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정한. 왕자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왕국이 아닌 인간들의 세계에서, 장난감들이 아닌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아닌 경광등의 사이렌 소리에서. 소년은 불편함을 느꼈고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소년은 조금 겁을 먹었다. 자신을 정한이라 부른 여자가 자신의 손목을 끌었고, 단층의 어느 아파트로 몸을 구겨 들어갔다. 문을 연 현관의 바닥으로 여인은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주아주 커다란 폭포가 되었고, 그녀의 폭포수는 마를 새가 없어 보였다. 소년은 겁을 먹었다. 여인은 왕자를, 어릴 적 잃어버린 아들을 데리고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

 

그조차 힘겨웠는지 여인은 잠시도 서있질 못하였다. 울먹이는 투에서 그녀는 절규하였고 안도하는 숨을 거칠게 뱉었다. 여인은 정한을 꼭 잡고서 놓지 않기로 하였다. 정한은 돌아온 집의 향취를 느낄 새도 없이 엄마라 불리는 여인의 품에서 하루의 종일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어디로 갔었니.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요.

툭하고 떨어졌죠.

 

그럼 어디에 있었니.

 

아이들의 왕국에요.

거기 모여 사는 아이들은 전부,

주인분들이 잃어버린 아이들이래요.

 

너도 거기 있었니.

 

네, 쭉 있었어요.

 

우린 널 잃어버리고 싶어서,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알아요, 저도 알아요.

 

아니야, 넌 몰라.

네 누나라는 그 애가 그만 널.

 

알아요, 저도 알아요.

 

내가 누군지 알겠니?

 

누구신가요.

제 주인이세요?

 

아니야, 엄마야.

엄마라고 부르렴.

 

엄마.

 

그래.

그래.

나의 아들.

 

한참을 꼭 껴안은 채 둘은 부둥켜 울었다. 소년은 여인의 바다를 감히 재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깊고도, 어두운 그곳을 들여다보기 무서웠다. 여인이 말한다. 너무나 무서웠다고, 너무나 두려웠다고, 한참을 잃었던 그 시간으로 그렇게나 연약하게 떨어대었다고 말이다. 저녁의 늦은 날씨가 점점이 불어온다. 소년은 자신을 안은 여인의 팔을 잡고서 숨을 세었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할까. 언제쯤이면 나아지실까. 낫다니 무어가. 마음이, 상처가, 집과 세상이 아님 누나가.

 

누나는 어디 있어요?

 

여인이 화를 낸다.

 

그 애는 찾지 마, 그 애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여인의 역정이 울린다. 더욱 가슴으로 눌리고, 더욱 가슴으로 끌어올린다. 소년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상상도 못할 거야!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공부도 하지 않고!

집안일은 엉망에다 너까지 잃어버렸지!

 

여인의 말이 우수수 집안으로 비가 되어 쏟아진다.

 

그 애는 널 죽인 거나 다름없어!

 

그런 그녀의 말로 소년이 답한다. 그의 말이 아프게 들린다.

 

하지만 그녀가 필요해요.

저에게는 누나가 필요해요.

 

왕국으로 와 자신을 보러온 존재. 인간과 장난감, 가족, 인연과 혹은 후회. 감정들이 한참을 섞여 끝없이 까맣게 물드는. 여인은 소년을 꽉 잡고서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안 돼, 그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

 

저녁 사이의 거리에서 아빠가 돌아온다. 그도 돌아온 아들이 반가웠다. 하지만 소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소년은 소녀를 찾았고, 두 어른은 그녀를 잊으라 하였다. 비수들이 된다. 두 어른이 날카로운 비수들이 된다. 그가 있던 세계를, 그가 기억하고 있던 온기를.

 

그 애는 절대 안 돼!

 

절규를 하듯이.

 

제발 잊어, 이제 이곳이 너의 집인걸.

 

호소하듯이.

 

제 집은.

 

소년은, 왕자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린, 아직은 어린 그의 입이 머뭇머뭇 제 마음을 꺼낸다.

 

제 집은 이곳이 아니에요.

 

여인이 일어나 청 테이프를 꺼낸다.

 

여보!

 

테이프로 문 틈새를 막으려는 그녀를 남자가 막아선다.

 

이거 놔!

얘를 지켜야 해, 당장!

 

여보, 정신 차려!

 

지친 둘의 등으로 땀이 흥건히 젖어 내렸고, 둘의 틈으로 악다툼이 계속 된다. 여인이 무릎을 꿇으며 울고 말았고, 남자가 그런 여인을 부축해 방으로 옮기어 주었다. 남자가 왕자를 본다.

 

정말 정한이니?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장난감 왕국의 왕자는 알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이곳의 가족일까.

 

모르겠어요.

 

남자는 서랍으로 가 사진첩을 꺼내 뒤지었다. 소년이 있을 곳을 꺼내어 앞으로 보인다. 소년은 제 모습이 비친, 어느 남자아이가 찍힌 기억들의 틈바구니로 손을 쓰다듬었다.

 

자, 이게 너란다.

 

보에 싸인 아기 하나. 여인의 품으로 안겨 있다.

 

자, 이건 네가 처음으로 일어섰을 때야.

 

남자가 사진과 함께 말을 이었다. 자, 이건. 그리고 이 사진은, 하며. 그의 말로 왕자는 여름방학을 맞았고, 계곡으로 가기도 했으며, 텐트를 친 첫 날과 누나와 다투어 상처가 났던 날로 돌아갔다. 두꺼운 장갑도 있고, 노오란 단풍과 따듯한 봄 햇볕도 있다. 남자가 묻는다.

 

기억이 나니?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남자는 아쉬운 숨을 내고서 안경을 내렸다. 그는 왕자에게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럼, 혹시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니?

 

왕자가 답한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에 있었어요.

주인분들이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이요.

 

와, 정말이니?

뭐랄까 대단하구나.

 

그곳엔 주인들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요.

매일 기다리고 함께 울고 노래도 불러요.

 

그럼 그곳에서 무엇을 했니.

너도 가족을 기다렸니?

 

왕자가 제 손 끝을 본다. 엄마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을 쫓아내었다. 가족을 만나라고, 어서 가족과 함께 하라고. 자신은 꼭 빼두고서.

 

네, 기다렸어요.

 

남자의 환한 얼굴로 왕자가 손을 펼쳐 보인다.

 

누나를 기다렸어요.

그 수많았던 기억들 중 제일 기억나는 걸,

저는 기다렸어요.

 

남자가 왕자를 껴안는다. 그의 품이 담배와 술기운으로 버석거렸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누나도 만나야 해요.

 

남자는 나직막이 답하였다.

 

그래, 그래.

 

왕자의, 아니 아들의, 아니 정한의 목덜미로 뜨거운 것이 흘러 흠칫 놀랐지만 짐작은 되어 가만히 그의 순서를 기다려주기로 하였다. 슬퍼할 누군가의 순서는 오로지 각자의 것이어서 정한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여인은 이번 여행이 달갑지 않았다. 부르릉. 온 몸을 떨며 2000년대 식 쥐색 아반떼가 기지개를 핀다. 남자가 페달을 밟고 자동차가 빛으로 나아간다. 주택단지에서 도로로, 도로에서 빌딩들의 사이로. 그들은 아주 어릴 적 정한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 보았다. 운전석에는 빛이 환하게 들어찼고, 여인은 소년의 곁에서 기대듯 앉아 있다. 손만은 꼭 잡고서.

 

정한이 네가 태어났을 때는,

그만큼 건강한 아이가 없었단다.

 

남자가 웃으며 말한다. 그렁그렁 무언가를 달고서. 소년은 남자의 말과 함께 창으로 고개를 올렸다. 푸른 하늘로 빛들이 부서지고 건물들과 사람들의 위로 구름이 드리운다. 푸르게, 아주 푸르게.

 

간호사들이 하나같이 말하더구나.

정말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말이야.

 

창 너머로 꺄르르 웃음소리가 부딪힌다. 소년은 창으로 고개를 빼어 바라보았다. 쥐색 자동차는 작은 어린이집으로 가 닿았다. 아이들이 모래를 으깨고, 작은 교실들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노래를 부른다. 남자는 그곳에 멈추어 섰다.

 

네가 조금 더 작았을 때 다녔던 곳이다.

엄마가 늘 이곳에 널 데리러 갔었지.

 

문장의 뒤로 ‘기억나니’가 붙지만 소년은 그저 멀게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동차를 움직였다. 부우웅. 세 사람을 태운 초라한 타임머신이 몸을 기우뚱 기울이며 달려 나간다. 그들은 마을의 공원으로 갔다.

 

주말이면 갔던 곳이야.

네가 태어나고 주욱 갔었던 곳이지.

 

다시 남자의 말로 붙는다. ‘기억이 나니’ 하지만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발목까지 오는 작은 울타리도, 그 나무 울타리 사이로 핀 수목들도 소년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자동차가 다음 목적지로 날아간다. 그의 어금니가 꽉 물린다. 어느 하나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소망을 바라며.

 

여긴 네가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곳이야.

이곳은 그러니까.

 

세 사람이 맞닿은 곳. 그곳은 거리의 노점상들이 일렬로 쭉 붙은 노점 거리였다. 소년은 알은 체를 했다. 남자가 건네어 보여준 사진 속 장소였다.

 

누나와 함께 놀았던 곳이죠?

 

아까의 그 공원도, 자신이 다녔다던 어린이집도, 태어난 병원에서 조차. 그녀, 소녀가 닿지 않은 곳은 한 치도 없었다. 두 사람이 그녀를 지우려 해도, 해변 가를 놀다가 남은 모래알갱이들처럼 어딘가 남아 조용히 빛나고 잇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됐어!

이제 같이 살면 되는 거야!

옛날이잖아, 걔는 이제 상관없다고!

 

여인이 윽박을 지른다. 남자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고, 여인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소년이 비운 오래의 시간동안 가족이라는 자리에는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야 돌아왔는데, 걔가 뭔데 여길 기어들어와!

 

고함. 비명. 흐느낌과 호소. 바람이 불었고 파랗던 하늘로 먹구름이 꼈다.

 

오늘은 이만 하자꾸나.

 

남자가 여인을 부축하고 소년이 자동차로 태워진다. 소년의 옆에 타던 여인은 떨어져 조수석으로 등을 움츠렸다. 소년은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서운 탓이었다. 여인이, 가족이, 오래이 떨어져 잊히어진 시간들이.

 

누나도 가족이에요.

 

그러한 시간들의 파편에서, 부서지고 그을린 자욱에서. 소년은, 오래전 떠나 왕국으로 유년을 보낸 왕자는 소리쳤다.

 

누나가 필요해요.

그 사람이 필요해요, 절 도와줄 수 있어요.

 

왕국에서의 약속.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왕국의 아이들. 주인들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증거. 그 분들은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누나를 몰라요.

절 찾으러 왕국까지 와주었다고요.

 

그 분들은 너희를 사랑하신다.

 

당신들이 여기 있는 동안,

누나는 직접 절 찾으러 와주었다고요!

 

끼익.

 

자동차가 집에 도착하고 여인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서는 쌩하니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훌쩍 떠난 곳으로 남자가 지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그의 손을 끌어 말한다.

 

일단 집으로 가자.

 

방으로 끌려간 소년은,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의 왕자는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된다. 소년은 다짐한다. 그녀를 보러가자. 자신을 밀어내었다는 기억은 나지도 않은 채. 꼭 다짐은 하고 만다. 누나를 만나러 가자.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를 담은 방이 꾹 닫힌 채 입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고리를 힘껏 잡아 당기어보아도 꿈쩍하지 않는다. 소년은, 왕자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집은 2층이었고, 난간이 있지만 높지는 않았다. 문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열어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창으로 향한다. 바람이 들고 빛이 든다. 가을이었고, 여름이 끝나가는 추위가 열기를 식힌다.

 

소년이 창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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