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거리의 아래, 깊숙이 내려앉은 낮은 지대의 사무실로 기체 회수 팀이 진입한다. 단이가 고개를 들어 창으로 드는 수십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단이가 아니었다. 그 흔한 정원용 안드로이드도 아니었고 공장의 가공품도 아니었다. 회로에서 윙윙거리는 소음이 거슬려 그녀는 제 머리 속에 박힌 전선 몇 개를 직접 잡아 뽑기도 한다. 제 발치의 아래로 떨고 있는 허 백, 제 연인에게로 그녀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파 했다. 그녀의 망가진 언어 모듈이 기괴한 음을 낸다.

 

[一%に&*げま^9う。]

 

허 백이 주춤거리며 손을 휘젓는다. 그의 손으로 얇은 먼지들과 시멘트 가루들이 흩뿌려져 일렁인다.

 

[私$%ち1一緒**4す。]

 

철제 의자의 다리가 잡힌다. 부수어진 두개골 위로 생체액이 흘러넘치고 단이가 허 백의 떨리는 손을 본다.

 

[永遠にです。]

 

딱 한마디. 망가진 언어 모듈 사이로 간신히 튀어 나온 완전한 문장. 그 문장이 파편처럼 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것이 허 백이 내려친 의자 때문이었는지, 사무실을 급습한 안드로이드 현장 팀의 총알 때문이었는지. 단이는, 허 백의 요코가 되고파 하던 그 안드로이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이의 눈에 허 백이 들어온다. 머뭇거리는 얼굴과 발자욱. 뒤로 감기는 테잎과 비디오. 그녀의 바람이 그에게 닿지 못한다. 끝까지 허 백은 그녀가 수놓은 소원의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녀는 한 밤에 만난 춤꾼 바이오로이드였고 어긋난 오해로 부풀어 오른 거짓투성이의 연인이었다.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 만남이 그녀의 부서지고 뜯겨진 부품들 사이로 요동친다. 군인들의 망치가 그녀의 머리를 완전히 부러뜨린다.

 

 

나의 시로 씨

 

거짓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어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요.

 

 

 

그녀는 본래 태어나 가공되었던 공장의 창고로 회수된다.

 

 

 

 

점잖은 양복의 배불뚝이 남자가 종이를 팔락인다. 허 훈이 깔끔한 잿빛 자켓 안으로 담배를 빼어 물었고 초조하게 발을 두드린다. 맞은편에서 팔락이는 종이들이 쉼 없이 넘어간다. 남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종이 뭉텅이를 덮어 반듯하게 세워 보관한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 훈은 담배를 쥔 손을 죽 뻗어 다리를 꼬았다. 그가 굴리는 초조함이 담배 연기로 덧 씌어져 가면이라도 쓴 냥 애처롭게 흩어졌다.

 

[계약을 하시면 알게 될 테죠.]

 

[흠.]

 

배불뚝이 남자가 양복 안에 담긴 시곗줄을 찰랑이며 시간을 확인한다. 금으로 반짝이는 남자의 줄에 허 훈 역시 보란 듯 제 가슴에 차고 있던 시곗줄을 찰랑거렸다. 같은 금색의 반짝거림을 맞은편 남자가 눈썹을 들며 말로 받았다.

 

[고리타분하지만 멋은 남아있죠.]

 

허 훈은 꽤나 그럴싸한 맞장구를 치기 위해 아등바등 하였다. 남자가 허 훈이 넘긴 극본을 받아 제 가방에 담는다.

 

[고전적이지만 맛은 있어요.]

[본래 고전이라는 것이 대중적이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허 훈이 고개를 빼어 배나온 남자가 담는 자신의 극본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실수로 엉뚱한 가방에 넣지는 않나 노심초사하는 훈에게 남자는 모자를 집으며 손을 내밀었다. 허 훈도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는다. 허 훈이 자리를 떠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의자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군요.]

 

허 훈이 바로 서서 그의 질문을 받을 준비를 한다.

 

[왜 우리같은 작은 회사에 온 것입니까?]

[규모가 큰 동화 산업도 있는데 말이지요.]

 

당연한 질문이다. 허 훈은 준비해 둔 답변을 거울 앞에서 연습하듯 또박또박 따라 읽어 보였다.

 

[기존의 산업은 대중 문화와 영화 산업으로 이미 몸집을 불렸습니다.]

[반면 당신네 회사는 한창 작품들을 모으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제 작품으로 유행의 기류에 편승하기 보다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가 양 팔을 벌려 제 모습을 비춘다.

 

[저는 문화 산업의 새로운 시발점이 될 겁니다.]

 

뚱뚱한 남자는 틀어진 단추를 여매며 땀을 닦았다. 그의 자신감이 그는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군요.]

[안드로이드에게 합법적인 권리가 주어져야 된다는 사람들과.]

[극단적인 인권 단체 사이의 일을 알고 계십니까?]

 

[뭐 신문을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나노하 기업의 회장가 죽은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허 훈은 목을 조이는 셔츠 카라를 손으로 잡아 당겼다.

 

[뭐가 문제이죠?]

 

[시에라 클럽이라는 사교 모임의 누군가가.]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살인을 저질렀다는군요.]

 

[극본에 나오는 일본 가문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노하 가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을 텐데요.]

 

[아니요, 허 훈씨. 그게 아니죠.]

 

남자는 목덜미로 잔뜩 흘러 셔츠를 적시는 땀방울들을 훔치고 또 훔치었다. 허 훈에게 작게 손을 내저으며 타이르듯 목소리를 낮춘다.

 

[댁 극본에 있는 인물들이 너무.]

[살아있는 것처럼 나오지 않습니까.]

 

허 훈이 삐딱하게 자세를 꼬아 남자를 노려보았다. 땀으로 몸이 젖은 남자가 극본이 든 가방을 손으로 톡톡 두드려 보인다.

 

[제 생각에 말입니다.]

[극이 너무 실감나게 집필 되어 있어서 말이지요.]

 

남자의 눈두덩이 사이의 좁은 눈이 가늘게 허 훈을 떠보았다.

 

[말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남자의 좁은 눈을 마주 노려보며 허 훈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더욱 독한 연기들이 뿜어져 나온다. 배불뚝이 남자가 연기를 손으로 치우고 기침을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허 훈이 담배를 물어 내뿜는다. 언젠가부터 떨리던 다리가 진정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극이고 가짜입니까?]

 

허 훈은 연신 콜록거리는 남자의 앞으로 담뱃불을 비벼 꺼 가만히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고민이 있을 것은 없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은이는 회사의 실험실로 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 허 백은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요코는, 그 안드로이드는, 정원용 로봇으로 광적인 집착을 보이던 그녀는.

 

[모두 가짜입니다.]

 

허 훈이 고개를 바로 들어 제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들긴다.

 

[제 상상력이 만든 결과물이죠.]

 

동화 산업의 면담자가 모자를 집어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질문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아직 더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뚱뚱한 그의 손이 살래살래 땀을 털며 흔들린다. 그는 가방을 잡은 채 문간으로 발을 걸쳐 나갈 준비를 하였다.

 

[생각해두신 배우가 있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를.]

[안드로이드라면 어떤 기종을.]

 

허 훈은 허리를 곧게 펴 가슴을 열어보였다. 재미있는 말을 하듯 그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번진다.

 

[제가 만든 안드로이드가 있습니다.]

 

[만드셨다고요?]

 

[그 극을 위해 태어났다고도 볼 수 있죠.]

[물론 관리와 감시는 제가 맡겠습니다.]

[배우 하나 고용하신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남자가 문을 열어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날씨조절 기기가 설치된 도시의 돔으로 따가운 볕이 내리쬔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만나 뵙도록 하지요.]

 

뚱뚱한 그의, 꽉 낀 셔츠가 푹 젖어 문을 닫고 사라진다. 땀내와 담뱃내가 들어찬 곳으로 허 훈은 숨을 내쉰다. 그가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그가 허 씨 집안의 저택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를 하녀가 맞았다.

 

[Well Life 사에서 온 편지입니다.]

 

허 훈은 편지를 건성으로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언젠가 겨울을 찾던 안드로이드가 갇히었던 방으로 향하였다. 좁고 어두운 방으로 그가 들어간다. 벽 한 켠으로 서서 잠들어있는 여인을 허 훈은 다가가 피부를 매만졌다. 몸의 온 곳곳들이 부서지고 파괴된 그녀를 재조립하고 수리하는 데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물론 그녀의 칩 역시 재구성하느라 허 훈은 이번 극본의 성공이 절실했다.

 

[자, 시작해보자고.]

 

그의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우들과 연극 장치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저들끼리 뛰쳐나가느라, 허 훈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제 동생, 허 백이 선물로 준 진귀한 경험담을 무대로 올렸다. 그리고 그 극의 여주인공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동생, 허 백을 사랑하였던 그녀의 칩과 기억을 조작해 수 만 가지의 기록들을 덧씌웠다. 이제 그녀는 허 훈의 명령에 따라 다른 모든 이에게 집착과 같은 열정을 쏟을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모든 이를 사랑할 것이다. 무대를 보는 모든 관객들을 사랑할 것이다. 무대를 오르는 것에 목숨을 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네 눈앞에.]

 

허 훈이 눈을 감은 여인에게로 속삭였다.

 

[동생 허 백이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새로운 극을 준비하였다. 길고 고된 기다림으로 그의 이야기는 무르익어 한참을 탐스럽게 빛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안드로이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허 훈은 내심 그런 답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극들을 준비하며 저 여인, 저 안드로이드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지독하고 지독한 기회를. 그는 끝내 아버지의 칩에 담긴 그의 생전의 기록을 열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이 열리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허 훈은 두려웠을 뿐이다. 제 아버지가 겪은 것들을, 대 여섯의 해 전에 실종된 그를 그는 저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두어 떨어트려 놓았다.

 

아버지는 죽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 것은 과거의 일이었고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동생 허 백이 이야기하였듯 아버지는 죽고 없다. 그는 없다. 그것만이 허 훈이 아는 진실의 전부였다.

 

허 훈은 복도를 걸어 몇 달 전 화재가 일어나 엉망이 된 동생의 정원으로 걸었다. 재들이 넘치던 먼지 밭들이 말끔히 닦이고 쓸려 새로운 초목이 가득 피어 올라있다. 동생의 고집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 가득 날씨조절기를 통해 햇살을 받고 있었고 영양제가 곳곳으로 주입되고 있다.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생명으로 넘쳐나 빛나고 있다.

 

허 훈이 정원의 벤치로 가 앉아 편지를 열었다. 그곳엔 극의 배우가 미련처럼 남아 제 이름을 남기었다.

 

'주인님에게'

 

머릿말.

 

'정원의 은이가.'

 

마무리 말.

 

허 훈은 그 모든 일들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는 편지를 구겨 정원을 지나는 꼬마 안드로이드에게로 건네주었다. 몇몇의 난이들이 깔깔거리며 구겨진 종이를 장난감처럼 서로 주고받는다. 허 훈은 광합성을 하는 정원의 위로 햇살을 받았다. 한여름이 훌쩍 다가온 것 같아 허 훈은 웃옷을 벗어 등을 기대었다.

 

풀벌레가 언젠가 잊히어진 노래를 부른다. 옛 시절로 구절들이 되감아진다.

 

그는 하얗게 다린 무명천으로

옷을 짓고 밥을 지었네

 

들판으로 거니는 이가 없어

굴뚝으로 연기를 쏟아내건만

 

오는 것은 잠에든 숨소리들뿐이네

 

하얗게 다린 천으로

그가, 그가, 그가

 

따스하게 옷을 여미네

 

한 여름 같은 무더위 아래로 그는 겨울을 불렀다. 가짜 태양을 가득 받은 초목들이 푸르게 빛나는 곳에서 허 훈은 옛 기억을 되뇌인다.

 

 

 

주인님에게

 

전 당신을, 주인님을 원망합니다. 밉고 미워 두 손을 다해 지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이 저를 덮쳐 보여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압니다.

생명을 동경하던 제가 재로 타들어간 정원을 보아야 했을 때

생명을 궁금해 하던 제가 동생 같던 아이가 타들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주인님은 모르겠지요. 아니, 당신은 모르겠지요.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 보았던 것은 참으로 지독한 어둠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무지였습니다. 참으로 가벼운 동경으로 마주한 생명이,

당신 아버지란 기억이 그토록 시리고 독한 것 일줄 알았다면

저는 망설여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제 두렵습니다. 생명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습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할 것을 아이마냥 열어보아 큰일을 당한 듯

참으로 답답하고 먹먹한 심정입니다.

그 연화라는 박사가 저를 입히고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생명의 둔중함을 깨달은 저는 어쩌면 죽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기억 끝에서 그의 말을 대신 전합니다.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은둔하여 살았던 자신을 용서하고 행복하길 빈다.

나의 아들들아, 훈아. 백아.

 

사랑한다.

 

- 정원의 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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