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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어린 신 이야기(2)

2010.02.02 12:0502.02


  사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라는 바로 자신만의 바닷가로 달려갔습니다. 빛만 만들어둔 세상이라서 내버려두었다가 좀 더 세상을 만드는 법을 잘 알게 되거든 그 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사서 선생님이 말해준대로라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빛을 만들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손을 넣어 가능성들을 휘젓지 않았어야 했어요. 아라가 휘저은 가능성들로부터 도대체 어떤 세상들이 생겨났을까요? 직접 빚은 세상만큼 조화로운 세상이 생겼을리는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난 세상이니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아직도 스스로 만들어지다가 부서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겠지요. 그런 세상에 누군가가 살게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일의 책임이 신에게 있는 것처럼 세상을 망친 책임도 신에게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 합니다. 신이라 하더라도 이미 벌어져버린 일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세상을 다시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부서지는 세상에 갇힌 동물이나 식물들,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은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파도처럼 자꾸만 후회가 일어 눈물로 넘쳤습니다.
"덩어리야! 덩어리야!"
  자신 만의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아라는 덩어리를 소리쳐 부르며 달렸습니다. 평소라면 아라의 발을 간지르며 같이 놀자고 졸랐을 야트막한 파도가 철벅거리면서 발에 감겨 걸음을 더디게 합니다. 저 너머에 푸른 빛으로 부풀어 오른 덩어리가 보였습니다. 일렁거리는 덩어리는 처음 아라가 파도에 밀려온 것을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습니다. 아라가 겨우 가까이 다가가서 숨을 헐떡거리는 동안 덩어리가 말했습니다.
"봐, 너가 안 보고 있던 동안에 내 안에 뭐가 생겨났는지! 빛을 만들 때 네 손에 바닷물하고 모래가 묻어있었나봐!"
  아라는 덩어리가 눈치채기 전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얼른 씻어냈습니다. 대체 어떤 세상이 스스로 만들어져 비틀리고 부서져가고 있을지 자꾸 끔찍한 상상들이 떠올라서 눈을 감고 숨을 깊히 들이마셔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된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거리며 끝없이 서로 합쳐지는 부글대는 진흙들의 세상일까요? 아니면 물로만 가득차서 살아있는 것이 숨을 쉴 수 없는 오직 바다뿐인 세상일까요? 밀려오는 파도나 시원한 바람을 기뻐할 틈도 없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사나운 물고기들로 가득찬 곳일까요? 아라는 눈을 뜨고 덩어리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덩어리 안에 비치고 있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라가 한 것은 처음에 손을 넣어 가능성들을 휘젓고 빛을 만든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어떤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손에 묻어있던 바닷물과 모래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아라는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랗게 반짝이는 바다 한가운데 녹색 풀로 가득한 대륙들이 떠 있습니다. 흰 구름이 산 꼭대기들을 스칠 듯이 지나가고, 바람들이 새들의 날개를 등에 실은 채 바다 위를 뛰놉니다. 온 바다를 가득 메운 파도 아래로 은빛 비늘로 반짝이는 물고기떼도 보입니다. 저절로 만들어진 세상은 아라가 꿈꾸던 세상 그대로였습니다. 어쩌면 아라가 모든 걸 다 배우고 나서 심혈을 기울여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다한다고 해도 이런 세상은 만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라는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덩어리가 신나서 말했습니다.
"네 손 끝에서 떨어진 것들에서 이렇게 굉장한 것들이 생겨날 줄은 몰랐어. 처음에는 빛 속에 떠도는 가능성들하고 모래알 몇 개, 바닷물 몇 방울만 뒤섞였는데, 점점 크게 뭉치더니 저절로 세상으로 자라나더라고."
"너 덩치도 전보다 훨씬 더 커진 것 같다."
"세상이 자라날 때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때부터 더 크게 부풀어오르던걸."
  아라는 멍하니 세상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정말 예쁘다... 이렇게 멋진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지다니."
"그렇지? 이젠 나도 전보다 더 자란 느낌이 들어. 내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아지구."
  덩어리가 으쓱거렸습니다.
"어때, 세상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을래?"
"그래도 돼?"
"물론이지, 너가 만든 세상인데."

  그래서 아라는 바다에 뛰어들 때 처럼, 숨을 멈추고 덩어리 속으로 몸을 쑤욱 들이밀었습니다. 온 몸이 아릿아릿해지는 이상한 감촉이 들고 나서, 살 곁에는 짠 맛이 귀에는 파란색이 코에는 파도 치는 소리가 느껴졌습니다. 어느새 아라는 두 팔을 벌리고 세상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싸늘하기도 하고, 점점이 흩어진 별들과 유독 큰 달이 선명히 보입니다. 아라는 파랗게 빛나는 둥그런 하늘 위로 내려갔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천천히 날개를 퍼득이며 날던 오래된 바람들이 아라를 환영하듯 몸을 뒤집으며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아라는 빠르게 빠르게 휙 꼬리를 끄는 별똥별보다 빨리 세상을 향해 날아갑니다. 가득히 커다란 바다가 아라의 품에 안길 듯이 자꾸만 다가왔습니다. 좀더 어리고 날개가 여린 바람들이 자기들끼리 장난치면서 아라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막 파도 끝을 차고 날아올라온 바람에서 바다내음이 물씬 납니다. 아래에 날던 날개가 흰 새들이 아라가 자기들 무리의 하나인 양 뒤섞여 함께 날았습니다. 간질거리는 구름을 빠르게 통과하고 나서 아라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파도가 모래를 쓰는 소리같기도 하고 바람이 구름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한, 시원한 웃음이었습니다. 항상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왔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세상을 나는 것은 너무도 굉장한 일입니다! 왜 신들이 그토록 세상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한번 세상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런 굉장한 일은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겁니다.
  새들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가 아라의 머릿결을 헤집었습니다. 바람이 데려다 주는대로 날아서, 아라는 함께 날던 새들에게 안녕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흰 모래가 펼쳐진 바닷가에 내려앉았습니다. 큼직한 조가비들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고, 파도의 흰 포말이 보드라운 비단처럼 밀려왔다가 스러집니다. 아라의 발 밑에서 황급히 게들이 눈을 뒤룩거리며 옆걸음으로 멀어져갑니다. 햇빛에 뜨거워진 모래의 감촉은 사박거리는 발자국소리 같습니다. 아라는 한참동안이나 바닷가를 걸으면서 너무 멀리까지 나온 불가사리를 도로 바다로 돌려보내주고, 숨어서 나오지 않으려는 소라게와 장난치고, 뭍에 드러나 오므라든 말미잘을 구경하며 놀았습니다. 햇빛에 얼굴이 화끈화끈해지고 입가에 짭짤한 맛이 날 때쯤 아라는 발을 파도가 간지럽힐 만큼 뻗고서 모래 위에 드러누웠습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바짝 마른 모래의 느낌과 발에 느껴지는 물결의 느낌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수평선에 아련히 걸려있는 구름과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신들의 땅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줍니다. 밀려오는 파도소리는 자장가처럼 아른아른했습니다. 마음껏 맑은 공기를 들이킨 것처럼 흡족한 기분이 되어, 아라는 푹 잠들었습니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나서 기분 좋게 깨어나 얼굴 위를 돌아다니는 게들을 치우고 일어났습니다. 바다와 바닷가에 언제까지고 있어도 좋지만,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전에는 걱정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세상에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의 끝자락을 잡아타고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아까처럼 너무 높히는 말고, 뭔가 보이면 금방 바람 꼬리에서 폴짝 뛰어내릴 수 있을 만한 높이로. 한들거리면서 짠내나는 바닷바람과 함께 납니다. 빽빽히 자란 풀이 가득한 언덕들을 몇개나 넘었습니다. 유난히 비탈이 가파른 언덕에서 소금기 묻는 풀잎들이 급히 머리를 숙이는 위로 바람이 단숨에 치달아올랐습니다. 쑤욱 솟구치는 느낌을 즐기며 아라는 눈을 감고 언덕에 스칠 듯 가까이 갔다가 붕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에서, 아라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과 딱 마주쳤습니다. 바람에서 미끄러져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아라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느닷없이 불쑥 눈 앞에 날아 내려온 아라 때문에 저쪽도 놀란 것 같았습니다.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는 아무렇게나 덥수룩하게 자랐고, 얼굴이나 옷차림은 지저분했지만 눈만은 깊고 깊은 바다 속 색처럼 진한 검은색이었습니다.
"넌 누구니?"
  아라가 망설이는 새 저쪽이 먼저 물었습니다.
"어 - 나는 - 으음 - 아라야."
  엉겁결에 대답한 이름은 아주 예전에, 신들의 학교에서 세상의 말을 만드는 법을 배울 때 처음으로 만든 말에서 바다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왜 지금 하필이면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난 마늬라고 해. 넌 이 근방에서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왔어? 난 저 너머 마을에서 살아."
  아라는 마늬라는 말이 처음으로 만든 말에서 파도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걸 기억해냈습니다.
"으응- 저기- 저 쪽 너머에서."
  하며 아라는 애매하게 바다 근처 쪽에 손을 휘둘러 보였습니다. 처음 날아들어온 게 바다 너머였으니 맞는 말이긴 합니다.
"그래? 저 너머에서 왔단 말야?"
  마늬는 꽤 놀란 눈치였습니다. 새삼스럽게 아라를 위 아래로 보는데 아라는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졌습니다.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 졌을 때 마늬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기, 혹시 우리 마을에 들리지 않을래?"
  아라가 거절하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말투입니다. 그러나 아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그래."
하고 대답합니다.

  마늬는 활달하고 생각이 뚜렷한 아이였습니다. 언덕길을 내려가서 한참 바닷가를 걸어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늬가 자기네 마을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주어서, 아라는 이 세상에 관해서 직접 둘러보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늬네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들과 비슷하게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산다고 합니다. 좀 안쪽 지방으로 가면 숲도 있고 산도 있고 힘센 영주님들이 사는 더 큰 성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물고기와 조개를 내다 팔러 시장에 가면 성벽은 목을 쳐들고 올려다 보아야 할 만큼 높고 줄지어 선 경비병들의 옷깃은 빳빳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라가 본 수많은 다른 세상들의 역사책에서도 그랬듯이, 높은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 친절하지 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당장 경비병들이 와서 물고기를 빼앗아가고 시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큰 일입니다.
"웃기지 않니? 그 사람들은 그물을 치지도 않고, 소금을 굽지도 않는데도 우리한테서 그걸 빼앗아간단 말이야. 농부들은 그 사람들의 땅을 빌려서 세금을 내는 거라고 해도, 이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닌 걸!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세금을 바쳐야 하는걸까?"
  마늬가 분개한 듯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건 잘못된 거 같다."
  아라가 맞장구치자 마늬가 계속 말했습니다.
"어저께 폭풍 때문에 그물이 찢어져서, 우리 집뿐 아니라 여러 마을 사람들이 다들 고기를 충분히 잡질 못했어. 내일 아침에 또 세금을 걷으러 와서는 아무거나 빼앗아가려 할꺼야, 그렇게 되면 찢어진 그물 빼고는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껄."
  마늬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라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다른 세상의 역사책들에서 보았던 일들이 아라가 만든(정확히 말하자면 아라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진) 세상에서도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대개 그런 세상들은 그다지 잘 만들었다고 하기는 힘들었거든요. 똑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살고, 어떤 사람은 빼앗기고 산다니요. 아라는 이런 부분은 조금쯤 고치는 편이 더 좋을 거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마늬와 함께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바다에 뛰어들어 하늘과 물이 모두 붉게 끓을 무렵이었습니다. 조그맣고 볼품없는 마을이었지만, 아라는 마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다 거품 속에 밀려온 젖은 지푸라기나 거기에 얽혀 있는 물풀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그다지 기분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 없고, 빼앗기고, 경계하는 눈이었습니다. 마늬의 부모님도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마늬가 아라를 소개하고 나자, 곧 마늬의 팔을 붙잡고 나가더니 작게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장 우리 형편도 곤란한데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하니?"
"하지만 엄마, 저 애는 바다 너머에서 온 애에요."
"넌 언제까지 그런 아이들 같은 이야기만 믿으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바다 건너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아. 하지만 영주님들의 병사들은 세금을 걷으러 오지."

  일부러 들리라고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내쫓지는 않아서 아라는 그날 마늬네 집에 묵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시간에는 묽은 생선죽을 앞에 두고는, 말없이 달각거리며 낡은 그릇을 숟갈이 긁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아마 마늬의 부모님도, 애써서 번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활짝 핀 표정일 수 있을테고 묽은 생선죽을 내놓으면서도 마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아라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고기떼가 파도에 밀려오게 할까요? 몇달동안 폭풍의 옷자락을 서로 묶어놓아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할까요? 소금에 절여진 작은 생선이 가득한 항아리들을 산더미만큼 나타나게 할까요? 하지만 아무리 많은 고기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걸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만든 세상에 사는 것을 함부로 없애버리는 것은 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조금쯤 혼내줘서 다시는 남의 것을 빼앗지 못하게 할 셈입니다. 하지만 밀려오는 밤의 파도소리와 갈라진 벽 틈새로 비쳐드는 달빛 아래서 아라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라가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또 마늬의 부모님은 왜 그걸 아이들 같은 이야기라고 했을까요? 그 점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라는 돌아누워서 소금기 냄새를 맡으며 잠들었습니다.

  영주님들의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왔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목소리는 훨씬 더 크고 발걸음은 심술궃습니다. 마늬와 아라가 숨어서 보는 가운데, 마늬의 부모님들이 다른 마을사람들과 함께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나리들, 한번만 영주님들께 잘 이야기해 주시구려. 정말 이번에는 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오. 찢어진 그물과 배 뿐이에요. 나리들, 이해해 주시겠지요? 폭풍 때문에 그물이 찢어져서,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전부 다 도망가버렸다구요."
  병사들의 대답은 반짝거리는 창살처럼 딱딱합니다.
"원칙은 원칙이오! 영주님들께서는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시고, 여러분들은 그 대가로 매달 이 날에 세금을 바치기로 되어 있소. 폭풍이 불었다고 해서 영주님들께서 여러분들을 보호하는 의무를 그만두신 적이 있단 말이오? 특별히 이번 한번만 봐주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무를 지켜야 하오."
"하지만 나리들, 낼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정말입니다, 찢어진 그물뿐이에요. 낡아빠진 숟갈과, 이빠진 그릇, 무너져가는 초라한 오두막집 뿐입니다. 우리도 세금을 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오. 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배를 가져 가겠소."
  병사들은 인정사정 없이 그렇게 말한 다음에, 창을 높히 들고 아우성치는 마을사람들을 떠밀면서 거만하게 소리쳤습니다.
"배를 옮겨라! 자비로운 영주님들께서는 세금 대신에 배를 맡아주실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오! 영주님들의 식탁에 한 끼쯤 생선이 오르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우리들은 배가 없으면 굶어죽을 거요!"
  누군가가 악을 쓰자, 병사들의 창날이 위협적으로 번쩍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의무도 행하지 않겠다는 건가? 영주님의 보호에서 벗어나, 반역을 하겠다는 건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더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병사들은 히죽거리면서 배들을 들어 옮기려고 했습니다.

  아라는 바로 그 때가 나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다리는 어깨 넓이 정도로 벌리고 당당히 서서 소리쳤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리세요."
  병사들은 배를 옮기다 말고 아라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이건 또 뭐야? 왠 귀여운 공주님이신가?"
  하고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건들거리며 다가옵니다.
"아라! 안 돼. 나가지 마!"
  마늬가 달려와서 아라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려 했지만 아라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하고 속삭인 다음 돌아보니 어느새 병사가 다가와서 아라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아라는 지지 않고 똑바로 병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유,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했나요? 배가 없으면 사람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못할거에요. 그러면서도 계속 세금을 낼 수 있나요?"
  마을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아라와 병사를 쳐다봅니다. 마늬가 다시 아라의 팔을 세게 끌어당겼지만 아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씨,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 사람들은 영주님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그러면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영주님들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는데,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내놓지 않겠다니 말이야."
"영주님들의 보호란 게 누구에게서 뭘 보호한다는 거죠? 제가 보기엔 영주님들은 폭풍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공연히 생선이 먹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잡은 것을 빼앗는 것 같은데요. 보호가 필요하다면, 마을 사람들을 영주님들한테서 보호해야죠."
  이 말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보자 보자하니까 이 쪼그만 게, 죽고 싶나!"
  하면서 창이 높히 들어올려져서 햇빛 속에 번쩍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병사는 창을 떨어뜨리고 물러났습니다. 병사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뭐야, 이게?"
  창은 온데간데 없고, 축축한 미역 줄기에서 게들만 옆걸음으로 열심히 도망갑니다. 마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라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라가 씩 웃고는 다른 병사들의 창을 쳐다보자,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미역 줄기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마을사람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아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병사는 주춤거리고 물러섰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전 지금 당장 당신을 물고기로 바꿔 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물 밖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곤란하겠죠. 그래서 그런 짓은 하지 않겠어요."
  병사는 겁에 질려서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떡여댔습니다.
"당신들의 영주님들은 무얼 원하죠? 이 열심히 일하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오고 싶어했나요? 소금에 절인 물고기들이 전부 다인가요?"
  병사가 끄떡이자, 아라가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럼 전 당신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가서 당신들의 영주님들에게 실컷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먹게 해 주고, 그 다음에는 다시는 남의 것을 빼앗을 생각은 하지 못하게 만들겠어요. 안내해주세요."

  병사들은 겁에 질린 채로 서둘러 아라를 마차에 태우고 자기들도 올라탔습니다. 그 때 마늬가 재빨리 따라서 마차에 올라타 아라 옆에 앉았습니다. 병사들은 물고기가 될 까봐 어찌나 무서웠던지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올라탄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질 못하고 서둘러 말에 채찍질해서 달려나갔습니다. 덜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마늬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가 그렇게 말했을 때부터 난 진짜인 줄 알았어. 넌 바다 너머에서 왔지?"
  아라는 말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서 땀을 씻어주고 마차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게 했습니다.
"음, 글쎄, 솔직히 말하면 난 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럼 바다 너머에서 온 게 아니란 말야? 창을 미역으로 바꾸고, 병사들을 물고기로 바꿔버릴 수도 있으면서?"
  아라가 마늬를 쳐다보니 마늬는 아라가 바다 너머에서 왔다고 대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으-응, 사실은 말이지, 바다 너머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으음, 아니 바다 너머라고 해도 좋으려나- 그래, 난 저 너머에 있는 신들의 땅에서 왔어."
"신들의 땅? 그러면 넌 신이니?"
"응." 마늬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래, 그 얘기는 거짓말이 아니었어! 성 안에 사는 영주들이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갈 때, 바다 너머에서 그걸 바꾸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어. 드디어 너가 그걸 하러 온 거구나!"
  아라는 마늬가 기뻐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이 아닌 건 고쳐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했습니다.
"아니, 그게, 실은 그걸 바꾸러 온 건 아니야. 난 그냥 내가 만든 세상에 들어왔던 것 뿐인데, 뭔가 잘못된 거 같아서 그걸 고치려고 하는 거야-"
"신이 만들었는데 잘못 된 것 같다니 무슨 얘기야?"
  그래서 아라는 모든 것을 다 말해주었습니다. 자기는 사실 세상을 만들 자격이 없는 어린 신이고, 이 세상은 우연하게 발견한 세상의 재료를 휘저었다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며, 혹시 잘못된 세상이 생겨났을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고. 끝에다가 작은 문제가 있는 걸 알았으니 이제 고칠 거라는 얘기도 덧붙혔습니다. 마늬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라가 의아해서 마늬의 얼굴을 살필 적에, 마늬가 불쑥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넌 신이 아니란 거지."
"응? 신이 맞긴 하지만- 아직은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도 어린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진 않잖아? 어린 신도 신은 신이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신은 아니잖아."
"어- 그건 그렇지. 그래도 잘못 된 건 알았으니 제대로 바꿀꺼야."
  여기까지 말했을 때 성에 도착했기 때문에, 더 말할 틈이 없었습니다.

  다른 경비병들이 막기 전에, 아라는 마차에서 내려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습니다. 마늬가 허둥거리고 따라오는 것을 경비병들이 막으려 했지만, 아라의 발 밑에서부터 파도가 치기 시작하자 다들 기겁하고 짠 물 속으로 엎어져서 허우적거렸습니다. 바다 쪽에서 갈매기들이 흰 구름처럼 몰려와서 성 밖을 빙빙 돌았습니다. 철썩거리는 야트막한 파도에서 물거품이 꺼지고 난 자리에는 소금에 절여져서 바짝 마른 고기들이 알록달록한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쳤습니다. 짠 냄새와 해초 냄새가 섞인 시원한 바람이 깔깔거리면서 서로 꼬리를 길게 끌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아라 주위를 맴돕니다. 아라의 왼 발이 닿았던 자리에서는 황금색 모래와 검은 용암 모래가 솟아나고, 아라의 오른 발이 닿았던 자리에서는 붉은 모래와 흰 조개 껍질 모래가 솟아났습니다. 파도가 철썩 스치고 지나가자, 돌로 된 매끈한 성벽들은 바닷가의 까끌까끌한 절벽으로 변했습니다. 모래가 계속 솟아나서 파도가 발만 적시고 다시 밀려 나갈 정도가 되었을 때 쯤에야, 아라와 마늬는 영주님들의 웅장한 방에 도착했습니다.
  영주님들은 비싼 모피코트가 소금물에 젖을까봐 손으로 걷어올린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루 하루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서 물고기를 빼앗아가는 성 안의 사람들인가요?"
"무엄하다, 이놈! 경비병은 무얼 하느냐? 썩 이 놈들을 끌어내라!"
  아라가 손짓하자 소금에 절여진 고기들이 일제히 뛰어올라서 영주님들의 머리 위를 지나 뒤편에 퐁당퐁당 빠졌습니다. 바닷물이 튀자 영주님들은 기겁해서 몸을 움츠립니다.
"이봐, 말조심해! 아라는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라구. 너희들이 더이상 물고기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러 왔단 말이야."
  마늬가 소리치자 높은 관을 쓴 주교님이 겁에 질려 중얼거렸습니다.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그 이야기는 그저 아이들 이야기일 뿐이야..."
  아라는 분명히 아니라고 했는데도 마늬가 다시 그런 말을 하자 약간 눈쌀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물을 치고, 그렇게 해서 잡은 물고기를 먹거나 내다 팔아서 살아갑니다. 그건 갈매기들이 새끼를 먹이는 거나 큰 물고기들이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사는 거하고 다를 바 없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그 사람들한테서 물고기를 빼앗아 먹을 수 있는 거죠?"
  그러자 몸집이 크고 단단한 갑옷을 입고 큰 칼을 허리에 찬 장군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우리가 백성들을 수호하는 의무를 가벼이 여기고 있소, 바다 너머에서 온 이여. 우리의 의무 역시 그대의 율법에 비추었을 때 백성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바칠 값어치가 있는 것이오."
"당신들은 백성들을 무엇으로 부터 보호하나요?"
"다른 성의 영주들로부터요. 그 자들은 탐욕스러워서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도 다 가지고 싶어하거든. 만일 우리들이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자들은 자기 병사들을 몰고 와서 모든 것을 빼앗고 나서 백성들을 끌어다가 노예로 부릴거요."
  아라가 그 사람을 노려보자, 장군은 움찔하면서도 기죽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른 성의 영주님들하고도 얘기해보도록 하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아라와 마늬,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다른 영주님들은 모두 산더미 같은 바닷바람에 실려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습니다. 구름들이 휙휙 지나가고,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면서 바람을 타고 납니다. 영주님들은 겁에 질려서 뭐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아무 소리도 못 하기도 했습니다. 주교관을 쓴 사람이 가장 겁에 질려서 펑펑 울고 있었지만 아라는 못 본 척 했습니다. 글쎄, 남이 울고 있을 때 그걸 굳이 지적하고 놀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옆에서 마늬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파도가 절벽의 바다 동굴에 울리는 소리나 바람이 물거품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면서 아라는 기분이 좀 좋아졌습니다. 이윽고 바닷 바람은 그 큰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아라와 마늬, 영주님들을 다른 영주님들의 성에 내려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비병들은 혼비백산하고, 성은 작은 바닷가처럼 되었습니다. 아라와 마늬가 앞서고 영주님들이 모피 코트를 걷어올린 채 허둥거리며 뒤따라들어오자, 그 성의 영주님들도 화려한 옥좌 위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따라 들어온 영주님들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사악한 요술을 부려서 감히 우리 성을 침범하다니!"
  마늬가 막 말하려는 참에 훌쩍거리던 주교님이 먼저 외쳤습니다.
"바다 너머에서 오신 분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나중에 이 점에 대해서 단단히 얘기해둬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라가 다시 손을 들어올리자 갈매기들이 파닥거리면서 옥좌 주위에 내려앉아서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영주님들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자, 여러분도 이 쪽 영주님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물고기를 빼앗는 사람들이겠지요. 이 쪽 성의 영주님들은 당신들이 다른 백성들을 함부로 공격하고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보호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를 세금으로 거둘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황금색 왕관을 쓴 영주님이 발끈해서 소리쳤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오! 저 자야말로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우리들의 성을 빼앗고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소. 우리야말로 저 자로부터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고 있는거요."
"뭐라고? 그 전에도 너희들이 먼저 우리 땅을 공격하지 않았나!"
"네 놈이 그 전에 우리 바닷가를 빼앗아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다!"
"그 땅은 그 전부터 우리 것이었어! 나의 할아버님 때부터 우리가 통치했단 말이다!"
"그 때 그 땅을 빼앗아가기 전에는 우리 땅이었지. 우리는 마땅한 것을 돌려받았을 뿐이야!"
  이대로 계속 해 두면 끝나질 않을 것 같아서 아라가 손바닥을 딱 맞부딫히자 엄청나게 큰 파도 둘이 일어나 서로 철썩 맞부딫혔습니다. 흰 물거품들이 가라앉고 난 다음에는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푹 젖어 있었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좋아요, 당신들의 말을 들어보면, 서로 당신들의 백성을 당신들에게서 보호해야만 하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당신들을 소라게와 말미잘로 만들어서 이 해변가에서 사이좋게 잘 살게 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서 백성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하면서 손을 들어올리자 영주님들이 일제히 아우성치면서 그러지 말아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중에서 금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들고 있던 학자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신이여,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 쯤은 당신께서도 아실 겁니다. 우리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또 누군가 어떤 힘쎈 사람이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물고기를 빼앗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또다시 영주가 될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 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물고기를 바치면 지켜주겠다고 말할 때, 다른 영주들이 생겨나겠지요. 이것은 당신이 만드신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지요. 우리는 당신께서 만드신 데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학자가 안경을 치켜올리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다른 영주님들도 고개를 끄떡거렸습니다.

  조금 곤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라는 약간 오래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한테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자기가 세상을 잘못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때 마늬가 옆에서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틀린 게 있어요!"
"이 아이는 또 누군가?"
  학자가 눈을 찡그렸습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나의 친구입니다. 자, 마늬, 뭐가 틀렸는지 말해봐."
  마늬는 힘을 얻어서 계속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당신들이 다른 영주들로부터 지켜주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우리의 고귀한 의무를 모욕하다니!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거야!"
  장군님이 화를 냈습니다.
"아니에요, 실제로는 당신들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명령을 받고 다른 성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것도 병사들이고, 거기에 맞서서 싸우는 것도 병사들이지요. 장군님은 칼을 잘 쓸지 모르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병사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첫째 아들들이라구요! 우리 형도 당신들의 병사로 끌려갔어요!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이 없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에요."
  장군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뭐라고 대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정말 마늬는 똑똑한 아이입니다! 어쨌거나 이 세상을 만든 자기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이야기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라는 고개를 끄떡거리고 말했습니다.
"마늬의 말이 옳은 것 같군요. 이 점에 대해서 뭐라고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학자가 포기하지 못하고 끈덕지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이 병사들을 모으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서로를 지킬 수 없을 겁니다. 법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응징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전에 서로를 지켜야 할 필요도 없을거에요. 마을 사람들은 더 많은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더 열심히 일하지, 다른 마을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요. 당신들은 남을 공격해서 빼앗지 않으면 더 많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법은 당신들이 말하기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만들고 지키던 약속이에요. 법을 벗어나는 사람은 마을 사람들끼리 타일러서 그렇게 못하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법을 내세우는 한은, 마찬가지로 법에서 벗어나는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해도 그 법에 걸리지 않지요."
  마늬의 말에 학자는 결국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늬가 아라를 쳐다보자, 아라는 씨익 웃어주었습니다. 생각같아서는 마늬를 껴앉고 빙빙 돌고 싶지만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이 그렇게 한다면 좀 곤란하겠지요. 아라가 말했습니다.
"좋아요. 이제 이 점들을 다른 마을 사람들한테도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아라는 마늬의 손을 꼭 잡은 채 바닷 바람의 끝자락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바람이 뒷발로 다른 영주님들을 한꺼번에 움켜잡자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마늬가 키득거리자 아라도 함께 웃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마늬가 없었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라는 마늬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하늘 한 복판에 이르렀을 때, 아라는 땅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대강 가늠했습니다. 두 성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곶은, 앞으로 백년에서 이백년 정도만 있으면 옆의 절벽들이 무너지고 널찍한 바닷가가 될 것 같았습니다. 아라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자, 주위에서 바닷바람들이 재잘거리면서 아라의 코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라는 온 세상에 울리도록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두 성 사이의 곶으로 오세요! 영주님들과 함께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바닷바람들은 일제히 퍼져나가면서 그 소리를 구석구석 바람이 닿는 곳마다 퍼뜨렸습니다. 심지어 갈매기들도 "오세요! 오세요!" 하고 울면서 하늘을 맴돌았습니다.
  아라가 다른 한 손을 들어올리자, 잠깐 사이에 파도가 백배로 빨라졌습니다. 절벽들은 매끈해졌다가 야트막해졌다가 작은 바위들로 부서졌습니다. 바닷물은 세심하게 큰 돌들을 두드리고 쪼아서 작은 자갈들로 바꾸고, 또 입안에서 한참동안 물거품과 함께 굴려서 모래로 만들어 뱉어냈습니다. 잠깐 사이에 넓은 모래밭이 펼쳐졌고, 새로 생긴 절벽들은 저 멀리서 높다랗게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도 모두 볼 수 있도록, 아라는 툭 튀어나온 바위 하나를 골라 집어내서 바닷가 한 가운데에 세웠습니다. 이 일이 끝났을 때 쯤, 벌써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 생긴 바닷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라가 바람에게 내려달라고 속삭이자, 아라와 마늬가 가뿐하게 바위 위에 내려앉고 영주님들은 약간 대충 툭 떨여졌습니다.
  아라는 모여든 사람들을 이쪽부터 저쪽까지 쭉 둘러보았습니다. 마늬의 손을 붙잡은 채로, 사람들 앞에 서서 아라는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물고기를 잡아서, 혹은 벼를 거둬들여서 영주님들에게 세금으로 바쳤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이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곳에 왔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땀 흘려서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영주님들은 당신들을 다른 영주님들로부터 보호하고 그 대가로 세금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영주님들이 여러분들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되면 보호할 필요도 더 적어질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영주님들의 보호 아래에서 풀어놓고, 영주님들은 여러분과 마찬가지인 마을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아라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은 분들은 더 열심히 일하세요. 서로 필요한 것을 바꾸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아무런 댓가도 주지 않고 빼앗는 것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정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라는 손을 들어올렸습니다.
"여기 이 바닷가는, 제가 여러분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었고, 이제 다시 똑같이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러분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가지고 살 것이고,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의 바닷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평등하고, 자유롭습니다. 저는 이것을 제 이름으로, 그리고 여러분의 이름으로, 여기 이 곳에서 선언합니다!"

  아라의 말이 끝나자, 어느 새 아라 옆으로 가까이 온 주교가 소리쳤습니다.
"바다 너머에서 오신 분 만세! 바다 너머에서 오신 분 만세!"
  마늬가 지지 않고 외쳤습니다.
"아라 만세! 아라 만세!"
  잠깐 사이에 온 바닷가는 아라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아라는 뿌듯했지만, 조금 더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라는 손을 들어올려 사람들이 조용하게 한 다음에, 마늬의 손을 들어올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갔습니다.
"여기 이 친구는 마늬라고 합니다. 마늬는 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고, 다른 영주님들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늬를 오늘의 약속에 관한 증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마늬를 볼 때마다 저와의 약속을 기억해 주시고, 여러분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늬야, 정말 고마워."
하고, 아라가 마늬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마늬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아라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는 파도에서 튀기는 물방울 같은 모양의 작은 파란색 자국이 남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아라 만세! 마늬 만세! 마늬 만세!"

  이렇게 뿌듯한 순간이라면 결코 내려오고 싶지 않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빨리 가서 그물을 치거나 김을 매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요. 게다가 자기도 너무 오래 세상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이번 세상은 잘 고쳤지만, 다음번 세상에 또 이렇게 흠집을 남기지 않으려면 학교를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아라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모두에게 이 약속을 잊지 말고 돌아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오늘의 새로운 약속에 관해서 흥분해서 서로 떠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러 돌아갔습니다. 영주님들은 쭈뼛쭈뼛하다가 아라와 마늬를 힐끔힐끔 보면서 마을사람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자, 어느새 저물어가는 바닷가에는 아라와 마늬만 남았습니다.

  아라가 앉자 그 옆에 마늬도 와서 앉았습니다. 둘은 한 동안 나란히 앉은 채로 번져가는 저녁 노을과 노을이 비친 바다, 그리고 거기서 날고 있는 갈매기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마늬가 말했습니다.
"미안해, 처음에 난 너가 바다 너머에서 오지 않았다고 했을 때 너무 실망했어. 내가 오해한 거 사과할게."
"아냐, 애초부터 세상을 잘못 만든 건 나였으니까- 사과 하려면 내가 너랑 이 세상 사람들한테 사과해야지."
"괜찮아, 이제 바로 잡혔으니까."
갈매기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파도소리가 철썩거리면서 그 소리를 씻어냅니다. 마늬가 말했습니다.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 이야기는 아이들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 우리끼리 뭔가를 바꾸기를 바란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바꿔주기만 바라고 있었으니까 말야. 물론 지금은 우연하게 그런 이야기하고 너하고 맞아 떨어졌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면 좋겠어.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우니까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 사실은 그게 중요한 거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닌데."
  하고 아라가 웃자 마늬도 웃었습니다.
"그러게. 하지만 너가 바다 너머에서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들려 줄 수도 없었겠지. 스스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까지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틀린 걸 바로잡았지. 다음번에 세상을 만들 때는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꺼야."

  아라가 일어서자 마늬도 따라 일어섰습니다. 아라는 오랫동안 마늬를 쳐다보았습니다.
"너랑 같이 있으면서 이 세상이 변해가는 걸 계속 보고 싶지만, 수업에 빠지면 안 돼. 다음 번에 더 멋진 세상을 만들고,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나도 열심히 배워야지. 어쩌면 수업시간에 파도랑 달리기 내기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수도 있는데."
"계속 우리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나도 너랑, 이 세상이랑 언제까지고 같이 있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나한테 의논하러 올 거야. 사람들끼리 스스로 이야기하고 생각해서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그래서야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게 없어져. 아니, 정말로 나는 바다 너머에서 온 아이로 남고 말거야.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했으면서."
"그래,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너가 가 버린 다음에도, 널 잊지는 못할 거야.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면서도, 네 모습이 떠오르고 너를 다시 보고 싶을거야."
"나도 그래."
  하고 아라는 마늬를 꼭 껴안았습니다. 아라는 마늬를 껴안은 채로 말했습니다.
"나랑, 나하고 한 약속들을 잊지 마. 날 기억한다면 내가 한 말들도 기억해줘. 언젠가 또 널 만나러 올게, 그 때까지 잘 있어."

  아라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파도 위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놀던 작은 바람들이 다른 큰 바람들보다 한발 앞서서 재빨리 아라의 옷자락을 붙잡고 날아올랐습니다. 마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라! 아라!"
  아라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잘 있어!"
  그러면서 아라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마늬를 돌아보았다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라는 점점 더 높히 높히 날아오르고, 마늬가 부르는 소리도 더 들리지 않고 약속의 바닷가도 더이상 보이지 않고 새들도 따라 날아오를 수 없는 곳 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라는 한번 흘끗 뒤를 돌아보고, 눈가에 맺힌 걸 쓰윽 씻어낸 다음, 두 팔을 펴고 세상의 너머, 신들의 땅을 향해서 날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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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마늬의 생각은 원시적 무정부주의에 가깝고, 그래서 아직까지는 꽤 동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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