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까마귀의 아이-9

2010.07.02 17:2507.02

광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영주관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아무리 창문을 꼭꼭 걸어 잠가도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만큼은 막지 못했다.

“마가레트! 마가레트!”

엘켄은 쉰 목소리로 마가레트를 불러댔지만 대답하는 소리가 없었다. 엘켄은 서재에서 나섰다. 복도는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금장촛대를 들고 달아나는 하인의 등이 보였다. 엘켄은 검을 들고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영주님?”
마침내 엘켄에게 덜미가 잡힌 하인은 와들와들 떨면서 촛대를 내려놓았다.

“일레프는 어디에 있느냐?”
“일레프는 어제 저녁에 역병으로 숨졌습니다요.”
“마가레트는?“
“그녀도 어젯밤에...”

하인은 떨리는 어조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엘켄은 하인을 던지듯이 놓아주었다. 하인은 엉금엉금 네발로 기어서 달아났다.

“어째서 이런 일이. 엘이시여, 당신의 종을 진정코 버릴 작정이십니까?”
엘켄은 복도를 걸어갔다. 고급 도자기가 산산이 조각난 채 바닥에 흩어져있었고, 옷가지와 시트는 넝마처럼 널려 있었다. 집안을 밝히던 황금촛대도 힘없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엘,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엘켄은 흐느껴 울었다. 지금의 엘켄은 삼십여년전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했다고. 헌금도 꼬박 꼬박 냈고, 단식과 기도도 그친 적이 없었어.”
엘켄은 울면서 영주관을 벗어났다.

“그래, 이 모든 건 내가 에리시나를 도망가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그래 그래서 그분이 노하신거야. 에리시나를 찾아서 바쳐야 해.”
엘켄은 영지를 걸어갔다. 그의 옆에는 한사람의 수행원도 없었다.

“에리시나는 분명 그라냐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마녀의 집에 갔을 거야.”
엘켄은 중얼거렸다. 엘켄의 손에는 한자루의 검이 단단히 들려 있었다.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직도 마녀색출작업이 벌어지고 있는지 젊은 여자들이 굴비처럼 쇠사슬에 엮여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아낙이 현관 앞에 주저앉아 멍한 시선을 허공에 보내고 있었다. 아낙의 손에 들린 아이는 인형처럼 길게 흰 목을 바닥으로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람?”

엘켄은 길 한가운데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신부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그람은 여전히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엘켄은 그람의 어깨를 짚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그람은 숨이 멎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시체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엘켄은 그람을 내버려두고 전진했다. 그라이아이의 집은 영지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외곽쪽으로 갈수록 빈집이 늘어갔다. 마침내 엘켄은 그라이아이의 짚 앞에 멈춰섰다. 다 쓰러져가는 초옥 안에서 그라이아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엘켄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라이아이는 전에 보았던 그대로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라이아이, 에리시나는 어디에 숨겼나!”
엘켄은 소리쳤다. 뜨개질을 하던 그라이아이는 한쪽 눈을 굴리며 일어섰다.

“뉘시오?”
“에리시나는 어디에 숨겼느냐니까!”

엘켄은 그라이아이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그라이아이의 갈색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라이이아이의 입술이 쭈글쭈글한 피부를 밀어내며 웃었다.

“에리시나가 도망쳤나보군?”

엘켄은 잡고 있던 그라이아이의 어깨를 놓았다. 평상시의 그라이아이 답지 않았다. 지금 엘켄 앞에 서있는 그라이아이는 언제나 반쯤 정신을 놓고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 노파가 아니었다. 그라이아이는 구부정한 허리를 쭉펴고 엘켄을 쏘아보았다.

“불쌍한 작자 같으니. 결국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구먼.”
그라이아이는 이전의 바람 새는 목소리가 아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미친 게 아니었어?”
엘켄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이 정상이고, 정상인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법이지.”
그라이아이는 현학적인 말을 하면서 엘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당장 에리시나를 내놔. 그애를 죽여야만 역병이 멈춘다고.”
엘켄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그라이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엘켄은 검을 들어올렸다.

“어서 간곳을 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난 그애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알아도 알려주고 싶지 않고.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애는 네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났다는 것 뿐이야.”
“이이...”

엘켄은 검을 휘둘렀다. 검은 그라이아이를 스쳐지나가 선반에 있던 기름병을 깨트렸다. 올리브유가 바닥을 적시며 흘렀다.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네가 갖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모르겠어, 엘켄?”
“마녀. 네가 이 마을전체에 역병이 돌게 저주했지?”
엘켄은 검을 쥔 채 바들바들 떨면서 물었다. 그라이아이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저주라고? 진짜 저주가 뭔지 너는 아직도 여태 모르는가 보군. 엘켄, 거울을 봐.
거울이 없으면 물에라도 얼굴을 비쳐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엘켄이 반문하자 그라이아이는 작은 거울조각을 내밀었다. 거울에는 회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엘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한번 주위를 둘러보시지 그래? 하다 못해 눈앞의 나를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니야? 자, 보다시피 나는 나이를 먹어 잔뜩 쪼그라든 할멈이라고.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젊은거지?”
엘켄은 뒷걸음질쳤다.

“너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죽거나 나이가 들었지. 그게 정상이라고.
그날, 내가 마녀로 몰리던 날을 기억해? 난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네놈이  나를 마녀로 고발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 내가 아이를 가지니까 문제가 커질 것 같아서 그렇게 했던 거지. 그날, 나는 몰래 네게 저주를 걸었지. 네게서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도록 말이야.“

“내가 너를 고발했던 건...네가 나한테 저주를 걸어서였어. 네가 저주를 해서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엘켄의 말에 그라이아이는 입술을 일그러트리고 웃었다.

“불쌍한 사람.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저주 같은 건 없어.”
“그라냐...그래,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은 거야.”
“그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어. 겨우 네다섯살 때 헤어졌는데도, 모두 기억하고 있더군. 사람들이 강제로 떼어놓던 것까지도. 그애는 남편을 잃고 나서 내가 그리워 찾아온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

그라이아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애가 죽은 건 너 때문이야.”
“아니. 바로 너 때문이야.”

그라이아이는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가락을 들어 엘켄을 가리켰다. 엘켄은 검을 휘둘렀다. 촛대가 넘어졌다. 순식간에 마룻바닥을 적시고 있는 기름에 불이 붙었다.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그라이아이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엘켄은 뒷걸음질쳐 집을 빠져나왔다. 벌써 불은 기둥을 타고 지붕까지 뻗어오르고 있었다.

“으흐으윽.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엘켄은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바닥을 짚은 손위로 떨어져내렸다. 손등에 눈물의 온기가 닿자마자 유리에 금이 가는 것처럼 자잘한 주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엘켄이 고개를 들었을 때,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위로 희끗한 백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정신 없이 예배당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된 셈인지, 나는 하루가 다 가도록 마을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나는 영주관 헛간에 숨어서 절망적인 시선으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다음날 아침, 내가 감옥에서 빠져나간 사실이 알려졌는지, 영지에는 한떼의 사람들이 농기구와 낫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헛간 다락에서 겁에 질린 시선으로 개미떼 같은 행렬을 바라보았다.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물통에 얼굴을 박고 꾸역꾸역 물을 마셨던 일과 달아오른 철판을 걸어가도록 강요받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토악질을 했다. 죽어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다락에 앉아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헛간에서 끌어내는 환영에 시달렸다. 그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낮이 되었다. 어디선가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저멀리 광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엄마가 불길에 타오르는 광경이 떠올랐다.

다음순간, 상상속의 화형대에는 엄마대신 내가 매달려 있었다. 매캐한 연기로 눈의 혈관이 팽창하고 폐와 목이 어린 새의 창자처럼 찢겨나갈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불길이 장작대신 나를 연료삼아 타오를 것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그때 머리 위에 있던 천창에서 한줄기 빛이 새어들어왔다.

“벌써 정오인가?”
나는 중얼거렸다. 이시간 때면 항상 천창에서 빛이 비추고 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나는 정령들이 말해주었던 약이 생각났다. 한 방울이라도 들이키기만 하면 온몸의 피가 굳어서 죽어버리고 만다 던 독약이었다. 나는 햇빛이 비추고 있는 마룻바닥을 두드려보았다. 텅빈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마루를 덮고 있던 판자를 들춰냈다. 나는 그곳에 손을 넣어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코르크마개로 단단히 밀봉한 유리병에는 마녀처럼 검은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 순간에는 죽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서 달아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숨에 액체를 들이켰다. 정령들의 말대로 고통은 없었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몸이 무거워졌다. 나는 마룻바닥에 모로 누웠다. 점차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내가 갇혀 있던 헛간을 빠져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영지의 전체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영지의 중앙에 위치한 광장에서는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화의 불꽃을! 정화의 불을!”

슈이드가 목쉰 소리로 쉴 새 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광장에 밀집해 있는 군중들의 입에서도 똑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의 여자들이 연기로 목이 막힐 때까지 화형대위에서 소리질렀다. 여자들의 비명은 슈이드의 외침에 후렴구처럼 따라 울렸다.

마을거리에서는 한떼의 약탈꾼들이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한 이층건물에서는 열린 창문으로 허름한 자루에 금박을 입힌 옷과 금화따위를 분주하게 주워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에서는 상아로 만든 조각상을 가지고 두 사람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고 있었다. 급기야는 한 남자가 단검을 꺼내 상대방의 몸을 찔렀다. 상대가 쓰러진 후에도 남자는 미친 듯이 단검을 찔러댔다. 거리 밖에서는 건장한 남자가 버둥거리는 여자를 어깨에 걸치고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람의 정령이 내 옆에 있었다. 정령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서슴없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더 높이 날아올랐다. 어느새 우리 앞에는 수천수만의 꽃이 피어있는 들판이 펼쳐졌다. 보석을 하나하나 조각해놓는다고 해도 이 광경에 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슈이드도, 엘켄영주도 보이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 너머에서는 투명한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돌면서 춤추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들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나도 얼른 그들 틈에 끼고 싶었다.

‘여기서 이제부터 함께 사는 거야?’
나는 실프에게 물었다. 실프의 투명한 얼굴이 슬프게 빛났다.

‘왜 그래?’

실프는 대답 없이 내 손을 놓았다. 그 순간, 강하고 완고한 손길이 나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나는 지상을 향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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