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9

2014.05.23 20:2805.23

고양이가 여왕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한 손으로 팔목을 움켜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뒷목을 누르는 완벽한 제압.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물론 폐하께서 게임을 시작하실 때 속임수를 쓰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긴 합니다만, 그 외의 룰도 딱히 정해지진 않았지요. 제 목숨이 걸려있는 게임이라서요. 이렇게 난투극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는 유감을 표합니다만, 아쉽게도.”

고양이가 미소를 지었다. 날이 바짝 선 미소였다.

“제가 이긴 것 같군요. 조금이라도 움직이시면 목을 부러뜨릴 겁니다. 병정들을 멈추게 하세요.”

여왕이 인상을 엄청나게 찌푸리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카드 병정들이 한순간에 동작을 멈추었다.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던 토끼와 거북이도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양이가 여왕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제 목숨을 위협하셨지요. 똑같이 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게임을 한 것은 제가 아니니 그 선택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밖에 없겠군요.”

땡그랑.

바닥에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익숙한 단검이었다. 저 고양이가 하라는 일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보고 그런 일을 또 하라고?

“꼭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정권을 드리지요. 하시던지, 하지 않으시던지. 이 땅의 부조리함과 암흑을 가져오는 악한 존재로써의 여왕을 처단하시던지. 아니면 힘으로 반항하는 무리를 억눌러 질서를 세우고 이 어두운 땅을 밝히는 법을 아시는 여왕을 처단하지 않으시던지.”

화끈.

손아귀의 해골이 몹시나 뜨거워졌다. 두 눈에 푸른 불꽃을 켜고 고양이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단검을 손에 쥐었다. 여왕이 눈을 카악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해야만 했다.

“각자의 목숨 값만큼 당신한테 얻어낼게 있을 거예요. 당신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당신은 졌어요. 그러니 우선 내 소원을 들으세요.”

고양이가 여왕의 목을 붙잡아 억지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그 분노와 증오에 가득찬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7시가 되면 불쏘시개에 불을 켜고 저녁 7시가 되면 불을 꺼 주세요. 아니, 그보다 이 세상에 시간이란 게 있긴 한가요?”

“시간? 글쎄.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오. 하도 오래된 개념이라 잊어버리긴 했지만 분명 흐른다 어쩐다 하는 걸 보니 액체의 일종이라...”

“됐어요. 그냥 밤낮의 주기를 좀 더 짧게 해주시면 되요. 그리고 그때마다 이런 무도회를 열지는 마세요. 또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왕이 사납게 몸을 뒤틀었다. 소원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 말하긴 했다. 다음으로 해골이 말했다.

“난 뭐. 소박하오. 당신 덕에 몸까지 잃었으니 순금으로 된 새 몸 정도는 마련해 줘야지.”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여왕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대들었지만 해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병정의 눈치를 보며 다가온 거북이가 이어서 말했다.

“조금 있으면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궁정 정원에서 하게 해줘.”

옆에서 토끼가 찢어진 입을 가리며 살며시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고양이의 소원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내가 떠맡아 버린 모양이니 어떻게 할까.

“그리고 음흉한 고양이의 소원은 음. 그 소원을 들어줘 버렸다간 남은 세 명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게 되니까 그냥 각하하는 걸로 하죠. 이걸로 괜찮지요 폐하?”

고양이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여왕은 여전히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잡아먹을 듯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래 제압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끝을 내 버리는 것이.”

“내 선택이라면서요. 토 달지 말아요. 확실히 선택한거니까.”

이런 흉한 물건 더 들고 있고 싶지도 않다. 냅다 창문을 향해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여왕을 바라보려고 하는데.

슥.

무엇인가가 머리카락을 스쳤다. 무척이나 빨랐다.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아마도 방금 지나간 것은 내가 내던진 단검인 것 같았다. 단검이 날아온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런. 이것 봐. 내가 고쳐준 인형이 날 속이고서 잘도 도망쳐 나왔군. 오래 찾았어. 정말 오래 찾았어. 내가 아는 모든 길을 돌아다녀 이제야 만났다고.”

뒤틀린 입. 눈 대신 꼬매진 단추. 뒤틀린 미소를 띈 머리 옆으로 잘린 머리 두 개가 분노와 고통에 가득찬 일그러진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나에게 줄 머리가 있지. 손에 든 그 해골 말이야. 난 널 살렸어. 뒤틀어진 다리를 올바로 꺾어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줄 아나? 이제 돌려줘. 지금 돌려준다면 널 죽이기만 하고 삶아먹지는 않을게.”

머리장수가 천천히 걸어왔다. 여왕이 홱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놈들을 다 죽여 버려! 이봐, 어서 날 구하라고!”

머리장수가 홱, 홱 머리를 저었다.

“화장수만 가득찬 쓸모없는 머리.”

“뭐라고!?”

“이따가 풀어 줄게. 네가 머릴 댕겅댕겅 자르지 않으면 나도 굶어 죽을 테니까.”

머리장수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해골을 등 뒤로 숨겼다. 토끼와 거북이가 벌벌 떨며 내 발치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내가 지켜야 한다. 이 수다쟁이 해골도 토끼도 가짜 거북이도 내가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내게 그럴만한 힘이 있을까?

“말했잖아요. 이 해골은 못 판다고요!”

“난 널 고쳤어. 똑똑하고 정직한 사람은 등가교환이라는 걸 알지. 그 머리를 넘겨. 그리고 잘도 도망쳤겠다. 그간의 이자로 네 몸을 내가 고쳐주기 전이랑 똑같이 만들어주지. 크케케케케. 죽이진 않을 거야. 걱정 마. 그때 네 몸이 얼마나 웃겼는지 아나? 바닥을 기는 지렁이, 팔다리가 전부 꺾인 박살난 인형 같았다고.”

머리장수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눈구멍에 달린 단추 두 개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그 쓸모없는 머리로 말을 했지. 이 나에게 헛소리를 해서 혼란시켰지. 그 머리부터 박살내주마!!”

머리장수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아. 정말로 머리가 박살나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빨라서 감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꺄아악!!”

퍽.

고통 대신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체 나 대신 어딘가를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진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괘, 괜찮아요?”

“... 맞아본 게 얼마만인지. 별로 괜찮지 않습니다. 이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머리장수가 씨익 웃으며 팔을 다시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머리를 내려칠 기세였다. 다만 목표가 나 대신 고양이의 머리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피식- 고양이가 웃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거 참, 그림자로 절 다 가리겠군요. 참 크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예요! 제발 피해요! 피하라구요!”

고양이가 이쪽을 슥 바라보았다. 머리장수가 팔을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걸 맞으면 어느 누구라도 무사하지 못한다. 가짜 거북이의 등껍질도 파삭 하고 깨져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한가롭게 입이나 놀리고 있었다.

“이때쯤이라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조금 더 일찍 온 것 같군요.”

쾅!!

머리장수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앗, 하고 눈을 가렸다가 다시 눈앞을 살폈다. 고양이는 가벼운 동작으로 주먹을 피해 저 만치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에 억눌린 듯 위화감이 돌았다. 창문 사이로 밤의 어둠과 밀도를 달리하는 진득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비슷한 것을 느껴본 것 같은데. 생각을 오래 할 필요도 없었다. 창문 밖에서 번뜩이고 있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는 봉사가 아니라면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냥개다! 사냥개가 왔어!!”

거북이가 팔짝 뛰며 두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카드 병정들이고 토끼들이고 모두 도망쳐 살 길을 위해 내달리고 있었다.

콰앙!!

벽 한켠이 무너졌다. 사냥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카드 병정 몇 장이 쫙 찢어지며 사냥개의 먹이가 되었다. 입이 찢어진 토끼들이 기이한 비명을 질렀다.

“달려요! 아가씨!! 지금이오!!”

“잠시만요!”

여왕에게로 달렸다. 여왕이라면, 이 궁전의 주인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고양이는 머리장수의 주먹을 이리저리 피하며 홀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냅다 여왕의 멱살을 쥐었다.

“어떻게 하죠? 이곳을 지킬 방법. 저 사냥개를 쫓아낼 수 있는 방법 알고 있지요? 어서 말해요. 시간이 없어요!”

여왕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서 말하지 않으면 당신도 죽어요! 모두 다 죽는다고요! 아무 방법이라도 좋으니까 말해요!”

여왕이 살며시 눈을 떴다. 여왕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해골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때었다.

“첨탑을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불쏘시개와 연결된 줄이 있어. 불을 붙여 낮을 이 땅에 내려오게 해... 빛이 가득 차면 사냥개는 더 이상 짖지 못한다.”

그 말을 끝으로 여왕이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냥개가 벽을 더 허물었다. 이대로 가만있다간 건물 전체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죽을 수 없다.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바람을 품에 안은 듯 달리기 시작했다. 한 손에 해골을 꽉 잡았다. 진득한 어둠이 해골의 푸른 불빛에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계단이 나타났다. 정신없이 달렸다. 첨탑의 꼭대기는 바로 위였다.

“와아아아아!!”

카드 병정 한 무리가 아래에서 쫓아 올라왔다. 토끼가 거북이를 들춰 업었다.

“시간을벌어보죠!”

“우린 걱정하지 마!!”

토끼가 등 뒤에 업은 거북이를 무기삼아 병정들에게 돌진했다. 콰쾅! 하고 볼링핀 넘어지는 소리가 난 뒤, 카드장 휘날리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첨탑의 기둥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밖에서 사냥개가 휘두르는 흉포한 발톱이 성 전체를 박살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계단 하나하나 오르기가 죽을 만큼 힘겨워졌다. 하지만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봐요, 아가씨.”

해골이 몹시나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하악... 하악!! 왜요!! 바빠 죽겠는데!! 말이나.. 후, 걸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발을 잽싸게 놀렸다. 망할 놈의 첨탑. 뭐가 이렇게 높은 거야? 이렇게 높은 건물이 뭐가 쓸모가 있어?

“왜 여왕을 죽이지 않은 거요.”

“하아.. 뭐. 그런 사소한 질문으로... 헉헉.. 안 그래도 숨차 죽겠는데...”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요.”

정말이지 그런 사소한 일로 남의 발목이나 잡고. 이 해골은 어쩔 수가 없다. 발을 더 바삐 놀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첨탑의 정상이 보일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이놈의 해골은 끈질기기도 하지. 계속 아래턱을 딸그락거리며 시위하고 있다.

“헉헉... 당신이...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잖아요!! 당신 때문이잖아!! 짜증나 죽겠네!!”

헉, 헉헉. 헛숨을 많이 뱉었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쾅!! 쾅!

또 성 어딘가가 붕괴한 것 같았다. 다리를 더 빨리 놀려야했다. 안 그러면 이대로 떨어져 죽는다. 계속해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고맙소.”

“뭐라구요?!!”

잘 들리지도 않는데 해골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저런 인사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여왕이 위기에 몰렸을 때 그렇게나 뜨거워졌으면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해놓고 내가 모르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하다. 고맙다고?

“고마워 할 일도.. 많네요!! 헉.. 헉헉!!”

이제 두 번만. 두 바퀴정도만 더 돌면 첨탑의 옥상이 보일 것이다. 이 세계에 다시금 빛이 돌아온다. 이 지겨운 밤이 드디어 끝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또 다시 달리려던 찰나.

째깍, 째깍.

시계소리가 울렸다. 마치 누군가가 꽉 움켜쥔 것처럼 몸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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