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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정원의 여자들 - 후일담

2021.04.17 02:2004.17

추적추적 비가 쏟아져 내린다. 한거정은 입고 있던 외투를 끌어 목 밑으로 당기었다. 담배 갑을 꺼내 불을 붙이려 허둥댄다. 한쪽 팔을 깁스한 한거정은 반대 주머니에든 불을 꺼내기 위해 팔을 비틀고 허리를 당기었다. 비가 쏟아지는 공장의 쌀쌀한 시멘트 바닥으로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차량 몇 대와 경관들이 공장으로 와 테잎을 들어 두리번거린다. 한거정은 불을 켜지 못해 식어가는 연갑을 빈 입속으로 물어 침만 삼킨다.

 

[Good weather, right?]

 

경찰들 사이로 여자 하나가 한거정에게 손을 흔든다. 그녀가 한거정에게 다가가며 주절거린다.

 

[Well, I really want drink tonic.]

[Ya know, rainy day...]

 

검은색 구두와 갈색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그녀는 쥐색 줄무늬 코트를 여매었다. 적갈색 머리칼이 비에 젖어 찰랑인다. 한거정은 한마디 답도 없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만 보았다. 여자가 고개를 으쓱인다. 한거정이 입을 연다.

 

[你说的我都听不懂]

(그렇게 떠들어봤자 못 알아 듣는다고.)

 

[조사원들입니까?]

 

공장장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와 공송하게 묻는다. 여자가 먼저 통역장치를 두드려 말을 붙인다.

 

[나노하 기업에서 왔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신분용 수첩이 반짝인다. 꽃과 별이 섞인 복잡한 문양 아래로 그녀의 사진이 붙어있다.

 

[좋습니다.]

 

공장장이 여인의 수첩에서 눈을 떼어 한거정을 본다. 그가 뒤늦게 명함을 꺼내 건넨다.

 

[Well Life 사 소속 안드로이드 전담 현장 보고 팀입니다.]

 

[알겠습니다.]

 

공장장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다.

 

[그런데 조사하시고 싶으신 게 Well Life 사로 가는 납품 기기입니까?]

 

뻔한 물음이다. 한거정은 준비해온 대답을 당연하다는 듯 꺼내어 보인다.

 

[그건...]

 

[그건 바이오로이드 사건을 맡은 저희를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일 뿐입니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며 태연하게 한거정의 말을 잘랐다.

 

[누가...]

 

[누가 이런 사건에 도움을 주겠어?]

 

여자가 한거정을 보며 눈썹을 올린다. 한거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여자가 그의 어깨로 어깨동무를 걸었다.

 

[이 남자가 꽤나 많은 도움을 주어서 말이죠.]

 

한거정은 여자의 친근감에 부담스러워한다. 그가 몸을 빼내려 하고 여자는 더욱 그를 제 쪽으로 당긴다. 공장장은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

 

[저기 조사관님들.]

[우리 공업 단지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예민해져서 말이죠.]

 

여자가 한거정에게 건 어깨동무를 풀고 담배를 물어 불을 붙인다. 공장장은 두 손을 붙여 부탁을 하였다.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거정이 여자를 보고 있다. 여자는 연기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시죠.]

 

자리를 비키는 공장장의 뒤를 보며 한거정은 빈 연갑을 입술로 굴리었다.

 

[어때, 기업 경찰 양반.]

[냄새가 나나?]

 

여자가 우산을 펼친다. 비가 더욱 거세게 땅으로 떨어진다. 공장의 녹슨 페인트가 빗물을 받아 천천히 벗겨진다. 비를 맞고 있는 한거정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여자는 그의 입에 매달린 연갑에 불을 붙였다.

 

[모르지.]

 

여자가 우산을 그에게 씌워주느라 온통 비로 젖는다. 코트와 머리칼이 빗물로 덮여지는 그녀가 입 꼬리를 올린다.

 

[We never know, what happen on there.]

 

[什么?]

(뭐?)

 

여자는 그에게로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무리하지는 마.]

 

그녀가 그의 다친 팔을 턱으로 가리킨다.

 

[몸도 약한 주제에 말이야.]

 

한거정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당해보면 그런 말 못할걸.]

 

[어쨌든 정보는 고마워.]

[나노하 기업의 회장이 죽어서 한창 난리이거든.]

 

[그 양반 덕을 본 땅이 한둘이 아니니까.]

 

[재키라는 게 여기 있다고?]

 

[모르지.]

 

간신히 불이 남은 담배를 들이키는 여자. 그녀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한거정이 우산대를 잡아 그녀에게로 돌려주려한다. 여자가 웃으며 제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그의 손에 쥐어 준다.

 

[안드로이드가 살인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여자가 묻는다. 우산을 떠맡은 한거정이 우뚝 서서 진지한 얼굴로 답하였다.

 

[조사해봐야지.]

 

여자가 담배를 털어 웅덩이로 던져 버린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걸어 경관들에게로 돌아간다. 자오랑이 어느새 다가와 한거정의 뒤로 말을 걸었다.

 

[是谁?]

(누구입니까?)

 

한거정이 우산 속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들이 튕기는 소리가 가득 우산 속으로 첨벙거린다.

 

[不懂内心的女人]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자오랑이 목에 걸친 목도리를 불편한 얼굴로 저 혼자 당기고 풀기를 반복한다. 한거정이 고개를 저었다.

 

[那是什么?]

(그건 뭔가?)

 

자오랑이 한거정의 깁스를 가리킨다.

 

[是那个时候得到的东西]

(그 미친 안드로이드에게 얻은 훈장이지요.)

 

한거정은 엷게 웃으며 공장으로 걸어간다. 자오랑도 그를 따라 걷는다. 공장들이 부지 가득 줄 세워져 있었다. 자오랑은 공장들을 올려다보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要确认这里所有的地方吗?]

(여기를 전부 돕니까?)

 

[不对]

(아니.)

 

한거정은 여자를 중심으로 공장 부지로 흩어지는 경관들을 가리켰다.

 

[他们会确认的哦]

(저 자들이 주요 공장들을 확인할거야.)

 

[那我们怎么样?]

(그럼 저희는?)

 

[我们]

(우리는.)

 

한거정이 낡고 벽 곳곳이 부식되어 구멍이 난, 관리되지 않는 공장의 문을 한 팔로 밀었다. 그가 힘겹게 끙끙거리자 자오랑도 함께 나서 문으로 몸을 밀었다. 녹슨 문이 기괴한 소음을 일으키며 먼짓내를 풍기었다. 비가 내는 비릿함과 폐를 덮는 답답함이 공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거정이 입을 막으며 겨우 내로 말하였다.

 

[我确认一下这里]

(이런 곳들을 확인해야지.)

 

자오랑이 공장의 문간에 서서 우산을 털었다. 멀리로 자신을 보고 선 적갈색 머리칼의 여자를 뚫어지게 마주본다.

 

[警察本来就不袖手旁观吗?]

(원래 바이오로이드 사건에서 경찰은 방관하지 않습니까?)

 

한거정은 깁스한 팔로 코를 막고 남은 팔로 손전등을 켰다. 까마득한 어둠이 작은 줄기의 빛을 삼켜버린다. 고개를 빼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나 보이는 것이 없다.

 

[这次的情况不一样]

(이번 사건은 경우가 달라.)

 

[是那个案子啊]

(나노하 기업의 회장 때문이군요.)

 

[好的]

(그래.)

 

빗줄기 너머 가만히 서있던 여인이 홱 등을 돌린다. 자오랑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고는 한거정을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두 줄기의 빛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어둠은 허덕이듯 빛을 삼키고 두 사람을 삼킨다.

 

[我在这里找到什么好呢?]

(여기서 무얼 찾으면 됩니까?)

 

[Jacky.]

(재키.)

 

한거정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자오랑은 희미한 빛줄기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Jacky?]

(재키요?)

 

[杀人犯 Jacky!]

(살인마 재키!)

 

[那不是传闻吗?]

(그건 그냥 소문 아니에요?)

 

자오랑이 소리친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前辈?]

(선배?)

 

없다. 어둠 속에서 자오랑은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前辈?]

(선배?)

[前辈!]

(한 선배!)

[前辈!]

(선배!)

 

빛들이 어둠에 삼켜져 길들이 발밑으로 마구 얽히었다. 눈과 귀가 멀고 몸이 방향을 잃는다. 바닥을 구르고 상자에 걸려 넘어진다. 자오랑은 시멘트 바닥을 짚으며 앞을 더듬어 나아갔다. 케케묵은 냄새가 진동하여 폐 속 가득히 먼지를 불어 넣었지만 자오랑은 밭은 호흡을 내며 내달렸다.

 

자오랑의 허둥대는 몸이 붙잡힌다.

 

[什么呀!]

(뭐야!)

 

자오랑의 입을 막는다. 팔과 다리를 잡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자오랑은 도시 밑으로 난 굴을 떠올렸다. 정신 나간 안드로이드가 그에게로 달려들어 날을 휘두른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쉿.

 

자오랑의 눈앞으로 존재 하나가 그에게로 속삭였다.

 

쉿.

 

자오랑은 버둥대는 몸을 멈추어 힘을 빼었다. 그를 쥔 손아귀 힘이 세 진다. 자오랑이 몸을 죄이는 힘에 비명을 흘리자 존재가 그를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자오랑의 머리 위로 다시 속삭인다.

 

쉿.

 

제 키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존재에게 자오랑은 말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철컹 철컹.

 

바닥을 두드리는 발자욱 소리. 자오랑을 잡았던 존재가 다시 자오랑을 제 손에 쥐어 뒤로 감추었다. 자오랑은 비명 하나 내지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혔다. 기계의 잡음이 들린다.

 

(할멈, 인간들이 왔어.)

(망을 보던 몇이 내려와 말하더군.)

 

할멈이라 불리는 존재가 몸을 흔든다.

 

(인간들이 이곳으로도 올 거야.)

(자리를 옮겨야해.)

 

손아귀의 힘이 차츰 풀리고 있다.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깊어질수록 자오랑을 묶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자오랑은 몸을 비틀어 간신히 그녀의 손에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를 돌아보는 눈 몇 개를 두고서 자오랑은 연신 뛰었다. 할멈이 뒤로 밀어 넣었던 공간 안을 내달리자 밝은 빛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공장의 차가운 열기가 얼굴 가득 부딪힌다. 관절들 움직이는 소리와 잡음이 섞인 언어들. 자오랑은 부품 상자로 몸을 숨겨 지켜보았다.

 

연극 옷을 입은 안드로이드와 경찰 방패를 든 안드로이드가 지난다. 요리를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주위로 갖은 종류의 로봇들이 둘러서서 화덕으로 불꽃이 튀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작은 축제처럼 도시의 모든 안드로이드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물건을 교환한다. 축제의 위로 경박한 발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작은 몸집의 감시용 카메라가 다리를 놀리며 크게 외치었다. 그는 천장에 달린 배관의 위로 올라서있었다.

 

(인간들이 이곳을 찾고 있어!)

 

안드로이드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그들이 재키를 찾고 있어!)

 

축제에 모여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일제히 소리를 죽이고서 사방으로 날뛰었다. 자오랑의 앞에 있던 부품 상자가 어느 안드로이드의 몸에 걸려 앞으로 쏟아진다. 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나 그 누구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다. 공장을 벗어나 모두 같은 곳으로 내달렸다. 그중 그 누구도 말소리 하나, 발자욱 소리 하나 남기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어 달렸다.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의 질주가, 어둠 속으로 부품 부딪히는 소음과 먼지 밟는 소리만으로 번지었다. 자오랑은 호출기를 딸칵거렸다. 물밀듯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보며 손가락을 놀리는 그의 몸이 붕 떠오른다.

 

짧은 비명을 지르려는 그의 입을 막고 그의 몸을 손아귀에 쥔다. 할멈이라 불린 그 안드로이드가 거대한 몸을 굴리며 안드로이드들과 함께 어둠 너머로 내려간다. 자오랑은 빠져 나가기 위해 버둥거리나 아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장 내부로 가득 들어찼던 수 백 대의 안드로이드들이 같은 방향과 속도로 달려 도시의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허 씨 저택의 지하에서 보았던 비밀스러운 굴. 그 굴로 수 백 대의 바이오로이들이 맹렬히 도망가고 있다. 도시의 밑에 존재하는 기업과 저택, 골목들을 연결하는 통로가 바이오로이드들의 행렬로 소란들이 소리 없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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