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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빛머리 - 멱살다짐(3)

2021.11.27 03:5611.27

“강아지가 일을 벌리렷다.”

열댓 보를 멀찍이 선 채 수염을 느릿느릿 쓸며 한다는 말씀이었다. 정촉은 즉각 짝다리를 짚고서 턱을 처억 치켜서니 예를 차렸다.

“아유, 선배님두. 개, 사램두 구별 못 허슈? 눈병에 차도가 읎으시고만.”

“허허.”

웃던 십팔검이 가만 팔짱을 끼며 섰다. 정촉은 여즉 매고 있던 방패를 벗어 옆쪽 울타리에 가만 기대 놓았다.

“왜 안 쓰구? 갖은 수를 다 동원해야지.”

“아이, 사램을 잡넌 데 신기(神器)를 쓰겄슈.”

“하, 참.”

어이가 사라져 턱을 뺀 작자 앞으로 정촉은 떡하니 섰다. 저편에서도 척하니 자세를 차리니, 추울 때가 아님에도 냉한 바람 줄기가 불었다. 그새 몰려나온 구경꾼들도 노변에서 저마다 구경할 태를 갖추었다. 십팔검이 환기를 할 듯 목을 흠흠 갈았다.

“검명은 양광십팔검(楊廣十八劍)이요, 함자루넌 윤 자에 명현 되시넌 이분이, 우리 아우 토실헌 볼기를 즘 두드려 줄 텡께, 꾸지람이 닿넌즉 어매 젖 즘 더 자시구 오시게.”

하고 내뱉는 품이었다. 정촉은 귀에 벌레나 들어간 듯 귀를 후비고선 후 불었다.

“중원 충주의 정촉이 여쭈간디, 말씸대루 이눔 볼기야 탱탱허니 익어선 두드릴 맛이 적잖어유. 근디 어르신이야 머 볼 것이나 있겄슈? 긍께, 후배넌 선배 주머니나 즘 갈겨 드려야지, 머.“

거드름을 죽죽 빼며 이른 정촉이 입을 마저 열었다.

“탱탱허니 익은 게, 후배 볼기만 허겄쥬.”

“아이, 내 것은 자네랑은 계관 읎어. 자네 어매를 대동해야 뵐 것을 뵈이지.”

십팔검이 고개를 틀고서니 손날을 들어 휙휙 저으며 한다는 소리였다. 노변에서는 피식피식 웃음기가 나돌았다. 비끄러져 올라간 정촉의 입매가 대번에 가라앉고 눈에는 쌍심지가 돋았다. 그러나 속에서 역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내리 앉히고, 정촉은 대뜸 절을 올렸다.

“아이구! 새 아부지가 여그 계셨네. 초장에 절 받으슈.”

“잉잉.”

“아이구, 아부지.”

“오냐, 욘석아.”

받드는 시늉에 작자가 제꺽 거드름을 피우는 시늉이었다. 노변에서는 난딱 웃음보가 또 일었다. 정촉은 무릎을 털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엊그적에, 전(前)어무니를 또 뵙구 오넌 길인디, 이 타지에서 마침 어른을 봬유!”

그러자 수염을 가만 내리훑기나 하던 치가 눈을 크게 떴다.

“잉? 그새 내 처를 만나구 왔어? 잘 있등가?”

“예, 무사태평허시든듀.”

“아이구, 그랴. 반가운 일이다.”

퍽이나 반갑다는 품으로 치가 과장되게 뒷짐을 지었다. 벌어지는 된판을 본 관중들은, 이 마당극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 사뭇 궁금 어린 낯짝들이었다. 정촉은 “안 그래두…” 하고 길게 운을 떼었다.

“기별을 전허라구 허시든듀.”

“잉?”

과연 물음을 빼는 기색이거니, 냉큼 짓쳐 갈 때였다. 정촉은 허파에 숨을 밀어넣었다.

“어휴우, 씨가 새 밭 찾으러 갔다만은! 제우 토끼풀 씨앗밲에 안 됭께 어느 밭이 성에 차겄더냐구! 묻잡든디유..!”

웃음보 자루의 끈이 마악 풀어헤쳐질 맡이었다.

“그렁께! 마저 올라가선 백두산삼이나 잘 자시구서! 씨앗 종자나 갈아치라구우!”

- 하하핫! -

자루가 곧장 열려서는 안의 웃음 법썩, 가락들이 구수하게 쏟아 나와 뒹굴었다. 낄낄 도진 웃음살로 노변에는 자빠진 이들까지 더러 있었다. 작자가 관중을 흘기거니 낯판을 대강 감싸쥐었다.

“아이구! 그기 또 소문이 날 참이네! 어여 입을 막아야 쓰겄다!”

그러자 정촉은 팔짱을 낀 채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휴우, 그새 이만저만 새 버렸슈! 벌씨 나라 서울꺼정 파다헝께.”

“그게 은제 또 그리꺼정 갔어?”

“내참, 발두 읎넌디 여 선천 땅이라구 안 오겄슈? 잉? 벌씨 왔넝감?”

하며 정촉이 손날을 이마에 꼽은 채 주위를 두르는 시늉이었다. 작자가 크게 아이고오! 소리 내더니만 곧 혀를 쯧쯧 찼다.

“글씨, 부자에 유친두 몰르구, 철딱서니 읎넌 치헌테 엉기적 묻어 온 모양인디.”

“아유, 예를 채리넝 건 진즉에 글렀슈! 사램 된 도리루다가, 으찌 토깽이를 아부지루 모시겄슈!?”

정촉이 아서라는 조로 손사래를 휙휙 쳤다.

- 아하하! -

막 웃어 대는 소리소리를 힘써 흘리고, 작자가 칼집을 쥐들더니만 제 샅추리에 척 대였다. 칼이 길게 사타구니에서 솟았다.

“요 맛은 즘 매울 겨.”

“아이, 발딱 휘두르문 추욱 처지기야 허겄쥬.”

꼴사나운 턱에 정촉이 턱을 모로 틀며 난딱 일렀다. 상대가 눈을 새초롬히 뜨고 보았다.

“그랴?”

“글쥬.”

“그럼 자네가 함 맛 봐 봐. 볼기허구넌 또 마침 근경(近境)잉께.”

“예?-“

별안간 작자가 사이를 좁히고 뛰어 들었다.

- 어엇! -

스릉!-

두 날붙이가 동시에 각기 집에서 출동했다. “합!” “이얍!” 순식간에 10여 합이 칼끝과 검끝에서 부딪히고 미끄러져 날렸다. 이리저리 던져 대는 칼끝에 정촉이 검을 척척 대어 붙이는 동안이었다.
허공을 점한 칼질이 으레 날아왔다. 정촉은 피하기보다 에라, 검을 작자의 목덜미 편으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치가 곧바로 거리를 격하거니 뒤로 폴짝 뛰었다. 낯판이 그새 붉으락푸르락하는 처지였다.

“이씹!- 살수를 쓴단 말여?”

정촉은 고개를 갸웃,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명(無名)이 삼가 십팔검을 뵈오넌디, 으찌 장난을 치겄슈?”

“헛허, 찢길 눔-“

말을 지껄이는 편으로 정촉이 곧장 검을 찔러 갔다. 얼굴을 찌르는 것을 치가 둘러 막고는 곧바로 전면을 횡으로 그었다. 정촉은 검날을 누여 일격을 흘려 낸 후, 떨어지려는 칼날을 좇아 검을 그대로 훑어 올렸다.

샤아악-

“엇!-”

인상이 일그러진 치가 검을 비틀어, 타고 오르는 검을 창!- 칼방패(코등이)로 퉁겨 내었다. 그러자 아뿔싸, 힘을 싣느라 정촉의 몸뚱이가 기우뚱한 찰나였다. 칼이 그만 어깨로 쏟아졌다. 정촉은 냅다 몸을 트는 동시에 발목에 힘을 주었다. 휘두르는 궤적 밑을 지나는 정촉의 코앞에 칼날이 번뜩였다.
뒤로 뜀뛰기를 한 정촉은 한기를 제대로 쏘인 듯 감각이 없는 코를 매만졌다. 형태도, 가쁜 숨을 들이는 구실도 멀쩡한 것으로 보아 안즉 달려는 있었다. 앞을 보거니 치는 실실 웃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자, 인제 누가 토깽이여?”

끼치는 멋쩍음은 싸게 물리고, 정촉은 마치 바람을 내몰 양 검을 붕붕 휘둘렀다. 그리고 코를 티나게 킁킁거렸다.

“워디 토깽이가 쏘다니남? 누린내가 나넌디?”

“그랴, 더 설쳐 봐아.”

치가 칼을 가슴팍 앞으로 고이 치켜든 채 말없이 이편을 응시했다. 예기 어린 기세가 전면에서 물씬 뿜어져 나왔다. 날을 드밀 틈새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촉도 가만 입을 닫고서 왼발을 앞에 내고, 검자루를 쥔 왼손을 오른손 위로 옮기었다. 그리고 왼쪽 어깨를 가만 내밀었다.
바람 줄기가 옷자락을 지나고 머리칼을 살살 부나꼈다. 격한 다툼 탓에 상투에서 삐진 머리털이 정촉의 미간으로 어른거렸다. 털 몇 올이 눈앞에서 흔들흔들 상대를 쪼개기도 하고 출렁출렁 베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매번 상대가 커지는 듯했다. 그 순간 칼날에 볕이 똑바로 되비쳤다. 정촉은 부신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코앞에 선 만치 커져 있었다.

“으합!“

“헛!-“

챵!-

왼편으로 그대로 찔러 들어오는 칼을 정촉은 재게 부딪혀 흘렸다. 급히 기동한 탓에 자루를 파지한 손이 미끌거렸다. 두어 차례, 어깨와 목덜미를 가르는 칼질을 아슬아슬 흘려 낸 정촉이었다. 칼날이 물러서려던 그때, 정촉은 자루를 쥔 왼손을 그악스레 쥐고선 검끝을 휙 내밀었다. 상대가 피하는 동시에 검을 밀어내며 칼을 찔러 왔다. 정촉은 검을 휘둘러 막고선 뒤로 비켜섰다. 칼날이 바락 좇아왔다.
그 뒤로도 칼과 검은 찌르고 막고, 베고 피하는 칼부림을 벌였다. 그러나 칼이 시종 공세를 취하면 검이 내내 수세에 몰리는 형국과 진배없었다.
바깥에서 중앙으로, 종으로 쉼없이 쏟아지는 칼날을 정촉은 회피 일색이었다. 칼날이 눈앞에 번뜩일 때마다 정촉은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상대의 잔웃음이 그 숨결 사이를 비집었다.
어느새 두 병기가 부딪히는 수십 합은 정촉의 왼편, 상대의 오른편으로 몰려 있었다. 거침없는 칼질을 연신 막아 내는 정촉의 왼손이 시나브로 저려 올 참이었다.

“흡!-“

칼날이 재차 날아왔다. 정촉의 눈이 환히 빛났다.
바깥에서 횡으로 마악 저미려는 칼날의 뿌리가 턱- 막히기로 치솟은 왼 팔꿈치였다. 접힌 왼팔 끝에서 검이 떨어졌다. 찰나에 지척으로 마주하는 눈살이 엉키어 지났다. 당황하는 빛은 막힌 칼날에 비쳐 내리고, 이를 악문 빛이 그 칼날에 비치어 올랐다. 떨어지는 검은 정촉의 오른손에 쥐여 잽싸게 치솟았다. 정촉은 냅다 검을 그어 내렸다.

쩡!!-

“억!-“

검격을 받아 낸 칼이 크게 울자마자 작자가 외소리를 내었다. 기함을 한 작자가 헐레벌떡 물러섰다. 정촉이 내려다보거니, 부르르 떠는 반동을 주체 못해 손가락들이 흉하게 곱아 있었다. 대낮의 길목에서 피를 흩뿌릴 수는 없기로, 칼을 갈겼던 차였다. 작자도 그를 알았는지 표정이 심히 어두웠다. 그러나 더 접근치는 않고 칼만 가누어 쥐는 품이었다. 정촉은 턱을 가뜬히 치켜올렸다. 얼마 떨어진 거리에서도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듯 했다. 귀를 마저 열자니, 노변에서는 히야아..! 감탄사가 튀어나오고들 있었다. 정촉은 검을 내리고 머리를 숙였다.

“이 미욱헌 후배가 주제에 참 실례가 많았시유! 선배!”

그러자 작자가 허탈한 듯 칼을 내리더니, 씁쓸한 얼굴이었다.

“아녀, 내 후배 검을 견식헝께, 온제구(언제고) 우리 양광의 일검일통(一劍一通) 소식을 받잡겄다!”

“어유, 몸 둘 바를 몰르겄시유! 선배!”

허리를 바짝 굽히며 예법을 행하던 정촉은 마저 공치사를 할 품으로 선배에 똑바로 다가갔다. 오는 사람을 보거니 선배도 마주 응할 빛이었다. 코앞에 다다른 정촉은 선배 손을 양손으로 꽉 포개며 고개를 들이대었다.

“…한 분만 더 내 어무니 으쩌구 허문, 밖에 결창(내장)을 내다가 터출 텡께. 주의허슈.”

으레 인사나 주고 받을 품으로 있던 작자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대관절 어떤 상소리가 제 귀에 들었는가 여기는 빛이었다. 정촉은 꾸벅 인사를 올렸다.

“선배님! 못난 말학(末學)은 이만 물러가겄시유!”

“…”

대꾸는 없이, 그저 물러가는 정촉을 노려보는 서슬이 시퍼랬다. 정촉은 놓아 둔 방패를 들고서 다시 가게로 들었다. 앞에 선 이들이 자칫 몸이나 대일까 비키는 기색이었다. 정촉은 칼날을 막아든 팔꿈치가 그제야 아리아리하게 쑤시는 것을 알았지만, 일절 티를 내지 않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정촉은 자리에 앉아 국을 마저 들었다. 곁드는 눈길들이 밑반찬이 되거니, 팔의 쓰림은 가시고 혀의 단맛만이 정촉에 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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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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