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0

2014.05.23 20:1405.23

3_ 미혹의 곡선

찌르르르릉-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저 시계를 구입한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몇 번이나 배터리를 갈아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특별히 수리를 하거나 했던 기억은 없다. 애시당초 수면에 목을 매는 몇몇 사람들과 달리 나는 깨어날 때 자명종에 거의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푹 잠드는 일이 없는 머릿속에서 간밤에 꾼 정체불명의 꿈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느릿느릿 환상을 걷어내려는 순간 머릿속에 박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자명종을 두들겨 멈추었다. 지독히도 선명한 꿈이었다. 토끼, 해골, 고양이, 알 수 없는 죽은 것들과 이상한 나라. 한 시간이 일분 같고, 일분이 한 시간 같았던 시간과 따로 놓인 듯 한 세계에서 간신히 돌아온 것일까.

“후우.”

한숨이 나왔다. 이제 꿈은 끝났다. 이제 두 번 다시 길을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움켜잡아 묶고, 세안을 하고 몸을 씻고 화장을 하고 커튼을 걷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단단하고 빈틈없는 복장과 구두.

하지만 왠지 낮은 굽의 구두를 골랐어.

높은 굽의 구두를 도무지 신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스커트도 조금 불편하다. 무난하고 긴 바지를 입었다. 바지를 끌어올리려던 찰나에 찌르는 듯 한 아픔을 느끼고 숨을 들이마셨다. 양 손을 들어 올려 눈앞까지 올렸다. 두 손은 무엇인가에 잔뜩 쓸린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무언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급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해골은 어디에도 없다. 아차, 두고 왔지.

하지만 해골 같은 것은 원래 어디에도 없어. 모두 내가 꾼 꿈일 뿐이다. 손이 쓸린 것은 무언가 잠꼬대라도 심하게 하다가 상처를 입은 거겠지. 현실의 일이 꿈에 투영된 것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발도 엄청나게 아파왔다.

차가운 바닥을 너무 오랫동안 밟고 서 있어서였을까. 발등에 조금만 무엇인가가 닿아도 경련 할 것만큼 발이 아팠다. 이래서야 말이 안 된다. 꿈속에서 걸었다고 깨어난 뒤도 발이 아프다고? 문득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꿈이 아닌 것은 아닐까.

쉴 새 없이 드는 의혹을 등지고도 몸은 간신히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 굽 낮은 구두에 발을 우겨넣었다. 발이 아팠다. 이 고통이 현실이기를. 그 꿈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문을 열었다. 새벽 이른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버스는 내가 온지 1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버스기사는 나에게 시선도 한번 주지 않았다. 분명 살아있는 사람. 온기가 느껴지는 반가운 얼굴일 텐데 나와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면 저 사람과 세계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힘없이 발을 끌어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겔겔거리고 웃던 그와 공격적이었지만 나를 바라봐주었던 생물이라 하기에 이상한 무엇인가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리던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회사에 누구보다 조출하여 컴퓨터 책상에 앉아 랩탑을 꺼내고 알 수 없는 글줄이나 작성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야. 그리고 피곤한 몸을 잠의 세계로 이끌어 가면 된다.

하지만 문득 한 번도 든 적이 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아.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달릴 필요도 없고, 모르는 길을 걸을 필요도 없는 곳에 어떤 의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 없이 지나쳤지만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차가운 거리. 걷는 사람들은 누구도 시선을 주고받지 않고, 정겨운 한마디마저 들려오는 법이 없다. 새들마저도 고독히 밀알을 좇는 이곳이 내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고향일까. 회의감이 치밀었다.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았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모르는 것. 나를 아는 이, 나를 불러줄 이.

나는 고독하다. 이 감각은 미칠 듯이 선명하다. 적막의 세계에서 나를 지켜주던 고독이 이제 도리어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했다. 또다시 이전에는 해 본적 없는 일을 해버렸다. 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흐읍 숨을 들이마셨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밤길을 내달리고 싶었다. 도대체 지금의 나는 누구?

두 눈을 반쯤 뜨고 거리를 살폈다. 햇살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나뭇가지 끝에 햇살이 걸리고 이슬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그리고 한 가지 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헙-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나무는 발이 달린 것처럼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 버렸다. 두 번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저건. 꿈속에서 본 누군가와 닮았다.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끼익-

생각할 시간도 없이 버스가 멈추었다. 짜증날 정도로 정시였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느릿느릿 몸을 이끌고 버스 아래로 몸을 내렸다. 강한 햇살에 온몸이 노출되었다. 매미 떼가 시끄럽게 떠들어대었다. 짜증이 났다.

저벅, 저벅, 저벅.

낮은 구두가 지면을 울렸다. 정신없이 회사를 향해 걸었다. 아마도 누구도 오지 않았을 사무실을 향하여 몸을 옮겼다. 최 조출 사원은 나다. 문득 얼마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문을 열었다. 아마도 그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한데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바짝 달라붙은 슈트와 날렵한 몸매. 새카만 눈동자와 창백한 피부. 꿈속의 고양이가 내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 왔다. 과장된 몸짓이었다.

“돌아온 현실이 아무리 편안하다고 해도 꿈의 찌꺼기를 처리하지 않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내 눈앞에 양 손을 펼쳐보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악수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요. 제 말을 또 듣지 않으시려거든 귀를 막으셔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안 들릴지는 의문이지만.”

벌컥 짜증이 치솟았다.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죠? 왜 제 주변을 맴도는 건가요!”

“아무것도. 그저 약간의 흥미가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과장한 것처럼 당신의 주변을 맴돈 사실도 없고요. 그저 제가 있는 것을 당신이 보고, 저는 제가 관심이 있는 방향으로 행동을 할 뿐이지요.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고양이는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저이기도 하고요. 그 말은 그 꿈속에서 들은 말들을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아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아닙니까? 아마 하루의 기한이 있을 겁니다. 그동안 아마 당신은 ‘무언가’를 하기를 요청받았을 텐데요.”

선명하게 떠올렸다. 뻔히 기억하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머릿속에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난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어떻게 할 겁니까?”

“뭘 물어보는 거예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고양이가 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몹시 고양이 같은 동작이었다. 그는 두어 번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으신 겁니까? 제가 이전에 말씀을 드린 데로 당신한테 남은 시간은 7일 뿐이군요. 이곳에서 하루를 뺀다고 해도 썩 시간이 많지는 않으실 텐데요. 계획이 있습니까? 단지 아무것도 안한다... 는 너무 밋밋한데요. 아시다시피 살인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구, 장소, 시간, 모든 것이 적당하게 맞아떨어져야지만 성립되는 것.”

고양이는 내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가요. 나가지 않으면 경비를 부르겠어요!”

“불러서 경비를 죽일 겁니까? 좋지 않은 생각이군요. 그는 무장하고 있고 남성이기에 힘도 당신보다 훨씬 강합니다. 죽이기는커녕 순식간에 제압당하겠지요.”

죽인다. 죽인다. 짜증이 치밀었다. 아직 아무도 죽이겠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시끄러워요! 이 이상 나한테 말하지 말아요! 내가 결정할 일이지 당신 같은 방관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고양이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입 꼬리를 올리는 고양이의 웃음. 하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행복이나 기쁨 같은 것이 아닌 차가운 비꼼이었다.

“그래서 그 세계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쌍둥이는 절대 당신을 거저 여기로 보내 준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는 해야 하는 일이 있지요. 가만히 있으시려거든 그것도 좋습니다. 다시 한 번 해가 뜨지 않는, 모두 죽어버린 이상한 땅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그것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버릇인 듯 한 말끝에 그는 드라마틱하게 양 팔을 벌렸다. 나는 흠칫하며 뒤로 더 물러섰다.

“제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이 상황에 흥미를 느낍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졌다는 말이지요.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 물을 것 같으면,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바로 당신이지요.”

“당신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거세게 소리쳤다. 하지만 고양이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움을 거절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건네는 것은 저의 자유. 잘 들으십시오. 두 번 이상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들어줄 의사도 없겠지요.”

“듣고 싶지 않으니 빨리 사라져요. 살인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생각은 애석하게도 제 관심 밖입니다. 제가 지금 드릴 것을 당신이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순전히 당신의 몫이지요. 제가 드릴 이 물건은.”

스륵. 고양이의 날렵한 소매 단을 타고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미끄러졌다. 세상에, 온 몸에 피가 빠지는 것 같았다. 저 날카로운 칼날, 새카만 손잡이. 내 손바닥 정도 길이의 나이프였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체 말을 이었다.

“이 물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특별합니다. 찌른 상대를 죽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상의 모든 관계도 끊어버려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게 되지요. 시체가 그 즉시 사라지는 것 또한 이점의 하나입니다. 이 단도만 사용하신다면 시간, 알리바이. 등등 사후처리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요.”

“이, 이런 거...”

날붙이가 새파랗게 빛났다. 하려던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의하셔야 할 것이 있다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을 노려야 한다... 정도입니다. 타인에게 노출되어버린다면 아마도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당신으로서는 아마도 곤란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런 것 필요 없으니 가져가요! 저, 저리 치워요! 그런 흉한 물건!”

“받으시거나 말거나 당신의 자유입니다.”

고양이는 척척 걸어서 내 데스크 근처로 다가섰다. 그는 소리 없이 단도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이만 사라질까요.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당신이라면 잘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끝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저지할 새도 없이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문을 열어젖혔다.

“자, 잠시만!”

그는 살짝 한 손을 들어 올려 내게 흔들어 보였다. 다음순간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이제 텅 빈 방 안에는 이상한 나이프와 나 단 둘만이 남아버렸다. 고민 할 시간도 없었다. 누군가가 들이닥치는 발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저 흉한 물건을 어떻게 해 버려야 한단 말인가. 냅다 저 흉기를 들어서 창가로 다가섰다. 창문을 확 열고 집어던지려던 찰나. 머리를 스쳐가는 한 마디가 있었다.

다시 한 번 해가 뜨지 않는, 모두 죽어버린 이상한 땅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고양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근처 프린터에서 A4지 한 장을 뽑아내어 나이프를 친친 감았다. 칼날 끝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위장해 놓고는 책상 서랍을 쭉 잡아 빼어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서랍을 닫았다. 쾅 소리가 나며 책상 전체가 흔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잽싸게 랩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들어온 사람은 나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맞은 편 데스크로 건너갔다.

흠칫흠칫 곁눈질을 보내었다. 저 사람이 눈치 챈 기색은 없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잘 모른다.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도 단 한번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지금만큼이나 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한 때도 없었다. 혹시나 내가 무언가를 숨긴 것을 본 것은 아닐까?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닐까?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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