녀가 부른다. 연은 꼼짝도 않고서 몸을 움츠렸다. 도망을 칠까. 그녀의 두 다리가 긴장으로 경직된다.

 

얘, 연아.

 

자신을 부른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부른다. 연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안다, 얘야 안다.

 

연은 이를 물었다. 방문의 너머로 들리는 것을 그녀는 등으로 막아 새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냥 그땐 모든 게 미웠단다.

 

연은 속으로 삼키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지.

 

그냥 그때에는 말이다.

모든 게 미웠단다.

 

연의 몸이 무너진다. 뭘 말하고 싶은데. 대체 나한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녀의 무너진 몸으로 정한의 소망이 내려앉는다. 연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하다.

 

무너진다. 연의 몸이, 연의 마음이, 온 곳으로 흠이 가득한 유리 어항이. 너무도 깨지어 별처럼 흩뿌려진다. 연은 여전히 두 족속을 믿을 수 없었고, 정한의 바람만이 발치로 내려와 기댄다. 자꾸, 자꾸만 기대어 꿈을 꾼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7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당신에게 해줄 말들 (에필로그) 키미기미 2023.01.14 0
2796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91 키미기미 2023.01.14 0
2795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8 키미기미 2023.01.14 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93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6 키미기미 2023.01.14 0
279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9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9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31 키미기미 2023.01.14 0
278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88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1 키미기미 2023.01.14 0
2787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다음 장으로 키미기미 2023.01.14 0
2786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8 키미기미 2023.01.14 0
2785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84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6 키미기미 2023.01.14 0
2783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8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8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3 키미기미 2023.01.14 0
278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7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1 키미기미 2023.01.14 0
2778 단편 종말의 마라토너 정우지 2022.12.28 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