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수취인, 불명

2022.03.04 14:2403.04

안녕. 너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우주선에 탑재된 시스템에 따르면 지구의 시간으로 내가 지구를 떠나온 지 5092일이 지났어. 나는 지금 차라 행성계에 있는 미리온에 머물고 있어. 이곳은 지금까지 내가 머문 행성과는 다른 곳이야. 여기는 암석이 아닌 가스로 이루어진 행성이거든. 처음에는 당연히 이곳을 지나쳐 가려고 했어. 에너지로 쓸 태양열이 필요했기 때문에 항성인 차라의 빛을 받으려면 암석으로 이루어진 땅이 필요했으니까. 다행히도 미리온의 위성까지는 갈 수 있어서 거기에 우주선을 정박하고 며칠 머물려고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을 차리니 나는 미리온에 있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처음엔 알 수 없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어. 미리온 행성의 거주민들은 파동 함수를 붕괴하지 않는대. 슈뢰딩거의 고양이 알지? 독극물이 든 병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가 독극물에 의해 죽었을지, 혹은 살았을지는 상자를 열기 전까진 알 수 없다잖아. 우리가 상자를 열어서 내부를 보는 순간, 고양이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결정이 되는 거지. 그전까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중첩해서 가지고 있고 말이야. 그걸 물리학자들은 ‘의식체가 눈으로 물체를 측정하는 순간 파동 함수가 무너진다.’고 하는 거지. 정말 이상한 말이야. 그렇지? 그런데 이 이상한 말대로 살아가는 게 미리온인들 이야. 그들은 수많은 가능성을 걸쳐서 살아 간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세계를 산다고 하면 이해가 되니? 그들은 내가 태어나지 않은 세계와 내가 태어나서 지금 자기들 앞에 서 있는 세계를 동시에 산다는 거야. 이 행성의 어떤 입자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나도 그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이곳에 머무는 일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거든.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야. 방금까지 베이글이 내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바게트로 바뀌는 행성이거든. 사실 베이글이니 바게트니, 그런 게 이 행성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 때문이래. 나를 비롯한 지구의 생명들은 파동 함수를 붕괴하는 의식체니까. 그들이 말하길 이 행성에서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을 바탕으로 파동 함수를 붕괴한대. 그래서 땅이 없는 이 행성에서도 나는 땅을 만들고, 테이블을 만들고, 먹을 아침 메뉴를 만들어내는 거야. 내가 이런 얘길 들려주면 너는 분명 ‘웃기는 소리하지마, 이 이과 인간아’ 하고 킥킥 웃을 거야. 네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뭐, 어쨌거나 내가 여기에 와버린 바람에 그들은 처음으로 고정되는 세계를 만나게 되었대. 내가 미리온에 착륙하지 않는 세계와 착륙하는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미리온을 보는 순간 내가 미리온에 착륙하는 세계가 확정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어.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고. 내가 지금까지 해 본 모든 경험 중에 가장 이상한 경험일 거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너에게 이렇게 물었었지.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걸까? 너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어. 두 개의 끈이 있고, 각 끈의 한쪽 끝이 장막 너머에 있다고 상상해 보랬었나? 그 끈들에 뭐가 달려있는지는 장막에 가려져 알 수 없지만, 어떤 끈을 당길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것. 너는 그게 운명이랬어. 그러니까 운명은 정해져 있기도 하고 선택할 수 있기도 하다고 했었지. 끈 끝에 달린 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가 모를뿐이니까. 그것도 양자 함수의 붕괴랑 비슷하다고 난 생각해. 우리가 당길 끈을 결정해서 당겨버리는 순간, 그 끝에 달린 무언가도 결정이 되는 거니까. 기왕이면 머핀이었으면 좋겠다. 네가 머핀을 좋아했었으니까. 블루베리가 들어간 머핀만 빼고 말이지. 나는 여기 사람들에게 네 얘길 해주곤 해. 이들은 너와 내 관계를 신기하게 생각하더라. 사랑한다는 마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고정된 우리가 신기하대. 나는 그게 우리가 떨어져 있어서라고 답했던 것 같아. 네가 너무 그리워서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들이 또 뭘 물어봤더라? 아, 그래. 내게 왜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곳까지 왔는지도 물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안 했던 것 같아. 사실 처음에 차라 행성계에 온 건 차라가 우리가 발견했던 별인줄 알아서였어. 맞아. 우리가 관측한 ‘주하’ 말이야. 우리가 민간 우주선을 만들었던 것도, 내가 시험 비행을 떠났던 것도, 모두 그 별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였는데. 우리 둘이서 말이야. 그런데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어. 차라는 주하에 비하면 작은 항성이야. 지구의 태양만큼 작지. 그러니까 여기에 온 것은 완전한 실수라고 할 수 있겠네. 그래도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아. 주하는 차라와 같은 은하에 있는 모양이거든. 은하라는 건 정말 크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하에 아주 가까워 왔다고 생각해. 적어도 지구를 떠나 여기까지 온 시간보다는 덜 걸리지 않을까 싶어. 네가 없이 거기에 가는 건 이제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너는 아니라고 말하겠지. 온갖 좋은 형용 구를 붙여가며 내가 우리를 대표해서 가준다면, 그것은 자기도 함께 가는 것과 다름없다고, 뻔한 영화 속 대사 같은 걸 얘기할 거야.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네 말을 들어주려고 해. 네가 나에게 이 우주선을 시험 운전해달라고 했었을 때처럼. 만든 사람이 타보고 괜찮은지 알아봐달라고 했을 때처럼 말이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부탁이었을 거야. 그냥 네가 운전해보라고 했을 거라고. 그리고 돌아오면, 예정대로 우주선을 두 배로 키우자고 했을 테지. 그럼 너는 떠났을 거고, 내가 죽었을 거야. 맞아, 그때는 우리 둘 중 누구도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몰랐지.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으니 과거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거야. 그러나 그런 일은 없어. 떠난 건 나였고, 내가 떠나자마자 우리가 살던 지역에 폭격이 쏟아졌으니까. 이제 내가 돌아갈 곳도, 너도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걸 매 순간 인정해야 할 뿐이지. 사실 내가 이런 얘길 하지 않아도 미리온인들은 이미 알고 있더라. 그들은 내가 그 사실들을 말한 세계도 동시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어쩌면 나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내 심정을 알고 있는 타인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어. 어쨌거나 이 추레한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떠나온 이후로 나는 계속 혼자였으니까.

 

있잖아, 여기 와서 느낀 건데, 우주의 입장에서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우리는 사랑이나 평화, 평등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 근데 그 중요한 개념마저도 우주에겐 무의미한 거지. 나쁜 뜻이 아니라 진짜로 의미가 없는 거야. 전쟁이나 미움 같은 것도 우주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하지만 미리온인들이 내게 베풀어준 친절은 진짜였어. 그들의 진심이었지. 그들은 왜 내게 그런 세계를 보여줬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 그들에게 묻지는 않았어. 하지만 다른 답을 상상해봤지. 나는 우주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짓고 있는 표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 이 우주는 친절함으로 고정이 되는 거지. 그게 우리가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인 것 같아. 그게 우주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어도 말이지. 네가 죽었다는 걸 우주 저 너머에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지구로 돌아가 죽으려고 했어. 삶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우주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지만, 사실은 매우 좆같지만,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려고 해. 내 우주가 그렇게 고정되길 나는 원치 않거든. 우주의 모든 법칙이 같을 수는 없지만, 방향성은 언제나 같다고 생각해. 물리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법칙이 아니어도, 그것이 아무리 허상과 허무 위에 쓰여진 허깨비 같은 것이라도, 우주는 언제나 정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고, 그 가운데 우리는 그것들을 역행하는 존재지. 있지, 미리온에서 사귄 친구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어. 자신은 지구가 전쟁으로 황폐화 된 세계에서만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이 동시에 살고 있는 어떤 우주에서는 지구가 멀쩡하대. 너와 내가 거닐던 우리 도시의 거리와 골목도, 여행을 떠났던 스페인의 까미노길도, 노을이 지는 토론토의 호수와 밤의 디즈니랜드도 아직 멀쩡히 남아 있다니 나는 믿기지가 않아. 그래서일까? 지금 내 삶은 그때와는 아득히 멀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 지구가 있어. 파괴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사랑과 평화를 옳다고 믿는 것이 고정된 세계가. 아마 그 지구에선 너도 내가 보내는 이 편지를 기다리고 있겠지. 내 시험 비행을 기다리거나. 나는 내일 미리온을 떠나. 지구와는 더 멀어질 거야. 스윙바이를 하면서 바라볼 미리온은 여전히 평범한 가스행성이겠지만, 이 꿈같은 행성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그럼 다음 머물 행성에 착륙하면 또 연락할게. 안녕, 사랑해.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937 단편 종막의 사사2 계수 2021.11.20 9
2936 단편 피는 물보다 진하다 미음 2020.10.31 7
2935 단편 샌드위치 맨1 아메리카흰꼬리사슴 2020.09.29 7
2934 중편 반짝임에 이르는 병 이멍 2022.02.18 7
2933 단편 사랑의 의미 진정현 2018.10.24 6
2932 단편 실종 진정현 2018.12.05 6
2931 단편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2 소울샘플 2020.12.30 6
2930 중편 혼자서 고무보트를 타고 떠난다 해도 조성제 2020.01.03 5
2929 단편 소프라노 죽이기(내용 삭제)1 신조하 2022.03.23 5
2928 단편 [공고] 2023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23.01.24 4
2927 단편 천하에 소용없는 노력과 망한 인생 대혐수 2022.09.03 4
단편 수취인, 불명 양윤영 2022.03.04 4
2925 단편 아웃백 아메리카흰꼬리사슴 2020.04.29 4
2924 단편 시아의 다정 양윤영 2020.03.29 4
2923 단편 당신은 나의 애정 캐릭터니까 두영 2019.12.31 4
2922 중편 코로나 세이브 어쓰 - 2020년생을 위한 스마트 혁명 가이드 소울샘플 2020.09.16 4
2921 단편 연희 진정현 2018.10.24 4
2920 단편 채유정 진정현 2019.02.20 4
2919 단편 문초 진정현 2019.08.26 4
2918 단편 슭곰발 운칠 2022.01.25 4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