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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탈옥 (1)

2009.08.04 15:5108.04

댓글은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0_0;; 사실 읽어주시는 것 만해도 감사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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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 일어날 때까지 30분 이상 협상을 하는것이 보편적이다.



좀더 누워 있을까, 아니면 더 버티고 있을까. 이러면서.



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넘어갈때 충분히 준비 시간을 주는 편이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다음에 숨 가쁘게 기계적으로 아침을 갖고,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선 다음 모노레일에 몸을 던진 뒤에야 "아, 일어났구나." 자각하는건 정말 불쾌하다.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의식이란 수영장에 몸을 던지는 그 기분.



지금 내가 감옥에 있다고 한데서 그런 취향이 쉽사리 바뀔리는 없다.



더군다나 말이 감옥이지 깔끔한게 차라리 농가보다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독방이라서 잠도 편하게 잘 수 있고. 가을이라서 날씨는 선선하고,

여름에 그렇게 들끓던 각다귀도 이젠 한풀 꺾인 시절이다.

좋지 아니한가? 그냥 옵션 관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간에 나는 감옥에 있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제 벌어진 일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사건의 전모는 대략 이랬다. 나는 일종의 입국자 심사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리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내가 무슨 국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유는 옷 때문이었던것 같다. 하긴 이런 실크가 구하기 어렵긴 하지.

손짓 발짓과, 약간의 현지어를 동원한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를 방문했냐는 말에 내 입에서 코리아라고는 말이 나오는 그 순간,

담당 관리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내뱉었다. "꺼어리?"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군인 둘에게 무어라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렇게 연행되었고, 감옥으로 직행했다. 아니 대체 왜.







설마 코리아가 이 곳 말로 엄청난 욕은 아니었을까.

"꺼어리"인가가 "f--"같은 욕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잡아가둘 정도는 아니다



코리아 하면서 내가 한 제스춰가 무엇이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만지는 것이 바바리안의 행동일지는 모르나, 잡아 가둘만큼 건방진건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말 한마디, 제스춰 하나에 잡아 가둔다고?



밀수품목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호신용 전기충격기가 들켰을리도 없고. 다른 전자기기라고 해도 대단할 것이 못되었다.



상황을 살펴 보았을 때, 신성모독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런 일이 아니면 잡아 가둘리가 없잖아.



정말 신성모독인 것인가. 중동의 어떤 나라처럼 참수 당하는건 아닐까. 머리 속에서 화형을 당한  후 무신론자의 성인이 된 나를 그려보았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고 성자로 추대되진 않는다. 제기랄. 무신론자는 그것이 단점이었다.



슬슬 머리가 복잡해 졌다. 의식의 세계로 진입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난 눈을 제대로 떴다.

다행히도 옷도, 머리도 모두 무사했다. 간밤에 깨지 않았던 것도 이 이유였던 것 같았다.



갑자기 아무 음악이나 듣고 싶어졌다. Queen이나 MIKA, 자우림 같은 것.

하지만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나타나는 "배터리가 부족합니다."가 떴다.

아쉬운 마음에 아날로그로 몇 번 흥얼거렸다.



"신경 쓰지마요. 그렇고 그런 얘기들. 골치 아픈 일은. 그냥 잊어버려요."




병사가 아침상을 들고 왔다. 뭐라고 지껄이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먹으란 소리였을 것이다.

밥과 나물, 근처에서 잡아온 걸로 보이는 생선, 고기 한 그릇. 매운 것은 눈 씻고 찾아 볼수 없는게 유감이었다. 독이라도 들지 않았을까? 법의학에 안목 하나 없지만 안전한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수저를 들었다. 투박한 느낌의 수저였다. 그렇게 대충 밥을 비웠다.




음악이 다시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자우림의 음악도 직선거리로 6~700광년 떨어져 있었다. 이 곳에선 이런 음악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퍼졌다.






백수로 살다 1년 반 만에 들어간 외국계 기업. 약어 설명도 없이 T.C.A. 대학 시절 주워들은 광합성 TCA 회로 외에는 별다른 게 연상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입사 때 출장 전담 직원으로 뽑힌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도 못했다. 구글 뺨치는 훌륭한 복지에만 정신이 팔려있어서 더 관심이 없었다. 출장 직원 6명이 원인 불명으로 실종되는 사건만 아니었어도 난 그렇게 계속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애인과 결혼을 앞두게 되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 나는 별 생각 없이 전과를 지원했고, 별 무리 없이 출장 전담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실종 직원이 전체 직원의 절반을 넘게 된 어느 날.

군번이 한참 아래인 나에게도 드디어 수색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니 여기 잡혀 있는 사람이 어쩌면 나만이 아니지 않을까. 나처럼 모두 붙잡혀서 돌아오지 못하는게 아닐까. 나무로 허접하게 되어있는 침상에 다시 누웠다. 그런데 대체 왜 투옥 된 걸까. 별별 상상이 다 떠올랐지만, 확실하게 고민을 끊어주는 오컴의 면도날은 없었다.




봉해졌던 문이 열렸다.





병사가 다시 들어왔지만, 이번엔 별말이 없었다.

대신 옆에 여자가 하나 서있었다. 평범한 여자 같지는 않았다.

이 곳에 와서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아니어서 이쪽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이 동네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혹시 회사 수색 직원이 아닐까?



그녀도 나와 눈빛이 똑같았다. 과연. 침묵이 잠시 흘렀다.

초조와 기쁨, 그리고 약간의 불길한 느낌. 온갖 생각이 섞여들면서 머리 속에 쓸데 없는 노래 가사가 스쳐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맙소사. 죄다 똑같구나. 아아아.'



그녀는 나를 쳐다보는걸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병사에게 몇마디 뭐라고 시켰다.

(물론 시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쳇, 좋다 말았네.





또 아침이다. 그 밥의 그 나물이긴 하지만, 영양분을 얻는데 부족한건 없었다.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다. 감옥 투어 삼일째, 좀 나가고 싶었다.




밥먹던 숟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로 땅을 팔까 싶었다. 땅도 푸석푸석 해서 파기 쉬울지는 모르지만, 쇼생크 탈출도 아니고 그럴 생각 없었다. 더구나 최장 체류기간은 겨우 한 달이었다. 한 달이 지나면 나도 선임자들 처럼 ‘실종자’로 분류 될 것이다. 돌아갈 길도 막히니까 빼도박도 할 수 없다.




다시 위병이 나를 불러냈다. 이번에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나갔다.

감옥을 나오긴 나오게 된것이다. 자의가 아니라서 그렇지.










“이름은?”




갑자기 내 귀에 통역 물고기라도 박힌 것은 아니었다.

나와 어제 그 여자는 필담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1300년대의 인텔리가 한문을 못할 리가 없다.




시공(발음은 같지만 시간과 공간의 “時空”이 아니라 시간 구멍 “時孔”이다. 영어로 하면 Time Hole이었던가.)이란 것이 발견된 것은 대략 은하 기원 1130년대의 일이다. 드넓은 은하에 100억 남짓한 인간들이 살다보니 거짓말 좀 보태서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 태양계 하나의 물질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고 해도 수천대가 먹고 살 수있던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어떤 기크가 행성 두 개 잡아먹으면서 한 실험의 결과물이 시공이었다.




친구들한테 재밋는 게 있으니 같이 연구라도 하자고 했다든가, 하다못해 제대로된 연구노트이라도 남겼더라면 더 훌륭한 게 나왔으련만. 이 작자는 평생 온시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유람이나 하다가 시간선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 그도 변명할 건 있었을 것이다. 은하 기원 1159년에 빌어먹을 초신성 폭발이 일어난 바람에 친구고 뭐고 다 죽어버렸으니까. 그렇게 밀키웨이 은하의 한 청년기 문명은 박살나버렸다. 아직 인류의 능력이 은하 간 항해를 할 정도의 재간은 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알면서도 앉아서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그녀는 혼자 과거로 도망쳤다.




그렇다고 이 아가씨가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살다 죽은 건 아니었다. 온 시대를 돌아다니면서 사귄 수많은 애인 중에 하나가 우연히 시공 조작 기술을 습득한 것이었다.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니 TCA가 몇 년 정도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애인의 삶을 기준으로 적어도 50년은 넘지 않았을까 싶다. 21세기 본부에 파견된 현재 사장이 인간 하루주기 기준으로 40년을 해먹었다니까, 21세기 본부는 초기에 설립된 셈이다. 어디까지나 추정값이지만.




21세기 본부 사람들은 이 아줌마를 ‘마더’라고 하는데, 초국적을 넘어선 초시공적 기업인  이곳의 특성상 ‘성모’라고 부르는 자도 있고 ‘관음’, ‘페리스’, '가이아', ‘날으는 미트볼 스파게티’ 등등 제각각이다. 여하간 이런 생각이 나온건 지금 필담하고 있는 여자랑 이 아줌마랑 왠지 닮은 것 같아서였다.







“두보”




여자가 약간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조숙한 이 시대의 사람들을 감안하면 십대 후반이었다. 키는 약간 작고 통통한 편이었다. 그 시대 기준 미인상.




“시성 두보와 연관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 성은 두요. 이름은 보. 자는 잡남.

하도 짓기 귀찮아서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두보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두보가 700년대 후반 사람이다. 지금은 1300년대.

대략 600년이니까 20대 손 정도 나온다.




“내가 두보의 22대손이다.”




“어쩌다가 시성의 자손이 세작일이나 하게 되었는가?”




그렇구나. 세작인 줄 알고 잡힌거구나.




“풍류객일 뿐이다. 선조의 이름을 더럽힐 생각은 없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면 내가 정말 두보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든다.

여자가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글을 쓴다. 한 열 몇 살 정도 되었을 텐데.




“속이려 들지마라.

그렇다면 이런 전란의 땅에 유람을 오는 멍청한 선비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세상에. 유람객인건 못 믿고, 두보의 20대손인건 믿는다니.




“전란의 땅이라니? 벗이 고려 땅이 둘러보기 좋다하여 홀로 나선 것이다.”




때는 1380년대.

몽골과 왜구, 홍건적의 침략이 적어 “안전시간대”로 분류되는 시대가 이 때였다.

이성계랑 최영이 다 때려잡아서 한동안 잠잠한 때인데 무슨 전란의 땅인가.

여자는 한참을 뚫어져라 날 쳐다보더니 몇자 썼다.




“잘못 왔다. 여기는 고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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