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유령빌라지 N115에 들린 후로 여러 유령들이 날 찾아왔었다.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몇몇 기자유령들이었는데 그들은 내게 온갖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부터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부터, 능력이 없었을 땐 자신들을 본 적이 있는지, 유령빌라지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지, 유령들과 살아있는 사람 간의 관계개선 및 이미지개선에 대한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유령과 귀신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건지,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 함부로 들어오면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는 꼬마유령의 말도 안 되는 질문까지, 나는 하루 종일 그들에게 시달렸다.

   하지만 이튿날 밤이 되어도 병구와 용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임이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두 차례 전화를 했지만 전부 여임이 엄마가 받았고, 기말고사 준비 중이라 당분간 전화할 시간조차 없을 것 같다며 냉랭하게 말하곤 전화를 뚝 끊었다. 섭섭하긴 했지만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일들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림을 그렸다. 유령빌라지가 아닌 이곳에서 내가 그린 그림에 숨을 불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도화지와 대면했다. 눈을 감았다. 무엇이든지 제일 먼저 보인다면 그걸 그릴 참이었다. 냉기가 휘감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그들이라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반실성이었다.

   “방해했니?”

   그녀와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 살짝 당혹스러웠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날카롭게 물었다.

   반실성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치 고리로 꿰어 낚아챈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너희들과 함께할지 아니면 이곳을 떠날 지 고민 중이야. 너랑 같이 있으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불안하단 말이야. 이상하지.” 그녀가 답답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알 수 있다니요? 무슨 예언이라도 또 하셨어요?”

   “아니.” 며칠 동안 굶기라도 한 듯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치마의 구멍 난 부분이 조금 더 쭉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왜 새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는 그 구멍을 마치 고양이털을 만지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녀가 대뜸 말했다. “나는 정신병원에서 죽었어. 그 땐 눈알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고 중얼중얼 거리면 다 미쳤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 , 지금도 그런 것 같지만…… 어쨌든 요즘은 간질이니 뭐니 병명이라도 있었지만 그 땐 그냥 미쳤다고 했거든. 열아홉에 부모님 손에 병원에 넘겨져서 스물하나에 죽었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상했지만 전과 다르게 가식적으로 들리진 않았다.

   “병원의 몇몇 간호사들은 내 예언 실력을 인정했어. 그들의 장래 배우자를 내가 알려줬거든. 또 맞췄고. 하지만 원할 때에 나오는 게 아니니까 관심은 시들시들해졌지. 간호사는 그나마 인간적이었어. 그들은 위에서 시키는 걸 할 뿐이었지. 그 놈의 의사들이 문제였어. 저들 마음대로 내 능력을 병으로 취급했고 마루타를 대하듯 아니, 난 마루타였어! 저들의 머리통엔 오로지 이 약이 먹힐까 고심할 뿐이었어.”

   그녀가 동정해달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목을 드러내 보였다. 거뭇거뭇한 주사바늘 흉터가 깨를 엎어놓은 것처럼 수두룩했다.

   “그들은 고구마가 익었는지 확인해보듯 거리낌 없이 정맥에다 주삿바늘을 푹푹 찔렀고, 또 전기충격을 줬고…… 지금의 약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냥 독극물을 내게 먹였어. 나한테 왜 이런 이상한 능력이 생긴 건가, 난 조물주를 원망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정신병원 건물 안 벤치에 누군가 새겨놓은 문구를 읽었어. ‘이유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 문구를 읽는 순간 난 내 존재의 이유, 내 능력의 이유가 분명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 하지만 여태까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어. 그래서 난 심판을 미루고 있는 거지.”

    그녀가 왜 그렇게 창백한데다 퀭하게 보이는지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랑 있으면 불안하다니. 그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나랑 있으면 불안한 건 왜죠?”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냐는 듯 둥그런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모든 걸 직접적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이야기할 순 없어! 내 느낌이란 게 그래. 그냥 그렇단 거지.” 약간 딱딱거리는 어조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빈 도화지만 응시했다.

   “것보다 해봤니?” 그녀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뭘요?”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가 턱으로 도화지와 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는 거 말이야. 여기서 그리는 건 또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궁금해 하고 흥분해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아직요. 해보려고요.”

   그녀가 날 부러운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나도 너 같았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진 않았겠지?” 그녀가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 뭐라고요?” 나는 들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아냐.”

   전등불이라도 켜져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불이 켜져 있어도 충분히 섬뜩한 얼굴이었다.

   “근데 넌 태어날 때부터 그랬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설명하기가 귀찮아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설명하기 귀찮구나?” 그녀가 또 휑한 눈빛으로 날 보며 물었다.

   나는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끝내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해. 모두들 그렇게 귀찮게 물었겠지? 벌써 수십 번은 대답했을 거고. 그렇지? 기자들이랑 아줌마들이 몰려나가는 걸 봤어.” 그녀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령들의 행동에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이었다. “제 공간만은 침범하지 않았으면 해요. 방으로 불쑥불쑥 찾아올 때면 대낮에 광장 한가운데서 발가벗은 느낌이라고요.” 나는 그녀에게 살짝 화풀이를 했다.

   “미안. 화가영감님한테 말씀드릴 게.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시더라.”

   그녀는 여전히 떫은 감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화가영감님은 유령빌라지의 그러니까…… 구청장이나 시장 같은 분이에요?”

   반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님이시지. 각 빌라지마다 원로님들이 계셔. 원로님들 모임도 있고. ‘유령빌라지 운영위원회라고 하지. 유령빌라지의 유지와 평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이야.” 그녀가 뭔가를 깜빡한 듯 시계를 보더니 이어 말했다. “화가영감님 오실 때가 다 되었네! 가봐야겠어. 가서 네 문제도 말씀 드리고. 또 보자.”

   그녀가 휙 사라졌다.

   나는 한 동안 멍하니 빈 도화지만 응시했다. 눈을 감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거…… 제일 먼저 보이는 거……! 그런데 다리의 흉터가 욱신거리며 벌겋게 부어올랐다. 나는 눈을 뜨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눈이 떠지질 않았다. 예전에 엄지와 검지가 강력본드로 붙어서 떼어낸다고 식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처럼 양쪽 눈이 다 그렇게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머리가 일곱 개인 그 끔찍한 피조물이 병구아버지의 영혼을 갈가리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다. 연기가 환풍기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그 장면이 사라지고 나서야 두 눈을 번쩍 뜰 수 있었다. 얼음물에 풍덩 빠졌다 나온 듯 소름이 쫙 끼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걸 그리기로 스스로 약속했지만 그 끔찍한 괴물을 그릴 순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나도 뭔가를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병구아버지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도화지에 연필을 갖다 대었다. 나는 내가 실제로 보았던 그 장면을 여과 없이 그려나갔다. 어둠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병구아버지의 두 다리부터 와드득 먹어치우는 그 광경 말이다. 그리는 내내 가슴이 타들어갔다. 그림을 다 그리고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서늘한 기운이 또 한 번 느껴졌다. 이번엔 병구와 용희가 분명했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두꺼운 책으로 그림을 잽싸게 가렸다. 그들이 곧 벽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왔다. 둘 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느껴도 어색했고, 그들은 곧바로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눈치 챘다.

   병구가 말했다. 뼈라도 부러진 듯 힘이 다 빠진 목소리였다. “그 때 먼저 가서 미안.”

   “아냐. 난 괜찮아.” 나는 눈물을 다시 훔쳐 닦곤 왼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물었다. “아파트 벽에 있었니?” 그렇게 묻고는 씩 웃었다.

   용희가 붉게 부어오른 내 흉터를 유심히 살피곤 대답했다. “물탱크 위에 있었어. 어딘지는 모르겠어.”

   용희의 안경 너머로 게슴츠레 뜬 눈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는데, 분명 뭔가를 미심쩍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병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내 왼팔이 갑자기 들썩거렸다. 나는 곁눈질로 팔 아래를 살폈다. 뭔가 이상했다. 도화지 끝이 팔락이는 것이었다. 나는 왼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그런데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도화지는 더욱 요동쳤다. 둘이 이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이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책 아래서 뭔가 솟아나오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

   “왜 그래?” 병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때, 압력솥 뚜껑이 뻥 하고 날아가듯 책이 천정으로 팍 날아올랐다가 침대 위에 툭 떨어졌다. 도화지가 강풍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정신없이 펄럭였다. 곧 그림 속에서 병구아버지가 튀어나왔는데 어둠도 뒤따라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병구아버지가 숨이 끊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병구는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려했는데 어둠이 도화지 밖으로 튀어나와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했다.

   “사알려어줘어어어! 으아아아아악!”

   그가 어둠에게서 벗어나려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잡으려했지만 여지없이 다 통과해버렸다. 식칼을 수십 개 박은 듯한 주둥이가 이내 팔딱 뛰어올라 그의 허리까지 집어삼켰다. 병구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우리는 비석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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