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겁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이나 뱀파이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동그랗게 난 두 개의 구멍을 독으로 뒷마무리를 하지 않아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채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출혈이 자연적으로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 이대로 두면 이 남자, 곧 사망한다. 나라면 조금만 먹고 예쁘게 상처를 막아놨을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길..제길..]

나는 사막에 떨어진 여우같은 기분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 피를 마시고 싶다는 갈망이 발부터 머리까지 스멀스멀 잠시해온다. 점차 뇌가 마비되면서 먹으면 안 되는데..119에 전화해야하는데..라는 생각이 가라앉았다.

[으윽..]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코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피의 향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떠밀려 엉금엉금 그에게 다가갔다. 입을 벌리자 하나뿐인 송곳니가 달빛에 들어나 반짝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목에 머리를 숙였다. 피. 피. 피. 나는 떨리는 입술을 목에 가져다 댔다.

내 입술에 뿜어져 나오는 피가 묻는 순간에 해방감과 쾌락, 기쁨이 용솟음쳤다. 긴 혀를 내밀어 분수대의 물을 마시듯 솟구쳐 오르는 핏줄기에 가져다데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는 방어도 피신도 못하고 죽어가는 남자 옆으로 떨어져 머리를 땅에 박았다. 벌떡 일어나려고 다리를 모으는데 허리에 발길질이 가해지면서 뼈가 끊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 옆으로 구르며 눈을 떴다. 호미처럼 몸을 굽힌 채 앞을 보니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나를 두들겨 팼음을 알았다. 달빛이 거대한 몸에 가려 그가 누구인지, 왜 나를 때리는지 물어볼 수 없었으나 엄청난 힘으로 보아 그 역시 뱀파이어였다. 사람이라면 내가 피를 빠는 순간 내보내는 환각 때문에 근처에 오지 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다가와 뱀파이어의 허리뼈를 단번에 부셔버릴 정도로 나를 구타할 수 있다면 절대 사람이 아니다.  

[그만]

1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낮선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허리뼈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지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해, 이대로 있다간 또다시 공격 당할 수 있다는 문제에 대해 더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재생이 고통스러웠다.  

[하악..하악..]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하자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다가오더니 샤넬 향수가 진동하는 실크 손수건을 뭉쳐 입에 단단히 박아주었다. 허리에 집중된 신경들은 한 개씩 뼈가 움직일 때마다 전기를 흘려보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다리와 팔이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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