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3

2014.05.23 20:1905.23

한 참을 옥신각신 했지만 저 둘은 의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뭐랄까 여왕을 만나기 위해서 절박한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한다기보다 뭔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장난을 저지르려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내가 이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계에 단 하나 의지가지도 없다는 점이고 그렇기에 내가 아무리 싫다는 의사를 표명해도 저들을 따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참담하게도 등을 떠밀려 높은 언덕을 넘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제 어떡하라는 거죠? 계속 말했지만 전 역시 안 돼요. 춤추고 인형처럼 웃는 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우리를 따라오기만 해요. 썩은 나무토막을 침향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부인이오. 아가씨가 어지간한 둔치만 아니라면 분명 명랑하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둔갑할 수 있을 거요.”

“그러니까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요! 제가 그런 식으로 변한다니...”

“네가 그런 식으로 변할 필요는 없어! 그냥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한 시간이 됐든 오 분이 됐든 말이야.”

해골과 거북이가 번갈아가며 말을 잘라먹었다. 화가 버럭 치밀었지만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보단 행동. 여기서 더 말을 해 봐야 끊어 먹힐 뿐일 테니까. 그 자리에서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 뚜벅 걸어 나섬으로써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려 했지만.

꽈악.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한쪽 다리를 꽉 붙잡고 버티는 가짜 거북이. 전혀 놔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거세게 흔들었지만 거북이는 대롱대롱 매달릴 뿐 떨어져 나갈 기미가 없다. 한숨이 나왔다.

“후우. 도대체 뭘 하자는 거죠? 두 분이 생각 하는 그런 농담 같은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여왕을 만나는 방법은 없나요? 숨어 들어간다던가...”

“숨어들어가?”

거북이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해골을 눈가로 들어 올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 글쎄. 내 생각에는 그저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방법이 제일 쉽고 옳다고 보오. 위험도 적은 편이고. 여왕 궁에 숨어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 멀쩡한 사람은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다고 해도 결코 성한 몸으로 나오진 못할 거요.”

해골의 무거운 목소리 끝에 거북이가 토를 달았다.

“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 토끼놈 처럼 눈을 뽑고 입을 찢어버리면 되. 여왕의 모집조건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 그 정도면 되거든.”

순간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휘저었다. 어쩌면 이 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교계라니... 사교계라니.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을 리 만무한데. 하지만.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소? 그게 아가씨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시계토끼를 만나서 그놈을 제압하는 것. 그리고 저 가짜 거북이도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가짜가 아니라니까!”

가짜 거북이가 펄쩍 뛰어올랐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인내심이 증발해 버렸는지 이내 저택의 커다란 대문을 향해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그가 대문에 당도했다.

쾅, 쾅쾅!!

“이리 오너라!!!”

냅다 목청껏 고함을 내지르는 거북이. 해골이 턱을 딱딱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지만 귀부인의 저택을 방문하는 태도가 그게 뭐요?”

“실각한 백작의 마나님 따위 무슨 힘이 있다고. 그리고 어차피 이런 곳까지 마중을 오는 것들은 시종들 아닌가? 겁낼 것도 꺼릴 것도 없어.”

쾅 쾅!!

연신 시끄럽게 문을 두들겨 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문으로 조금 다가섰다. 이 둘도 내가 전혀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이 멍청한 계획을 즉각 포기할 것이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끼익-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녀복 차림의 누군가가 고개만 살짝 디밀고 말했다.

“뉘신지요.”

순간 깜짝 놀랐다. 마치 하녀의 얼굴에 눈 코 입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실은 그런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었지만. 표정은커녕 숨구멍 두 개와 눈구멍 두 개가 뚫렸을 뿐인 저 삭막한 가면 뒤는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던 찰나.

“손님이다. 부인과는 일면식이 있지. 어서 길을 안내해라.”

“부인께서는 지금 어느 누구도 들일 수 없다 하셨습니다만...”

손아귀 아래에서 해골이 말했다.

“괜찮은 아이가 있어 보여드리려고 온 거요. 상당한 재능이 있으니 돌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좀 전해주시오. 먼 길을 온 참이라 돌아가기가 그렇소.”

“하지만...”

감정 없는 목소리가 가면 아래에서 울렸다.

“어서 들여주지 않으면 문을 부술 테다!”

거북이가 빽 고함을 질렀다. 하녀는 결국 잠시만 기다리라며 느릿한 동작으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열린 문틈만 보며 멍하게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열린 문틈으로 또다시 머리가 비죽 나타났다.

“실례했습니다. 부인께서 어서 안으로 들라 십니다.”

이제야 저 큰 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가면 쓴 하녀의 등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쌍둥이의 궁전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로, 수십 개의 커다란 창문이 뚫린 벽은 문양 하나하나가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어딘가 동화책 같은 곳에서 이런 종류의 저택을 본 것 같았다.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뿌리치고, 백조 오데뜨가 창가에서 구슬피 노래하던 곳. 새하얀 벽이 이어지고 열린 방방에는 화려한 가구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결코 말을 걸어오거나 다가서는 법이 없었지만 수많은 고용인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얗고 표정 없는 가면.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지만 어느 누구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북이와 해골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말을 해봐야 들어줄 사람 따위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아닐까. 저들은 저들이 쓰고 있는 가면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왠지 하염없이 답답한 기분이 되었다.

층계를 두 번이나 올라 기다란 복도를 지났다. 드디어 저택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문을 보게 되었다. 십중팔구 이곳이 높으신 부인이 머무는 곳이리라. 문틈으로 얼핏 홍차 냄새가 살짝 베어 나왔다. 그래. 이게 그거다. 그 상류층이 즐긴다는 오후의 티타임. 다만 따뜻한 햇살만큼은 기대할 수가 없겠지. 이 세계에서는 여왕이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태양마저도 떠오를 수 없는 곳이니까.

활짝 문이 열렸다. 펑퍼짐한 드레스에 가려진 날렵한 몸매. 틀어 올린 머리칼과 부채로 완전히 가려 알 수 없는 얼굴.

“어서 와요.”

귀부인이 기품 있게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만히 해골을 앞으로 내세웠다. 내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격조 했소. 부인.”

“오랜만입니다. 부인.”

거북이가 근사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몸이 없는 해골은 살짝 턱을 기울이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이어지는 침묵. 어색함을 도저히 견딜 수 가 없어 가만히 몸을 숙였다.

“가만. 누가 왔나 했더니 아는 분이 찾아왔군요. 아마 저번에 따님을 보내주시기로 했었던 분과. 음. 그리고 다른 한분은... 어디선가 몸을 잃었나요, 아니면 이참에 무거운 몸을 이끌기 보다는 시종을 두기로 결정하셨는지.”

누가 시종이라는 거야. 나오려는 말을 꼭 틀어막았다.

“다름이 아니오라 부인. 우리가 재능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오. 이번에 점화기념 무도회가 열릴 때까지 당신이 교육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오만.”

해골이 짐짓 위엄 있는 말투로 운을 떼었다. 거북이가 살짝 덧붙였다.

“이래 뵈도 몸이 유연하고 재능이 많은 아입니다.”

이래뵈도라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부인이 살짝 부채를 치워 보였다.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의아함이었다. 부인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얀 베이스에 까만색 나비가 그려져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가면이었지만, 어째서?

의문할 사이도 없었다. 부인이 나에게 이리오라고 손짓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해골을 거북이에게 맡겨놓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 걷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부인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투박하군요.”

투박해서 죄송합니다.

“거기에 걸음걸이는 엉성하고 뻣뻣합니다.”

엉성하고 뻣뻣해서 죄송합니다.

부인은 가만히 내 뒤에 서 있는 거북이를 건너보았다.

“두 분의 안목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아이에게 도대체 어떤 재능을 보신 것인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 지요. 이대로라면 어떤 가면에게 이 아이를 씌워야 할지 알 수 없답니다.”

“큼, 원석이라 하는 것은 본디 투박한 돌 속에 숨어있는 것 아니요? 물론 우리가 그런 안목이 있다는 것은 아니오. 사실을 말할 것 같으면...”

부인이 가만히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저 가리는 행위에 의미가 있을까? 본 얼굴은 이미 두터운 가면이 가리고 있는데. 거북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여왕을 뵙고 싶소. 무도회에서 주목을 받아야 하지. 이 아이는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최고였소.”

“안목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부인이 부채를 치웠다. 놀랍게도 가면의 문양은 바뀌어 있었다. 까만 나비는 온대간데 없고 수국 한 송이가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면 뒤에서 유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왕께서는 삼일 후에 세상을 밝히시기로 결정하시고 있지요. 재능이 있는 아이를 데려다 주신다고 해도 훈련을 하고 교육을 시킬 충분한 시간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저라도 무리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다 살펴보지도 않았잖소!”

해골이 다급하게 외쳤다. 부인은 살며시 옆얼굴을 보였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다. 해골은 아래턱을 딱딱거리다가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부인. 부인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큰 도전 아니겠소? 언제나 준비된 아이를 내세운다면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것은 그대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에 도움만 줄 뿐. 이번 일로 저 아이를 데뷔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부인의 명성은 더 더욱 높아지겠지요.”

밑도 끝도 없는 설득이었다.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가르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노력을 쏟는 것은 그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에 불과할 뿐. 아마도 저 부인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면 뒤쪽으로 살짝 드러난 하얀 살결이 차갑게 비쳤다.

“죄송하지만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 곤란하지만 이 아이는 가망이...”

“할 수 있어요.”

순간 나 자신을 의심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한 거지? 부인의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국 한 송이가 일렁이더니 알 수 없는 파형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동그란 원에서 선이 쭉쭉 뻗어나갔다. 거미가 되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냐?”

“배울 수 있어요.”

독살스러운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았다. 거미가 이빨을 드러내었다. 곤충이나 작은 짐승 따위를 빨아먹을 때 쓰는 날카로운 독니. 순간 이 부인이 우아함 뒤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손을 가만히 치켜 올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 아이를 조금 대해보고 싶군요.”

거북이가 말없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에 든 해골을 잠시 그에게 넘겨주었다. 해골이 딱 하고 아래턱을 맞대더니 가만히 말했다.

“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이가 못 미더운 듯 몇 번 기웃거리다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리고 방 안에는 나와 부인 단 둘이 남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정말이지.”

부인이 한쪽 다리를 확 들어올렸다. 맙소사. 부풀어 오른 치마가 확 찌그러졌다. 날렵한 다리를 한쪽 다리위에 척 들어 얹었다. 그리고 한 손으론 테이블 뒤쪽을 뒤적대더니 기다란 곰방대를 꺼내들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홱 하고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부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도, 눈도, 귀도. 빼꼼- 하고 열린 조그마한 구멍 같은 것이 아무래도 입인 모양이었다. 부인은 거기에 곰방대 끝을 밀어 넣었다.

“후우.”

담배연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찡그릴 새도 없이 부인이 말을 걸어 왔다.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배, 배우는 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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