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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까마귀의 아이-5

2010.07.01 14:2407.01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그람의 영혼은 발목에 무거운 추가 달린 채 끝없이 심연으로 침착해가고 있었다.
'아이리나 자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부제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을때, 그람은 자신도 모르게 알피드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어있는 알피드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유서에 다른남자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죽었다고 하는군요. 뉜지는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말이오.'
호사가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렇게 안봤는데, 겉으로만 정숙한 여자였군. 이럴줄 알았으면 죽기전에 한번...쩝 아깝구먼.'
무엇이 아쉬운지 입을 쩝쩝 다시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 말들을 일축하려는 듯이 보다 경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안타까운 일이. 게다가 아이를 가진 채 목숨을 끊었다고 하니, 이건 정말 큰죄요.부디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것인데.'

그순간 알피드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나았으리는 생각이 들었다.누군가의 숨겨진 죄를 본다는 것은 그람에겐 고통이었다. 자살자의 육신은 관습상 사거리에 묻히며, 일부 시골에서는 시체를 토막내어 널어놓기도 한다. 그만큼 자살은 크나큰 죄악이었으며, 어느 누구도 자살자를 동정하거나 그를 위해 제대로된 절차의 장례식을 치뤄서도 안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평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며, 성직자나 귀족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아이리나도 어쩌면 최소한의 의식에 따라 묻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불륜행각과 자살을 배신으로 받아들인 아이리나의 남편은, 관습에 따라 사거리 어느 곳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위선덩어리들.'
목소리들이 사라진 뒤 알피드는 차갑게 웃었다.

'그들이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하려 들었던가.'
그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도 그녀의 죽음은 올바르지 못했어. 신의 뜻을 거역한 것이었다고.'
복도를 울리던 발걸음소리가 뚝 그쳤다.

'단지 한가지 죄로 모든 것을 호도하려고 들지 말게. 아이리나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사람이었어. 다만 아무도 몰랐을 뿐이지. 아이리나가 가진 순결함, 그 지성, 그 순수함을.
이 세상엔 더러운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이 많아. 한번 보게. 신의 이름으로 짓는 무수한 죄악과 위선과 교만을! 그런 자들은 살아남아 오늘도 떠받들리고 있는데, 왜 아이리나와 같은 여인은 자살했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당해야 하지?'

'알피드. 조용히 하게. 누가 들을지도 몰라.'
그람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설혹 그녀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죽음마저 모독당해야 할 이유는 없어."
'자네 미쳤군.'
알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종교는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인간을 모독하고 증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냐.'
알피드는 그람을 밀치고 지나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게 나아.'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뱀에게 목소리가 있다면 저런 목소리가 아닐까. 그람은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떠날 줄을 몰랐다.



숲이 불타고 있었다.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미처 피하지못한 아기새를 둥지에 남겨두고 온 어미새가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벌레들이 불길을 피해보려고 뛰어올랐다. 어느동화에서 양딸로부터 달군 구두를 신는 벌을 받은 계모처럼, 날벌레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다 마침내 추락해버렸다. 샘은 끓어오르는 진흙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고라니의 상아처럼 흰 이가 폐허 속에서 비죽이 솟아올라 있었다. 다람쥐 일가의 검게 그을린 시체위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를 적대감 넘치는 사람의 무리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이 죽은 검은 땅위에서, 그들은 또다른 생명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요정들이 뜨거운 불길에 찢긴 흉물스러운 날개를 땅에 끌리면서 어디론 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 가? 다들 어디 가는 거야?'
내 물음에도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들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만둬요! 안되요!"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쳐다보았다. 타인의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사는 뻔뻔스러운 작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이야말로 몰록의 수하들이며, 피를 원하는 아세라여신의 추종자들이다. 나는 힘껏 소리 질렀다.

"당신들, 모두 저주하겠어. 모두 죽고 말거야. 불나방처럼!"

눈에 띄는 동요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열에 들뜬 내 팔다리를 붙잡고 그들은 소리 질렀다. 마녀! 마녀! 마녀라고.
그리고 어둠. 눈을 떴을 때도, 어둠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변소나 마구간으로 착각할 만큼. 그때, 눈부신 빛줄기 하나가 내 눈을 자극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차가운 비취색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에리시나. 어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느냐?"
어제? 벌써 하루가 지났나?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네."

엘켄이 재차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엘켄은 입술을 일자로 만들어 다물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네가 한말을 취소해라. 네 할머니 그라냐가 시켜서 한말이었을 뿐, 너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고 해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엘켄을 올려다보았다. 엘켄이 말했다.

"그래야지 살 수 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순간 나는 그가 한말을 전부 깨달을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 그라냐에게도 엘켄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가엾은 사람."
나는 중얼거렸다. 엘켄의 짙푸른 두눈동자가 크게 흡떠졌다.

"요정들이 내게 한말이었어요. 당신들이 스스로 일으킨 불길이 당신들을 삼킬거라고."
"그라냐!"
"전 그라냐가 아니에요. 에리시나죠."
엘켄의 손이 감옥의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제발 아가야. 아니라고 말하렴. 그렇지 않으면 난 널 살려줄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이에요. 전 결코 부정하지 않을 거에요."
엘켄은 고개를 숙였다. 빛에 의해 생겨난 그늘이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알았다. 나는 너를 구원해주려고 했는데, 너도 네 어미처럼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구나.난 더이상 너를 구해줄 수 없다."

나는 고집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켄은 고개를 돌렸다. 빛이 사라졌다. 나는 어둠속에 남았다.
내 이름대로, 어쩌면 나는 복수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


엘켄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스려저가는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 신부가 또 왔나, 일레프? 돌려보내게."
그날 이후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신부는 줄기차게 엘켄을 찾아왔었다. 엘켄은 부재중이라거나 다른 용무로 바쁘다거나 등의 이유로 그를 뿌리쳐오고 있었다.

"그람입니다."
엘켄은 홱 몸을 돌렸다. 그람 신부였다. 일레프가 그뒤에 서서 멎적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만, 신부님께서 갑자기 뛰어드시는 바람에."
"알겠네. 자네는 물러나있게."
일레프를 물린뒤, 엘켄은 차가운 시선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어쩌실 작정입니까. 설마 겨우 그 어린 아이를..."
"마녀입니다. 아이가 아니라."
"그앤, 잠깐 정신을 잃은것 뿐입니다."

그람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그앤 마녀요! 더이상 할말 있소? 그렇게 판결되면 되는거요."
"난...난...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애가 어떻게 될지 알고나 계십니까?
종교 고문관이 오게되면...먼저 옷을 벗긴뒤에 공중에 매달아두고 발목에 무거운 것을 매답니다. 만일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점점 더 무거운 돌로 바뀝니다. 뼈가 탈골되고 인대가 늘어나고, 몸이 기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다음에...다음엔 수차에 매달아서 돌립니다. 그밖에도 뜨겁게 달군 철판을 걷게 한다든가 바늘방석에 앉힌다든가..절대로 고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애가 죽거나 죄를 인정할때까지는요. 그래도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쇠꼬챙이로 자궁부터..."

"그만, 그만두시오."
엘켄은 소리질렀다.

"그런건 당신보다 내가 더 잘알고 있단 말이오."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람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 당신이나 이곳사람들을, 나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마녀재판이라니, 헬레니스에서는 이단 심문은 보아왔어도, 그런 해괴한 재판은..무죄든 유죄든 결국 죽는다니.."
"시끄러워!"
엘켄은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말에 그람은 놀라서 움찔했다.

"여긴 헬레니스가 아니라 트라이아란 말이오!"
엘켄은 숨을 고른 뒤, 그람에게 속삭였다.

"게다가. 신부 당신도 말하지 않았소? 요정을 믿는 자는 배교자라고."
그람은 입을 다물었다. 엘켄은 비죽거리며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른 게 뭐가 있소? 잘난 헬레니스 신부."
다시 불길을 응시하며 앉아있는 엘켄의 등뒤로 문이 닫혔다.



붉은 등불이 천장에서 흔들거렸다. 도살자처럼 붉은 얼굴로 슈이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도구들을 하나하나 늘어놓고 있었다. 그람은 반은 혐오감이 섞인 얼굴로 탁자위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결코 죄인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고문도중에 죄인을 죽이는 자는 보통 신참자들이죠. 신부, 이일은 참 까다로운 일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해서 생전에 회개할 때까지, 죄인은 죽어서는 안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르겠군요."
그람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는 일을 혐오하고 있군요."
슈이드는 탁자 위에 펼쳐진 도구중에서 낚시 바늘처럼 휘어진 갈고리를 들어올렸다. 그람의 이마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죄인들은 감히 신을 저버리고 악마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지옥에 먹혀버렸단 말입니다. 난 그 영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그깟 육체쯤 고통을 받아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심판의 날이 오면 새로운 육체의 옷을 입을텐데.
그러니 죄인에게 쓸데없는 동정심은 갖지 마십시오. 보기야 좀 거칠지 모르지만, 나만큼 신께 봉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육체 또한 주께서 주신 것이지요."
그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슈이드는 그 말에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고통도 주께서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슈이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미소였다. 어떤 사심도 없는. 그람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이제 시작해야겠습니다."
성무를 보는 사제처럼 슈이드는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슈이드를 조수들이 따라갔다. 그람은 머뭇거리다가 어둠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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