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쟤 지금 우리 보지 않았어?”

   “뭐라고?” 그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쟤가 방금 우릴 힐끔 봤다고! ……저기! 친구! 우릴 볼 수 있다면 윙크 한 번만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모른 척하고 떡볶이를 먹었다.

   “아니잖아! 이 바보야!” 귀가 한 쪽 없는 유령이 소리쳤다.

   코가 긴 유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분명히 봤다고! 이 멍청아. 좀 기다려봐!”

   “나보고 멍청하다더니 네가 더 멍청하잖아! 이 바보야!”

   “! 아니라니까! 이 멍청아!”

   “근데 우릴 보지도 않잖아! 이 바보야!”

   “멍청아! 아니야! 우리 목소리가 작아서 못들은 거 일 수도 있어! 너도 잘 못 듣잖아!”

   “! 그런가? 그럼 내가 멍청한 거고.” 귀가 한 쪽 없는 유령이 어둔하게 말하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치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를 부르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안 보이나요!”

   나는 그들이 성가시기 시작했다.

   엄마가 물었다.  “? 맛없니?”

   떡볶이 노점 주인아주머니가 날 힐끔힐끔 보는 것까지 성가셨다.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코가 긴 유령이 말했다.  “무시하는 걸 수도 있어.” 귀가 한 쪽 없는 유령이 이제는 떡볶이 노점 주인아주머니 옆에 서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주인아주머니 앞치마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응시했다.

   귀가 없는 유령이 내 눈 앞에서 손을 흔들다가 내 뺨을 내려쳤다. 물론 그의 손은 내 볼을 지나 왼쪽 귀로 통과했지만 그의 행동은 참을 수 없었다. 내가 휙 노려보자 귀가 없는 유령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날 봤어! 그 살아있는 사람이 날 봤다고!”

   “우와!” 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완전 멋진데!” 그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나는 떡볶이를 먹는데 다시 열중했지만 그 멍청한 두 유령들이 여기 와봐! 그 살아있는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바람에 시장에 있던 유령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눈치 없이 말을 걸었는데, 그들을 무시하면서 엄마 말에 대답하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뙤약볕에 장시간 노출된 것 마냥 곤죽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침대에 뻗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 일곱 시가 되어있었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거실로 나갔다. 그런데 외삼촌이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외삼촌은 여전히 멋졌다. 엄마에겐 나이차이가 열한 살이나 나는 동생이었고 내겐 하나 밖에 없는 외삼촌이었다. 약간은 매섭게 생긴 눈썹에 크지만 쌍꺼풀이 없는 눈과 우뚝 선 콧등, 두툼한 입술과 헤어왁스로 잘 넘긴 머리스타일, 그리고 훤칠한 키에 긴 두 다리, 어린 시절 모델 기획사에서 그에게 모델 일을 해보라고 권유한 적도 있었다.

   외삼촌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다. 전공이었던 심리학을 때려치우고 영화공부를 시작했는데, 내게 사고가 일어나기 딱 한 달 전에 외삼촌은 파리로 떠났고, 엄마는 내 사고소식을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외삼촌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았기에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결혼을 한 엄마와 아빠는 외삼촌이 대학에 들어가서 자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지원해주셨다. 그가 돌연 자퇴를 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크게 실망을 했다고 했지만, 프랑스까지 가서 영화공부를 하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그를 보고는 오히려 실망했던 자신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나는 그런 이유로 외삼촌이 병원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었고, 모든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외삼촌은 그 동안 가족들에게 소홀했다며 가슴 아파했다.

   늦은 밤, 화장실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혼자서 소파에 앉아있던 삼촌을 보았다. 삼촌은 잠깐 이야기를 하자며 날 불렀다. 테이블엔 맥주 한 캔이 찌그러져있었다.

   외삼촌이 말했다. “우리 리안이한테 제일 먼저 공개하고 싶어. 외삼촌이 한국에 나온 이유는 말이다. 우리가족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나왔단다.” 그가 기분 좋게 씩 웃었다.

   “뭔데요?”

   그가 안방 쪽을 힐끔 보곤 내 옆에 더 가까이 앉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건 내일까지 비밀이다.”

   외삼촌이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혼혈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는데 활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외삼촌이 어깨동무를 한 채 서있었는데 외삼촌도 그 여자가 지은 미소 못지않게 밝게 웃고 있었다.

   외삼촌이 말했다. “네 외숙모가 될 사람이야.”

   그가 사진 속 미소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이에요? 삼촌?”

   나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놀랐다.

   “놀랐지?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내일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하나밖에 없는 내 조카니까.”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외삼촌이 이번 해까지만 공부를 마치면 졸업이야. 그럼 한국에 돌아와서 일을 구할 생각인데, 다음해 여름쯤 볼 수 있을 거다.”

   가족 모두가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설레고 흥분되었다.

   “우리 리안이 삼촌 많이 좋아했었는데 질투 안 나?”

   나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는데, 외삼촌을 외숙모에게 빼앗겼다는 생각보단 외숙모의 외모에 질투가 났다. 외삼촌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다.

   “늦었어. 이제 자렴. 좋은 꿈꾸고.”

   외삼촌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소파에서 일어나려는데 등 뒤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반실성이었다. 그녀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너랑 같이 있기로 정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의 이유를 찾을 방법은 너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둘은 어딜 간 거야?”

   “잠깐 볼일이 있어서 어딜 간 것뿐이에요.”

   사실 병구와 용희는 아버지의 사고를 목격한 유령이라도 있는지 찾기 위해 아침에 비월산으로 떠났었다.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반실성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녀를 신용하지 않았다.

   “둘은 이 집에 있을 때 항상 어디에 있니?”

   “이 소파에요.”

   “그럼 난 어디서 자는 게 좋을까?” 반실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여기서 잔다고요?” 나는 기가 막혔다.

   “그래. 결정했다고 했잖아. 너랑 있기로.”

   내가 조금 날 선 어조로 물었다. “제 의사는 상관없나요?”

   반실성이 완두콩만 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중얼거렸다. “우린 좀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착각한 거야?”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짜증스러웠다.

   “착각이든 뭐든 간에 여기서 지내는 건 안 돼요. 안 그래도 신경 쓰인다고요!”

   “알겠어. 알겠다고!” 반실성이 쀼루퉁하게 말했다.

   그녀가 쳇, 하고는 밖으로 휙 나갔다. 너무 했나 싶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 옆에 반실성이 입을 벌리고 눈을 반쯤 뜬 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뭐에요?!”

   반실성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미안. 유령빌라지로 돌아가다가 불량배들을 만나서.”

   내가 딱딱거렸다. “불량배들이 당신을 볼 순 없잖아요. 불량배들이 당신을 봤다면 놀라서 자지러졌을 거예요.”

   “미안. 미안.” 그녀는 잠에 취한 채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일어나요!”

   그제야 반실성이 감전된 듯 파르르 떨며 천정까지 솟구쳐 날아갔다.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붕어눈알 같은 눈을 껌뻑껌뻑 깜아대며 다시 자릴 잡고 누웠다. 그리고는 독특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놀랐잖아!”

   “누가 할 소린데요! 왜 다시 드러눕는 거냐고요!”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잠만 자고 돌아가려고 했다고. 치사하게!” 그녀의 입술에 붙어있던 마른 살갗이 뚝 떨어졌다. 그 때였다. 막 돌아온 병구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뭐야! 이 못생긴 아줌마가 왜 여기 있어?”

   “내 허리밖에 안 오는 짜리몽땅한 난쟁이 같은 게 뭐라고? 못생긴 아줌마?”

   나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외삼촌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윙크를 했다.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뜻을 담은 우리들만의 비밀표시였다. 그런데 반실성이 외삼촌 주위를 빙그르르 날아다니다 내 코앞까지 날아와서 물었다. “누구야?”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실성에게 성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뭐랬어요? 신경 쓰인다고 했죠. 그렇게 묻는다고 거기서 내가 내 외삼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 생각 없이 굴었네.”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누구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내 외삼촌이라고요! 괜히 딴 생각 품지마세요.”

   “어머머! 얘가, 얘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까지 왜 그러니? 잘 생겨서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98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면서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은 또 처음 보네.”

   병구가 반실성을 쏘아보았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외삼촌은 밥을 다 먹고 난 후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와 아빠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엄마는 눈물까지 흘렸다. 외삼촌이 왜 우냐고 묻자, 가족이 생긴다니까 기뻐서 우는 거라고 했다. 외삼촌은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할 걸 괜히 미뤘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엄마가 높고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앨범 좀 정리해야겠다. 올케 오면 잘 나온 사진만 보여줘야지. 근데 올케는 한국말 잘 하니?”

   “어느 정도는. 어려운 단어 쓰면 못 알아들어.”

   외삼촌은 그 것과 관련해 뭔가 떠오르는 추억이 있는지 피식피식 웃어댔다.

   “뭔데? 왜 혼자 웃니?” 엄마가 궁금하단 눈초리로 나무랐다.

   “어디서 배웠는지 아침을 다 차리고는 진지 잡수십시오.’이러는 거야. 어찌나 귀엽던지.”

   “팔불출! 네 눈에 안 귀여울 리가 있겠니?”

   엄마가 그렇게 외치곤 다락방에서 앨범이 든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외삼촌과 아빠는 식탁에 여전히 있었다. 엄마가 앨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외삼촌의 이름이 적힌 앨범이었다. 엄마가 앨범을 가지고 식탁으로 향하는데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나는 그 사진을 주워들었다. 조금 오래된 사진이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사진이었다.

   여자는 머리를 헐렁하게 묶었고, 볼에 하얀 물감이 묻어있었다. 그림을 반쯤 그린 듯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은 채 몸을 돌려 브이를 그리고 있었는데 손가락에 붓이 끼워져 있었다. 바깥에서 찍은 듯 햇살이 그녀를 밝게 비췄는데, 보라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참 예뻐 보였다. 그런데 반실성이 내 뒤에서 유심히 사진을 보더니 더 자세히 보려고 했는지 내 앞으로 와 이마가 겹쳐질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그래요?” 나는 짜증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크게 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식탁 쪽을 바라보았는데 다행히도 그들은 앨범 속 사진을 보며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왜 그러냐고 물어도 그녀는 계속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그녀가 답답한 지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낯이 익는데…… 어디서 분명히 봤는데…….”

   나는 사진 뒷면을 살폈다. 볼펜으로 강주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검은 잉크가 보랏빛으로 번져있었다.

   “강주이…… 강주이……?” 반실성이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소리쳤다. “맞다! 그 여자야! 저번에 내가 말했지? 내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고. 그 병원 8년 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신축되었거든. 나는 가끔 우울할 때면 거길 찾아가. 물론 지금은 안 가지만…….”

   “우울한데 왜 정신병원을 찾아요?” 용희가 끼어들었다.

   반실성은 이해하지 못하겠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살짝 땍땍거리는 어조로 답했다. “그거야 나보다 더 우울한 사람들은 보면 나아지니까 그렇지.”

   병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반실성이 사진 속의 여자를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내가 죽었었던 위치랑 같은 병실에 있었어. 그녀는 무척 암울해보였지. 살아생전의 나보다 더 그래보였단 말이야. 심신이 어찌나 약해보이던지. 어둠에 조종당하는 게 당연할 정도였어.”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털실을 앞에 둔 고양이의 눈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는데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게 신기했지. 그 정도의 어둠이라면 그 자리에서 무슨 짓이라도 할 텐데…… 목을 매던지 말이야.” 그녀가 생각 없이 그렇게 말을 내뱉다가 움찔하며 병구를 쳐다보았다. 병구가 화를 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덧붙여 말했다. “어둠이 더 많아진 이후로는 거길 가지 않았어! 정말 위험하니까. 좀 오래된 일이야.”

   나는 왜 그 여자사진이 외삼촌의 앨범 속에서 나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사진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엄마. 이 사람 누구에요?”

   엄마가 관심 없이 눈을 흘기듯이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부릅뜨곤 사진을 낚아채 듯 가져갔다.

   “이 사진이 왜 여기에 있어!”

   엄마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귀까지 시뻘게졌다. 엄마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곧 사진을 구기며 부엌 쓰레기통에 버리려했는데 외삼촌이 괜찮다고 했다. 나는 둘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어때? 다 지난 일인데.” 외삼촌이 식탁 위에 있는 호두를 씹어 먹으며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기분 나빠!” 엄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에요?”

   엄마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앨범을 휙휙 넘기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외삼촌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란다.”

   “이 사람을 만났었다고요? 그럼 이 사람하고 사귀었단 말이에요?” 내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외삼촌과 엄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외삼촌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 이상하게 생기기라도 했니? 아니면 외숙모 두고 바람피울까봐?”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며 그의 뒤에 있는 반실성을 흘끔 쳐다보았다. 반실성이 흥분하여 말했다. “A308호 병실에 있어. 거긴 독실이야!” 그녀의 침이 외삼촌의 머리 위로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외삼촌이 엄마를 보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라서 말하는데, 누나. 걔가 날 먼저 찼지만, 만약 우리가 변함없이 만났더라도 이 친구랑 이루어지는 건 힘들었을 거야.”

   엄마의 손이 호두를 담은 접시 위에서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예상 밖이란 어조로 물었다.

   외삼촌이 피식 웃곤 대답했다. “그 친구 아버지가 아트미술관 관장이야. 그 돈 많다고 소문 난 관장 외동딸.”

   “아트미술관?!” 엄마가 흠칫 놀랐다. 나도 함께 놀랐다. 엄마가 바로 말했다. “그 미술관 관장 자살했어. 조금 된 일이야.”

   외삼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참 안 됐네. 그 아가씨도.” 엄마가 혀를 쯧쯧 찼다.

   나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반실성과 병구와 용희가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물었다. “정말 그 여자가 정신병원에 있었어요?”

   “맹세코 그렇다니까! 난 기억력이 꽤 좋단 말이야. 사진 속에선 웃고 있어서 알아보기 좀 힘들었는데 분명 그 여자 맞아! 강주이란 이름이 어디 흔하니? 아니잖아.” 반실성이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어둠은 살아있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어.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순 없지만 정신적인 건 컨트롤할 힘이 있지. 쟤한테 물어봐. 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쟤 아버지도…….”

   반실성이 병구를 가리켰다. 병구가 그녀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용희가 그를 가로 막았는데 병구는 분에 못 이겨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무 것도 모르면 닥쳐! 우리 아버진 어둠에 농락당한 게 아니야! 살해를 당한 거라고! 이 더러운 빙의령아!”

   내가 말했다. “병구야. 진정해. 그 여자를 도와야 해.”

   병구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만 우리 아버질 네 입에 담아봐! 그 땐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반실성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가 눈치 없이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뭘 어떻게 살해를 당했는데? 목매달았다며? 자살한 거 아냐?”

   나는 아무 말 없이 빈 도화지와 만년필을 가져왔다. 반실성에게 말했다. “저한테서 조금 떨어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반실성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용희와 병구를 번갈아보았다. 용희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턱을 몇 번 움직였다. 병구는 그녀가 옆으로 오는 것이 싫었는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강주이란 여자를 거침없이 그렸다. 사진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그릴 수 있었다. 도화지 깃이 팔락이기 시작했다. 용희와 반실성이 벽으로 물러섰다. 반실성은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도화지는 이내 빳빳하게 펴졌다가 태풍 아래의 커다란 바나나나무 잎사귀처럼 팔락였다. 도화지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이내 어둠이 솟구쳤다. 나는 그 힘에 못 이겨 뒤로 주춤거렸다. 어둠은 예상보다 훨씬 높이 솟구쳤다. 그 힘이 창문까지 흔들어댔는데, 반실성은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생긴 흉터가 또 벌겋게 부어올랐고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나는 어둠의 힘에 놀라 멈칫 했지만 한손으로 쥐고 있던 날카로운 만년필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위에서 아래로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자 내가 내리찍었던 부분에 검붉은 불꽃이 일더니 괴기스러운 비명이 그 속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한 번 더 내리찍었다. 그러자 어둠이 방 안에서 요동을 치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그 덩어리들은 곧 수증기처럼 증발했다.

   밖에 있던 병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가 물었다. “괜찮아?”

   나는 꽤 견딜 만했다. 흉터가 쓰라린 것 말고는 다 괜찮았다. 반실성의 뼈다귀 같은 앙상한 두 다리가 마구 흔들리더니 힘이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용희가 코 아래까지 내려간 안경을 들어 올리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이 그녀를 또 노릴 지도 몰라. 그녀는 살아있는 사람이니까.”

   병구가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주저앉았다. 그의 까만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둔 지푸라기처럼 헝클어졌다. 그는 무척이나 괴로운 듯 보였다. “그 여자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 하잖아. 정말 자살을 한 걸까?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자살이 아니라면? 우리 아버지처럼 자살한 게 아니라면? 우리 아버지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고…….”

   병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말했다. “그럼 그 관장이란 아저씨 사진을 구해보자. 만약 그 아저씨도 자살이 아니라면, 우린 네 아버지 억울한 죽음을 풀만 한 단서를 얻게 될 거야.” 내가 용희가 반실성을 보고서 이어 말했다. “넌 반실성 씨하고 그 병원에 다녀와 줘. 그 여자가 아직도 병원에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반실성은 양손으로 제 몸을 꽉 안으며 꼭 보트 위에서 달달거리는 낡은 모터처럼 떨었다. 용희가 말했다. “알겠어. 확인하고 올게.”

   둘이 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갔다. 내가 병구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왜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까?”

   병구가 아무 생각이 없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다. “외삼촌에게 물어봐야겠어. 강주이랑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 말이야. 혹시 외삼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정신적으로 어디가 아팠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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