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까마귀의 아이-4

2010.07.01 14:2007.01

타닥타닥. 숲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벌겋게 타들어가는 숲은 거대한 숯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안돼..."

여린 신음이, 넋 놓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람의 귓가에 닿았다. 그람은 홱하고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에리시나였다. 그람은 자신도 모르게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에리시나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엘켄 영주는 이미 영주관으로 돌아간 후였고, 사람들은 자기 일에 전부 여념이 없었다. 그람은 군중들 틈 사이에서 에리시나를 데리고 나왔다.

"안되요."
"뭐가 안된다는 거냐?"

에리시나는 적갈색 눈동자를 크게 흡떴다. 유난히도 이날 따라 에리시나의 눈이 더 붉게 비쳤다.

"어째서 다들 숲을 불태우는 거죠?"
에리시나의 볼이 열기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째서라니. 당연히..."
"다들 들리지 않는거에요?"
그람은 에리시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가늘게 뜬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리지 않느냐구요. 비명소리가 들려와요. 그들이 울고 있어요.
왜, 왜 그들을 내쫓는거죠?"
"그들이라니, 누구말이냐?"
"이곳의 주인들, 영혼들."

그람은 에리시나의 말에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린 시절, 유모가 말해주었던 이야기들이 현실로 되살아듯했다. 손에 잡힐만큼 생생했던 요정들, 그리고 그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 복수. 그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에리시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차려라, 얘야. 넌 헛것을 보고 있어."

"헛것이 아네요. 그들을 실재해요. 난 그들을 보기까지 했는걸요. 지금 이순간까지도 그들을 여기 남아 울고 있어요. 봐요, 모든 곳에서 소리가 들려와요. 왜 그들을 내쫓는거죠? 여긴 그들의 땅이에요. 그들이 선한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악한 존재들은 아니에요. 적어도 도려내듯 제거해야하는 그런 존재들은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신부님? 신부님은 그들을 부정하고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터전자체를 없애버린거에요.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죠? 그들이 없으면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원래 우리는 하나였으니까요. 우리도 방황해야 할거에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그람은 당황해서 말했다. 그러자 에리시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모르는건 신부님이시죠."
"조용히 해라! 지금 여기서 만일 누가 네말을 들었다간……."

그람은 말소리를 낮추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람은 사람들에게 요정을 섬기는 건 이단자의 행위이며, 이단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단지 겁을 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이곳 트라이아 사람들은 분명 말 그대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러니 만일 에리시나의 말을 누군가가 듣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더더구나 에리시나의 조모와 어머니는 이미 마녀로 판명되지 않았던가.
그람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넌 사람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며 마녀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처음에는 너도 그 말을 증오했겠지만, 차츰, 그들의 말을 현실로 믿어버린 거야. 만일 사람들 앞에서 방금 네가 한말을 되풀이 말한다면, 그건 네가 그들의 의도대로 되는 것 이상이 아냐. 그들은 당장에 널 마녀로 지목하고 번제물로 바칠 거야. 그러니……."

"아아악!"

에리시나는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모아졌다. 그람은 땀을 흘렸다. 어떻게든 이 애를 데리고 나가야한다. 하지만 에리시나는 그람의 손을 뿌리쳤다.

"신부님, 아이리나가 누구죠?"
그람은 차갑게 굳었다. 에리시나는 그런 그를 히죽히죽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네요. 얼굴은 둥근 편이고, 연녹색 눈동자에, 웃으면 한쪽 뺨에 보조개가 들어가는...아, 왜 그날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남자가 누군지?"

그람은 아 무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에리시나가 아이리나는 알고 있는지, 어떻게 그날일을 알고 있는지 그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남자는 바로 그람신부님 옆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내면과 소망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아이리나는 모든 걸 말하려고 했어요. 모든 것을. 그런데 묻지 않았죠. 아이리나는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없어서, 그것이 명백한 거절이라고 생각해서, 뛰어내렸어요. 그리고, 그남자는, 그남자는 아이리나가 죽은 이유가 신부님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이 그날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정죄했기 때문에, 아이리나가 죽은 거라고. 그래서 신부님을 증오하고 있어요. 지금 이순간에도!"

에리시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거짓말쟁이. 당신도, 그도, 모두 거짓말쟁이들이야!"
에리시나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 모두 저주하겠어. 모두 죽고 말거야. 불나방처럼!"

미친 듯이 소리치는 에리시나앞에서 그람은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쳤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람은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마구 저항하는 에리시나를 붙잡아 어디론가로 데려가는 광경이외에는.어떻게 해서인지 그람은 교회당의 자기처소로 돌아와 있었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구석에 웅크렸다. 검은 어둠, 어둠이 하염없이 그에게로 밀려들어왔다.


"찰싹, 찰싹."
채찍소리가 공허한 어둠을 뚫고 둘려왔다. 한 남자가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람은 그늘에 숨어 이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흐느껴 울면서 채찍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지 남자는 말을 하다말고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죽어버려라. 이세상 모든 여자라는 족속들의 씨가 말라버려라. 더러운 이브의 족속들!"
다음순간 남자는 거칠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용서해주십시오. 지금 이순간조차도 저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 탐스런 갈색 머리결과 그 부드러운 피부, 입술, 둥근 어깨며, 봉긋한 가슴...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용서하지 마시고 진노로써 멸해주소서. 하지만 그녀만큼은...용서해주소서. 당신의 진노로 세상이 불탈지라도 그러나 그녀만은……."

쯧쯧. 그람은 혀를 찼다. 저 친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완전 횡설수설이잖은가. 그람은 이곳 헬레니스에서 평생을 보냈다. 헬레니스는 화려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모순된 이미지의 도시였다. 법황청이 있는 성스러운 도시이자 에우로프 대륙에서 가장 음탕한 음행이 자행되는 곳이 헬레니스다. 역대 교황들 중 몇 사람은 동성애와 아리따운 처첩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는 합창단원의 소년들을 자신의 욕망의 제물로 만든 교황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람은 그런 행위를 옹호하거나 동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현실에서 여자 좀 떠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동료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심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이는 것은 그람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여인이 저 자존심 강하고 여자라면 질색팔색하는 알피드를 매혹시켰을까. 풍만한 여인의 나부가 순간 그람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어이쿠, 주여. 용서해주십시오"
그람은 이 민망한 상상을 탓하며, 자기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아마도 고해실에 들락거렸던 여자 중 하나겠지. 그람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래주는게 저 도도한 친구를 위한 도리인 듯싶었다.


여자의 하얀 손이 어둠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건...안돼요. 안된다고요."

애원하듯이 흐느끼듯이 여자의 목소리가 두터운 벽을 통해 전해져왔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여자의 둥근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참..."

미칠 노릇이군. 그람은 투덜거렸다. 평범한 연인들의 대화같지만, 두사람의 밀회장소가 다른곳도 아닌 성소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람은 어린시절부터 지속적으로 헬레니스의 문학과 철학의 세례를 받아왔다.그래서 인간 본연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또한 신이 내려주신 것이기에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직 절제하지 못할때에만 죄가 된다. 이것은 어떻게보면 성인들의 "여자란 남자를 넘어지게하는 존재"라는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건 그람 자신은 남에게 "절제"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람은 고해소의 두터운 판자넘어 들려오는 열락의 신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두사람의 행각을 지켜보면서 그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릴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겸연쩍어졌다. 그들을 비난하기에는 이미 시점이 지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본의아니게도 그람은 이두사람의 "볼 것을 다본"상태였다.

성소에서 저런 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이 죄인가, 아니면 엿보는 자신이 더 죄인가. 그람은 혼돈속에서 계속 그런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남자가 유창한 헬레어로 속삭였다. 여자는 아직 화답하지 않고 있었다.

"아가씨들아, 나 비록 가뭇하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에 두른 휘장처럼 귀엽다는구나"
남자가 다시한번 속삭이자 여자가 헬레어로 화답했다. 약간 토라진듯한 목소리였다.

"검다고 깔보지 마라, 오빠들 성화에 못 이겨 내 포도원은 버려둔 채,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고 햇볕에 그을은 탓이란다"
남자는 전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종려나무처럼 늘씬한 키에 앞가슴은 종려 송이 같구나. 나는 종려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휘어잡으리라. 종려 송이 같은 앞가슴 만지게 해다오. 능금 향내 같은 입김 맡게 해다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가슴에서 비늘처럼 옷이 떨어져내렸다.

"나는 성벽, 내 가슴은 망대랍니다. 그 날 임께서 보시기에 나무랄 데 없을 거예요."
남자는 여자의 앙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팔과 팔의 얽힘, 몸과 몸의 얽힘.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는순간 여자가 속삭였다.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그리고 침묵. 모든 것이 멎어버리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람은 눈을 어디다 둘줄 몰라서 반대편 벽을 뚫어져라고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을 짚었던 바닥에서 땀방울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남자는 일어나려는 여자를 다시한번 포옹했다.

"울고 있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울지 말아요. 어차피 이럴 예정이었잖아요."

여자를 안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순간, 여자가 남자의 팔에 손을 가져가자 남자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여자가 나간 뒤에도 남자는 잠시 동안 어둠속에서 눈물을 떨구었다. 남자가 나간 후, 그람은 후우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의 그 불쾌한 영상이 눈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람은 궁시렁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옛날 사람들 말씀이 틀린 게 없어요. 여자란 족속은 말이지..."

막 고해소를 나서려는 그람은 잠시 자신을 응시하는 두눈과 마주쳤다. 그람과 남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적대감마저 담긴 시선으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람은 서둘러 헛기침을 터트리며 자리를 떴다.

"흠흠, 날씨가 참...흠흠..."

그람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사라졌다. 남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음날, 예배당에서 그람과 알피드는 마주쳤지만 서로 어색한 시선만 주고받은 채 헤어졌다.


"신부님께 죄를 고백하러 왔습니다."
아이리나는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람은 천뒤에 숨겨진 그녀의 육체를 상상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그녀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왔습니다. 저는..."
"그만."
그람은 아이리나의 말을 끊었다.

"성직자가 아닌 친구로서 충고하겠소. 인간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만 선과 악은 분명한 경계를 그어야만하오. 남편을 배반하는 행위는 선이라고는 할 수 없는 행위요. 그것은 또한 주 엘을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하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남자를 그만 만나시오. 내가 아는 아이리나는 현명한 여인이니 무슨 뜻인지 알 것이오."
아이리나의 연녹색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안타깝게 빛났다가 사그라들었다. 아이리나는 베일로 얼굴을 짙게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1 중편 괴물 이야기 - 뱀파이어 (1) Cosmiclatte 2010.08.02 0
110 중편 [섬] 임재영 2010.07.05 0
109 중편 까마귀의 아이-10(완결) 회색물감 2010.07.02 0
108 중편 까마귀의 아이-9 회색물감 2010.07.02 0
107 중편 까마귀의 아이-8 회색물감 2010.07.02 0
106 중편 까마귀의 아이-7 회색물감 2010.07.02 0
105 중편 까마귀의 아이-6 회색물감 2010.07.02 0
104 중편 까마귀의 아이-5 회색물감 2010.07.01 0
중편 까마귀의 아이-4 회색물감 2010.07.01 0
102 중편 까마귀의 아이-3 회색물감 2010.06.30 0
101 중편 까마귀의 아이-2 회색물감 2010.06.30 0
100 중편 까마귀의 아이-1 회색물감 2010.06.30 0
99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4.남자친구(2) 하늘깊은곳 2010.06.29 0
98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하) 룽게 2010.06.27 0
97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중) 룽게 2010.06.27 0
96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상) 룽게 2010.06.27 0
95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4.남자친구(1) 하늘깊은곳 2010.06.11 0
94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목소리(5) 하늘깊은곳 2010.05.11 0
93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목소리(4) 하늘깊은곳 2010.04.22 0
92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 목소리(3) 하늘깊은곳 2010.04.0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