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8

2014.05.23 20:2805.23

병정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리저리 가면 쓴 사람들을 정원 쪽으로 내쫓아 버리고, 테이블과 온갖 장식들을 바깥으로 몰아내버렸다.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텅 빈 홀은 아주 작은 목소리마저도 크게 울리게 만들었다. 여왕이 손짓하자 토끼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바닥을 닦고,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정렬해 자리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저기가 승부가 진행될 자리인 모양이었다.

“세븐 포커.”

여왕이 차디차게 내뱉었다. 그나마 친숙한 종목에 숨이 확 트였다. 운만 확실히 따라준다면 십중팔구 이길 수 있는 평범한 게임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움츠렸던 어깨도 조금 펴졌다. 바닥에 거북이를 내려놓고 테이블로 다가섰다. 거북이가 잽싸게 테이블로 다가가 구석구석을 살폈다. 뭔가 장치라도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검사하는 모양이었다.

“남의 목숨을 걸고 도박이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라며 툴툴거리면서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분주히 왕래하는 토끼들을 훔쳐보는 걸 보니 자기 사위를 찾으려는 생각도 아직 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여왕이 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아가씨. 여기는 카드 여왕 궁전이고 그녀는 이곳의 주인이지. 그러니 아가씨는 지금 카드의 여왕과 카드게임을 하려 하는 거요.”

“종목은 포커잖아요. 아무리 이곳이 여왕궁이라곤 하지만 설마 대놓고 조작을 한다던가 하지는 않을 테고요.”

“그런 게 아니오. 그녀는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아마도 무엇인가가 벌어진다면 그건 카드의 선택이겠지. 그리고 카드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잘 생각해 보시오. 아가씨일까. 아니면 그들의 여왕일까.”

해골이 내 손바닥 위에서 머리를 틀더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나는 의자를 끌어 앉으며 속삭였다.

‘카드는 무기물 이예요. 누굴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다구요.’

‘호오. 아가씨 고향에서는 카드가 무기물인 모양이군. 하지만 저기 걸어 다니는 카드 병정들이 내 눈에만 보이는 환각이 아니라면 야 이 게임에 쓰일 카드도 저렇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똑, 똑.

여왕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우리는 속삭이는 것을 멈추고 게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카드 병정들과 토끼들, 고양이와 거북이가 둥글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테이블 한 가운데에서 금빛이 조명에 번뜩번뜩했다. 맙소사. 황금으로 된 트럼프카드였다. 토끼 한 마리가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올라 현란한 솜씨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촤라락.

허공에서 금빛 카드가 펼쳐졌다가, 모아졌다. 아래가 위로, 위가 아래로. 정해져 있던 것들이 혼돈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운만 따라준다면 저 여왕을 이길 수 있다. 이유 모를 자신감이 넘쳤다. 이윽고 섞기가 끝난 듯, 토끼 두 마리가 각각 여왕과 내 옆에 다가서더니 금화 한 덩이씩을 올려놓고 사라졌다.

“무도회를 미뤄놓은 참이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골드칩 200개를 먼저 소진하는 쪽이 패배하는 것으로. 시드머니는 열개부터 시작한다.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해도 좋아.”

여왕이 차디찬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시선은 카드에 고정되어 있을 뿐. 다른 곳은 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네.”

딱히 이의랄 게 없었기에 간단히 답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떨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던져 버린 가면을 다시 쓰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아. 아직 카드는 한 장도 받지 않았는데 이렇게 긴장해버려서 어쩐단 말인가. 건너편의 여왕은 마치 텅 빈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토끼가 카드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한 장, 저쪽에 한 장. 이쪽에 한 장. 저쪽에 한 장. 총 8장의 카드가 바닥에 달라붙었다. 여왕이 우아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거둬들였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도록 되도록 천천히 카드를 집어 들었다.

“아가씨.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꼭 그걸 말해야 해요?”

가뜩이나 긴장되 죽겠는데.

“이봐 이쪽은 목숨이 걸려있단 말이야!”

냅다 고함지르는 거북이.

“초심자의 운이 따르면 좋겠군요. 저도 아직 죽고 싶진 않으니까요.”

팔짱을 끼고 남의 일 인양 고개만 까딱거리고 있는 고양이. 이래저래 내 편이라는 것들이 미덥지가 않았다. 거둬들인 카드를 손안에서 펼쳐 보았다. 온통 황금이라 번쩍거리는 통에 한 번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눈에 힘을 주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맞지 않을 수 있냐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음장 같은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음을 굳혔다.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네장중 한 장의 카드를 뱅커에 돌려놓고 한 장을 바닥에 깔아놓았다. 여왕은 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난 후 느긋하게 카드 한 장을 내려놓았다.

결과는 여왕의 승리였다. 여왕이 바닥에 깐 것은 하트의 여왕 카드. 내가 바닥에 깐 것은 스페이드의 에이 카드. 보스를 놓쳤다. 기다렸다는 듯 여왕이 다음 카드를 받았다. 도대체 뭘 받은 걸까.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다. 이쪽도 카드를 한 장 끌어넣었다. 애매한 패였다. 페어는 한 쌍 만들어 졌지만 그보다 강한 수가 모이지가 않았다. 최대로 모인다고 해도 플러시. 두 장 만 뜻대로 나와 준다면 승부를 걸어볼만한 패가 모인다.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혹시 염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짝 고개를 들어 여왕을 감시했다. 맙소사. 여왕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까지 걸려있어.

“풀.”

흡- 반응할 뻔 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도대체 뭘 들고 있기에 저러는 걸까? 지금 두리번거리면 안 된다. 보아도 되는 것은 카드뿐이다. 어느 틈엔가 카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별 필요도 없는 사람들과 딱 필요한 만큼만 어울리기 위해 배워놓았던 도박기술이 이런 데서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손이 계속 떨렸다. 될 대로 되라지. 아직 카드는 더 받아 봐야 안다.

“콜.”

토끼가 한 움큼의 골드 칩을 중앙으로 몰고 갔다. 골드 칩을 다 잃으면 목숨을 잃는 것인데. 현실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여왕이 자기 몫의 카드를 받았다. 조금 성급하게 다음 카드를 받았다. 아직까지 둘 다 페어가 없어서 높은 수를 가진 여왕이 보스를 잡게 되었다. 좋아. 운이 따르는 것 같다.

플러시까지 앞으로 딱 하나. 강한 수를 잡기만 하면 한 번에 모든 상황을 끝낼 수도...

 

“풀.”

“이거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야?”

거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이 백번 맞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배팅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토끼가 상당히 많은 양의 골드칩을 중앙으로 밀었다. 죽을까? 배짱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는 카드의 여왕. 카드의 여왕이 쥐고 있는 카드는 과연 얼마나 엄청난 카드일까. 내 플러시보다도 강할까? 확인해보고 싶었다. 여왕이 펼치고 있는 카드 중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띄엄띄엄한 숫자카드. 페어 하나조차 없이 초라했다.

“콜.”

‘아가씨.’

‘가만 있어봐요.’

여왕이 카드를 받아갔다. 떨리는 손끝으로 카드 한 장을 집어 다른 패들과 맞추어 보았다. 윽. 운이 따른다. 플러시가 가볍게 완성되었다. 아니. 그냥 플러시가 아니다. 스페이드의 A,2,3,4,5.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가장 강한 패. 이대로라면 나는 지지 않는다. 이보다 강한 패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로티플이라면 일생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귀하디귀한 패. 이 상황이라면 여왕이 나를 이길 수 있을 확률은 한없이 낮다. 이대로 잘 낚여주기만 하면. 여전히 페어는 없다. 보스를 쥔 여왕이 이대로 잘 물려만 준다면...

“풀.”

표정관리. 표정관리... 하마터면 헤벌쭉 웃으며 좋아할 뻔 했다. 냅다 아래턱을 벌리려는 해골을 테이블 아래에다가 숨겼다. 여왕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음 카드를 기다렸다. 여왕이 한 장. 내가 한 장. 히든카드가 나누어졌다. 마지막 한 장은 별 볼일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가 가진 패는 최상의 스트레이트 플러시. 아마도 승리는 확실했다. 여전히 보스를 잡고 있던 여왕에게 살짝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돌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딘지 살짝 지루함 같은 게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지루함?

갑자기 등골이 곤두섰다. 생사가 걸린 게임에서 지루함을 느낀다고? 어지간히 승리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이전부터 풀로만 일관하고 배팅머니를 늘리는 데만 관심 있는 것 같은 플레이 방식으로 일관하는 걸 봐선. 설마 저 일관성 없는 카드의 배열이.

로티플(Royal straight flush)이 된다고? 아니 그렇게 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해골이 했던 말이 다급히 떠올랐다.

카드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잘 생각해 보시오. 카드가 선택을 한다고? 카드가 카드 여왕인 저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카드는 분명 무기물이다. 내 손에 들린 패는 절대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설마 변하는 카드가 있다고 해도 나중에 짝을 맞춰 보면 그런 속임수는 다 들어날텐데. 설마 여왕은 로티플을 받을 것을 확신할 정도로 자신의 운을 믿는단 말인가?

그런 확신은 광기에 가깝다. 자신을 절망에 몰아넣을 광기. 내 패가 더 강하다. 여왕은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많은 돈을 걸고 있는 거겠지.

‘아가씨. 내 말 좀 들어봐요.’

‘시끄러워요! 거의 다 이겼는데.’

해골의 아래턱을 꽉 막아버렸다. 아래에서 읍, 읍,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곧이어 여왕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풀.”

맙소사. 여왕이 남아있는 자신의 골드칩을 전부 밀어버렸다. 죽을까? 아직 할 수 있다. 나도 전부 밀어버릴 수 있다. 내 패는 강하다. 내가 산술에 강한 것은 아니지만 첫 게임부터 로티플 완승이라니 아마 0에 가까운 낮은 확률일 것이다. 그런 확률에 걸고 승리를 확신하는 배짱 같은 것은 있을 리 없다. 여왕의 차디찬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런 엄청난 행운을 손에 쥐고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리 없다. 저것은 아마도 거짓이다. 내가 이긴다. 이대로 죽어줄 수는 없다.

“콜.”

남은 돈을 전부 밀었다. 토끼가 테이블 위로 풀쩍 올라갔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곤 해골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해골이 아래턱을 쩍 벌린 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제발 내 말을 좀 들으라니까!”

“걱정 말아요. 내가 이길 테니까. 나도 생각이 있어요.”

해골이 답답하다는 듯 아래턱을 딱딱 깨물었다. 마치 몸만 있었다면 방방 튀어오를 기세였다.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불안감 때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스페이드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구요. 지금 내 패보다 강한 게 로티플 말고 뭐가 있어요. 첫 게임에 로티플이 나온다고요? 그게 나올 줄 알고 처음부터 풀만 반복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가씨. 내가 말했던 것 전부 잊어버렸소? 물론 카드는 무기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카드를 섞는 자는 분명 여왕의 수하란 말이오! 저 토끼의 손아귀에서 카드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누가 아냔 말이야!”

섬뜩. 정말로 섬뜩해졌다. 급히 여왕의 표정을 살폈다. 지루함. 공허함. 그런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아픔도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토끼가 양쪽의 히든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뒤집으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이토록 완벽하게 카드를 조작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 토끼는 눈도 안보이잖아. 말도 할 수 없어!

토끼의 텅 빈 눈구멍에서 피가 한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찢어져버린 입가에도 피가 베어 나왔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여왕에게 준 패가 로티플이 맞나요? 당신이 속임수를 쓴 건가요?”

토끼는 그저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의외의 전개가 펼쳐졌다.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내 하인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마라!”

“시끄러워요! 어차피 뒤가 구린 게 있으니 그런 식으로 입 막으려는 거 아닌가요?”

여왕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다급히 토끼의 귀를 잡아채더니 고래고래 고함치기 시작했다.

“어서 카드를 뒤집어! 게임을 끝내라. 그렇지 않으면!!”

토끼가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아는 한 토끼와 몹시 닮아 있었다. 카드 병정들이 테이블 위의 토끼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토끼가 바르르 떨면서 내 카드를 뒤집었다. 내가 가진 무기가 모두 앞에 공개되었다. 이제는 여왕의 무기가 드러나는 일만 남았다. 뻔 한 속임수에 속아서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절대로 싫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말로 당신이 속임수를 쓴 게 아닌가요? 그 카드를 떳떳이 뒤집을 수 있나요!?”

토끼가 텅 빈 눈구멍을 질끈 감았다. 입이 막히고 눈이 파였어도 아직 귀는 들릴 것이다. 귀가 들려야 여왕의 명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 말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토끼의 손이 벌벌 떨렸다. 여왕이 질세라 소리쳤다.

“삼 초 이내에 카드를 뒤집지 않는다면 바로 목을 벨 테다! 하나...”

“당신은 쌍둥이에게 속았어요! 그 도마뱀 아가씨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들은 정말 멋지게 사랑했다고요!”

“두울!!”

“타인이 뭐라고 말하건 상관없잖아!! 스스로 괴로울 필요 없잖아요! 그냥 귀가 가려운 쪽으로 달려요.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하라구요!!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셋! 저놈의 목을...”

토끼가 고개를 펄떡 들었다. 축 쳐져있던 두 귀가 확 펼쳐졌다. 카드에서 손을 때더니 찢어진 입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똑바로 발음할 수 있도록 바람새는 구멍을 막은 것이다.

“내가속임수를썼어요하지만내가그러고싶어서그런건아니야. 나는 속임수를 썼어요! 저런 정신 나간 여자와 같이있는것도질렸어!! 이제 난 그녀에게 돌아갈 거야!!”

“잘 했어요!” “잘 선택했소!!”

해골과 동시에 외쳤다. 기쁨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여왕이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자신의 카드를 스스로 뒤집었다. 속임수 로티플이었다.

“속임수? 그래서 어쩌라고. 속임수를 쓰지 말라는 룰이 있었나? 결과는 너희들의 패배야. 전부 목을 벨 거라고. 이 미천한 토끼 놈부터 목을 베 주마. 병정들아. 이놈의 목을 당장 베라!!”

병정들이 토끼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안 돼!!”

탕!

목이 뎅겅 잘려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엉뚱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렸던 눈을 살며시 뜨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테이블위에 엎어져 있는 것이 토끼고 그 위를 감싸고 칼을 대신 막아준 것은... 거북이였다. 두꺼운 가짜 등껍질을 날카로운 칼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서 가자. 내 딸이 기다린다. 눈도 입도 없어도 내 딸은 너를 사랑할거야. 돌아가는 길은 내가 지켜주지. 어서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려!”

“자, 장인어른?”

토끼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북이는 더 이상 말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토끼를 테이블 아래로 집어던졌다.

“달려 이 멍청아!”

토끼가 뭔가에 씌인 것처럼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에 업힌 듯 병정들 사이를 미친 듯이 뛰었다.

“그쪽이 아니야!! 오른쪽!!”

가짜 거북이가 토끼의 한쪽 귀를 꽉 붙잡았다.

“아야야, 아파요! 아프다구요아파!!”

“너 같은 멍청한 놈은 좀 아파봐야 정신을 차려!”

거북이가 출구를 향해 토끼를 대리고 내달렸다. 정신없이 응원하는 와중에 여왕이 고함을 빽 질렀다.

“뭐하고 있는 거냐! 빨리 이놈들의 목을 죄다 베라!!”

그 말을 신호로 병정들이 미칠 듯이 달려들었다.

“아가씨! 뛰어요! 어차피 저 여자는 우릴 전부 죽일 셈이야! 도망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거요!”

“그건 나도 알아요!”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갔다. 사방에 병정들이 흉흉한 무기들을 들이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로 솟으려니 천장까지 막혀있다.

“죽여라!! 모두 죽여!! 내 말을 듣지 않는 것들은 모두 목을 베어버려!! 목을 베어서 사냥개의 먹이로 주라지!! 끼하하하하하하!!”

여왕이 화통하게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심히 거슬리는 가운데 병정들이 슬금슬금 다가서고 있었다. 칼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떻게 좀 해봐요!”

“글쎄 내가 몸만 있었어도 저런 놈들은 한주먹거리도 안됐겠지만 지금 내 꼴이 이러니 어쩌오.”

이그. 내가 이 해골한테까지 의지하다니 급하긴 많이 급했나보다. 테이블 위로 한 놈이 기어오르려 하기에 발로 냅다 걷어차 버렸다. 이런 식으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토끼와 거북이도 병정들에게 몰려 도망치지 못하고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여왕의 웃음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다. 공포감과 당황보다 짜증이 더 솟구칠 즈음 갑자기 여왕의 웃음이 뚝 멈췄다.

“그런데 말입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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