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중)

다음날부터 나는 만테크닉스의 양자두뇌 사고 조사관이 아니라 문화부의 근로 환경 조사원이 되었다. 윤 지수 가까이에서 평소 업무와 대인 관계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 조 성화 부장이 급조를 제안한 위장신분이었다. 정부기관의 조사원을 사칭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었지만 오전에 공안의 송 화정 특무관과의 전화통화로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연방공안국에서 공문과 가짜신분증까지 보내준 것이다. 점심 즈음에 도서관 앞에서 공안국 요원에게 신분증을 받고 몇 가지 설명을 듣는 동안 전화가 왔다. 송 화정 특무관이었다.
송 화정 특무관은 특유의 빠르고 건조한 말투로 공안이 이번 일에서 편의를 봐주는 것은 이번 일에서 만에 하나 문제가 있으면 즉시 자신들에게 먼저 정보 공유를 해야 한다는 거래의 의미임을 설명 했다. 물론 거래라는 단어도, 공안이 사기업의 조사활동을 지원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그 어떤 단어도 그녀는 피해갔다.
전화를 끊은 다음 나는 조 성화 부장을 만나러 갔다. 점심식사 이후 시간인지라 구내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나는 잠시 그녀의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조 성화 부장의 사무실은 좁지만 구석구석 세심하게 손댄 흔적들 때문에 편안했다. 책상위에는 몇 개의 가족사진 액자와 즐겨 읽는 책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가급적 개인물품으로 보이는 것들은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 하면서 그녀의 책상 위와 책장을 훑어보았다. 책들은 주로 전문서적과 관보들로 나뉘어 잘 정돈 되어있었고, 딱히 나의 흥미를 끌만한 것은 없었다. 단지 세상에는 도서관 사서들을 위한 전문잡지가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종이잡지로.
잡지 한두 권을 들춰보고 있는 사이에 조 성화 부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슬리브를 받친 커피컵을 들고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기다리시게 했네요.”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다시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종이책이 아직도 나오고 있는걸 보면 신기하죠?”
“그러네요.”
“스크롤이 처음 나왔을 때도 디스플레이의 혁명이다 뭐다 하면서 종이문서가 모두 사라질 거라고 호언장담 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죠. 도서관 만해도 그래요. 우리는 20명 정도의 전자도서관 관리팀이 있지만 종이책을 관리하는 사서 인력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요. 출판사들도 여전히 종이책을 찍어내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그걸 보존해야 할 의무도 있고요.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다운로드 받는 이용객들도 많지만 여전히 서가 사이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은걸 보면 신기해요.”
나는 잠시 지수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그건, 여전히 사람들은 책이란 건 손에 쥘 수 있는 물질화 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그렇겠죠. 비슷비슷하게 생긴 스크롤에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읽는 것보다는 예쁜 표지와 밝은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는 게  진짜 책을 읽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건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책 한 권을 온전하게 읽었다는 느낌이 들 때는 책의 뒷 표지를 덮고 나서 잠시 그 책의 무게를 느낄 때죠. 화면의 종료버튼을 누를 때가 아니라. 저는 백경을 스크롤로 읽고 난 다음 몇 년 뒤에 책으로 다시 읽었어요. 고서점에서 산 오래된 양장본이었는데 종이는 먼지 때가 잔뜩 끼고 군데군데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도 있었죠. 그걸로 읽으면서 비로서 이야기의 무게가 느껴지더라고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이 모험이었어요. 이미 다 읽었던 내용이고, 종이책이라고 해서 전자책과 글이 다른 것도 아닐 텐데요. 글이 영혼이라면 책은 육체 같다고나 할까요? 누가 그랬었는데?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그 책과 섹스하는 기분이라고. 어머, 나 좀 봐. 별소릴 다하네.”
조 성화 부장은 황급하게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망한 소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고 노력 하는 얼굴이었다.
“조사관님?”
“네?”
“로봇, 아, 아니 APO가 그...... 그것도 할 수 있나요?”
“섹스......말입니까?”
덩달아 작아진 내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우스웠다. 조 성화 부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의체와 양자두뇌의 모델에 따라 다르지만 가능한 모델들도 있습니다.”
“지수씨도 그런 모델인가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기 전 임시로 소집된 업무 회의에서 조 성화 부장은 문화부로부터 근로 환경을 조사하는 조사관이 파견되었음을 공지 하였다. 연방정부에서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현장 실사이니 만큼 큰 부담을 갖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는 직원은 없어 보였다. 도서관 내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녀도 되는 자격은 얻었지만 직원들의 시선으로부터는 자유스럽지 못했다. 고작해야 종합대출실 한쪽에서 윤지수를 노려봐도 되는 위치를 얻은 셈이다. 나는 스크롤을 펼쳐들고 의미 없는 문서들을 펼쳐 놓은 다음 대출실안을 두리번거리거나 윤지수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눈으로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1 중편 괴물 이야기 - 뱀파이어 (1) Cosmiclatte 2010.08.02 0
110 중편 [섬] 임재영 2010.07.05 0
109 중편 까마귀의 아이-10(완결) 회색물감 2010.07.02 0
108 중편 까마귀의 아이-9 회색물감 2010.07.02 0
107 중편 까마귀의 아이-8 회색물감 2010.07.02 0
106 중편 까마귀의 아이-7 회색물감 2010.07.02 0
105 중편 까마귀의 아이-6 회색물감 2010.07.02 0
104 중편 까마귀의 아이-5 회색물감 2010.07.01 0
103 중편 까마귀의 아이-4 회색물감 2010.07.01 0
102 중편 까마귀의 아이-3 회색물감 2010.06.30 0
101 중편 까마귀의 아이-2 회색물감 2010.06.30 0
100 중편 까마귀의 아이-1 회색물감 2010.06.30 0
99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4.남자친구(2) 하늘깊은곳 2010.06.29 0
98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하) 룽게 2010.06.27 0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중) 룽게 2010.06.27 0
96 중편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상) 룽게 2010.06.27 0
95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4.남자친구(1) 하늘깊은곳 2010.06.11 0
94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목소리(5) 하늘깊은곳 2010.05.11 0
93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목소리(4) 하늘깊은곳 2010.04.22 0
92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3. 목소리(3) 하늘깊은곳 2010.04.0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