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어린 신 이야기(1)

2010.02.02 11:4402.02


  세상의 끝 너머, 아득히 멀고 광대한 곳에 신들의 땅이 있습니다. 푸른 바다가 소리도 없이 물결치며 밀려오고, 흰 구름들이 띠를 이루어 드리운 그곳에서는 죽지 않을 운명의 신들이 거닐고 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달콤해서 온 몸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고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상쾌하게 해줍니다. 신들의 땅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우리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귀에 대면 들려오는 바로 그 소리랍니다. 천사들이 새처럼 환희에 차서 언제까지고 노래를 부르는 시끄러운 곳이나, 줄어들지 않은 고깃덩어리와 술잔들이 오가는 왁자지껄한 잔치가 매일같이 벌어지는 곳은 아닙니다. 이곳은 깨어있는 평온함의 땅, 변함없는 고요한 아침의 땅입니다. 신들은 그런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들이 거기서 무얼 하느냐구요? 많은 이야기에서 말하는, 세상을 하나하나 굽어 살피고 일일히 자애롭게 보살피는 신들이나 모조리 기록해두었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 앞에서 호통치는 신들과는 좀 다릅니다.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신들은 불멸의 땅에서 항상 공부하고 있답니다. 아니, 여기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지겨운데 신들도 공부를 하고 있냐구요? 그럼요, 신들도 항상 공부하지요. 신들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여러분들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아, 거기 뒤쪽에 손 드신 분. 신들이 뭘 공부하느냐, 그거 참 좋은 질문이네요. 그렇지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신은 전지전능하다는데 뭘 더 배워야 할게 있담?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도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신들은 항상 조심스럽고, 항상 공부하고 있는 거지요.

  신들 가운데서도 어린 신도 있고 좀더 나이든 신도 있습니다. 신들은 아는 것이 많아지면 나이를 먹습니다. 나이든 신들은 더 공부를 많이 한 신들입니다. 어린 신들은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신들이지요. 나이든 신들은 학교를 열어서 어린 신들을 가르칩니다. 가끔씩 학교에 다니지 않고도 혼자서 배워서 알게 되는 신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혼자 깨우치는 것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일이지요. 게다가 신들이 시행착오를 거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그래서 어린 신들은 다니기 싫어도 학교에 다니면서 나이든 신들에게 여러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저런, 학교 다니기 싫어하는 건 여러분하고도 똑같군요.
  어린 신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는 세상의 비밀 중에서도 으뜸가는 비밀이라 아직 말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신들은 나이든 신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더 많이 배우고 더 크게 자랍니다. 어린 신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죠. 해의 불길이 가장 뜨거워져서 달을 가장 차갑게 달구는 때가 언제인지, 별자리들이 함께 어울려서 무엇을 노래하는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째서 그렇게 아름다운지, 꽃잎에 어리어 물드는 노을의 색은 어떤 것인지, 땀을 씻어주는 서늘한 바람을 만드려면 무엇 무엇을 섞어야 하는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나이가 들어서 이제 어른이 된 신들은 신들의 땅을 떠나서 그 너머, 우주의 더욱 멀고 먼 곳으로 갑니다. 거기서 신들은 조심스럽게 세상의 씨앗을 뿌리고 싹틔워서 돌봐줍니다. 그렇습니다, 신들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겁니다. 더 완전하고, 더 아름답고, 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거지요. 신들의 학교에서 어린 신들을 가르치는 나이든 신들은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신들입니다. 자신의 세상을 만드는 대신, 다른 어린 신들이 세상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신들의 땅에 남아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어린 신들은 아직 세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들의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지 않고서는 세상을 만들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무언가가 금지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게다가 어린 신들한테 무언가를 금지하다니요! 어린 아이에게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벌써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일이더라도요. 이 이야기는, 그런 한 어린 신의 이야기입니다.

  한 어린 신이 있었습니다. 신들에게는 딱히 이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신을 완전히 가리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쓰려면 신 하나만 부르려 해도 서가 하나를 채울 책으로도 모자랄 겁니다. '파란 색을 좋아하고, 보라색은 그 다음으로 좋아하고, 머리카락의 색은 연두색 꽃잎 가운데 빨간 꽃술 같고, 신발은 끈이 두개 달린 다 헤어진 것을 신고 다니고, 그 전에는 끈 하나는 떨어져 버린 여름 구름을 엮어 만든 신발을 신었고,'하는 식으로 계속되니까요. 그렇지만 나중에 가서 우리가 이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것이 생기기는 하니까, 그 이름대로 이 어린 신을 '아라'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아라는 다른 어린 신들하고 다를 게 없는 보통의 어린 신이었습니다. 보통의 어린 신이라는 말은 아직 세상에 관해서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가기 싫어도 억지로 신들의 학교에 가야하고, 하루라도 빨리 자기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신들을 말합니다. 아, 거기에 더해서 꼬리별하고 달리기 내기를 한다든지 학교를 빼먹고 시원한 구름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잔다든지 나이든 신들의 옷자락 끝을 묶어 놓는 장난을 친다든지 하는 것들도요. 아라는 그 중에서도 유독 바닷가에 앉아서 발가락을 간지르는 파도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끝없이 이어진 구름들을 쳐다보면서 자기가 만들 세상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새싹 속에서 아직 움트지 않은 꽃한테 말을 거는 친구나 구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번갯불을 타고 뛰어내리는 친구도 있었지만 아라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시원한 파도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동안 바람 너머로 이어지는 구름들을 보면서 아라는 자신이 만들 세상에 가득할 드넓은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물고기들과 비늘달린 사람들, 말하는 새우들이 헤엄치는 바다뿐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친구도 있지만 그 세상은 아라의 마음에 그렇게 썩 들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눈을 감았을 때 지느러미와 아가미로 전해져 오는 섬세한 물살의 모습과 일제히 춤추는 해초들의 밀림, 알록달록하고 기상천외한 모양들의 산호는 아주 멋집니다. 하지만 모두가 물 속에 잠겨 있으면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막막하게 펼쳐져 있는 수평선도, 그 위에 걸려 있는 구름도, 희게 부서지는 파도도, 사각거리며 밟히는 모래도,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얇은 물결도 알지 못할 거에요. 아라는 바다를 좋아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닷가를 좋아한다고 해야겠지요. 아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이 만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지 알고 감탄할 수 있도록요.
  아라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세상을 만들 때 바다에 온갖 솜씨를 다 부릴테니, 아라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바다를 좋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라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도시는 바닷가에 몰려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육지 안쪽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땅 안 쪽으로 깊숙히 바다가 들어오게 하면 될까요? 신들의 학교에서 지도 그리는 법을 배우는 시간에 자기가 만들 세상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받고 아라가 들쭉날쭉하게 바다와 땅이 번갈아 있는 지도를 그려냈을 때 선생님은 그렇게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다가 깊게 들어오게 만들면 침식과 퇴적이 어떻고 짠물과 민물이 어떻고 해서 안 된다나요.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른 친구들처럼 끈적한 꿀 같은 바다를 만들거나 파도가 없이 고요한 바다를 만들거나 금강석으로 된 높다란 절벽들로 둘러친다거나 해야 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런 바다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젖은 모래사장에 밀려오는 얕은 물결을 아이들의 발로 찰박거리며 달릴 수 있는 바닷가, 아라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가 가득한 세상,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겁니다.

  이렇게 자주 상상에 잠기곤 하는 어린 신들은 함께 어울려 놀 때 틈만 나면 자기들이 만들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나는 산 꼭대기에서 별똥별을 잡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꺼야, 나는 깊고 깊은 땅 속에 고양이 눈처럼 빛나는 보석들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야지. 깊은 동굴 안에 그 빛이 가득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빛들이 보석에서 부서져 흩날릴거야. 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커다란 쌍둥이 피라미드를 세워서 번갈아 뜨는 두 개의 태양을 기념하게 할테야, 내 세상에 가득한 나무들은 큰 숲을 이루고 뿌리로 얘기하고 이파리로 춤추게 할 꺼야, 결코 끝나지 않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세상을 만들겠어, 거기서는 모래바람이 윙윙 거리고 노래하고 사막을 스치면서 온갖 무늬와 결들을 만들겠지, 하고들 얘기했습니다. 다채로운 꿈들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멀리 멀리 퍼져나갔고, 나이든 신들은 그런 꿈들을 실제로 만들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세상들이 더욱 더 완전하고 아름답고 조화롭도록이요.
  그렇지만 아라에게는 다른 어린 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신들은 꿈에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그 비밀은 오직 아라만이 알고 있는 바닷가에서 철썩이는 파도에 쓸리고 있었습니다. 신들의 땅에서는 이렇게 어느 한 신만의 땅도 있습니다. 그런 땅에 들어가려면 그 땅의 주인인 신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초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신들도 자신만의 꽃이라거나 자신만의 햇빛 같은 것들이 있었기에 아라만의 바닷가가 특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라의 바닷가에 있는 그 비밀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아라는 수업시간 중에도 창 밖을 쳐다보며 그 비밀을 다시 한번 생각했고, 언제까지 남들에게 자신만의 비밀을 알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비밀이란 것은, 아라는 아직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지 않았는데도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만들 수 있냐구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어린 신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기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조급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별들의 노랫소리를 조율하는 법을 배우고 폭풍을 막으려면 산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배워도, 정작 무엇으로 세상을 만드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든 신들에게 세상의 재료가 뭐냐고 물으면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우물우물 넘겼습니다. 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 배우고나서 떠나갈 때야 젊은 신들의 귀에 세상을 만드는 재료가 무엇인지 속삭여 준다고 했습니다. 어린 신들이 아무리 세상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재료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는 꽃에 맺히는 이슬일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친구는 하늘 끝에 닿아 있는 푸른색일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자기 핏방울 조금이라거나 빠진 이빨이라고 생각하는 약간 무서운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재료로도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아라가 세상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아라가 자신만의 바닷가에서 야트막하게 발목을 적시는 파도와 놀고 있을 때, 아라는 무언가 형체도 색깔도 없는 것이 바닷가에 밀려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따금 우주 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거대한 거북이 올라올 때도 있고, 지친 어린 고래가 파도에 떠밀려 올 때도 있었기에 아라는 그 것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아라는 그것이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양은 흐물거리는 덩어리 같았지만 가끔씩 뭔가 알아 볼 수 있는 모양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색깔은 왠지 기분 나쁜 검은색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온갖 색깔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라는 손가락으로 그 덩어리를 쿡 찔러서 입을 만들어 준 다음에 물었습니다.
 "넌 뭐니?"
  덩어리가 새로 만들어진 입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만드는 재료야."
"너가 진짜로 세상을 만드는 재료라고?"
"그래, 나는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어. 온통 불꽃만으로 가득한 세상도,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세상도, 영원히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세상도, 나로 모든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아라는 다시 한번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너는 어디서 왔는데?"
"신들의 땅 너머에서. 세상을 만드는 재료는 신들의 땅 너머에만 있지. 여기서는 구할 수 없어."
"그러면 너는 아주 귀한 보물인가 보구나? 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운 나이든 신들만 너를 찾아 나서는 걸 보니."
  덩어리가 쿡쿡 웃었습니다.
"천만에. 신들의 땅 너머에는 나하고 같은 녀석들이 엄청나게 많은걸. 여기 신들의 땅하고, 너희 신들이 만든 세상들을 빼고 나면 우주의 나머지 대부분은 우리들이 꽉 매우고 있지. 우리는 아주 흔하기는 하지만, 언젠가 멋진 세상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래.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덜 심심할테니까 말야."
  아라는 한참동안 덩어리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럼, 넌 뭐지?"
"말했잖아, 나는 세상의 재료라고."
"아니 아니, 그 얘기가 아니야. 벌들은 꿀로 달콤한 차를 만들지만 꿀을 차 재료라고 하지는 않잖아? 너는 뭐라고 부르니?"
  덩어리는 약간 으쓱대는 듯이 말했습니다.
"너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은 '없음'이라고 해." "'없음'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니?"
"으음, 그건 우주의 가장 심오한 비밀 중 하나라고. 학교에서 좀 더 배우면 알 수 있을껄. 그런데 너는 학교에 안 가니?"
  학교 얘기가 나오자 아라는 얼른 말을 돌렸습니다.
"오늘은 안 가도 괜찮을거야, 아마. 어제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너희들은 신들의 땅 너머에만 있다고 했잖아."
"에- 나는 사실 세상이 될 뻔 했어. 막 신들의 땅을 떠난 어떤 젊은 신이 처음 세상을 만드려고 할 때 너무 흥분해서 좀 실수를 했지. 우리들을 푹 떠내서 반죽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세게 휘저은 거야. 그바람에 나는 세상의 그릇에서 튀어나와서 우주를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어."
  아라는 덩어리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습니다.
"음- 그렇다면 너는 세상이 되고 싶겠구나?"
"그래."
"그러면 내가 너로 세상을 만들어도 될까?"
"어- 난 좀 너무 작기는 한데. 그래도 처음 만드는 세상으로는 작은 것 부터 시작해도 좋겠지."
  아라는 당장에라도 세상을 만들기 시작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학교에서 좀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나면, 그 때 너로 세상을 만들어 줄게."
"그래, 무작정 만드는 것보다는 그러는 게 좋을거야."

  한번이라도 뭔가 비밀을 가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비밀이 옷 속에 들어간 털처럼 얼마나 간질간질한지 알 겁니다. 아라는 친구들 앞에서 세상의 재료가 뭔지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지도도 제대로 못그리는 녀석들도 세상을 만들겠다고 당장 뛰어나가려고 들 게 뻔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마구잡이로 만들면 거기에 사는 동물들이나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할까요? 아라는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비밀을 알긴 했지만 좀더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아직도 시냇물과 돌들의 합창소리를 잘 만들지 못하고, 숲이 너무 빽빽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라는 처음으로 만드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밀을 말하고 싶은 것만큼이나 당장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도 참고, 대신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학교에서 나이든 신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라가 이렇게 변하자 선생님들도 놀라고 친구들도 놀랐습니다. 아라가 제출한 산맥 모형은 만점을 받았습니다. 여태까지 아라는 해안선 그리기만 열심히 하고 산맥 모형은 대강대강 만들었는데, 선생님은 아라가 새로 만든 산맥 모형을 보고서 처음에는 다른 친구의 것인 줄 알았습니다. 아라는 어떻게 다섯 개의 달이 서로 충돌하는 일이 없이 세상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지 궤도를 정하는 아주 어려운 문제도 풀어냈습니다. 아라의 친구들 중에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던 친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달들이 튕겨나가거나 한꺼번에 다섯개가 뜨기가 일쑤였죠. 아라가 평소처럼 수업시간에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 딴 생각을 하고있는 거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아라에게 새들의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습니다. 아라가 새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와 함께 지저귀고 떠나려 하지 않는 바람에 그 날의 다른 수업들은 모두 새들의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라가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자 모두 놀랐죠. 그렇지만 가장 놀란 것은 아라 자신이었습니다. 아라도 자기가 열심히 하면 이렇게 잘 해낼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내주는 문제나 숙제들을 척척 풀어내자 아라는 점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아라의 속에서 비밀은 더 크게 자라났습니다. 갓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의 솜털이나 막 씨앗에서 돋아난 새싹 같던 비밀은 어느새 혼자 날 수 있는 젊은 새의 깃털이나 제법 두 팔을 벌리고 자라난 이파리처럼 커졌습니다. 바람이 부드럽게 나부끼면서 나른한 봄날의 꽃가루가 간질이듯, 아라는 아무래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충분히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다그쳐도 소용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직 산의 바로 옆에 절벽을 만드는 것도 아주 능숙하지는 못하고, 달을 다섯 개 늘어 놓을 수는 있어도 해 두 개를 늘어 놓는 법도 모르고, 물방울들이 밀려들어가는 파도 끝에서 추는 춤과 모래알 사이를 파고 드는 물고기의 아가미에서 추는 춤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도 비밀은 자꾸만 아라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숙제는 너가 제일 잘했잖아? 문제들도 충분히 풀 수 있었다구! 못할 이유가 뭐가 있담? 너가 그렇게 실력이 모자라도 괜찮아. 조금만 하는 거면 별 문제 없을 거야. 누구나 다 처음 하는 일은 서투르기 마련이라고 선생님들도 말씀하셨어. 연습하는 셈 치고 살짝만 만들어 보면, 그 다음에는 더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어?

  결국 아라는 자기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무 어려운 세상을 만드려고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거야. 누가 처음부터 온 하늘에 보석같은 별들이 가득 박혀있는 세상을 만들까? 안 보이는 땅 속에서 조심스럽게 불그스레한 용암 빛에 비춰 가면서 연습하고 나서, 그 다음에 모두가 다 올려다 볼 수 있는 하늘에다가 별을 박아 넣는 거지. 해 두 개를 늘어 놓는 법을 모르면 하나만 띄워 놓으면 되지 뭐. 어렵게 달 여러 개 만들거나 할 거 없이 그냥 하루에 해 하나 달 하나 번갈아 뜨는 간단한 세상을 만들면 쉬울꺼야. 살아있는 것들도 너무 복잡하지 않게만 하면 되지, 간단한 세상에는 간단한 생각들하고 간단한 말들만 있으면 되는 거고. 바다가 땅을 전부 깎아 먹지 않게 하는 법이나 한 쪽에만 산이 왕창 몰려 있게 만드는 게 힘들면 일단은 적당하게 만들어 보는 거야. 정말 만들고 싶은 세상은 간단하게 연습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더 잘 만들어지겠지. 아무려면 이제 겨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애들이나 배우는 것도 못 만들겠어?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좀 참고 쉽게 만들자구. 시험삼아서 만든 세상을 선생님들한테 보이고 어디 어디를 고쳐야 할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을지 배울 수도 있을테고. 혹시 아주 잘 되면 선생님들도 내 솜씨를 인정해 주고 더 일찍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줄꺼야!

  그래서 아라는 입이 두 개인 동물들이 극광의 선율에 맞추어서 부를 수 있는 36음계를 만드는 수업이 끝난 다음에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자기 만의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 동안 바닷가에 가게 되면 더 세상을 만들고 싶어질까봐 일부러 가지 않았었지요. 덩어리가 아라를 보고 반가워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 어때, 그 동안 세상을 만드는 법은 많이 배운 거야?"
"빨리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지. 아마 우리 반에서는 이제 내가 제일 잘 할 껄."
  하고 아라가 으쓱거렸습니다. 선생님들은 세상을 만드는 신들은 항상 겸손하고 자신이 한 일을 뽐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열심히 공부한 건 사실이니까요.
"우와, 대단한데. 그러면 바늘 위에 올라가는 도시들이 가득한 세상이나 세 가지 말을 쓰는 민족들이 사는 세상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어?"
"으응, 어- 그 쯤이야. 말 만드는 법 배우는 수업 시간에 숙제로 만들어간 말만 해도 열가지가 넘는걸."
  사실 한 민족이 여러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민달팽이들의 냄새 언어나 구름끼리 모양을 바꾸어 가면서 말하는 것을 만들었지만 아라는 대충 넘어갔습니다. 속으로는 정 그러면 세 가지 말을 쓰는 민족은 만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요. 게다가 바늘 위에 올라갈 만큼 작은 도시들이라니, 그런 것도 별로 아라가 관심이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아라는 몸을 쭉 펴서 뒤로 젖히고 나이든 신들이 하던 것처럼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했습니다.  "아직 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운 건 아니지만, 난 굉장히 많은 걸 알아. 여덟 개의 손에 여덟 개의 손가락이 달린 거미들이 그물을 잣는 여덟가지 방법들도 알고, 화산이 폭발할 때 어떤 약초로 뜨거운 속을 달래줄 수 있는지도 알아. 물론 해안선의 모양에 따라서 파도가 찰랑이는 골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지는 줄도 알지. 노래하는 별들은, 음, 완벽하게 조율할 수는 있지만 약간 소리가 작긴 해. 그래도 대신 구름 너머에서부터 그 노래를 전해줄 수 있는 새들을 만들 수도 있다구."
  덩어리는 열심히 아라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알고 있으면 간단한 세상 쯤은 만들 수 있겠구나?"
  그게 바로 아라가 바라는 말이었지만 아라는 좋아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래, 학교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애들도 아닌데, 웬만한 애들은 다 간단한 세상은 만들 수 있을꺼야. 거기다 나 같은 경우는 다른 애들 보다 훨씬 더 잘 하니까. 그런데도 나이든 신들은 세상을 만드는 재료가 뭔지 가르쳐 주지 않고 학교를 끝내고 난 다음에야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있잖아."
"그거 참 불공평한 일이네. 너를 갓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애 처럼 취급하다니."
  덩어리는 분개한 듯이 말하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덩어리가 다시 말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나로 아주 아주 간단한 세상을 만들어 보지 않을래? 조금만 연습해 보는 거라면 아무 문제 없을거야."
"그래도 될까?"
"괜찮아, 나도 빨리 세상이 되고 싶은 걸."

  그래서 아라는 소매를 걷고서 덩어리로 세상을 만들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한가지 한가지씩만 배울 때하고는 달라서, 시작하기 전에 약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요. 학교에서 하던 거야 달만 따로 놓아도 되지만 세상을 만들 때는 전에 만든 별들의 지도도 같이 놓아야 하고 해에 이끌리는 꼬리별들도 별 사이에 부딫히지 않게 놓아야 합니다. 파도가 해안선을 조금씩 깎아내는 것만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라 파도를 타고 바람이 날아오르는 것도 생각해야 하고요. 너무 바람이 세면 갇혀서 빙빙 돌다가 엄청난 회오리 바람이 되어 버려서 하루에 절반은 파도가, 나머지 절반은 바람만 밀려 드는 곳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 배우기 시작한 내용은 아주 조그마한 변화도 전체적인 균형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으로도 세상 반대편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나요. 세상의 윤곽을 처음 잡는 일은 아주 신중해야 했습니다. 아라는 자기가 만들고 싶었던 바다와 땅이 번갈아 있는 세상은 조금 나중에 만들어야 겠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땅이 죄다 바닷물에 깎여 버리지 않게 하면서 그렇게 땅과 바다를 배치할 수가 없었거든요.
  아라가 망설이기만 하고 손을 대지 못하자,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덩어리가 재촉했습니다.
"자, 빨리 만들어봐!"
"그, 그래."
  하고 아라는 얼결에 덥썩 덩어리에 손을 집어 넣었습니다. 덩어리는 겉으로 보기에도 온갖 색깔이 아롱거렸지만 그 속의 촉감도 마찬가지로 온갖 것이 다 있었습니다. 아라의 손바닥에 꿀 같은 끈적한 느낌이 스쳐 지나가고 뒤이어 풀잎에서 살랑대는 바람 같은 상쾌한 느낌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더니 왼손 검지 손가락은 뾰족뾰족한 결정들에 찔린 것 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났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는 아기가 엄마 젖을 빨 때 꼬물거리고 혀를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났습니다.
"어- 제일 처음에 뭘 만들어야 하지?"
"모양을 잡아야 하니까 땅하고 하늘하고 바다를 갈라 놔야지."
"그렇지만 잘 보이질 않는걸."
  아라는 덩어리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빛을 만들어 봐. 그렇게 하면 뭐가 뭔지 분간 할 수 있을거야."
  덩어리가 조언했습니다. 아라는 덩어리의 말대로 손가락으로 덩어리를 휘저으면서 눈을 감고 빛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덩어리의 안에서 아롱아롱 거리는 움직임이 한층 강해지더니 온 덩어리가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라의 손 끝에서부터 갈래져 뻗어나온 빛이 덩어리 안의 모든 것과 부딫혀서 사방팔방으로 튀었고, 빛은 덩어리 안에서 맴돌며 구석구석 밝혔습니다. 아라는 그 빛 속에서 끝없이 비밀스러운 어둠과 신비로운 결정의 단면과 막 첫 숨을 들이쉬는 새싹과 심해 깊은 곳의 조가비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아라의 손에 들려 있는 덩어리 안에서 빛에 떠서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우와!"
  하고 덩어리가 숨막힌 듯이 말했습니다.
"멋지다! 빛의 느낌은 정말 굉장한걸!"
"그래, 나도 이렇게 멋질 줄은 몰랐어."
  하고 아라가 중얼거렸습니다. 빛의 간질간질한 촉감과 콧 속 가득히 감도는 향기와 사락거리는 소리와 입 안으로 퍼져 가는 맛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아라가 멍하게 서서 덩어리를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 그 안에서 회오리 치는 빛은 약간씩 모습이 변하며 덩어리 속에 떠도는 모든 것들을 휘저어 밀어냈습니다. 떠도는 거대한 보라색 수정의 성의 탑 너머로 짤깍거리는 바늘 다섯개 달린 시계가 윙윙 돌아갑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잔뿌리들이 손을 뻗어 파고 들 때, 현미경으로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운모들이 싸락거리며 뿌리의 그물에 얽혀 듭니다. 하늘로 솟구치는 폭포로 허공을 헤엄치는 날개 달린 물고기들이 뛰어들고, 폭포 속에는 파랗고 차가운 달이 떠 있어서 물은 달고 시원합니다. 아라는 정신없이 안을 떠도는 것들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게 세상의 가능성들이야."
  덩어리가 속삭였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들, 잠들어 있는 꿈들, 피어나지 않은 싹들이지.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정말 멋지다."
  아라는 손가락으로 맥박치는 심장처럼 뛰는 빛을 살짝 건드려보았습니다. 물결이 퍼져나가며 그 안에서 깜빡거리는 초록색 별들이 피어났다가 지며 쇠로 된 씨앗으로 변했습니다. 씨앗들이 우수수 손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이 따끔따끔해서 아라는 손을 움츠렸습니다. 쇠로 된 씨앗들은 반짝 반짝하는 무수한 불꽃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흔들리며 가라앉습니다. 그 때 그 너머에서 꿈꾸고 있는 아기가 서서히 떠서 다가왔습니다.
"날 닮았네."
  하고 아라가 중얼거렸습니다. 아라가 손을 내밀자 아기는 아라의 손가락 부근에서 잠시 떠돌면서 눈을 약간 떴다가 다시 감고 꿈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아라는 퍼득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막 만들어진 세상의 빛을 들여다 보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파도가 무릎까지 밀려 왔다가 물러나 발치까지만 밀려 오다가 다시 무릎에 닿을 시간이 지나도록 꼼짝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들의 땅에서 하루를 계산할 때는 바다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하루로 칩니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여기로 달려왔는데 꼬박 하루가 지나서 벌써 그 다음날의 첫번째 수업시간이 끝나고도 한참 지났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수업을 듣고 문제를 척척 풀어냈는데 갑자기 전처럼 돌아가면 다른 선생님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라가 말했습니다.
"어- 시간이 너무 지났네. 이제 가봐야 될 거 같아."
  덩어리는 약간 실망한 것 같았습니다.
"벌써?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빛만 만들어 놓고 그만두다니, 세상을 만드는 건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잘 들어가다가 갑자기 수업을 빠지면 선생님들이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거야. 거기다 오늘 배우는 것도 아주 중요한 거라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세상을 만들 때 실수 할지도 몰라."
"뭘 배우는데?"
"세상의 꼭대기에 얼음을 쌓아서 바다의 높이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법. 실수해버리면 정성껏 만든 산이 전부다 바닷물에 잠겨버리겠지."
  덩어리는 아쉬워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빨리 세상이 되고 싶긴 하지만, 제대로 된 세상이 되고 싶으니까."
"미안해. 좀 더 배운 다음에 정말 멋진 세상으로 만들어줄께."
  아라는 덩어리에게 인사하고 얼른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아라는 생각했던 것처럼 바로 덩어리에게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새로운 과목을 가르치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업은 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신들이 처음으로 세상을 만드려다가 저지른 실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난히 해를 좋아했던 신이 열 개의 해가 항상 떠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을 살게했더니, 너무 뜨거워서 땅이 말라 버려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어느 신은 들을 뛰노는 동물들로 가득 채우고 아주 잘 자라는 풀들을 자라나게 했지만 너무 동물들이 많은 나머지 먹을 풀을 다 짓밟아버려서 결국에는 동물들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아주 조금 축을 잘못 놓는 바람에 매일 같이 별들이 땅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세상도 있다고 했고, 새들이 앉아서 쉴 곳을 깜빡하고 만들지 않아 항상 날아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라가 뜨끔한 이야기는 자기처럼 바닷가를 좋아하던 신이 만든 세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나서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그 젊은 신은 너무 기쁜 나머지 꼼꼼하게 세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항상 마음 속으로 그리던 드넓은 바다와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바닷가를 만들 꿈에 들떠서 허겁지겁 세상의 재료를 반죽하고 세상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나이든 신들에게 너무 성격이 급하다고 꾸중을 듣기는 했지만 학교 다닐 적에 아주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면서도 별다른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보통 다른 신들이 처음 세상을 만들 때보다 거의 두 배는 빠르게 세상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완성되고 나서 조금 지나자 사소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파도가 너무 커서 해변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서 땅이 작아지고 바다가 줄어들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커다란 파도가 철썩거리는 것을 보기 좋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바닷가도 없어지고 바다가 얕아지니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파도를 줄이고 얕아진 바다의 흙을 긁어모아 다른 곳에 쌓아 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산이 너무 높았서 바람의 흐름이 막혀 자꾸 큰 비가 내리고 애써 쌓아올린 흙이 도로 바다로 씻겨갔습니다. 뒤늦게 너무 땅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땅을 떼어내 달을 하나 더 만들었더니 조수의 차가 심해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신이 어떻게 좀 조수의 차를 줄여볼까 하고 달의 궤도를 조종하느라고 골똘해있는 동안 마무리가 잘 되지 않은 땅을 떼어낸 곳이 도로 터져서 엄청나게 큰 화산이 분화하고 말았습니다. 그 열기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구름처럼 수증기가 치솟았고,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렸습니다. 세상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수증기가 더 많이 생기고 구름이 두꺼워지면서 온도가 더 올라갔습니다. 결국 그 세상은 푹푹 찌는 아주 뜨거운 수증기와 구름들로만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땅바닥에 딱 붙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껍질이 두꺼운 굴이나 증기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유령같은 해파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 주고 나서 선생님은 마치 아라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일은 아주 힘들고 또 모든 것을 다 생각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신들도 여러분이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세상을 만들 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배웠지요. 그런데도 약간의 잘못이 처음으로 만드는 세상을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세상을 망치는 일이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나 동물, 식물들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일들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세상을 만드는 것이 여러분의 책임인 것처럼, 세상을 망치는 것도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절대로 '여러 번 연습하면 더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만들 때마다 이게 자신이 만드는 최고의 세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제껏 모든 신들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세요."
  이 말이 끝나고 선생님의 눈이 한번 더 아라와 마주치자 아라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습니다. 물론 아라의 바닷가에 있는 비밀에 관해서 선생님이 알고 계실리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더 마음이 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라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자신만의 바닷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세상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덩어리 안에 손을 집어 넣었을 때의 느낌들, 처음으로 빛을 만들어내고 난 다음의 느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안을 떠돌고 있는 세상의 가능성들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 느낌들이 한시라도 빨리 세상을 만들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서두르다가 실수해서 세상을 망쳐버린 신들을 생각하면 참아야겠지요. 자기가 만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일부러 괴롭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시 바닷가로 돌아가면 덩어리가 빨리 자기를 세상으로 만들어달라고 조를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 먼저 덩어리 안의 빛을 들여다보면 도저히 스스로 참아낼 수 없을거에요. 아라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한동안은 자신만의 바닷가로 돌아가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처럼 가만히 바닷가에 앉아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물결에 발을 담그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학교의 도서관에 가서 오래전에 만들어진 세상들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공부에 도움도 되었고, 세상을 만드는데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다른 신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루바삐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의 책이 모여 있는 도서관은 항상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오래된 책냄새가 나는 끝도 없이 솟아 있는 서가들 사이로 나른하게 햇살이 비쳐들면 작은 먼지들만 그 속을 떠다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보통 신들도 책을 아주 많이 읽지는 않거든요. 어린 신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해서 견디지 못하니 수업만 끝나면 밖으로 나가 놀기 바쁜데 책 읽을 틈이 없지요. 나이든 신들은 새로 세상을 만들고 전에 만든 세상들을 손질하느라 너무 바빠서 책 읽을 틈이 없답니다. 쉬는 날이면 한가롭게 앉아서 쉬고 싶어하지 머리아프게 세상만들기에 관한 책을 읽는 건 질색입니다. 그러면서 어린 신들한테는 책 읽으라고 잔소리 하는 것은 잊지 않습니다. 도서관을 지키는 늙은 사서 선생님는 오래전에 아주 훌륭한 세상들을 몇십개나 만들고 신들의 땅으로 돌아와 어린 신들을 가르치다가 이제는 온 세상에서 모여든 책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신이었습니다. 언제나 도서관에만 있고 학교에 나오셔서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생님들도 존경하는 분이셨지요. 사서 선생님은 아라가 날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가끔 아라에게 좋은 책들을 권해주기도 했고 또 젊은 시절에 만들었던 세상들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들도 많았고 듣는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세상의 비밀들도 많이 알려 주셨지요. 덕분에 아라는 덩어리와 만들다만 세상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서 선생님은 아라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건 말하자면 어항과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서로 합쳐지고, 색이 변하고, 차곡차곡 쌓이고,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는 결정들이 가득했습니다.
"이게 뭐인 것 같니?"
  사서 선생님이 물었을 때 아라는 그 감촉이 처음 빛을 만든 세상과 비슷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모른다고만 했죠.
"이건 아주 작은 세상이란다. 반짝거리는 결정들과 보석들, 광물들의 세상이야."
"안에 있는 것들이 움직이는 모양이 굉장하네요. 이걸 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사서 선생님은 빙긋 웃었습니다.
"아니, 나도 이 다음의 모양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안을 들여다보면 어떤 것이 나올지 미리 알 수 있겠지만, 책상 위에다 두고 가끔씩 보고 처음 보는 모양을 볼 때 즐겁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오늘 네게 이야기해 줄 세상의 비밀이 바로 이거란다. 신들은 모든 걸 다 내다보고 세상을 만드려고 노력하지만, 신들이 항상 손을 대고 있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있어."
  하고 사서 선생님은 부드럽게 작은 세상을 어루만졌습니다.
"이 정도로 작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만큼 재료를 떼어낸 다음에, 거기다가 전에 만들었던 다른 세상에서 나온 결정들을 한두 조각 떨어뜨렸지. 그렇게 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아라는 숨을 죽이고 결정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 보았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계속 말했습니다.
"막 세상을 만드려는 젊은 신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해서 혹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으면 어떡하나, 자칫해서 세상을 망치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고민하곤 하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학교에서는 너희들에게 신으로 책임감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에 세상이 스스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말해주지 않아. 그렇지만 간혹 신이 실수를 하더라도 세상이 스스로 그를 넘어설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신비로운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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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전에 쓰기 시작해서 비교적 최근에 완성한 글입니다. 마무리가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은 쓴 대로...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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