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4

2014.05.23 20:2105.23

멍하게 맞받아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인은 그런 나를 향해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날카로운 턱과 조그마한 얼굴. 모두 미인의 기준에 부합하고 있었다. 다만, 있어야 할 것들이 하나도 없을 뿐. 그녀는 입인 것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구멍을 열어 말을 토해내었다.

“가르칠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배우겠다는 거냐. 너는 가망이 없어. 너무 오랜 세월 굳은 몸을 이끌었다. 너 보다는 차라리 썩은 널빤지가 더 유연해. 거기에 동작은 끝이 살아있지 않아. 모두 투박하게 뭉뚱그려졌어. 목소리에는 애교가 없고 머리에는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없지.”

멍하게 있는 나를 향해 부인이 덧붙였다.

“거기에 나는 시간이 없단다. 무도회는 얼마 남지도 않았어. 새로운 인물을 키워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그리고 내 아래에 있는 아이들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무도회를 망치게 되겠지. 까맣게 태워버린다고. 까맣게.”

찌릿. 시선이 와 닿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눈 같은 것은 없는데. 그녀의 얼굴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턱 위쪽의 구멍이 확 벌어졌다.

“주제에 무얼 하겠다는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응?”

부인의 얼굴이 확 다가왔다. 나는 얼굴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담배연기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기분이 나빠졌다. 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고요! 적어도 당신 흉내는 낼 수 있어요!”

“내 흉내?”

부인의 얼굴 언저리가 일그러졌다. 아마도 저건 눈살을 찌푸린 것과 비슷한 표정 아닐까. 저 입 속에는 혀도 이빨도 없어 보였다. 아마 혀가 있었다면 혀를 끌끌 차지 않았을까. 가만히 상상해 보고 있자니 부인이 말을 이었다.

“무도회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 줄 알긴 아니? 사교계가 어떤 곳인 줄은 알아? 모두 가장이야. 얼굴도, 몸도, 노래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허리를 쫙 펴고 있으면 피곤하지. 하지만 쫙 펴고 있어야해. 나긋나긋하게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손끝 하나하나 전부 긴장시켜야 해. 하지만 그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지. 아프고 힘들지만 억지로 해야만 하는 거야.”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부인은 꼬고 있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발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빌어먹을 다리를 꼬고 앉을 수조차 없다! 거기에 인형처럼 웃어야 하지! 그리고 돼지 같은 사내놈들과 꼴같잖은 몸동작으로 춤을 춰야해! 나는 이 일이 싫다. 몸서리가 날 만큼 끔찍해! 모두가 나를 우아한 부인인줄로 알지. 하지만 말이야.”

부인이 얼굴에 가면을 썼다. 곰방대는 팽개쳐 버렸다. 가면 위로 거미줄이 펼쳐졌다. 알 수 없는 곤충이 묶여 파닥거리고 있었다.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지. 물어뜯을 곤충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독니를 썩히고 굶어 죽어야만 한다고.”

거미줄 위로 거미가 올라탔다. 살기어린 이빨이 파닥거리는 곤충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눈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돌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이 곤충을 확 물어뜯었다. 곤충이 축 늘어졌다. 거미가 수많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를 키워내기에는 시간이 없어. 넌 절망적이라고. 원하는 게 무엇이 되었든 이 길은 네가 선택할 길이 아니야.”

“...할 수 있어요.”

카악-.

거미가 입을 벌렸다. 가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허리 펴!”

날카로운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허리에 힘을 넣었다. 등줄기가 확 곤두섰다. 보이지 않는 코르셋이 허리를 꽉 조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고통까지 느껴졌다. 인상을 찌푸리려던 순간.

“고개 더 들어!”

턱을 확 치켜 올렸다. 부인의 손길이 턱 끝에 와 닿아 있었다. 그녀는 원석을 만지는 듯 진지하고 날카로운 손길로 내 턱 선을 내리훑었다. 손톱 끝이 날카로웠다. 저절로 양 다리가 모였다. 무척이나 조신한 자세가 되었다. 단 두 마디로 흐트러져 있던 자세가 똑바로 잡힌 것이다.

“...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하구나.”

부인의 손길이 목으로 타고 내려왔다. 소름이 돋았다.

“생활이 무던했지만 천성이 무딘 몸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은 없어. 너를 무도회 한 구석에 새워놓을 마네킹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것이 너와 저 분들이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지.”

“방법이 있다고요?”

입을 열었다. 부인이 내게서 확 멀어져 갔다. 그녀는 서랍장 어딘가를 뒤적거리다가, 은테가 둘러진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조심스럽게 열쇠를 맞춘 후, 뚜껑을 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하얀 가면이 그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부인이 조심스럽게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들어올렸다.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가면속의 내 얼굴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게 뭐죠?”

목에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나에게 말했다.

“재능 없고 그동안 쌓아온 것도 없는 아이에게 가능성이란 딱 하나 뿐이지. 네가 기댈 곳은 오로지 행운 하나. 이 가면은 너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럼 너를 전에 없는 최고의 미인으로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이 가면에게마저 버림받는 다면 너에게 더 이상 가망은 없다. 그저 이 저택을 나가주기를 바랄 뿐이야. 두 손을 다오. 정중하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렸다. 부인이 날렵한 동작으로 내 손 위에 가면을 올려 주었다. 낮은 조도의 불빛 아래에서 둥글게 빛나는 가면. 그리고 그 위에 비친 내 모습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가면 속 내 얼굴이 미소 지었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써 보려무나. 너를 스스로 증명해보렴.”

하지만.

뛰는 가슴이 경고했다. 이 가면을 쓰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저택을 돌아다니던 하인들의 표정 없는 가면이 떠올랐다. 거부감과는 정 반대로 두 손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였다. 가면의 뒷면은 짙은 어둠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가면의 차가운 안감이 얼굴에 맞닿았다. 눈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안 보여요.”

“보이게 될 거야. 운이 좋다면.”

어두운 와중에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더 무서운 것은 이 가면이 마치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귓가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면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양 볼을 조여 왔다. 턱 아래까지 조여 왔다. 마치 내 얼굴을 빼앗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다음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모든 것이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보였다. 부인의 가면은 검게, 그녀의 드레스는 하얗게 보였다. 하얀 벽면을 따라 검은 장식이 춤을 추었다. 천천히, 시야가 현실감을 되찾고 있었다. 색감이 천천히 돌아오는 와중에 숨이 확 트였다. 가슴을 확 젖히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깜짝 놀랐다. 내 목에서 나온 것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미성이었다. 온 몸이 간질간질 거렸다. 누군가 거친 솔로 몸을 마구 쓸어대는 듯 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하얗게 변색하고 있었다. 허리뼈가 우둑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통은 없었지만, 지독한 위화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는 것처럼 다리가 늘어났다. 괴이한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

비명이라기 보단 음악이잖아. 이런 건 내 것이 아냐.

“운에게 선택 받았구나. 그렇다면.”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나의 가면은 지금 어떤 그림을 띄고 있을까? 온 몸이 간지럽고, 뼈가 뒤틀리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발끝까지 긴장감과 선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아. 나는 변하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그 가면이라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도 같구나.”

부인의 하얀 가면에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가면을 쓴 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가녀린 초승달이 호선을 그리고 있다. 마치, 귀부인의 미소처럼 보였다.

“가면에 빨리 적응하는 편이 좋을 거야. 너를 쓰는 일에 질려버리지 않도록. 하지만 가면을 너무 좋아하는 것을 권하지는 않겠어. 정말로 가면과 하나가 되어 버리면 두 번 다시는 벗을 수 없게 되니까.”

벗을 수 없게 된다. 뜻밖의 한 마디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목에서 흘러나왔다.

“벗을 수 없게 된다니요?”

부인의 손이 부드럽게 자신의 가면에 와 닿았다. 가면은 그녀의 얼굴로부터 부드럽게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빙글, 부인의 손 위에서 돌던 가면은 그 뒷면을 나에게 보이게 되었다. 온통 까맣게 물들어 있는 뒷면. 거기에는 아마도 원래 부인의 얼굴에 붙어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코, 눈, 입술 등등이 제멋대로 붙어 있었다. 부인이 턱 위의 작은 구멍을 열어 답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돌려달라고 사정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지. 가면 뒤의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불편함과 불안함을 계속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네가 정말 뼛속까지 우아한 귀부인이 되는 일은 없지.”

부채가 쫙 펼쳐졌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나부끼더니 부인의 가면을 가렸다. 그 가면에 어떤 그림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자신을 빼앗기는 거야. 하지만, 명예와 부귀를. 사랑을.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버릴 수 있겠지? 눈과, 코와, 입. 그리고 너 자신마저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얼굴을 옥죄고 있는 가면이 금방이라도 내 얼굴을 뜯어 가버릴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가면에 손을 대었다.

탁!

부채가 휘둘러졌다. 손목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부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없어. 잡은 행운을 떨쳐내려는 거니? 어리석구나. 그런 어리석음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원하는 걸 얻겠다는 거냐? 싸우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체 행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위험까지도 피하겠다고? 그럴 순 없지.”

딱!

부인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쪽문이 열리고 시녀 두 명이 비죽 가면 쓴 얼굴을 내밀었다.

“네가 한 선택이야.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어. 걷는 법, 천사같이 웃는 법,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법.”

“잠시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어느새 좌우에 달라붙은 시녀들이 팔을 걸어왔다. 하지만 가면의 영향 탓인지 저항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이래서야 마치 무력한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발버둥 치려해도, 무력한 근육은 나긋나긋하고 천천히 움직일 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단기간에 배우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연습과 교육이지 너의 마음의 준비 따위가 아니야. 배워라. 그리고 원하는 것을 붙잡아.”

“안 돼.”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이것은 안 된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만다. 팔을 휘두르고 싶었다. 시녀들의 팔은 가늘기 그지없었다. 쉽게 뿌리칠 수 있다. 하지만, 내 팔이 그들보다 훨씬 가녀렸다. 어느 틈에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가면의 뒤편에 가둬버리려는 거야? 내 가면엔 도대체 뭐가 그려져 있지?

불안한 시선을 부인에게 던졌다. 부채 뒤로 가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느끼는 거야. 자신을 잃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부인의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어느 틈에 쪽문 밖으로 끌려와 있었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시녀들은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을 칠 기운도 없었다. 얌전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을 수밖에. 시녀들은 저택 한 켠에 자리 잡은 작은 방으로 날 밀어 넣은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전혀 안정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이상한 가면에 얼굴, 아니 혼까지도 빼앗겨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지금 반쯤은 감금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가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천천히 얼굴에서 때어내려고 시도해 보지만 아무래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확 뜯어냈다가는 정말로 얼굴이 뜯어져 나가 버릴 것 같았다. 힘을 조금 더 주면 피부가 찌익, 찌익, 하고 뜯어져 나가 버릴 것 같았다. 한숨이 나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자고 그 해골이랑 거북이 말을 들어버린 것일까.

애당초 그 무시무시한 토끼를 찾아갈 생각은 별로 없는데. 그렇다고 그 괴짜 여왕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하지만 이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 정신 나간 세계에 무사히 정착해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누가 나의 친구며 가족이 되어 주지?

끼익.

문이 열리고 시녀 한명이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발소리도 내지 않은 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꾸벅하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테이블에 다가섰다. 정말이지 우아하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내리 깔았다.

쟁반 속에는 거칠어 보이는 빵 작은 덩이와 뭘 넣었는지 알 수 없는 묽은 스프. 그리고 나머지 것들과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양의 채소들. 조금도 조리되지 않은 듯 풀 냄새가 고스란히 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풀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 판국에 식욕이 동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먹어야 하는구나. 이 우아하고 가녀린, 맥 빠진 몸을 이끌기 위해서는 저런 거라도 먹고 마시며 버텨야만 하겠지. 자리를 잡고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벽에 부딪혔다. 이 조막만한 가면에는 제대로 된 뚫린 구멍이 없었다. 이래서야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도 못한다. 라고 생각했을 즈음. 쭈욱, 하고 입 부분에 동그랗게 구멍이 뚫렸다. 야금야금 우아하게 먹으라는 듯, 아주 스푼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만.

급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 이빨. 내 혀. 내 입술. 모두 그대로 있었다.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들이 다 사라져 버릴 위기에 닿으니 소중함이 몇 배나 각별했다. 빵 덩이를 조금 잘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거칠다. 이건 그냥 음식이다. 맛이나 모양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영양과 생명유지에만 목적을 둔 거칠디 거친 빵. 묽은 스프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풀을 씹었다. 잔디를 씹는 것 같았다. 아니, 잔디가 차라리 낫다. 잔디에는 정체모를 가시가 돋아있지는 않다. 볼을 할퀴는 가시를 혀로 살살 밀어 뱉어내었다. 지독하게 불편했다. 더 이상 식욕이 돌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행위가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채워 주던가. 하지만 그것이 똑바로 돌아가지 않으니 차라리 서글픔이 밀려왔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방 안을 살펴보았다.

허름한 침대. 어두운 색의 시트. 창문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커다란 옷장이 보였다. 부인이 나에게 가면을 꺼내준 그 상자처럼 은테가 둘러져 있었다. 무료감과 불안감을 한 켠에 치우고 가만히 다가섰다. 은으로 된 문고리에 양 손을 대었다. 차가운 감촉. 문은 마치 미끄러지듯 천천히 열렸다.

방 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달빛에 비친 하늘하늘한 천 자락이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나는 이런 옷을 입고 모두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무도회장의 한 가운데에 서서 마치 그날의 주인공처럼 느릿느릿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른다. 숨 막히게 멋진 남성의 손을 잡고 계단을 통해 걸음걸음 아리땁게 홀을 향해 들어서면 느릿한 음악이 멈춘다. 빛이 한 가운데로 비치고, 옷자락을 둥글게 휘날리면서 춤을 춘다. 인형 같은 미소가 사방을 가득 채운다.

고개를 홱 저었다. 그곳에 나는 없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내가 아닌 대단한 것으로 봐 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한 순간도 나로 있을 수가 없다면, 진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던 그 세계처럼. 다시금 가면이 확 조여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갈 방법이 없을까?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급히 창가로 다가섰다. 가득 차 있는 달을 향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수풀이 숨 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요기 충만한 밤이었다. 밤이 이렇게까지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이봐요!”

가녀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래서야 누군가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이곳은 이 거대한 저편의 뒤쪽 드넓게 펼쳐진 심야의 정원.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겨우 저 정도다. 낙심하여 고개를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거북이와 해골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만나지 못한 체 그대로 돌아가 버린 것일까. 홱 하고 창가에서 물러섰다. 텅 빈 달이 무서우리만큼 가까이에 있는 것이 싫었다.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여행과 고생 속에서 갈아입었던 옷마저 헤지고 낡아 있었다. 반짝이는 드레스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이젠 되려 현실에서 입고 있던 옷이 현실감이 없었다. 이 볼품없고 두꺼운 인조섬유. 기계가 삽시간에 끝낸 형편없는 박음질. 이것이 다 뭐란 말인가. 진짜 현실은 자기가 현실이라도 인식하고 싶어 하는 것.

두 손이 옷장을 향했다. 옷자락이 손아귀에서 미끄러졌다. 이런 옷을 혼자서 입을 수가 있던가? 아무렴 어떨까. 사람 입으라고 만들어놓은 옷인데 내가 못 입을 것은 또 뭐람. 드레스가 내 손아귀에서 빛나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쳐 방안을 어둡게 만든 다음, 사락사락 옷을 벗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내 얇디얇은 팔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건 내 팔이 아니었다. 아무렴 어떤가. 이런 팔은 이런 드레스에 가당하다. 지저분한 속옷마저 모두 내려버리고, 알몸으로 가만히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등 뒤로 다가서는 것이 느껴졌다. 공포도 놀람도 없었다. 시녀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여 내 등에 코르셋을 채우고 새 속옷을 입혔다. 드레스가 하늘을 날았다. 다리가 미끄러져 통과하고 팔에 천이 휘감겼다. 내가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을 찰나에 모든 일이 진행 된 것이다. 드레스는 마치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이제 어떡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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