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먹어서 어째요]

그녀는 혈액 냉장고 옆에 있는 일반 냉장고에서 가공된 혈액을 꺼내 전자렌지에 데웠다. 다른 반인반뱀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를 사랑한다. 공수해온 혈액을 기계에 넣어 가공한 후, 아름다운 유리병에 가득 채워 칸칸히 줄 맞쳐 집어넣는다, 내가 비닐에 대충 담아 위 아래 없이 막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리는 데 비하면. 그래서 혈액이 들어오는 날엔 잔소리가 최고조에 달하며,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혈액팩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괜찮아요. 그보다 돈이 떨어진 것 같은데, 맞죠?]
[아..눈치 채셨어요?]  

그녀는 입가에 뭍은 붉은 피를 혀로 핥으면서 말했다.

[가계부 보면서 한숨 쉬는데 모르면 바보죠]

스승의 집이고, 스승의 가정부라 혈액을 살 돈만 있으면 되는데 그 마저도 항상 간당간당하니 오늘처럼 먹고 죽을 돈마저도 없는 날이 종종 있다. 뱀파이어면 오랜 세월을 살아 주식도 잘하고, 투자도 성공해 부자라고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나 같은 가난뱅이도 있다, 그것도 꽤 많이. 돈이란 건 뱀파이어 세계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고리짝에 뱀파이어가 된 사람들이 다 독식하는데 나 같은 초짜에 장애인이 어찌 끼어들 수 있겠는가.

[아가씨, 한 숨 쉬지 마세요, 복 나가요]
[월말이니까 장애수당 받으러 갔다올께요]
[혈액을 좀 드시고 가세요]
[속이 영 거북해서..]

나는 눈과 이를 부여잡고 일어나 끙끙 소리를 내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삼차신경통이란게 정말 사람 잡는 병이다. 송곳니로 변하는 쪽의 눈과 이가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들썩거리고 쑤신다. 처음에 나는 삼차신경통인줄 모르고 치과와 안과를 갔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갖가지 검사를 다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으며, 별별 약을 다 먹어도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다. 반년 쯤 그렇게 고생했을 때 별안간 송곳니가 솟아 올랐고, 그 때 어느 의사에게서 병명을 들은 것이다. 뱀파이어들 중에도 0.001%에게서 나타나는 희귀성 질환이고 이를 모르는 어떤 뱀파이어는 이를 다 뽑아버린 후에야 왔단다 (묘하게도 다른 부분은 없어지지도 않고, 다쳐도 바로 재생이 되지만 이만은 뽑거나 부셔지면 그걸로 끝이다. 결국 뱀파이어에게도 결함은 있는 셈이다) 내가 만난 치과 의사가 매우 양심적이라며 칭찬을 하니 깜짝 놀랐다. 만약에 나한테 이가 전부 없다면 가뜩이나 못 생긴 얼굴이 입술만 오물거리는 할머니처럼 보일 게 아닌가. 그 날 놀란 가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며 진료비를 깍아달라고 떼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처럼 장애를 지닌 뱀파이어들이 지구상 어딘가에 또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에서 1등급의 장애뱀파이어증을 받았다, 세금도 감면받고 장애수당도 타기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