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어린 신 이야기(3)

2010.02.02 12:1802.02


  마늬와 헤어지고 돌아온 아라는 초조하게 기다리던 덩어리가 "어땠어?"하고 묻는 것에도 그냥 손만 휘휘 저어 보이고는 터덜터덜 걸어서 학교로 갔습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성실하게 수업에 잘 나오던 아라가 갑자기 두 번이나 수업을 빠지자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며칠동안이나 아라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라는 원래 친구들 가운데서도 가장 쾌활하고 기운이 넘치는 어린 신이었습니다. 마늬와 헤어진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자기가 처음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제대로 바로 잡았는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염없이 슬픔에 젖어있을 일 만은 아닙니다. 바로잡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아라의 손 끝에 묻었던 모래알과 바닷물에서 만들어진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바다 너머에서 올 아이를 기다리며 영주님들에게 물고기를 빼앗기고 있겠지요. 이건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아라는 다시 며칠이 지나고 나서는 다시 가장 열심인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라의 비밀은 가슴 속에 뿌듯하게 남아, 다른 친구들보다 자기가 조금쯤은 더 자란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번도 세상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 처음으로 만들게 될 세상보다는, 아라가 두번째로 만드는 세상이 훨씬 더 멋진 세상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지요.

  아라는 다시, 마늬를 만나기 전처럼 돌아갔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서로에게 콕콕 찌르는 작은 번개를 날려보내며 장난 칠 때에도 돌아보지 않고, 따사로운 햇빛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려서 모두 꾸벅거리고 졸 때에도 똑바로 앉아서 수업을 듣는 어린 신으로요. 수업이 끝나고 다른 어린 신들이 바람 틈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별똥별을 주우러 갔다가 다음 수업 시간이 다 되어서야 허둥거리고 대충 숙제를 마칠 때, 아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숙제를 시작해서 잘 모르겠는 것은 다른 선생님들한테 여쭤 가면서 꼼꼼하게 끝마쳤습니다. 수업도 끝나고 숙제도 다 해 버렸을 때는 모든 책들의 도서관에 가서 더 많은 세상들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가끔 사서 선생님이 따뜻한 차를 끓여 주시면 함께 앉아서 마시면서 옛날에 사서 선생님이 만들었던 세상들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책에서 읽은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문득 마늬 얼굴이 떠올라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젓고는 얼른 더 멋진 세상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생각으로 마늬 생각을 밀어냈습니다.

  이미 여러 가지를 배웠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그 세상을 만든 신이 만들지 않아도 세상에서 생겨나는 것에 관한 수업입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목소리와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노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나 부를 수 있는 모든 노래를 만들 수는 없지요. 신이 만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가끔씩 신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랄만큼 멋진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답니다. 훌륭하고 경험이 많은 신들일수록 모든 걸 미리 만들어서 장식장처럼 진열해 놓기 보다는, 가장 적은 것들만 처음에 늘어놓고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가능성들이 자라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서 선생님이 보여주신 그 결정들로 가득한 작은 세상도 그런 종류일 겁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라도 아라의 세상을 만들 때 실제로 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손을 넣어서 가능성을 휘젓고, 빛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손 끝에 묻어 있던 모래알과 바닷물이 떨어진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서 거기서 모든 게 생겨났지요. 파도 이는 바다와 날아다니는 새들과 헤엄치는 물고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늬까지. 아라가 일일히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내고 만드려고 했다면 그런 세상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사람들까지는 얼핏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마늬를 만나기 전에 마늬 같은 아이를 상상해낼 수나 있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들에 신이 손을 대는 경우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절로 만들어진 것들은 가끔씩 약간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세상이 빨간색이 초록색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된 곳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 정도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빨간 깃털을 가진 새들이 아무 이유 없이 초록색 깃털을 가진 새들을 괴롭혀도 된다면, 초록색 깃털을 가진 새들은 자기 깃털들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빨간 새들이 갈아입으며 흘린 깃털을 주워 몸에 달아야 하거나 피가 나도록 자기 몸을 쪼아 깃털을 빨간 색으로 바꾸려 한다면, 이런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일이지요.”
  아라는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바꾸는 것은 아주 어려운 작업입니다. 처음 세상을 만들게 된 많은 신들이 이런 일에서 실수를 많이 한답니다. 왜냐하면, 신의 손이 끼여들게 되면 그것 역시 그 후에 저절로 만들어진 것들과 함께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도 있고, 계속 손을 대야 하는 힘없고 약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요. 이래서 처음 세상을 만드는 신들은 어떻게 할지 손을 쓰지 못해서 저절로 바뀔 때까지 내버려두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여기서 아라는 다시 고개를 끄떡거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처음부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상을 만들 때 가능성들을 잘 보살피는 일이지만, 이미 생겨나고 났다면 그 다음은 조심스럽게 바로잡는 게 필요합니다. 세심하고 애정어린 손길로, 스스로 비틀어져 버리지 않도록, 그 아름다움이 더욱 꽃피어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아라는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잘못을 멋지게 바로잡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깃털처럼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앞에서 자기가 벌써 세상을 만들었다고 떠드는 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저마다 멋대로 세상을 만드려고 학교도 안 나오고 신들의 땅 밖으로 달려나갈테고, 선생님들은 아라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영주님들의 세금에 시달리게 한 것을 꾸짖겠죠. 그래도 마늬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겹쳐서,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졌습니다. 아마도 사서 선생님이라면, 언제나 온화하시고 화내지 않으시는 분이니까 아라가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화내지 않으실 겁니다. 끝까지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아라가 벌써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것과, 잘못을 그렇게 훌륭하게 바로잡았다는 것, 그리고 더 멋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칭찬해 주실 거에요.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아라는 곧장 모든 책들의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라가 서둘렀기 때문에, 사서 선생님이 차를 따라 주시면서
“오늘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가 보구나,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자, 뜨거우니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하렴.”
  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라는 호 호 불어서 떠 있는 찻잎을 밀어내고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부터 어쩌다가 세상을 만들게 되었고 거기서 무슨 잘못이 생겼고 어떻게 바로잡았는지에 관해서, 영주님들과 마을사람들과 마늬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얘기했던지 이야기가 끝마칠 때까지 차는 손에만 들고 한 모금도 더 마시지 않아서 식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이야기를 전부 다 하고 나자 서가에 내리쬐던 오후의 따사로운 햇빛은 어느새 부드러운 석양빛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이야기를 들으셨고,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조용히 차만 마시고 계셨습니다.

  아라가 속으로 ‘제가 한 것, 잘했지요?’하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동안 사서 선생님이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차가 식은 것 같구나. 더 따라주마.”
  다시 아라의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게 되자 사서 선생님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젊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 주마. 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우고, 처음으로 신들의 땅 밖으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갔던 때의 이야기지... 그 때 나는 더 이상 어린 신이라고 불리기 힘든 나이였지만, 그래도 다른 신들보다 훨씬 빨리 배웠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된 신들 가운데서는 가장 나이가 적었단다. 그래서 다른 신들이 나를 부를 때 농담 삼아서 계속 어린 아이라고 불렀지. 아이 취급한다고 화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가 빨리 배웠다는 뜻이기도 하니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어. 그래서 처음으로 세상을 만들게 되었을 때, 그 세상의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 줄 때,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말에서 아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를 따 와서 ‘아헤’라고 했다. 그 후로는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아헤라는 이름을 썼단다.”
  선생님은 말을 잠깐 끊고 차를 한 모금 드셨습니다.

“처음 세상을 만들 때, 난 사람들이 배고프거나 춥지 않고 마음껏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그래서 따뜻하고, 푸른 풀과 나무로 가득하고,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사납지 않은 살찐 들소며 코끼리들이 옆에서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는 세상을 만들었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모두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러다 보니까 점점 세상에 사람들과 들소며 코끼리들이 너무 많아지고 말았단다. 그렇게 많아지고 나자 풀들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더 많은 풀들이 없어지게 되었어. 먹을 풀들이 없어지자 들소들은 풀뿌리까지 파헤쳤고, 코끼리들은 나무를 쓰러뜨려서 높은 곳에 달려 있던 잎사귀를 먹었고, 사람들은 다음 해에 다시 자랄 씨앗들까지 다 먹어버렸지. 땅은 황폐해졌고, 그렇게 되자 많은 동물들이 굶어 죽었단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 모든 것이 너무 부족하니 서로 남의 것을 빼앗고, 자기 것을 지키려 하고, 서로를 의심하면서 믿지 않았어. 난 그 광경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런 세상을 원한 게 아니었거든.”
  아라는 사서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라는 차 한 모금을 꼴깍 삼키고 재촉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선생님도 세상에 들어가신 거군요?”

“그래. 하지만 사막이 된 땅에 뿔뿔히 흩어진 모두를 불러모으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어느 부족 하나를 골랐어. 다른 강력한 왕국 아래에서 노예 생활을 받으면서 그렇게 서로 빼앗고 죽이는 것이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 부족이었지. 나는 그들의 지도자 앞에 나타나서, 내 이름을 아헤라고 소개하고는 내가 말하는 것들을 모든 사람들에게도 알리라고 말했단다. 서로를 죽이지 말고,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쓸데없이 화려한 의식을 행하지 않도록. 그러자 그 부족 사람들은 내가 진짜 신인지 믿지 못했고, 자신들도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내가 한 말을 따르는 것을 머뭇거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못 만든 세상을 바로잡는 약속의 증표로 삼는 의미에서, 그 부족을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고 바닷물을 반으로 갈라서 구출해내어 추격자들을 막았지.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믿기 시작했어. 나는 부족의 지도자에게 나와의 약속을 돌판에 새기게 하고 이 약속을 따르며 널리 퍼뜨리게 했단다. 모든 것들이 부족한 세상에서 평화가 오게 하도록 말이야.”
  사서 선생님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습니다.
“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그 부족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도록, 그리고 더 많은 부족들과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생각했던 것과 일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어. 충분히 힘이 강해져서 남의 침탈을 받아 곤궁했던 옛 시절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나자, 마찬가지로 다른 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남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나한테 화려한 의식을 치렀다. 그건 그저 강력한 왕들이나 사제들이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 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단다. 나는 그 일 때문에 무척 화가 났고, 그래서 그 부족을 다시 더 강력한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했어. 그제서야 사람들은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해방시켰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이전과 같아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어떤 민족을 택해서 한 일이 잘못이란 걸 알았어. 신과 사람의 관계만으로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안 거지.”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신 건가요?”

“내가 그 부족을 내버려 두자, 곧 다른 부족들을 복속시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단다. 황제들은 자신들이 나의 화신이라고 주장했고, 귀족들은 자신들이 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사제들은 자신들이 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했어. 하지만 나는 그들 곁에 없었다. 대신, 사람의 모습을 하고 가장 밑바닥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다른 부족 사람들을 찾아갔어. 학자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아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고쳐주고, 법관들의 불공정한 판결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내 이름을 파는 신전의 장사꾼들을 쫓아냈단다. 내 말을 들으러 모인 오천 명의 사람들을 물고기 둘과 빵 다섯을 나누어 먹이고, 일흔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네 말로 내 말을 들을 수 있었어. 어부들과 목수들, 직공들, 농부들,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말을 귀기울여 들었지. 난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곁에 가서 옛날에 내가 지금의 황제들과 했던 약속을 다시 말했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말이야. 남을 해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어려울 때 함께 돕도록.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평화와 행복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서로 싸우고 빼앗으며 괴롭게 될 뿐이라고 했지.”
  아라는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맞아요, 저도 마늬랑 다른 마을사람들하고 그런 약속을 했어요.”
사서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 황제, 귀족들, 사제들은 그들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내가 다시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거야. 그들은 나를 법정으로 불러들여서 공격했다. 돈을 받지 않고 남을 함부로 고친다, 자격없이 판결을 뒤집는다, 정당한 장사를 방해한다고 말이야. 내가 아헤의 이름으로 그런 일이 정당하다고 논박하자, 그들은 나한테 내가 아헤의 이름을 함부로 한다고 하더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바로 내가 아헤이며,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이는 황제나 귀족이나 사제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말했단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 침을 뱉으면서 조롱했어. 네가 아헤라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고 하면서. 나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한번 죽었다.”
  아라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죠? 그 약속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건가요?”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그 사람들에게는 더욱 편했던 거지.”
  사서 선생님이 약간 쓸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일이 되고 난 후에 나는 한동안 울적해서 세상을 들여다 볼 마음이 없었다. 사실, 처음 세상을 만드는 많은 신들이 세상이 자기 뜻과는 달리 돌아가면 괴로워서 다시 세상을 만들고 싶지 않아한단다. 나도 한참 동안이나 그랬지. 그런데 다시 세상을 들여다 보자, 뜻밖에도 이미 죽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더구나. 아헤와의 약속을 참되게 지키자는 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어. 황제와 귀족들과 사제들은 당황해서 그런 사람들의 입을 막고 사제들 외에 함부로 아헤의 약속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한 벌을 내리겠다고 윽박질렀지. 하지만 힘으로 누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제국은 무너지고 말았지.”
“- 그래도 일이 잘 된 거네요. 선생님하고 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긴 거니까.”
  사서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더욱 슬퍼 보였습니다.
“그걸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니. 사람들은 나와의 약속보다, 그 약속을 말한 사람이 나라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말았어. 약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신이 명령한 약속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거야.”
“마늬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 이야기 말이구나. 그래, 신의 손길이 그렇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원래 지니고 있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더 약하고 부서지기 쉬워지지. 그렇게 된 것을 종교라고 부른다.”
“종교요?”
“그래. 그 후로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어서, 아헤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나와의 약속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이름을 강요하고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서. 그런 것이 어떻게 진짜 약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니.”
“- 그러면, 마늬도 그럴까요? 제가 마을 사람들하고 한 약속이 종교가 되었을까요?”
  아라가 급하게 묻자 사서 선생님이 아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마늬라는 아이가 걱정되고 또 네가 만든 세상이 그렇게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은 안다. 하지만 한가지만 약속하자꾸나. 네가 만든 세상에 뭔가 잘못이 생겼다고 해도, 바로 손을 쓰려고 하지 말고 다시 나에게 오너라. 당황해서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알겠어요.”


  아라는 대답하기는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한 번 바로잡으려고 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때문에 계속 다른 잘못들이 생겨나게 된다니요! 아라의 발자국 소리가 모든 책의 도서관의 복도를 탕탕탕 울렸습니다. 이미 석양은 다 지고 갓 단장한 별들만 총총 빛나며 달려가는 아라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덩어리 안에 저절로 세상이 생겨났을 때는 그저 아라가 가능성들을 휘저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좀 다릅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한 일 때문에 더 큰 잘못이 생겼으면 어떻게 하나요? 이건 순전히 아라가 잘못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면, 아라는 그 앞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그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닥칠까 두려워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엄두도 못 낼거에요. 아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자꾸만 치솟아 오르는 두려움을 뿌리치느라 달렸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것은 신경쓸 꺼리도 못 됩니다. 자꾸만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 용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워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지 알고 싶지 않아서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라만의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덩어리는 전보다 더 크게 부풀어 있어서 멀리서 부터 보였습니다. 아라는 야트막한 파도를 뛰어넘으면서 달렸습니다. 덩어리의 색은 확실히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전의 색은 햇살이 곧바로 내리쬐는 산호 바다의 투명한 푸른 색이었다면, 지금의 색은 박동하는 남색의 심장이나 밤의 바다 빛 같았습니다. 그 속에 희미하게 붉은 보라색 가닥들이 실핏줄처럼 뻗어서 빛나고 있습니다. 아라가 도착해서 덩어리 안을 살펴 보는 동안 잠들었던 덩어리가 깨어났습니다.
“어,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덩어리가 졸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라는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들여다 본 세상 안 쪽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뛰놀던 초원에는 죽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파도는 무거운 대포가 가득 실린 배를 힘겹게 날랐습니다. 갈매기며 꽃게들은 간 곳이 없습니다. 온 세상에 피 냄새가 가득해서, 바닷물 냄새보다 더 지독하게 짠 냄새가 났습니다. 아라는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눈물 방울만 아라가 서 있던 자리에 툭툭 떨어져 남았습니다.

  아라는 팔을 벌리고 흰 새 처럼 날아 내려갔습니다. 밤의 하늘은 지독하도록 새까매서 보고 있노라면 심장까지 텅 비어버리는 기분입니다. 이상하게 큰 달은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서 울다가 지쳐 빨개진 채로 흘겨 보는 눈 같습니다. 별들은 땅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아버리기라도 한 듯 캄캄한 하늘에는 달 뿐입니다. 새들의 날개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화살과 포탄, 피 냄새며 연기, 비명 소리를 전하느라고 지친 바람들은 아라를 딱히 반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바람에서는 붉은 얼룩이 묻어나고, 또 어떤 바람에서는 검게 탄 재만 묻어납니다. 연기로 되어 있는, 속이 비어 있는 검은 구름을 통과하고 나자 아라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꼭 연기에 눈이 매워서만은 아닙니다. 아라가 울기 시작하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구름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검댕과 화약 냄새 뿐인 눈물이지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웁니다. 바람들 틈에 숨어 있던 다른 구름들도 서서히 나타나서 함께 울었습니다. 죽어간 병사가 마지막으로 내쉰 숨결이 더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한숨이 눈물이 됩니다. 이렇게 맹렬하게 비가 쏟아져 내리는데도 땅 아래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없습니다. 토끼며 사슴들은 이미 싸움이 시작되기 오래 전에 모습을 감춰 버렸고, 그 자리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깜빡이지 않는 눈에서도 눈물이 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널부러진 군복은 진흙투성이가 되고, 화약냄새를 씻어내 제 품에 안은 물은 콸콸콸 울면서 흐릅니다.
  얼마나 날았을까, 저 쪽에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두 병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가 처량하게도 온다. 마늬 님의 이름에 걸고, 제기랄! 이 놈의 전쟁은 언제 끝나나 몰라.”
“저 놈들이 다 죽어 넘어지거나 우리가 다 죽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겠지. 물론 마늬 님께서 우리한테 계시는 한은 우리가 죽는 건 어림없지만 말야.”
  아라의 모습은 빗줄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전쟁의 끝에 마늬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라가 자리를 떠나자, 두 병사는 뭔가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뭔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는데.”
“전쟁터에는 악마들이 돌아다닌다니까. 아니면 원혼이나 시체 도둑이거나 짐승이겠지. 마늬 님께서 지켜주시길.”
“쳇,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군. 애초에 마늬 님한테 가르침이 오지 않았던 때가 더 조용했는데.”
“말조심해. 어디에 끄나풀이 있다가 그 소리를 이단심문관한테 찌를지 알아.”

  아라는 계속 날면서 더, 더 많은 막사들을 보았습니다. 지쳐버린 병사들이 꿈도 꾸지 않고 자는 동안 비는 조용히 땅을 적시며 내립니다. 상처에서 열이 올라 신음하는 소리, 다시 가족을 만나기를 바라며 흐느껴 우는 소리, 그리고 하루빨리 적들을 물리치고 마늬의 가르침이 멀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기도 소리. 아라는 마침내 가장 많은 막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밤에도 잠들지 않는 근위병들이 엄숙히 늘어서서 신성 마늬 제국의 황제이며 약속의 증표이고 첫번째 사도, 가장 위대한 보호자, 대행자, 정복자, 계약자인 마늬의 막사를 지킵니다. 황제는 전선의 제 1선에 서서 모든 병사들을 독려하며 수많은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 땅의 끝까지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근위병들은 아라가 앞을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라는 한참동안이나 막사 앞에 서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뺨을 타고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이지만, 온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라의 눈물입니다. 마침내 결심한 듯 아라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막사의 입구가 살짝 펄럭였습니다. 그걸 알아챈 근위병이 눈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이나 그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도로 시선을 앞으로 하고 쏟아지는 비와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허공만 쳐다 봅니다.

  막사 안에는 갑옷을 차려 입은 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하나 뿐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막사 안은 여전히 밝았습니다. 그는 아라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지도를 들여다 보고는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몸을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쉽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라가 한 쪽에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구냐?”
  한 손이 칼자루로 가면서 묻는 소리. 그러나 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지금은 자라서 훨씬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 되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 쪽도 멍하니 아라를 들여다 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습니다.
“설마...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아라?”
  아라는 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마늬에게 안겼습니다. 몸부림치면서, 눈물 범벅으로 마구 얼굴을 비벼댑니다.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해서 까칠까칠한 감촉이 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약속했으면서- 약속했으면서-”
  아라가 우는 동안, 마늬는 아무 말도 않고 아라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헤어질 때 마늬는 아라와 비슷한 또래였지만, 이젠 훌쩍 커버렸습니다. 아라가 선 키와 마늬가 무릎을 꿇은 키가 비슷할 정도였습니다. 아라가 좀 진정되자, 마늬가 아라를 보며 말했습니다.
“넌 그 때 그대로구나. 그 날 후로 한번도 잊지못했던 모습대로...”
“넌 달라져 버렸어.”
“그래, 그 후로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으니까. 신들의 시간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밤마다 수없이 잠들지 못하고 너한테 기도하는 동안, 신들의 시간으로는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냐- 변한 건 그것 뿐이 아냐. 넌 바닷가에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마늬, 조개를 줍고 소금을 굽는 마늬가 아니라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넌 영주님들처럼 되어버린 거지?”
  마늬는 아라의 눈을 피했습니다.
“미안해.”
“넌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선 안 돼- 누구랑 약속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뭘 약속했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말했으면서!”

  마늬는 여전히 아라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습니다.
“너와의 약속을 지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나봐. 너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주님들이 멀리 다른 성에 사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무릎 꿇지는 않았지. 모두 너와 약속했으니까,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갖고 싶은 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갖겠다고- 모두 맞서서 싸웠어. 물론 나도 맞서서 싸웠고. 그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마늬는 씁쓸하게 갑주를 쳐다 보았습니다.
“-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 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모두 들을게.”
  아라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꾹 참고 말했습니다.
“사실 난 너한테 변명할 것 밖에 없어. 너와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를 속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린 다른 영주들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들의 보호 아래에 있는 백성들에게 너와의 약속을 전했어. 나도 직접 그 이야기를 전하러 다니기도 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약속을 한 사람이 너였다는데 더 관심을 기울였어. 우린 모두 애였던 거야...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애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거지.”
“...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 이야기.”
“그래.”
  마늬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아라, 난 너의 약속 대신 이름을 내세우고 말았어. 약속이 아니라 약속의 증표를 내세워 버렸어. 널 자기 잘못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하던 어린 신이 아니라,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만들어 버렸어.”
  아라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난 사람들한테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약속한 사람들은 모두 무참히 쓰러지고 다시 영주들의 보호 아래 놓인 사람들만 남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 때 그 나이든 주교가 도움을 많이 줬지. 이름이 아라로 바뀌었다는 것만 빼면 그 전에 자기가 하던 일하고 똑같았으니 그 사람한텐 쉬운 일이었겠지. 난 너무 괴로웠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밤마다 너를 부르면서 기도했어- 제발 빨리, 다시 내게 와 달라고. 영주란 족속들을 죄다 파도를 불러와서 쓸어버리기라도 해 발라고-”
  마늬는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단 건 알아. 또다시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를 기다리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한 일이 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만들어버리는 일이었으니, 한동안 두렵기도 했지, 만일 너가 다시 와서 이 모든 걸 보게 되면 화내지 않을까 하고.”
  아라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절래 절래 젓기만 했습니다. 마늬가 아라의 뺨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네 생각을 하다가 하지 못하게 된 때가 있었어- 함께 싸우던 마을 사람들 중에서, 영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얘기에 혹해서 우릴 배신한 사람들이 있었던 거야. 그 때는 거의 모두가 죽을 뻔 했지. 그러고 나니까 더 이상 네 생각을 하지 않게 되더라고. 증오와 분노가 날 사로잡았어. 왜 이렇게 마땅한 약속을 따르지 않는 거지? 사람이란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없으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족속인 건가? 하고서- 그렇게 되니까 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만들어 버린 것도 더이상 두렵지 않아지더라구.”
  마늬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0년... 아니 15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신성 마늬 제국의 황제가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 웃기지 않니, 약속의 증표, 대행자에 정복자, 계약자라니 말야. 난 네 약속을 저버렸는데,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렇게 된 거야.”
“처음에는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한 약속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라고만 말하게 되었어. 일단 그를 따르게 되면 그 다음에 너와 한 약속을 이야기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사람들한테는 영주님이든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든 모두 똑같았던 거야. 누군가 따를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무작정 따르기만 하면, 자기들을 좀 더 편하게 해 줄 사람이 말야. 배신 당하고 나서도 여러 차례 고비를 겪고 겨우 이전 영주의 친척들을 물리쳤을 때, 이 땅에 있던 다른 영주들이 모두 하나로 연합했어. 난 성이나 영주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렇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새로운 영주가 되어야 한다고. 난 싫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약속을 전할 수 있게 된다고 했지.”
“그래서 영주가 된 거니?”
“이름은 영주라고 하지 않았지만 영주나 다름없었지. 마늬라는 이름, 이젠 더이상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아니야. 너와의 약속을 전하는 사람의 칭호가 마늬가 되어 버렸어. 사람들은 마늬의 아래에 모였어. 이제는 아라의 이름조차 없이, ‘아라의 선택을 받은 마늬’ 아래에- 너와의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내 아래에, 그리고 네 아래에 무릎을 꿇었어. 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만들었던 나마저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되어버린 거야.”
  마늬는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 후로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난 영주들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어... 영주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영주들로부터 ‘마늬의 보호’아래에 두고, 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영주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헌금이라고는 하지만 세금이나 다름없고, 모든 집의 첫째 아들들은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마늬의 병사가 되지.”
  아라가 몸을 떨었습니다.
“난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를 내세운 영주였을 뿐이야. 그러면서 스스로를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은 약속을 듣지도 않고 저버렸어... 자유롭고 평등해지기 위해서 자유로움과 평등함을 남에게 맡겼지. 대행자, 정복자, 계약자한테 말야. 스스로 아라가 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남들은 정복해서 무너뜨린 뒤에 약속을 강요하면 되는 거고, 자유와 평등의 대가로 자유와 평등을 지불하고.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난 계속 이겼어. 영주에서 왕으로, 왕에서 황제로... 그리고 가면 갈수록 너의 약속과는 점점 멀어졌지.”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 건 언제야?”
  아라가 약간 떨리는 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느 성을 공격해서 방어를 뚫었을 때였는데... 그 성의 영주는 다른 영주들에 비해서 가혹하지도 않고, 세금도 적당히 거두고, 쓸데없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나 봐. 백성들이 나와서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지만, 자기들은 새로운 영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구. 그 때야 번뜩, 백성들한테는 나도 그저 영주구나!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렸지. 마늬의 통치가,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의 통치가 그다지 가혹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사람들이 별 말 없이 통치를 받아들였어. 그 사람들도 여전히 약속을 받아들일 생각도 하지 않은 거지. 너무 괴롭히지 않으면,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아도 그게 나은 거야. 그걸 깨닫고 난 다음에야 다시 밤마다 네 생각을 할 수 있었어... 너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
  마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라는 마늬를 껴앉고 큰 소리로 울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한참 후에야 아라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니? 사실 너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책임이야. 세상을 잘못 만들어 놓고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무책임하게 영주 한 둘만 내쫓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
“아냐, 네 책임은 아냐. 우리가 바로 잡았어야하는데 우리가 하질 못한 거지.”
“애초에 잘못 만든 건-”
“뭐야, 잘못 만들었다고 말하면, 우리가 없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어버리잖아. 우리가 그렇게 말할 리는 없지.”
“-미안해.”
  아라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동안 마늬가 말했습니다.
“너한테 다른 영주들의 성을 모두 바닷가로 만들어달라거나, 영주들을 모조리 물고기로 바꿔 달라고 부탁할 순 없지. 그렇게 되면 그건 여전히 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여기는 거니까. 사실은 애초에 약속을 우리 스스로 했어야 하는 거지만-처음의 두 성들도 네 힘으로 무릎 꿇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해냈어야 하는 거지만,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고. 이제는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기도 해. 너가 없는 동안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생겼으니까.”
  하고 마늬는 자기 가슴을 탁탁 두드려 보였습니다.
“... 그럼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거니, 이 모든 걸 만들어냈으면서.”
“너가 만들긴 했지만- 지금 있는 건 우리야. 너한테 함께 하라고 말할 순 없어.”

  아라는 오랫동안 마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 거야? 마늬- 또다른,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는.”
  마늬가 좀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너처럼 내가 신이었다면, 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야겠지. 하지만 난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아니니까, 난 원래 여기 이 땅에 있는 아이니까-”
“- 안 돼, 제발, 죽지마-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아라가 소리치며 매달렸습니다. 가까스로 멎었던 눈물이 다시 툭 터져 샘솟습니다. 마늬가 아라의 등을 토닥거렸습니다.
“널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 갈게, 응? 신들의 땅으로 몰래 데리고 들어올 수도 있을거야, 아니면 이곳 어딘가에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섬을 만들고 거기로 가든가-”
“아냐, 그러면 안 돼. 마늬가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려면, 마늬가 사라져 버려서는 안 돼- 그러면 바다 너머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테니까. 혹여 영주들과의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여전히 또다른 영주인 마늬의 지배 아래에 남아 있게 돼.”
  아라는 마늬의 품 안에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마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늬가 웃어 보였습니다.
“걱정 마, 반드시 전투 중에 죽겠다는 얘기는 아냐. 모두 다 이겨버리고 난 다음에 평화롭게 늙어서 죽을 수도 있지. 물론 지금은 전쟁터 쪽이 더 가능성이 높지만 말야.”
  아라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마늬에게 안겨 있었습니다. 마늬가 말했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영주 연합의 가장 큰 군대랑 맞서 싸우게 돼... 이렇게 큰 싸움도 두 번 다시 없을거야. 이번을 넘기고 나면...”

  둘은 그렇게 하고 오래도록 있었습니다. 막사 밖에서 새벽 빛이 비쳐들자 깜빡거리던 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습니다. 근위병들의 인도를 받아 왔던 장군이, 기대어 잠들어 있는 마늬를 보고 물러났습니다.
“그동안 통 주무시질 못하셨다. 이렇게 큰 싸움인데, 그 전에라도 잠시 주무시도록 해 드려야지.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다.”
  장군이 근위병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늬가 말했습니다.
“아라.”
“응?”
“이 세상에, 신들의 시간으로 며칠 동안만 들어오지 마.”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마늬가 다시 말했습니다.
“우릴 돕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 거야, 하지만- 내가 죽는 걸 보게 되면, 넌 슬퍼하겠지. 그리고 신들은 우리처럼 쉽게 잊어버릴 수 없으니까. 너한테 그렇게 슬픔을 남겨 주고 싶지 않아.”
“마늬-”
“제발, 아라, 약속해줘.”
“너무 힘든 약속이야...”
“- 아라.”
  아라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마늬가 일어섰습니다.
“이젠 가야 할 시간이네.”
  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고, 마늬를 부르는 아침 기도 소리가 솟아있는 창들처럼 높고 날카롭게 울려퍼졌습니다.
“폐하, 폐하! 놈들이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연 폐하의 혜안은 놀랍습니다!”
“전에 지시했던 대로 하라.”
  마늬는 장군에게 그렇게 말하고 못 박은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라에게 말했습니다.
“갈게.”
“... 안 가면 안 되는 거니.”
“가야 하는지 알면서 그렇게 말하네.”
  마늬가 웃었습니다.
“나도 가고 싶진 않아. 여기서 언제까지고 너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너와의 약속을 위해선 이래야만 해. 널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가 아닌, 그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 애쓴 어린 신으로 돌려 놓기 위해서. 위대한 황제 마늬가 아니라, 한 때 아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마늬가 되기 위해서 말야.”
  마늬는 다가와서 아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때 받았던 입맞춤, 돌려 줄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답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아라는 마늬의 이마에서 푸른 물방울 무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늬는 돌아서서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습니다. 지시를 내리는 마늬의 목소리와 우렁차게 답하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아라는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눈물 한 방울만 가만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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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보다는 조금쯤 더 현실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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