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 해야만 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 위에 떨어진 두꺼운 책을 확 집어 들었고 모서리로 어둠을 있는 힘껏 내려찍었다. 두 차례 찍어 내리자 어둠이 마치 박쥐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질러대곤 팍 하고 터졌다. 온 사방에 까만 구정물 같은 것이 튀었는데 뿌연 김을 뿜어내곤 증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 누구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용희가 곧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병구아버지는 꺼이꺼이 목 놓아 울다가 이내 도화지 속에서 몸을 일으켰고 병구에게로 향했다. 그가 병구를 보듬어 안았다. 병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병구아버지가 흐느꼈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된 일이죠?” 내가 물었다.

그는 병구를 품에 안은 채 훌쩍거리며 말했다. “모르겠다! ,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아, 아무 것도 모, , 모르겠어!” 그는 한참을 그의 아들 품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 여긴 어, 어디냐?” 그가 딸꾹질을 하듯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희 집이에요. 아저씬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으으으!” 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두 눈을 꽉 덮으며 절망적인 신음을 내질렀다. “거긴 아주 끔찍한 곳이야. 시꺼먼 그 괴물의 뱃속이었지. 소화액에 사지가 다 녹은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어어! 신이시여…….”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병구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가 힘없이 축 늘어진 채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세요?”

병구아버지가 그를 부둥켜안으며 소리쳤다. “그래! 병구야! 아버지다!” 병구가 아버지의 목을 두 팔로 두르고 정신없이 울었다. 용희도 안경을 들춰 올리고 눈물을 훔쳤다.

병구가 아버지를 크게 책망했다.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 곁에 계속 있었다고요! 근데 왜 그러셨어요!”

그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제 아버지를 응시했다. 병구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표정을 잠깐 지어보였다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병구아버지가 맹렬하게 말했다. “아들아. 난 절대! 결코! 내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았다!”

병구는 다시 기절이라도 할 듯 창백하게 질렸다.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난 살해당했어.”

병구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아버지가 그럴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어요! 믿었어요! 하지만 그 밧줄을 본 순간…… 오해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누가? 누가 아버지를 살해한 거죠?”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구나. 집에 있었고, 밥을 먹고, 쌓아두었던 설거지를 마치고, 어항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람의 짓이 아니었던 것 같아.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도 그렇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유령? 나는 용희를 쳐다보았다.

용희는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유령은 아냐. 우린 그럴 힘은 없어. 책 한권도 못 드는 게 우리인 걸.”

병구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동안 둘은 목 놓아 울었다. 병구아버지가 흐느끼며 말했다. “아들아! 이제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함께 가자. 저기 빛이 보인단다. 참 아름답구나.” 그가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병구의 눈이 증발하는 눈물로 빛났다. 마치 다이아몬드 수백 개가 햇살 아래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아버지 말대로 어서 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약간 가빠진 내 숨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병구는 망설였다. 그가 날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

적막감이 맴돌았다.

어서 가. 병구야.” 내가 그를 부추겼다.

  그런데 병구아버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그의 말을 자르고 약간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 거냐? 알겠다! 아들도 못난 애비를 이렇게 기다려줬는데 내가 못 기다려준다면 안 되지! 먼저 가서 엄마랑 기다리고 있으마. 그 대신 꼭 조심해야한다!”

병구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아버지를 꼭 안아주고는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병구아버지의 고약한 인상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곧 병구아버지의 영혼이 새벽녘의 별처럼 희미해졌고 한 번 번쩍거리다 완전히 사라졌다.

병구의 눈물이 은가루처럼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는 아버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가슴 시리도록 환하게 웃었다.

 

   다음날 아침식사 때 나는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자살인 줄로만 알았던 병구아버지의 죽음에 누군가가 연관되어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살해를 하고 자살로 위장했단 말인데…… 부검을 해보면 자살이 아니라는 걸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엄마가 오렌지주스를 긴 유리잔에 따라 부으며 물었다. “요새 영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걱정 있니?”

엄마가 아빠 쪽으로 오렌지주스가 든 잔을 쓱 밀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니요. 걱정은요…….”

엄마가 내게 주스 잔을 건네며 물었다. “운동을 너무 무리하게 한 거 아니니?”

설렁설렁 걷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보이는데 왜 안하겠어요.” 나는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전혀 무리 없단 어조로 말했다.

아빠가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신문을 접으며 기사를 읽었다.

그가 곧 엄마에게 말했다. “당신 아트미술관 알지요? 저번에 당신 친구가 작품 전시했던 그 미술관 말이에요.”

엄마가 다른 유리잔에 남은 주스를 다 따라 붓곤 말했다. “알죠! 자동차매매단지 사거리에 있는 그 커다란 미술관이잖아요. 그 때 전시회에도 갔었어요. 작품이 난해해서인지 제가 잘 몰라서인지 계속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왜요?” 엄마가 가볍게 웃었다.

거기 미술관장이 죽었다내요. 자살했나 봐요.”

엄마가 흠칫 놀라곤 혀를 찼다. “요즘 우리주위에 이런 사건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세상이 너무 삭막해졌어요.”

나는 이 때다 싶었다.

아빠. 저번에 그 산장 주인한테 일어났던 일말이에요. 그거 어떻게 사건이 종결되었는지 혹시 아세요?”

아빠가 신문기사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어. 근데 왜?”

나는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아빠가 경찰서에 갔잖아요. 경찰들이 아빠를 의심하는 건가 신경이 쓰여서요.”

아빠가 신문을 뒤집으며 말했다. “아빠는 목격자로서 진술하러 간 것뿐이란다. 만약 살해 흔적이 있었다면 충분히 그들은 날 의심해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분은 자살을 한 거야.” 그는 확신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병구가 호소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아버진 자살을 한 게 아니에요. 살해를 당하셨다고요!”

그러나 그의 외침은 아빠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엄마가 아빠의 말에 설거지통에 접시를 집어넣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자살이 맞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과수에서 부검을 마쳤다고 했단다. 게다가 없어진 것도 없대. 귀중품은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안타까운 일이야.”

속이 메스껍고 뒤틀렸다. 어떻게 감쪽같이 속이고 자살로 위장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지? 것보다 병구아버지에게서 뭘 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돈은 아니었으니까 보복살인?

전화가 울렸다. 시끄럽게 울린 전화벨소리에 나는 튕겨 오르는 공처럼 놀랐다. 전화기 가까이에 있던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 매제. 잘 지냈는가?”

엄마가 놀란 눈동자로 아빠를 응시했다. 외삼촌이었다.

그래? 당연히 상관없지! . 그래. 그래.”

아빠가 전화를 끊었다. 엄마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화 바꿔주지 그랬어요.”

오늘 저녁에 온대요.”

오늘 저녁에요?” 엄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요? 서울에 왔대요? 차는요? 우리가 마중이라도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점심약속이 있다고 저녁에 바로 택시타고 거기서 온다고 하니까 맛있는 저녁준비 합시다.”

아빠가 출근한 후 엄마와 나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까지 걸어갔다. 나는 행인들 틈에 낀 채 사람인 척 걸어 다니는 유령들을 이제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조금 더 민첩하게 걸었고, 어둠을 피하기 위해 앞은 잘 보지 않아도 아래는 유심히 보며 다녔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낯익은 기자유령이 내게 눈인사를 했다. 귀찮게 따라붙지 않는 걸보니 반실성이 화가영감에게 잘 말한 모양이었다.

엄마.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내가 대뜸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리고 싶어진 거니? 아니면…….”

만약에 엄마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된다면 제일 먼저 뭘 하겠어요?”

엄마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좋겠지? 그런데 네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니?”

뻥튀기 장수가 맛 좀 보라며 뻥튀기를 건넸다. 엄마는 반을 뚝 잘라 내게 건넸다. 고소하고 달달한 뻥튀기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나는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세상 화가들이 보이는 것만 그리진 않잖아요.”

엄마가 뻥튀기 한 봉지를 사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니까, 조금은 예상 밖이라서…….”

강아지 프린트가 찍힌 분홍색 우비를 입은 소녀유령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유령빌라지에서 봤었던 소녀유령이었다. 나도 찡긋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했다. “저도 그래요. 제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시력을 되찾으면서 전엔 볼 수 없던 걸 볼 수 있게 되니까 그림을 그리고 싶더라고요.”

학교는?”

엄마의 옆으로 턱에 검정콩만 한 점이 난 뚱보아줌마 유령이 휙 지나갔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어요.”

시장 안은 사람들과 유령들로 북적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물건을 구경했고, 유령들은 그런 사람들을 구경했다. 햇볕과 비바람을 막을 천막지붕 위에 두둥실 뜬 채 햇볕을 쬐는 유령, 젓갈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빼거나 오줌을 누는 시늉을 하며 유치한 장난을 치는 어린유령들도 있었다. 몇몇 남자유령들은 붉고 푸른 유니폼을 입고 팀을 갈라 시장 안에서 축구를 했다. 아주 세게 찬 공이 지팡이를 짚고 막 일어서는 노인의 얼굴을 통과했는데 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느릿느릿 걸어갔다.

장바구니 한 가득 장을 본 엄마가 떡볶이를 파는 노점상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오랜만에 시장 떡볶이가 먹고 싶다며 등받이가 없는 기다란 나무벤치에 앉았다. 사실 빈 벤치는 아니었다. 남자유령 두 명이 거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었고 또 한 명은 귀가 한 쪽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했어! 분명해!” 코가 긴 유령이 발끈했다.

귀가 한 쪽 없는 유령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설마!”

아냐! 진짜라니까!”

네가 봤어? 네가 직접 본다면 내가…….” 그가 볼멘소리로 말하다 멈췄다. 코가 긴 유령이 그의 세 겹으로 접혀있는 옆구리를 툭툭 치며 날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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