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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까마귀의 아이-8

2010.07.02 17:2207.02

토린마을에 소각명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영주관 전체에 돌았다. 유진은 방에 몰래 숨어 울었다. 아직 취침시간은 멀었지만 지금의 유진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토린마을에는 유진의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었다. 마을이 폐쇄되었을때에는 살아있을거라는 가냘픈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차라리 병에 걸려서 마을이 불에 탈 때에는 세 사람모두 숨이 끊어져있었기를, 그래서 고통이 덜했기를. 유진이 바랄 수 있는 것의 한계였다. 유진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며 울었다. 침대 시트가 금새 축축해졌다. 유진은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물로 얼룩져야할 시트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피는 바로 유진 자신의 입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유진은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때마침 방에 들어온 그레타가 비명을 질러댔다.

일레프는 갑작스러운 마가레트의 전갈을 받고 하녀들이 일하는 건물로 걸어갔다. 일레프가 하녀들을 총괄하는 마가레트의 방에 들어섰을 때,  마가레트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일레프의 물음에 마가레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유진이...제가 데리고 있던 하녀인데...오늘 저녁 죽었습니다. 아마도 역병인 듯...”
“뭐라고?”
마가레트의 말에 일레프는 경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어찌해야할지...”
“그걸 이를 말이라고 하는가. 시체는 태우고 함께 일했던 애들을 전부 영주관 밖으로 추방해야지!”
일레프는 그렇게 호통을 쳤지만, 그의 얼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영주님께는 뭐라고 해야한단 말인가...”

일레프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방을 나섰다. 이런 일은 그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 이번에 소각된 토린 마을 출신이었다. 처음부터 알았어야하는데...후회가 밀려들어왔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일레프는 기침을 터트렸다. 요새 들어 기침이 심해졌다. 아마 앓고 있던 천식이 도진 모양이라며 일레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레프는 호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기침은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일레프는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레프는 손수건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지나가고 있던 하인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양피지를 넘기던 그람의 손이 흠칫했다. 양피지의 글씨가 뿌옇게 번져보였다. 그람은 눈을 비비고 다시 집중했다. 기침이 터져나왔다. 붉은 피가 한방울 양피지 위에 떨어졌다.

“설마...”

그람은 방한켠에 있던 양동이로 달려가 물에 얼굴을 비쳤다. 붉은 반점이 돋아난 얼굴을 보면서 그람은 주저앉았다.

“왜 하필 지금...”
그때, 머릿속에 에리시나가 한 말이 스쳐지나갔다. ‘역병은 숲에서 오는 거래요.’ 그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한 말일 뿐이었다. 그람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그람은 서둘러 양피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처음 역병이 발발한 토린마을은  개간지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람은 계속해서 서류를 넘겼다. 토린 마을외에도 최초의 희생자들 사이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바로 개간지에서 일했던 인부이거나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무서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람은 좁은 골방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람은 손수건으로 입과 코부위를 가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예배당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웅얼거리면서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콜록콜록하는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람은 열심히 기도문을 외우는 노파앞에 앉았다.

“요한슨 부인. 혹시 마을에 이상한 조짐같은거 없었습니까?”
“조짐이라굽쇼?”
노파는 백내장이 낀 탁한 눈으로 그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숲에서 다람쥐며 영양 따위가 내려와 죽은 일이 있었지요. 영양하고 사슴을 가지고 마을잔치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왜 묻는지요?”
그람은 비틀거리면서 긴 의자 사이의 통로를 걸어갔다. 그람의 머리 속에서는 영상이 책 넘기듯이 휙휙 넘어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베어 넘어가고 숲이 불타는 광경이 보였다. 개간지로 살 곳을 잃은 야생동물이 마을에 내려오고 있었다. 야생동물사이에 흑사병을 갖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야생동물은 점점 한곳에 몰렸고, 자기네들끼리 빠른 속도로 감염되었다. 그런 채로 그들은 마을로 내려와 죽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염되는 것조차 모르고 파티를 벌인다. 한편 개간지에서 일하던 벌목꾼과 일꾼들도 야생동물과 접촉하고 감염된다.

“맙소사. 하느님.”

그람은 예배당문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환기가 되지 않아 예배당은 횃불에서 나오는 연기로 자욱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연기사이로 군중의 머리가 유령처럼 두둥실 떠다녔다. 아이를 업은 아낙이 갑자기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전에 그람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던 아낙이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사람들은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히려 기도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져갔다. 그람은 한순간 예배당의 무거운 지붕이 무덤의 덮개가 되고, 자신이 기대선 문설주가 묘비로 변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람은 비틀거리면서 예배당을 벗어났다. 거리로 나오자 살타는 냄새가 났다. 한 떼의 군중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슈이드가 앞장서고 있었다. 겁에 질린 여자 몇이 벌거벗겨진 채 사슬에 묶여서 그들 속을 걷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람은 슈이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슈이드는 그 천진한 웃음을 물며 말했다.

“마녀를 색출하는 중입니다."
“무슨 소리요? 마녀라니.”
“모르십니까? 오늘 아침 마녀인 에리시나가 사라졌습니다. 필경 동료마녀들이 도와준 탓이겠지요. 마녀들을 모두 화형대에 매달아 신께 속죄해야합니다. 자, 어서 비키십시오.”

슈이드는 그람을 밀쳤다. 사람들이 험악한 얼굴로 그람을 스쳐지나갔다.

“마녀 때문에 역병이 도는 거야.”
“빨리 마녀를 찾아내 죽이자.”
사람들은 구호처럼 이런 말을 소리치고 있었다. 그람은 그들을 몇 걸음 따라가며 소리쳤다.

“정신차리시오. 여러분은 이러고 있으면 안되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손과 발을 깨끗이 닦고 야생동물 및 설치류와의 접근을 피하시오. 병을 막는 건 그 방법뿐이오!”
그람은 목이 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람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보시오, 제발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들으시오. 제발...”
그람은 몇걸음 걷다 말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람의 두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람은 두손을 그러모아 쥐었다.

“엘이시여, 자비로운 아버지시여.”
그람은 기침을 토해냈다.



마을 광장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성난 군중들의 고함소리가 영지 곳곳에서 들려왔다.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어!”

노파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젊은 여자가 청년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 광장으로 끌려나오고 있었다. 이미 여자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을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났던 여자였다.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 떼의 여성들이 달려나와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피묻은 머리타래가 한 웅큼 바닥에 떨어졌다. 날카로운 손톱이 피가 엉킨 살점을 뜯어냈다.

“속죄해라, 마녀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자의 나체가 허공에 매달렸다. 여자의 발 밑에 놓여있던 장작에서 불길이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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