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7

2014.05.23 20:2705.23

고양이가 여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곡 추시겠습니까?”

고양이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여왕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그런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끓는 분노를 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나.”

여왕이 차갑게 말했다. 고양이는 턱을 치켜세우고 가슴을 내밀었다. 잽싸게 달려든 카드 병정들이 고양이를 둘러쌌다. 고양이는 다가선 일곱 명의 카드 병정들을 훑어보더니, 여왕에게 대꾸했다.

“풀하우스군요. 이쪽의 패는 어떨 것 같습니까?”

“노 페어.”

여왕이 차디찬 얼굴을 일그린체 말했다. 가면 속 고양이가 귀를 긁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고양이는 가면 뒤에서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의 왕국놀이를 망칠 생각은 없어요. 그야, 당신의 놀이에 저도 무척이나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은 마지막 밤이지요. 내일부터는 찌르는 태양에 숨을 자리를 찾아 다녀야만 하겠지요. 저는 그냥 불쌍한 고양이입니다. 이 밤을 그저 춤추고 노래하고 즐기며 보내게 해 주실 수는 없을는지요.”

“네놈이 멋대로 구는 걸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여왕이 짚고 선 홀을 들어 올리며 역정을 부렸다. 카드 병정들이 흉흉한 무기를 앞세우고 점점 더 고양이에게 다가섰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어떻게 당해낸다는 말인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 보지만, 고양이는 움찔하지도 않고 여왕과 맞설 따름이었다. 가면 속 고양이가 상체를 쭉 편체 여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를 헤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백성이 아니기에 칼을 휘두르시겠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저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모릅니다. 혹여 당신을 죽이는 방법을 제가 모르고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조금 더 발언을 조심해 주셔야 할 것 같군요.”

웅성웅성.

 

여태까지 조용하게 있던 인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로 무어라고 대화하며 여왕과 고양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 고양이는 저렇게 대단한 존재였던가? 참견 많고, 이상한 성격에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는 고양이 한 마리가 순식간에 내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는 여왕과 당당하게 맞서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왕이 저런 말을 듣고도 얼굴을 붉힐 뿐, 목을 베라! 라고 소리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 언젠간 죽일 테다.”

여왕이 고양이를 향해 걸어 나왔다. 뒤쪽에서 토끼들이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렸다. 이곳의 누구보다도 화려한 옷이었다. 악사들이 음악을 바꾸었다. 고양이가 허리를 굽혀 예를 차렸다. 곧이어 둘의 손이 맞닿았다.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느린 템포에 맞추어 고양이와 여왕이 빙글 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동작과 절도 있는 완벽함.

저 둘이야말로 지금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었다. 무서운 여인과 굴복하지 않는 남성.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주목을 받는 것은 왜 내가 아닐까. 저들이 바라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는데. 저들이 꿈속에서나 그리던 이상의 여인이 되어줄 수 있는데. 서로 적의를 품고 느릿느릿 춤추고 있을 뿐인 한명과 한 마리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것일까.

둘 사이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악귀 같은 독기가 마치 춤사위를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분하지만 치열하고 아름다웠다. 저런 것은 분명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 텐데 어째서 눈을 땔 수가 없는 것일까.

여왕은 살기어린 눈으로 고양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맞은편 고양이의 가면에는 장난스럽게 눈을 비비는 고양이 한 마리만 떠올라있을 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뚫어버릴 창과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방패가 만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손이 맞 닿을 때는 불꽃이 튀며 예를 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수를 품는다. 그럼에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좌중을 압도한 것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나의 노력이 아니라 저들의 사방으로 불똥 튀는 제멋대로인 개성이었던 것이다.

음악이 바뀌었다. 이제 곧 파트너를 바꿀 시간이었다. 무엇인가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인에게 설득당하여 세뇌 비슷한 교육을 받은 이후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한 가치관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무너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조이는 가면이 다시금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타인의 거울이 되어서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이 방법으로는 안 된다.

가면을 꽉 붙잡았다. 얼굴 반대방향으로 잡아당겼다. 끔찍하게 아팠다. 마치 눈코입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아, 아아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눈부실 정도의 미성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렴 좋았다. 저 시선은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내 눈코입이 멀쩡한지 그것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힘이 모자르다. 이 여윈 팔로는 내 얼굴의 저주받은 가면을 뜯어낼 수가 없다. 양 손으로 가면을 움켜잡았다. 아직, 아직 가면 아래에 내 얼굴과 내 모습이 남아있을 것이다. 더 힘을, 더 힘을.

꽈악. 누군가가 가면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살짝 떴다. 익. 거북이 발이 내 가면 위로 얹어져 있었다.

“어서 이 가면 좀 때줘요!!”

발악하듯 외쳤다. 거북이 머리 위에 놓인 해골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가만히, 한 번에 힘을 주었다간 정말로 얼굴이 뜯어져 나갈지도 모르오. 몸에 힘을 풀고 우리가 하는 대로 맡겨놔요. 해방시켜 줄 테니까.”

으으으, 얼굴이 뜯어져 나갈 것 같았다. 거북이가 내 어깨에 올라타서는 얼굴에 발을 올려놓고 가면을 조금씩 뜯어내고 있었다. 찌익, 하고 피부가 벗겨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가면이 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쫘악-.

가면이 얼굴에서 떨어졌다. 황급히 얼굴을 더듬었다.

내 눈, 내 코, 내 입.

모두 다 그대로 있어. 이런 일로 기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온 몸에 힘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거북이를 불쑥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멀쩡해요!! 내 얼굴, 내 몸 모두 멀쩡하다고요!!”

“아가씨한테 저런 가면이 어울릴 리 없지. 헤어진 뒤로 아가씨한테 저 가면을 못 씌우게 하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저택에 발조차 들일 수 없었어. 미안하오. 무리한 일을 시켜서.”

해골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사과해 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 얼굴이 멀쩡한데 사과가 뭐가 필요하고 심각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냥 웃고 싶었다. 거북이가 실눈을 뜨고 나에게 무어라 말해왔다.

“시녀들이 몽둥이를 들고 우릴 내쫓았단 말이야. 백작 부인이 아니라 그냥 미친 여자였어. 내 딸을 보내지 않은 건 정말 만 번 잘한 일이란 말이지. 이런 흉한 가면이라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내 얼굴이 무사하다고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싸늘한 홀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돌연 밀려온 것은 주인공이 되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화려한 감정이 아니라, 사자우리 한 가운데 떨어진 토끼가 된 듯 한 격렬한 공포감이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면에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심지어 여왕과 고양이마저도 나를 보고 있었다. 슬금슬금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큰일 났다.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내 발치의 거북이도 슬금슬금 도망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같이 도망쳐야 하나? 어디로? 이대로 목이 떨어지는 것은 죽어도 싫은데. 일단 거북이의 머리에서 해골을 냅다 뺏었다. 역시 이걸 들고 있어야 안정이 된다.

“...어떻게 좀 해 봐요!”

대록, 하고 해골이 슬슬 내 시선을 피했다. 눈알도 없는데, 왠지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화통이 치밀어 무어라 소리를 치려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궈 버렸다. 이 몸도 없는 연약한 해골이 지금 이 상황에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나와 거북이와 해골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내지르는 심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선 여왕과 대치했다. 느리고 슬픈 음악이 흘렀다. 여왕의 눈은 노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묻겠다. 너는 지금 완전히 미친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반항하는 것인가. 억겁에 가까운 횟수만큼 무도회를 열어왔지만 너처럼 소란을 떨고, 감히 가면을 내 앞에서 벗어버린 자는 처음이로군. 당장 목을 베라고 말하고 싶지만. 분노 이전에 호기심이 드는 군.”

“미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당신한테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요. 애당초 당신한테 굴종한 적이 없었으니 반항이라는 말은 성립하지도 않죠. 저도 어떤 누구씨처럼.”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으로 숨이 거칠어지는 와중에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꽉 쥔 주먹에 힘을 넣었다.

“저도 당신의 백성이 아니니까요.”

여왕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거북이가 발치에 착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에 늘어선 병정들이 날카로운 쇳덩어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너에겐 다른 냄새가 나는 군. 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나의 백성이 아니라한들 나의 무도회를 망친 죄를 벗어날 수는 없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 적으로써 죽게 될 것이다.”

히익.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병정들이 착착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냥개에게 쫓기던 날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까? 두 번은 자신 없다. 그때의 끔찍한 고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흘깃 고양이 쪽을 훔쳐보았다. 팔짱을 척 끼고 두어 걸음 물러나 있는 것이 완벽한 방관자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여왕의 시선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병정들 중 하나가 칼을 휙 쳐들었다.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내리치겠다는 기세였다. 좀 더 근원적인 공포감이 밀려왔다. 생명이 위협받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을 쳐...”

“당신답지 않군.”

여왕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가 무엇인가를 황급하게 찾았다. 칼끝이 거의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어깨 위에서 간신히 멈춘 칼날을 보며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여왕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내 손에 들린 해골이었다. 여왕은 허리를 푹 숙이며 해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해골은 천천히 턱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답지 않아. 예전이었다면 감히 당신에게 두 마디 이상을 늘어놓은 자를 그저 참수하는 것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 이야기는 들었어요. 바싹 말라버렸군. 참지도 못하고 기어 나온 걸 보니 관 속이 어지간히 맞지 않았나봐요.”

놀랍게도 해골과 여왕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왕이 한 팔을 들어 병정들을 물러나게 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해골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보.”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여왕이 빽 고함을 질렀다. 에엑. 나만 이렇게 반응 한 것은 아니었다. 다들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뿐이지 움찔움찔 거리는 것으로 봐선 어지간히 쇼크를 먹은 모양이었다. 해골을 빙 돌려서 내 얼굴과 마주보게 만들었다.

“빨리 설명좀 해봐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오.”

“빼지 말아요! 당신 이야기 하는 거 엄청 좋아하잖아요. 모처럼 내가 들어주겠다는데.”

해골이 아래턱을 헤벌레 벌렸다. 아무래도 저게 생각에 빠진 표정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좌중이 모두 조용한 가운데 해골의 뭔가를 추억하는 듯 한 공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전 해박하고 상냥하고 용감하며 순수했던 한 해골이 시와 악기를 벗 삼아 여행을 하고 있었소.”

아. 저 놈의 폼 잡기는 장소를 안 가린다. 뭐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끊어질까봐 꾹 참았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방을 방랑하던 해골이 찾는 것은 단 하나. 생기와 따스함이었어. 하지만 이 세계에 그런 것은 정말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의심될 정도로 귀하디귀한 것이었네. 밤이 지나 불쏘시개가 환하게 타던 어느 날에 해골은 여왕의 궁성에 들어섰다네. 다시 한 번 세상에 밝음을 내리신 그 은혜에 음악으로라도 보답하고자... 굳세고 박식한 방랑시인과 고귀한 여왕이 사랑에 빠질 것은 내가 말을 안 해도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으득-

무슨 소린가 했다. 여왕이 손에 들고 있던 홀을 양 손으로 박살내고 있었다. 더 이상 말했다간 뼈를 분질러버리겠다는 경고의 신호로 들렸다. 하지만 해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여왕은 해골을 사랑했지만 그에게 왕의 자리를 허락하지는 않았소. 그녀는 잘생긴 방랑시인보다 자신의 권력을 훨-씬 사랑했거든.”

이 부분에서 해골이 아래턱을 딱 마주쳤다. 아무래도 혀를 찬 것 같았다.

“해골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권력을 탐한 적이 없었소. 애초에 해골은 남위에 군림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말이오. 그녀가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는 방식은 도무지 맘에 들지가 않았어. 아가씨나 여러분들이 보시면 알겠지만 말을 안 듣는다고 목을 자르는 자가 왕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미치광이이거나 염세주의자거나 둘 중 하나일거야.”

“그래서요? 결국 어떻게 됬단 말이죠?”

헛소리 그만하고 본론을 말해라. 라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한 바퀴 둘러말했다.

“잘생긴 해골은 어느 날 여왕에게 말했던 거요. 이제 사람을 찍어 누르거나 목을 뚝딱 자르는 일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 험한 방식으로만 왕국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해골의 현명한 조언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말이오. 여왕은 곧바로 해골에게 그딴 소릴 할 거면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거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떠나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그리고 자유로워지려는 날 병정들을 시켜서 날 지하에 가둔 건 당신이지.”

여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기충천해있었다. 대충 내막을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건 부부싸움이다. 감금과 탈출 등등 몇 가지 스케일 큰 서스펜스가 동반되긴 했지만 분명 이건 부부싸움이었다.

“그대로 썩어서 흙이라도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까지 당신 뜻대로 될 줄 알았소?”

가만가만.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 둘은 아마도 왕과 왕비는 아니지만 부부였던 건 확실한 모양이다. 저 무능하고 물러빠진 수다쟁이 해골과 철의 여신처럼 잔혹하고 완벽한 여왕이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았었다고?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왕이 손을 내저었다.

“아무렴 됐어요. 1000년만 채웠다면 내보내 줄 생각이었으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당신이 싸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닐까봐 그걸 막고 싶었을 뿐이니까!”

해골의 눈구멍에 파란 불이 켜졌다. 아마도 저건 분노다. 해골의 목소리에도 화난 기색이 물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린애 옷장에 가둬놓았다는 줄 알겠군. 1000년이 우습소? 나는 거기서 몸도 마음도 잃었어.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고.”

“애당초 당신한테 제대로 된 몸이 있기나 했나요? 좀 누렇게 변색된 것 빼고는 여전히 해골인 그대로잖아. 당신이야 말로 누가 들으면 당신이 해골이 아니었던 것처럼 알겠네요! 어디서 이상하게 생긴 계집애를 데려와선 지금 내 앞에서 편을 드는 건가요!”

여왕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해골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해골은 그에 전혀 지지 않은 체 마주 시선을 보내었다.

“아아. 당신한테는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 아가씨만큼 생기 있는, 즉 살아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이 아가씨는 타인을 억누르지도 괴롭히지도 못하지. 불쌍하게도 스스로 너무나 괴로운 상황에 있기에 그럴 여유도 없을 테고. 하지만 절대 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 말이오. 당신은 당신이 싫어하고 싶은 것과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목을 베라! 목을 베라 소리치고 있을 뿐이야!”

딱, 딱. 격렬한 말끝에 해골이 턱을 부딪혀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여왕의 눈에 불똥이 확 튀었다.

“그 천박한 입이 붙어있는 머리통을 언젠가는 때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고할 필요도 없었군요. 도박 빚에 몸통이라도 넘겼나요? 이긴 적이라고는 없는 무능한 양반. 내 방식에 한번이라도 더 토를 단다면 머리장수에게 팔아 치우겠어요.”

“그건 안돼요!”

버럭 화가 치밀었다. 누구 맘대로 머리장수에게 팔아치운다고? 손아귀에 든 해골을 꽉 움켜잡았다.

“이 해골은 내거예요. 당신한테 넘길 생각도 없고, 팔아치울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어요!”

“아니, 일단 나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좀 가만히 있어요!” “당신은 조용히 해요!”

말이 맞았다. 하지만 마음이 맞는 것은 아니었다. 고함을 빽 질러 해골을 조용히 시킨 여왕과 나는 서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해골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설사 저 여왕이 부부관계라고 한들 상관없었다.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내 남편이야!”

“제 친구예요!”

여왕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손을 번쩍 들더니 숨을 확 들이마셨다. 금방이라도 목을 베라!! 라고 외칠 기세였다. 아무렴 어떤가. 이쪽도 그렇게 쉽게 목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거북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익, 내려놔! 내려놔 뭐하는거야!!”

 

가짜 거북이 등껍질이라지만 칼 한두 번 정도는 막아줄 것 아닌가. 절대로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

“저 년의 목을...”

짝, 짝짝짝짝짝.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가 가면을 벗어던져놓고는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호탕한 웃음이라도 터뜨리면 어울리련만 저 고양이한테 그런 것을 기대할 수야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같이 굳어 있었다. 여왕이 몹시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이 얼어있는 모습 좀 보십시오. 당신 앞에서 헛숨이라도 내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요. 하지만 오늘 밤의 무도회는 정말 특별하군요. 백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일부로 꾸미신 것이 아니라면. 맙소사... 당신한테 거역하는 자들이 셋을 넘었군요. 그리고 그들 중 목이 떨어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고요.”

“지금 우롱하는 것이냐!”

여왕이 핏대를 새우며 카악 목소리를 높였다. 열기가 확확 뿜어져 나왔다. 화기를 피하려는 듯 옆으로 한걸음 옮겨선 고양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롱이라니요. 저도 목은 하나입니다. 폐하를 놀려봐야 놀이판이 험악해질 뿐이지요. 아이 한명을 너무 놀리다가 울음이라도 터뜨려버리면 더 이상 놀 분위기가 아니게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너 지금...”

고양이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날카롭고 선명한 목소리가 여왕의 말을 걷어내었다.

“저 해골바가지는 더 이상 자를 목도 없지요. 저 똑똑하고 용감하지만 좀 앙칼진 아가씨의 목을 베어봐야 이 자리에서 손상된 폐하의 위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망할 고양이놈아!” “앙칼지다고요?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냅다 고함을 질렀지만 해골의 목소리와 겹쳐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는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가 때어놓았다. 그는 나와 해골을 슥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저 고양이가 뭐라는 거야. 한마디 하려고 나서려는 순간, 여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랫니가 박살날 정도로 턱을 꽉 깨문 듯, 턱이 흔들렸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걸고 있었다.

“저 년놈들을 내가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은가. 해골바가지는 머리장수에게 넘겨서 다락방 한 구석에서 평생을 뒹굴게 하고, 저 계집애는 소각장에 처박아서 불쏘시개를 밝힐 장작으로나 쓰게 만들지. 거북이는 기름에 튀기고 네놈은...”

“워-”

고양이가 손을 내저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결말은 당신 말고 아무도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저는 당신 왕국 놀이를 방해할 생각도 없고, 그러자면 당신이 위엄을 그런 식으로 되찾으시겠다는 데 뭐라고 참견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좀 더 재미있는 방법을 취해보면 어떨까 조언을 드리고 싶을 뿐.”

그가 말끝에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고양이가 뭔가 장난질을 꾸밀 때와 똑 같은 얼굴이었다. 여왕은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듯 한 얼굴로 고양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승부하시지요. 당신이 이긴다면 저 아가씨를 갈아드시던 장작으로 쓰시던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승부 어쩌고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던 고양이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 아가씨의 신변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승부가 결정되면 그때는 마음대로 하시지요.”

“뭐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동의 안했어요. 멋대로 승부라뇨. 거기에 신변을 맡는다는 건 또 무슨 말이죠? 당신한테 그런 거 맡긴 적 없다고요!”

고함을 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질 않는다. 누군가 답변을 해 주긴 커녕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멍하게 고양이를 바라봐 보지만 저 입은 열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입이 열린 곳은 전혀 다른 쪽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종목과 룰을 정하지.”

고양이가 그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 이기면 두 사람의 처분권을. 만약 아가씨가 이긴다면 무사히 이곳에서 내보내 주시는 걸로 어떻습니까?”

여왕이 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런 식으로 정해지려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른다. 어째서, 내가 이긴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불공정한 게임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런 식으로 하려면 집어치워요!!”

모두가 날 바라보았다. 고양이마저도 나에게 황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것이 뭐죠? 꼬리 내리고 이곳에서 무사히 도망치는 것? 그런 거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당신 따위에게 겁먹고 무력하게 살해당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당신의 백성이 아니에요!”

여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타는 분노를 저 아래로 내려 보낸 것이 분명하다. 이제부터는 분명 나에게 이기는 것에만 그 에너지를 다 사용할 것이다. 볼이 화끈해졌다.

“당신이 이긴다면 나랑 이 해골, 거북이. 그리고 거기에 말 많은 고양이를 굽던지 삶던지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당신은 우리 목숨 수에 맞춰서 네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해.”

여왕이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지고 싶지 않았다. 어깨를 펴고 마주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나한테 이것저것 말할 수 있는 처지인줄 아나?”

“그러지 않겠다면 승부 따위 하지 않겠어요.”

여왕은 이를 갈았고, 고양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이치에 맞는군요. 저는 동의합니다. 그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대신 방법과 룰은 내가 정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왕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나라, 나의 방식 아래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제가 이긴다면 당신의 목숨을 몇 개라도 빼앗을 수 있죠.”

지고 싶지 않아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뭘 할 생각이기에 저렇게 기고만장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짜증과 분노가 몸에 활력을 더해주었다. 이대로라면 저 오만한 여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여왕은 나보다 한참은 더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홀을 치워라. 무도회는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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