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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2)

2014.06.28 14:2106.28

2

 

다음날 K담임은 승표의 아버지를 만났다(여전히 돌재떨이를 안은 채). 야심만만한 아들에 비해 아버지는 원만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K담임이 알고 있는 최고의 협박과 회유를 거듭해도 승표의 아버지는 사람좋게 웃기만 했다. K담임은 열과 성을 다하여 학생회장이 수행해야 할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학생회장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아서 교사 한 명의 업무와 너끈히 맞먹으며, 각종 행사 참여와 시상 및 수상, 동문회 참석 등으로 하루에 최소한 두 시간은 수업을 빼먹어야 하고 한 시간 빠른 등교와 한 시간 늦은 귀가로 인해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으며 실질적으로 일주일에 받는 수업이 스무 시간도 되지 않는다는 K담임의 마지막 카드를 접하고서도 승표의 아버지는 살얼음 낀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띄울 따름이었다. 결국 K담임이 A고등학교의 역대 학생회장들은 모조리 제때 대학에 붙지 못해 재수를 했다는 말까지 하고 나서야 승표 아버지의 대답을 들었다.

정 수업을 못 따라가겠으면 따로 과외를 시키면 되겠죠.”

K담임은 승표의 아버지도 담쟁이 이파리 나부랭이에 미쳤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재떨이를 포함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K담임의 책상 밑에 놓인 쓰레기통이 움직였다. 매일 교무실 청소를 하는 경화였다.

선생님, 승표는 학생회장 못할 거예요.”

경화는 교복 소매를 걷어올린 채 익숙한 솜씨로 쓰레기통을 비우고 제자리에 놓았다.

?”

찬조연설 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K담임은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렇군. 예전 학생회 선거에 후보 찬조연설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찬조연설이 있었으니 규정집에 찬조연설 규정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규정집에 찬조연설 규정이 없다면 찬조연설이 있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규정에 하나라도 어긋나면 선거를 할 수가 없으니 찬조연설자가 아무도 없다면 선거가 열릴 수 없다. 똑똑하지도 못한 게 거들먹거리는 꼴로 봐서 승표는 외톨이가 틀림없었다. 그런 놈에게 누가 전교생 앞에 서서 쪽팔림을 감수하겠나?

경화가 담배에 대한 혐오감을 단 한 올도 숨기지 않은 채 상을 찌푸리고 담배 선생의 임시 재떨이를 비우는 곁에서 K담임은 즐겁게 퇴근 준비를 했다.

이틀이 지난 뒤 교감이 K담임을 불렀다.

김 선생 반에 승표란 학생이 있습니까?” (교감은 모든 평교사들을 김 선생이라고 불렀다.)

있습니다.”

K담임은 대답했다. 교감은 책상 뒤 가죽의자에 앉아 있었고, K담임은 평교사가 교장실에 있을 때 서 있을 만한 적절한 좌표 공간에 서 있었다(수학 선생이 인류학 책을 참고하여 계산해 주었다). 거기에 서 있자니 뒤쪽에 놓인 포근해 보이는 노란색 소파에 한번 앉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감은 앉을 틈을 주지 않았다.

김 선생, 선생 반에서 입후보를 원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니 선거하지요. 이왕 김 선생이 담임이니 전체 지휘는 김 선생이 해주세요.”

교무실로 돌아온 K담임은, 잔잔한 미소에 압도당한 나머지 면담 뒤 승표 아버지가 교문 쪽으로 사라졌는지 아니면 그대로 교무실 복도를 걸어 교장실로 들어갔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교장실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K담임은 정말 선거가 하기 싫었다. 교장이 학생회장을 단지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교장실로 끌고 들어가 두들겨 팰지도 몰랐다.

다음날 교무회의에서 K담임은 발언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단 학생들로 구성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선관위와 협의하여 후보자 등록 기간과 선거운동기간, 합동연설일과 투표일자를 확정해야지요. 또한 선거운동용 홍보물과 홍보방법에 대한 규정을 정비하고, 학부모 참여의 허용여부와 허용할 경우 어느 정도의 상한선을 둘 것인지도 논의되어야 합니다.”

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무회의도 침묵에 빠져죽어 있었다. 교감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K담임은 죽어가는 심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선거에 대한 결제서류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교실에서 아이들은 책상에 엎어져 자게 하고 자신도 교단에 엎어져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교무회의가 끝나자 경화는 청소를 시작했다.

넌 왜 집에 안 가니?”

청소해야 하니까요.”

왜 매일 청소하는데?”

지각하니까요.”

오랜만에 교무회의에 출석한 담배 선생은 그녀가 들고 있는 쓰레받기에 비벼 끈 꽁초를 떨어뜨리고는 버마재비같은 자태를 남기며 사라졌다.

경화가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정말 이렇게 살 수 없다고요.”

아침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최소한 630분에 일어나야 했다. 학원과 과외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1. 언론과 시민단체의 이벤트성 보도 바람에 0교시는 사라졌지만, 그것은 ‘0교시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에 불과했다. 1교시는 730분으로 당겨졌고, 그러므로 등교시각은 언제나 7시였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무조건 아침에 1시간씩 더 자기로요. 이건 내 권리라고 생각했어요. 하루에 7시간 30분을 잘 수 있는 권리요.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내 권리 말이죠. 그걸 학교나 집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찾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매일 730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톡톡한 대가가 뒤따랐다. 등교하는 즉시 여러 가지 형태의 처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장 뛰기, 오리걸음 돌기, 화장실 청소, 화단 청소, 교무실 청소....원래 모범생이었던 그녀에게 관대했던 선생들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경화는 입술이 터져 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따귀를 맞고 당구 큐대로 엉덩이가 터지도록 맞았다. 위아래로 피를 흘린 뒤 경화는 양호실에 가서 드러누웠다. 그리고 협상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통은 그녀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경화는 침대에 누워 무엇을 제안하고 무엇을 얻어낼 것인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계산했다.

생각이 끝나자 그녀는 교실로 가서 친구에게 상처 부위를 카메라로 찍게 했다. 그리고 진단서를 끊었다.

제 제안은 말이죠, 아무리 기합을 받고 매를 맞아도 8시 등교를 포기할 수 없으니 다른 대가를 지불하게 해달라는 거죠.”

밤에 일찍 자면 되잖아.”

공부는 매일 12시에 끝나요. 취침시간까지의 1시간은 하루중에 최소한의 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요.”

그녀는 부모의 격분을 적절히 이용하는 한편 학교와 협상을 벌였다. 앞으로 지각을 이유로 폭력을 가한다면 이번에 맞은 것까지 포함해서 학교를 경찰에다 고소하겠다는 의사가 포인트였다. 그녀는 이겼다. 게다가 부수적인 성과도 얻어냈다.

이왕 계속 지각할 거라면 밖에서 청소나 운동장 돌기로 수업에 늦는 것보다 수업 끝난 뒤에 벌을 받는 게 더 좋다는 게 제 생각이었죠.”

경화는 수업이 끝나면 매일매일 교무실 청소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처음에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왜냐하면 학교는 그녀가 자발적으로 교무실로 내려와 청소를 하는 대신 도망가기 바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화는 이것 또한 몸으로 증명해냈다. 겨우 일주일만에 선생들은 그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감시의 눈길도 떨어져나갔다.

한 학기와 한 방학을 꾸준히 투자한 결과 경화는 아침 8시에 홀로 등교해 아무 제재없이 교실로 들어가는 전교에서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수업중에는 교실 안 들어가요. 공부하는 애들 방해돼잖아요.”

학교에 비해 집은 쉬웠다. 성적만 보장해주면 설득은 간단한 일이었다. 사실 수면시간이 늘어나자 피로도 빨리 풀리고 집중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승리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학기와 겨울방학이 끝나면 학년이 바뀌고 경화도 3학년이 된다. 새 담임은 학급 분위기를 고려해서라도 그녀의 등교시간을 용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봐야죠. 혹시 고3 되면 일찍 일어나고 싶을지도 모르구요. 9월 된지도 얼마 안됐는데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K담임은 임명장 양식을 만들었다. 학생회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경화가 그 자리를 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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