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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까마귀의 아이-7

2010.07.02 17:1807.02

불길이 일렁였다. 토린은 엘켄영지에 속한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전체에 역병이 돌아 폐쇄령이 내려진지 얼마 안되어, 병사들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과 함께 마을에 통째로 불을 놓았다.

그람은 착잡한 심정으로 마을에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향에 돌아온 시기가 좋지 못했다. 운도 지지리 없는 모양이었다. 그람의 불운은 법황청에서 쫓겨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변방에서 역병의 소동을 겪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람은 성직자로서 주민들의 임종기도를 올리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남았다. 하지만 그람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토린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짓이라는 것을.

병사들은 마을전체에 역병이 퍼져 마을주민 태반이 병자이므로 이런 조처는 불가피하다고 되풀이 설명했다. 어쩌면 그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말로 애써 자신들이 한 일을 정당화시키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지금 불타고 있는 토린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람은 그저 더 이상 병이 퍼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람의 바램과 다르게 영지에 딸린 고헨과 오스겔을 비롯한 다른 마을에서도 역병이 돌고 있었다. 영지전체로 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람은 토린에서 등을 돌려 예배당으로 향했다. 예배당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신부님.”

아이를 업은 아낙이 그람에게 매달렸다. 아낙의 크고 둥근 눈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괜찮을겁니다, 부인. 엘은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기도를 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겁니다.”

그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말 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람의 말에 안심이 되는지, 아낙은 안도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성전을 암송했다. 그람은 부제에게 예배의 집전을 맡기고 마을로 나섰다.

그람이 헬레니스의 대학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질병은 불결한 환경에서 발생하기 쉬웠다. 오염된 음식이나 식수에 의해서도 전염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질병이 전염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람은 마을의 집집마다 방문했고, 의사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마을에는 그람이 애써 쫓았던 미신이 다시 돌아온 듯했다. 호랑가시나무를 달인 물을 마시면 병을 쫓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빠른 속도로 마을밖에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 병마가 쫓아오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의사들은 정직하고 성실했으나, 마을사람들만큼 무지했으며, 어떨 때는 전문의가 아닌 그람이 더 나은 때도 있었다. 의사들은 그람이 하는 질문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람이 역병에 걸린 마을의 환자들의 기록을 알고 싶어하는지, 환자들이 먹은 음식이나 식수원따위를 알고 싶어하는지 의사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영지의 의사들이 하는 최대한의 조치란 환자의 몸을 침이나 바늘로 찔러 더러운 피를 빼내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이건 나은 경우로, 어떤 의사는 성전암송을 치료법으로 처방해주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의사가 환자들에게로 병을 전파할지도 몰랐다. 그람은 의사들에게 환자를 접한 후에는 꼭 포도주로 손을 씻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의사들은 꼭 그러겠노라고 다짐해주었지만 정말 그럴지는 그람으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영지내 마을의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결했다. 그람은 집에서 나온 생활하수와 찌꺼기를 그대로 집앞에 내놓는 것을 보았고, 배설물로 지저분한 돼지우리를 청소한 후 씻지도 않은 손으로 요리하는 주부의 모습도 보았다. 그람이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손발을 깨끗이 닦으라고 주위를 주었지만 워낙 오랜 습벽이어서 바꾸기 어려워보였다.

그람은 예배당에 마련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의사들이 건네준 자료를 훑어보았다.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않는 한, 의사와 마을사람들에게 한 조치는 전염속도를 늦추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병의 원인을 알아내야 전염을 막을 수 있었다. 환자들간의 공통점을 찾다보면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름: 스미스  
직업: 대장장이
나이: 50세
증상:발열과 오한을 호소, 10센티미터가량의 종양과
흑색반점이 온몸에서 발견됨. 사흘후 사망
처방:성전암송」

그람은 거칠게 휘갈겨 쓴 양피지를 넘겼다.

「이름: 베스
직업: 주부
나이: 17세
증상: 발열, 흑색반점, 두창, 이틀후 사망
처방:사혈」

그런 식으로 비슷한 내용이 나타났다. 병의 증상을 제외하고는 환자들간에 공통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성별, 연령, 계급이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직업이 농부인가 하면 다른사람은 회계사인 식이었다. 쭈구렁 노파인가 하면 세 살짜리 꼬마이기도 했다.

“흠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람은 양피지문서를 내려놓고 돌아보았다. 부제가 반
쯤 문을 열고서 어색한 얼굴로 서있었다.

“죄송합니다. 노크를 여러번 했습니다만, 못들으신 것 같아서..."
“괜찮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영주께서 찾고 계십니다.”

그람은 의아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엘켄의 비서인 일레프가 서있었다.

“영주께선 무엇 때문에 저를 찾으시는지요?”
그람인 마차에 오르면서 일레프에게 물었다. 일레프는 그람이 자리에 앉자, 맞은편자리에 앉았다.

“영주께선 역병문제로 신부님을 찾고 계십니다. 개간문제와 겹쳐서 여간 골치아픈게 아닙니다. 특히 영지민들의 민심이 불안합니다. 쿨럭.”

일레프는 말끝에 기침을 터트렸다. 일레프는 얼른 그람에게 사과하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기침은 끊이지 않고 연속해서 터졌다. 기침을 할 때마다 일레프의 얼굴은 열꽃이 피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기침을 멈춘 일레프의 두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어디 편찮은 겁니까?”
그람은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다. 일레프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일레프는 손수건을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마차는 영주관앞에 멈춰 섰다.
그람이 서재에 들어섰을 때, 엘켄은 검을 닦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람은 엘켄의 옆에 가 섰다. 엘켄의 검은 오랫동안 손질이 잘 되었는지 검날이 매끄럽고 흠하나 없었다. 그람은 팽팽이 긴장된 검날에 소름이 돋았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입니다.”

엘켄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엘켄이 지금 이검을 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람은 궁금했다. 물론 저정도 가보이면 자랑할만하니 자랑하고픈 마음에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괜시리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검을 꺼내보곤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결정이 서곤 합니다.”
“어떤...결정인지요?”

그람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엘켄은 탁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현재 영지에서는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민심도 심상치 않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상황일 때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글쎄요. 저는 신의 종일뿐인지라 모든 것을 신께 맡길 뿐, 그 이상은 모르는 일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람의 머릿속에는 생각이 복잡하게 엉켰다. 혹시 엘켄이 말한 것이 역병으로 인한 민란의 가능성에 대한 것인지, 검을 꺼낸 것은 그런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는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엘켄영지에 세 번째 마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순간 복잡하게 돌아가던 그람의 머릿속이 정지했다. 엘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에리시나의 영혼을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절차를 밟고 싶었습니다만, 상황
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루 속히 마녀를 처형하여 민심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 그 말씀은?”

엘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그람은 반문했다. 엘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처형할 예정입니다.”


간수가 덜그럭거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람은 지하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에 엘켄과 한 대화가 묵직하게 그람의 가슴을 눌렀다.

‘재판도 받지 않고 말입니까?’
‘상황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이건...’
‘어차피 시기가 앞당겨지느냐 늦춰지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놀랍게도 고문기술자인 슈이드도 엘켄의 결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건 말이 안됩니다. 아무런 정화의 과정 없이 처형하다니요. 그것은 엘의 신도로서 할 행동이 아니지요. 그대로 처형하면 필경, 저 가엾은 배교자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겁니다. 영혼이라도 구제해야 하거늘.”

슈이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슈이드의 손에는 작은 부지깽이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고문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부지깽이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살타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 같아 그람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문이 열렸다. 그람은 악취가 진동하는 감방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돌바닥위에는 에리시나가 몸을 자그맣게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그람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시나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람의 눈에 참담한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에리시나의 고운 머리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이곳 저곳에는 상처자국과 화상자국이 가득했다.

“신부님?”
에리시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람은 에리시나옆에 앉았다.

“내일 화형식이 있을 예정이다.”
그람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마지막 속죄기도를 들으려고 온 거야. 최대한 늦춰보려고 했다만, 어쩔 수가 없었단다. 밖에서 역병이 돌고 있는데, 사람들은 마녀 탓이라고 생각하는가보더구나.”
그람은 그렇게 말하고서 주위를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 얘야. 나로서는 정말 이 방법밖에 없구나.”
그람은 품에서 양동이와 인형을 꺼내서는 지푸라기를 덮었다. 그러고는 가죽자루를 벌렸다. 에리시나는 그람이 하는 행동을 그저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어서. 이게 감옥을 탈출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에리시나는 그제야 그람의 말을 이해하고 가죽자루속에 들어갔다. 그람은 가죽자루를 복대처럼 차고서는 수도복을 덮었다. 쉽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이시여, 용서하십시오.”

그람은 성호를 긋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간수들은 그람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슈이드는 세심하게 준비한 고문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해서 주점으로 가 자리에 없었다. 그람은 비틀거리면서 힘겹게 감방을 나섰다. 그람은 다시 한번 성호를 긋고서는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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