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기다려, 내가 이 지옥에서 널 구해줄게.

 

지옥에서 빠져나오면 뭐가 있어?

 

천국이. 내가 온전히 너만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천국. 넌 그 천국에서만 살아야 해.

왜냐하면 너는 천사니까. 너는 천사답게, 내 천국에서 나만을 위해 날고 숨쉬어야 해.

 

 

 

  


천국으로부터의 탈출

- 1 -

 

 




“이런 썅!”

 

빨간 불을 빤히 보고서도 유유자적 유모차를 밀고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던 아줌마와 박치기하기 일보 직전에 핸들을 가까스로 꺾을 수 있었다. 아줌마는 되려 나한테 삿대질을 하며 덤벼들다가 내 표정을 보더니 유모차를 광속으로 굴리며 도망쳤다. 2박 3일 출장 중 하루 밤샘에 하루는 회식, 그래서 총 6시간을 자고 출근하는 내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핏발 선 눈을 주먹으로 마구 비비며 곡예운전으로 간신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수고했다. 어서 들어와 어서!”

 

“이산가족 상봉하냐.”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사흘 동안 비워 놓은 자리에 메신저백을 내던지고 주저앉자 민규가 부지런하게 율무차를 뽑아서 대령했다. 눈앞의 한없이 사람 좋아 일견 호구스러워 보이는 스마일은 격주간 잡지 ‘사건과 사람’ 편집장 강민규. 편집장 겸 사장 겸 인사담당 겸 홍보까지 1인 4역은 기본, 거기에 옵션으로 따라붙는 것이 툭하면 빡돌아 엎는 게 특기인 한낱 1년차 편집기자의 벤딩머신 율무차 담당까지 맡고 있다.

나는 모니터 옆에 놓인 설탕병을 열고 밥숟가락으로 설탕을 두 숟가락 퍼서 율무차에 탈탈 털어놓고 한입에 들이켰다. 채 녹지 않은 설탕이 어금니 뒤쪽에서 오도독오도독 씹히자 곤두섰던 기분이 천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사히 교정 넘어갔네. 잘 해줬어.”

 

“최기자님, 창원에서 회식 때 끝내줬다면서요? 그쪽 여자분들 다들 최기자님한테 반했다고 난리에요-.”

 

디자인팀 선임 혜정이 킥킥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젯밤 회식자리 분위기가 너무 우중충하길래 할 수 없이 왕년 가다 좀 살려서 십자가를 메었더니 하룻밤사이 떠벌떠벌 말이 올라간 모양이다. 하여간 아줌마들 입 싼 거는....

 

“나 참, 안 놀아주면 안 논다고 지랄, 놀아주면 논다고 지랄....”

 

“어쩌긴. 장하다는 거지. 우리 얼굴마담 최씨 없으면 인사와 접대는 누가 책임지겠어.”

 

민규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나는 민규의 반달 모양 눈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뿔어. 너, 나 얼굴 보고 끌고 온 거지?”

 

“설마. 니 능력을 믿고 스카우트한 거지.”

 

“어머머, 지금 최기자님 자기 잘 생겼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아, 누가 그렇대요-?”

 

얼굴을 확 붉히며 소리치자 혜정과 경리 누님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편집장 포함 달랑 7명이서 만들어내는 잡지 ‘사건과 사람’은 매호 판매부수 1만 부라는, 이 출판계 불황 무간지옥의 시대에 믿을 수 없는 실적을 올리는 잡지다. 이런 장기불황 속에서 이만큼 선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편집장 강민규의 천재성과 인덕 때문이다-라는 것은 본인의 주장이었지만, 절반쯤은 사실이긴 했다. 확실히 민규에게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긍정적으로 부추기는 힘이 있었다. 어디 오지에서 선교사 같은 걸 했어도 잘 해먹었을 놈이다. 따지고보면 내가 여기서 기자 직함을 달고 있는 것도 오로지 강민규 덕분이기는 했다. 민규 녀석이 없었더라면 내 팔자에 책상 앞에 앉아서 일할 기회 따위는 죽을 때까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중퇴, 소년원 복역, 폭력 전과 2범. 출소한 후 먹고 잘 곳을 구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보고 들은 풍월이 뻔하니 전부 성인게임장, 건축 노가다, 나이트 삐끼 같은 것들뿐이었다. 나이 스물아홉에 동네 호프집 아르바이트도 따 내기 힘든 개차반 이력의 소유자, 그게 나였다.

 

-돌았냐? 이상한 자선하고 싶으면 다른 데 알아봐.

 

-기자는 사무직이 아니라 영업이고 노가다야.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한 애들, 근성 없어. 너 다른 건 몰라도 근성 하나는 죽이잖아.

 

강민규는 나의 유일한 불알친구로, 두 살 아래였지만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고를 치면 녀석이 수습하는 관계를 이어오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도 나한테 정학을 먹인 학주 옆구리를 오토바이로 박아버리고 소년원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 줄 수 없었지만. 어쨌든. 형님 소리 하며 쫓아다니던 꼬붕들까지 전부 다 떠나고 난 후에도 민규만은 내 곁에 남아 있어 주었다.

나이트 삐끼를 하다 진상손님의 갈비뼈 넉 대를 부러뜨렸을 때 나는 합의금 팔백을 구할 길이 없어 복역할 수밖에 없었다. 민규는 나에게 팔백만 원을 빌려주는 대신 출소하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돈은 빌려 줄 수 없고, 라고 녀석은 드물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녀석은 항상 웃느라 눈을 반달모양으로 접고 있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한 마디도 깔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일 년을 살고 나오자 민규는 약속을 지켰다. 녀석은 그런 놈이었다.

내가 기자 나부랭이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 처음 몇 달 동안에는 별 말로 다 못할 꼴을 보기도 했지만 어쨌건 나는 일 년 넘게 잘리지 않고 민규의 잡지사에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남의 인생을 구경하는 일이 세상 외로 적성에 맞았다. 스물일곱의 나는 내 인생을 살아내는 데 이미 진력이 나 있었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놀 틈 없어. 오늘부터 50호 특집기사 들어가야지.”

 

“야, 야. 엔진에 기름 칠 시간은 좀 줘야 하는 거 아냐?”

 

“보너스 챙겨 주잖아. 어디 이 바닥에 나만큼 인간대접 해 주는 업주 있나 물어봐라.”

 

망할 새끼. 생색내기는. 하지만 사실과 틀린 말은 한 마디도 없는지라 그냥 쭈그러지고 말았다. 사실 50호 특집기사 타이틀은 제법 자극적인 것이라 은근슬쩍 기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기자 경력만 8년차로 사무실에서 편집장 민규를 포함하여 가장 베테랑인 오 대리가 탈모가 진행되어가는 이마를 걱정스럽게 좁히며 말했다.

 

“광신 종교 단체라...50호 특집인데 하필이면 그런 소잽니까. 솔직히 전 아직도 좀 걱정돼요, 편집장님. 요즘처럼 살벌한 시대에 정신 나간 인간들 들쑤셨다가 괜히....”

 

“에이, 우리 최기자가 그렇게 허투루 일하겠어? 그리고 최기자한테 감히 누가 덤벼?”

 

그건 그래요. 오 대리와 여직원들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야, 야! 뭐야, 미친놈들이 뭘 가리고 덤비냐?”

 

“걱정 말라니까. 그런 사람들 아니래.”

 

그래봤자 미친놈들이지. 나는 혀를 차며 문서 프로그램을 돌렸다.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50호 특집 기사의 준비를 시작했다. 자료용 기사 폴더를 열자 자극적인 문자들이 모니터를 수놓았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찰스 맨슨과 광신도들’ ‘J*S 정모 목사 여신도 성상납' 여타 등등. ‘사건과 사람’50호를 기념하여 강민규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이름하여 ‘친 자연 공동체 마을의 충격과 공포의 실체’. 아무리 가제라지만 너무 심하다. 그게 무슨 일요신문에서도 안 실어 줄 삼류 카피냐고 마구 비웃어주자 민규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저었다.

 

“뭘 모르는 소리. 이건 핵폭탄 감이라고. 두고 봐. 공영방송에서 한 발 늦었다고 철철 울면서 인터뷰 따러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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