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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로봇

Love doesn't end, just because we don't see each other.
-Sarah Miles (The End of the Affair. 1999)

1.
“이번에는 달라. 그냥 도서관 사서야. 가서 쉬엄쉬엄 패턴만 분석하고 리포트만 제출해주면 돼. 초임 조사관들에게나 맡길만한 일이지만,  HFP에 연관된 일이라 본사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조사관을 원해. 충민씨처럼. 그동안 고생의 보상이라 생각하고 갔다 와. 요즘 아이 때문에 힘들다며? 최종리포트 나올 때 까지는 사무실에 안 나와도 돼. 그냥 최종리포트 때만 와서 보고해주게. 지원팀은 전처럼 미네르바의...닥터 부이가 배정되었으니까 연락하시고, QA팀이 보낸 리포트는 다운 받았지?”
과장의 전화를 받고 난 다음 나는 잠에서 덜 깬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10분전 까지 내 배위에 발을 올려놓고 자던 아내가 깨었다.
“일어났으면 영수 모니터 좀 봐줘.”
“나 아직 안 일어났거든?”
“그럼 지금 뭐하는 건데.”
“앉아 있어. 좀 더 잘래. 내일은 회사로 출근 안 해도 될 거 같아.”
아내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신 잘렸어?”
“아니, 업무배정. 최종 리포트 때 까지는 사무실로 안 나와도 된데.”
아내는 다시 몸을 뉘이며 툴툴댔다.
“뭐야, 제발 좀 잘려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의 베이비 모니터로 다가갔다.
모니터에는 아이의 체온이 정상이며 편안한 수면 중이라는 상태 메시지가 떠있었다.
아기 방으로부터 실시간 영상으로 전송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간밤에 빽빽 울던 작은 악마는 어디로 사라지고 누가 이런 천사를 데려다 놓았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잘못 놓고 간 선물은 아닐까 싶었다. 변태 같은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순록 학대자 영감이 호호 웃으며 ‘이런, 아이를 잘못 주었군!’하며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쓰레기로 만들고 세상을 울음과 비명 소리로 채우려 발광 하는 작은 악마를 다시 데려올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다가오는 성탄절이 두려워졌다. 적어도 35층에 위치한 아파트에 굴뚝이란 건 없으니 다행이다.
  휴가의 마지막은 늘 그렇듯 경미한 출근 공포증에 시달리지만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았다. 과장의 말을 100%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맡았던 일보다 상황이 복잡하거나 위험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에 나는 QA팀이 보냈다는 리포트도 오늘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읽지 않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휴가 중이니까.
  육아도우미가 집에 온 뒤 아내와 함께 쇼핑몰을 순례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안디옥으로 향하는 보에몽처럼 백화점을 들쑤셨다. 친지들과 친구들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선물들은 한곳에 모아놓으면 산타마을의 창고가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성지회복을 마치면 자유농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병사처럼 묵묵히 아내 뒤를 따랐다. 사단은 미네르바의 에이프릴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다 나고야 말았다.  
“스카프가 뭐야. 달에는 바람 안 불어.”
“이게 무슨 목도리야? 털모자야? 추울까봐 보내는 게 아니잖아.”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선물이란 게 기왕이면 받는 사람한테 필요한 물건이어야지.”
“알긴 뭘 알아, 전혀 모르고 있잖아. 여자한테 선물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없긴 왜 없어, 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줬던 건 뭔데?”
“뭐? 프루스트? 땡잡은 줄 알아. 그런 걸 선물 하고도 나랑 결혼 할 수 있었...”
언성이 높아지기 전까지 듣고만 있던 점원이 나섰다.
“포장... 할 까요?”
“네, 해주세요.”
  아내가 말했다.
“아뇨, 잠깐.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
  내가 말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포장하라니까요!”
아내의 목소리에 기가 눌린 점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스카프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더 큰 소리가 날 까봐 잠자코 있었지만 싸움은 집에 가서도 이어졌다.
결국 육아도우미로 나온 아주머니가 여기서 더 목소리를 높이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말까지 나온 다음에야 나는 서재에 틀어박히기로 했다. 아내의 손길이 닿지 않을 곳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어 한 대 피운 다음 방향제를 뿌리고 나서 스크롤을 펼쳤다.

세 개의 메시지가 들어 온 것을 확인 한 뒤 먼저 QA팀의 리포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만테크닉스의 nxr-45모델은 민간 수요가 가장 많은 프레임이다. 인공 인격체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그들이 던져준 충격은 ‘공포’이라는 단어로 집약되었다. 수백 년간 인류에게 각인 된 ‘인간형 로봇’의 이미지가 실체화 되자 개발사인 만테크닉스는 그들의 제품이 가전제품의 일종이라는 이미지 마케팅에 주력했다. 이들은 인간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닌,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와 다를 바 없다고 선전하는 것이 회사의 마케팅 방향이었다.
군사용, 산업용으로 최초에 개발된 프레임들과 달리 nrx시리즈는 민간용으로 개발되어 다양한 형태의 의체 적용이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45형은 민간의 가사, 사무처리, 정보처리 분야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모델이다. 20대 중반 여성의 평균 체형을 갖춘 nrx-45는 만테크닉스의 민간 시장 최대의 베스트 셀러였다. 특히나 커스텀 의체의 적용이 쉬운 편이라 서드파티 의체 업체들 역시 선호 하는 모델이다.
배정된 조사건의 대상 모델 역시 nrx-45였다. HFP에 의해 민간에 대여되는 인공인격체들은 별도의 고유번호와 함께 인간명을 갖고 있었다.

“윤지수씨 때문에 오신 거죠?”
인천 시립도서관의 자료관리부장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는 조성화 부장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얼굴빛이 비쳤다.
나는 동석한 QA팀의 한 진규 대리의 얼굴을 힐끔 쳐다 본 다음 그가 짓고 있던 미소를 흉내 내려 했다.
“일종의 정기 점검이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여기 한 대리가 하던 점검 업무와 크게 다른 건 아니니까  업무에 방해가 안 되도록 조용하게 처리 하겠습니다.”
나는 ‘처리’라는 단어를 쓴 게 실수는 아닐까 걱정했다. 걱정은 어느 정도 들어맞은 듯 했다.
“윤지수씨는 우리 도서관 직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직원이에요. 다른 직원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업무능력도 뛰어나고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도 좋죠. 평판도 좋고요. 이용 시민들이 뽑는 이달의 친절직원에 거의 매달 뽑힐 정도로 인기도 좋아요. 그래서 티 안 나게 차점자를 이달의 친절직원으로 올려놓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그렇다고 6개월 내내 윤지수씨 사진만 게시판에 붙여 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지수씨가 로봇, 아니…… 인간이 아닌건 확실한건가요?”
조성화 부장은 게이를 호모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려는 정치적 공정함에 대한 강박을 가진 풋내기 대학생처럼 단어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담임선생 앞에서 아이 자랑을 시작 하려는 학부모처럼 활짝 웃었다.
“ 네, 백 퍼센트 확실한 저희 제품입니다. 물론 의체의 상당 부분은 다른 전문 업체들의 것이긴 하지만요.”
그녀는 ‘제품’이란 단어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이와 잘 어울리는 조화롭게 진 얼굴 주름에 미간의 주름이 더해지자 활기찬 인상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을 나는 최대한 건방져 보이지 않는 손동작으로 막은 다음 사전 절차에 들어갔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의례적인 절차가 하나 있어서요. 아시겠지만 인공 인격체는 몇가지 연방법과 국제법에 의해서 관리 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향후에 있을지 모르는 예상치 못한 분쟁을 막고 관계자를 보호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들을 면담자들께 고지 해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복잡한 것은 아니니까 제가 읽어드리는 고지를 들으시고, 동의 해주셔야 할 부분은 동의 해주시고, 고지를 들었다고 말씀 해주셔야 할 부분에서는 간단하게 ‘네’라고만 답해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이제 나를 보험 판매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싫다니까.
나는 소형 영상 녹화장치를 들어 올리고 고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냥 읽어도 족히 5분은 넘게 읽어야 하는 고지문은 매 항목마다 설명을 요구하고 질문을 하는 조성화 부장 때문에 10분이 다 되어도 못 읽었다. 그녀는 녹화된 면담 기록이 연방공공안보국에 제출 된다는 사실에 못마땅해 했다.
“조사가 끝나면 저희 회사 쪽의 면담 기록은 모두 삭제됩니다. 기록은 공안과 자유인민연합  시민국에만 보관 되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되는 셈이죠. 설사 공안에서 열람 하려 해도 미네르바 총독의 결제를 얻어야 합니다. 외교적 보안 문서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 총독이라면... ‘달의 여왕’을 말씀 하시는 건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들 부르더군요.”
조성화 부장은 탕비대 쪽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며 말 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되네요. 말씀 드렸다시피 윤지수씨는 다른 직원들보다도 뛰어나요.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부서 전원을 윤지수씨와 같은 모델로 바꿔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예산만 더 있다면.” 그녀는 나와 한 진구 대리에게 커피 잔을 건네어 주었다.
“한 대리님과 이야기 나눌 때도 이게 큰일일거라는 생각은 못했거든요.”
“큰일이 아닙니다.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말씀 드려야겠네요.” 나는 커피 맛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을 늘어놓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고지문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APO (Artificial Personality Object:인공인격체)는 제품인 동시에 시민 입니다. 물론, 자유인민 연합에서만 통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그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외국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 다는 점이죠. 윤지수씨가 여권과 특수비자를 갖고 있는 게 그 이유고요. APO는 두가지 관점에서 관리 됩니다. 첫 번째는 고가의 특수기계라는 점이죠. 양자두뇌 뿐 아니라 의체자체도 고가의 정밀 기계입니다.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탱크에 깔려도 벌떡 일어나는 물건이 아닙니다. 특히나 윤지수씨 같은 정교한 의체는 주기적인 정비도 받아야 하고요. 한 대리가 하는 일이 그거죠.
동시에 인공인격체는 자유인민연합에서는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법률적, 외교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옵니다. 지구상의 국가들은 APO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아요. 하지만 자유인민연합은 그렇게 하고 있죠. 솔직히 지구 궤도에 3,000개 이상의 핵미사일 위성을 띄워놓고 지구를 겨누고 있는 애들이 ‘우린 오늘부터 진공청소기 에게도 시민권을 주기로 했어.’라고 선언 하면 우리는 진공청소기를 위한 여권에는 어떤 내용을 기록해야 하나 하고 고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네르바 조약이 어떤 건지 알고 계시죠? APO는 정밀기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근접한 권리를 가진 생명체입니다. 저희 회사가 민간분야에 APO를 대여하는 사업은 인간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의 세상에서 APO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미리 예측하기 위한 것입니다. 윤 지수처럼 인간과 거의 근접한 외모를 갖는 인공인격체는 드문 모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윤 지수 같은 모델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도서관에 납품 될 때 이용객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부서로 배치 해달라고 요청 드린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양자두뇌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APO 뿐 아니라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조 성화 부장은 마시던 커피가 마음에 안 든 것인지 아니면 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윤지수씨는 지난 6개월 동안 이 도서관에 훌륭하게 적응 했어요. 단지 업무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도서관 직원들과도 관계가 좋고, 이용하는 시민들에게도 평판이 좋죠. 다만 몇 주 전부터 말수가 적어지고, 혼자 식사를 하려 한다거나, 하여튼 혼자 있으려는 때가 많아졌어요. 단지 그것뿐이라고요.”
“그리고 대출실 순환업무 순번을 바꿔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했죠.”
“무리한 요구는 아니죠!”
조성화 부장은 자기 목소리에 스스로 놀란 듯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업무를 바꿔준 직원은 이미 전부터 지수씨 덕을 많이 봤던 직원이에요. 당직근무나 휴가 일정을 조정해야 할 때 언제나 지수씨 대신 근무 해주었죠. 그런 건 생각도 않고 저에게 와서 투덜거리기에 뭐라고 한마디 해주긴 했지만요.”
나는 잠시 한 대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열람실 순환업무 순번을 바꾸려 했던 이유는 들어보셨나요?”
“아뇨, 별다른 말이 없었어요. 그냥 사정이 있다고만 말했어요. 열람실 업무는 일주일에 두 번씩 돌아와요. 열람실 업무가 있는 직원은 그날은 다른 직원 보다 퇴근이 늦어져요. 그래서 오히려 다른 직원들은 약속이 있거나 하는 날에는 피하려 한다고요. 지수씨는 남들이 피하는 업무를 자기가 하겠다고 자청 한거에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됩니다. 양자두뇌의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패턴이거든요.”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몇 개의 단어들을 골라내었다.
“양자두뇌, 그러니까 APO들은 ‘그냥’이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냥’이 있습니다. 우울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시기 가 있을 때는 혼자 있으려 한다든가 할 수 있죠, 하지만 양자두뇌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습니다. 물론 구조상  개별적인 개성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양자두뇌는 요구하는 성능을 내기 위해 신뢰 할 수 있는 행동 패턴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윤지수가 왜 열람실 업무를 대신 하겠다고 했는지 이유는 끝내 말하지 않았죠?”
내 말투가 너무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조성화 부장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도 연장근무순번을 바꿔달라고 부탁 할 때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피곤해서라던가, 다른 날 약속이 있어서 일찍 퇴근해야 한다는 그런 거요. 윤 지수는 이유 없이 연장근무를 자청했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걸 말하지는 않았죠? 저는 그 ‘그냥’ 뒤에 숨겨진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온 겁니다.”
나는 갈라지려는 목을 축이기 위해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말씀 드렸듯 윤지수의 행동은 법에 위반된다거나, 같이 일하는 인간에게 해가 된다거나 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가 제조해서 납품한 제품이 저희가 예상하지 못했던 작동을 보일 때 그런 이유가 뭔가를 알아내야만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거고요. 의체나 하드웨어에 관련된 관리 업무는 한 대리가 충분히 잘 해주시지만, 양자두뇌의 행동과 관련된 부분에서 특이점이 발견될 때 그 이유를 찾아서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교정 할 수 있도록 돕는게 제 일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너무 심각 하게 받아들이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는 병원 의사들도 만테크닉스처럼 일 해준다면 정말 좋겠네요.”
조성화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필요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일단 시작은 좋게 나간 셈이다. 이만 하면.
면담은 한 시간이 조금 못되는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조 성화 부장은 내가 윤지수의 머리를 분해한다던가, 도서관 이용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퍼지건Purge Gun을 쏴 ‘해고시키러’ 온 게 아니란 걸 이해했다. 그녀는 최대한 세심한 주의를 요구했다. 도서관의 몇몇을 제외 하고 그녀가 인공 인격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윤 지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최대한 보호하려는 의도에 맞춰진 조성화부장의 대화는 미네르바 시민국의 조사부 쪽에서도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조사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이 경우는 더했다. 30분 뒤 나는 조 성화 부장이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저 의체는 어떤 변태 작품이야?”
“본사에서 바로 온 겁니다.”
한 대리가 대답했다.
“벤더쪽 커스텀이 아니라고? 양산형 모델 중에 저런 게 있었어? 심하잖아?”
“끝내주죠? 저도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어요. 처자식만 없었으면 데리고 살겠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잠시 한 대리를 흘겨 본 뒤 휴게실 한쪽에 앉아 있는 윤 지수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동안 나는 감탄의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 했다.
인공인격체의 의체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디자인 된다. 통념과는 달리 인간과 흡사한 외모를 갖는 의체는 그리 인기가 높지 않은 편이다. 초기의 어설프게 인간의 외모를 흉내 내었던 의체는 모두 혐오감, 공포감만 조성 할 뿐이었다. 대중적인 반응이 최악에 이르자 회사는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인공인격체가 인간을 모방한 괴물 기계가 아닌 친근하고 유용한 가전제품과 다를 바 없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로 한 것이다. 화이트, 또는 블랙톤의 미려한 디자인으로 마치 수세기 전의 SF광들이 꿈꾸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의체는 대중들에게 인공인격체가 하나의 유용한 기계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의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과 가까운 외모를 지닌 인공인격체에 대한 욕심이 다시 늘어났다. 나는 업무의 특성상 다양한 종류의 인공인격체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첫인상으로 봤을 때 윤 지수는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고의 인간형 모델이었다. 인간형 의체는 인간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주지 않는 외모를 갖는 것이 일차적인 지향점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는 오히려 시선을 집중시키고 불필요한 문제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인간형의체는 오히려 평범한 외모를 더 선호한다. 다만 대인 접촉이 많은 업무에 투입되는 인공인격체의 경우, 외모가 불러일으키는 호감으로 인한 장점도 상당한 편이라 적정한 외모의 균형을 찾는데 관건이 있다. 윤 지수는 그 균형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제작자가 좀 과한 욕심을 부렸던 게 아닐까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예인의 외모가 아닌 그녀는 생동감과 아름다움으로 넘쳐흘렀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확률과 통계에 의해 산출해낸 각도와 균형으로 이루어진 외모가 아니었다. 게으르고 천편일률적인 성형외과 의사들이 삼는 미모의 기준에서 지수는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사진을 본다면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망설임이 따를만한 인상이었지만 직접 본다면 미인이 아니라 부정하기 힘든 외모였다. 리포트에 첨부된 사진으로 이미 얼굴은 익혀두었지만 실물을 보고 나니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한 대리가 자리를 뜬 뒤 나는 윤 지수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신분증을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들어 보였다. 잠시 그녀의 눈에서 어떤 반응이 오는지 관찰했다. 동공에서 두 번의 녹색반응. 좋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그녀는 내가 회사에서 나온 조사관임을 알 것이다. 신분증에 붙어 있는 작은 특수 홀로그램 패턴이 그녀의 눈에 인식되면 그녀의 두뇌는 본사의 통제위성과 연결되어 신분증을 들고 있는 사람의 안면 패턴을 인식 한 뒤 정확한 조사관인지를 확인 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프라임오더 Prime Order를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충민 조사관님.”
나는 대답 없이 이삼 분 정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한 정장 차림의 그녀의 앞에는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책을 들어 제목을 확인 한 다음 말했다.
“도서관이 나오는 이야기네.”
“네, 그런데 이 콩스탕스란 여자는 아무래도 망상증이 의심돼요.”
그녀는 책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녀의 의체 설계자가 대체 어떤 변태일까 궁금해졌다. 지수는 책을 덮은 다음주변을 둘러본 뒤 나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 녀석 봐라?’
“죄송합니다. 불쾌하게 해드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지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크롤을 꺼냈다.
“PJSN라인 의체는 처음 보시나 봐요.”
그녀는 ‘의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눈동자가 잠시 나를 벗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의체관련 정보에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지수는 다시 웃었다. 활짝 핀 목련 같은 웃음이다. 맙소사.
“그거 아세요. 조사관님? 조사관님은 말을 할 때 일반적인 사람보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이 긴 편이네요. 그건 입으로 내뱉는 구어라도 비문이나 잘못된 표현을 하지 않기 위해서 신경 쓰고 계시기 때문이죠. 말끝에 웃음소리가 살짝 들어가는 건 스스로의 말투가 화난 것 처럼 들려서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런 것 같고요. 그런데 좀 전에 하신 말씀은 비문이네요.”
그녀의 말에 내가 대답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는 동안 지수는 다시 미소 짓는다. 나는 화난 목소리로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프라임 오더 Prime Order . 당장 스캔 중지해.”
지수의 표정에 머물던 생기가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내가 말했다.
“퇴근은 몇 시지?”
“오늘은 여섯시입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실금이 맺혀진 유리알 아래로 시침과 분침은 오후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다시 눈길을 들어 올리자 지수의 눈이 마주쳤다.
동공의 팽창.
그녀는 다시 눈길을 내 시계에 맞추고 말했다.
“6시 20분쯤에 주차장에서 한 해규 대리의 차를 같이 타고 레지던스로 퇴근 합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방문자 전용 주차장을 이용합니다.”
“그럼 레지던스에서 보지. 그전에 조 성화 부장과 이야기 해둘 사항도 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를 잡아 끈 것은 지수의 말이었다.
“타이맥스 106-NT.”
“뭐라고?”
“시계요. 해군에서 복무 하셨어요?”
나는 잠시 그녀의 표정에  얽혀 있는 어떤 목적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호기심이다.
내가 말하려 입을 열 때 그녀가 먼저 내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맞춰 볼게요. 연방해군 항공전단. 파일럿?”
나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VHA-66, 코 파일럿(Co-Pilot)"
“헬하운드. 그럼...남중국전쟁에도 참전 하셨나요?”
“왜 그렇게 생각 하지?”
그녀는 다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VHA-66은 해병 항공단과 해군 항공전단에서만 사용되었잖아요. 재래식 무기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남중국전쟁 이후에는 모두 퇴역했어요. 타이맥스 106-NT는 해군에서 주문제작해서 파일럿들에게 보급했던 모델이죠? 시곗줄 한쪽에 작은 나침반이 달려 있던 자리를 보면 원래 있던 나침반은 떨어져 나갔나 보네요. 그리고 그거요.”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의 끝에는 참전용사임을 알리는 약장이 달린 내 양복 상의가 있었다.
“남중국전쟁에서 격추된 해군 헬하운드만 모두 아흔일곱 기였죠.”
“그런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돼.”
나는 다시 스크롤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드셋으로 에이프릴의 웃음소리가 따갑게 울렸다. 윤지수와의 첫 만남이 녹화된 영상을 본 에이프릴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세상에... 잠깐만... 숨 좀 고르고. 자기, 불쌍해서 어떡해? 으하하하하.”
“시끄러워.”
“미안, 전쟁 때 이야기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러나 화면에 나타난 에이프릴의 얼굴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에이프릴은 웃음을 진정한 뒤 몇 개의 그래프 영상을 앞으로 끌어다 놓고 쿠키를 집어먹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 만나기 몇 분전 두뇌 활동곡선이랑 감정회로 패턴인데 복잡하게 얽혀 있긴 하지만 특별한건 없어. 일반적인 긴장감만 두드러지는 정도야. 근데 이게 재미있네. 책을 읽고 있는척했지만 전혀 읽고 있지 않았어. 양자두뇌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위화감이나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기만행동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자기가 휴게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얘는 계속 주변을 스캐닝 하고 있었어. 소리와 움직임들, 온도의 변화 같은 것들 말이야. 인간 식으로 말하자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거네.”
“맞아.”
나는 차 시트에 몸을 묻으며 끙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조사관들을 만나는 양자두뇌들은 어느 정도 예민함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장은 그들이 태어난 곳이라 사방에서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를 느낄 수 있지만 세상으로 나오면 그들에게는 조사관이 조물주의 대리인인 셈이다. 프라임 오더를 내릴 수 있는, 양자두뇌를 초기화에 가깝게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명령 권한을 가진 인간.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서 늘 두뇌 활동의 절반가량을 할애 하고 있는 양자두뇌 들로서는 가급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조사관들일 것이다. 양자두뇌들은 조사관들이 ‘넌 결함이 있어. 내가 널 바로 잡아줄거야. 그러니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과 행동패턴 데이터들, 축적된 정보들을 모두 백업 해놓고 새로운 너로 되돌려놓을거다.’라고 말할 까봐 두려워한다. 어떤 인간들은 평생에 걸쳐 간절히 바라는 일이 양자두뇌들에게는 죽음과 동일한 의미이다.
윤지수의 레지던스가 있는 건물 지하주차장에서는 위성통신망인 코스모 넷의 접속이 시원치 않아 나는 차를 대로변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해 놓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잔뜩 틀어 놓은 히터의 열기 때문에 차창에 김이 서려 젖빛 장막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하늘위에 떠있는 창백한 달에 있을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다시 울린다.
“어머, 어머, 얘 봐라?”
내가 다시 스크롤을 들어 화면에 시선을 맞추자 그곳에는 잇몸을 드러내고 이빨을 딱딱 맞추는 에이프릴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흥미거리를 찾았을 때 그녀가 보이는 버릇이다.
“자기 무릎 다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왜?”
“두뇌 활동 로그에, 자기가 들어 올 때 움직임을 스캔한 기록이 있어. 음....... 이걸 가지고 위성망으로 의체 회사들의 제품목록을 뒤졌네. 인공관절쪽으로 80개 정도의 모델을 추려서 저장해놨는데?”
남중국전쟁에서 돌아온 나는 무릎에 입은 부상이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수술을 결심했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후송되기 전 상해의 병원에서 받은 수술은 결과가 그리 썩 좋지 못했다.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야 새로운 인공관절로 교체수술을 받아야했다.  그 결과 지금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절룩거리는 오른쪽 무릎을 갖게 된 것이다. 에이프릴이 정리해준 윤지수의 두뇌 활동 로그를 살펴보며 강하게 떠오른 의문은 하나뿐이었다. 윤지수가 조사를 받게 된 사유는 아주 단순하고 사소하다. 윤 지수는 업무에 태만 한 적도 없었고, 불필요한 집착이나 강박을 보인적도 없었다. 단지 명확한 이유가 없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인간은 그럴 수 있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할 수 있다. 왜 그따위 남자를 다시 만나냐는 질문에도 동일하게 답할 수 있다. 물론 그 ‘그냥.’이라는 말 한마디 뒤에 숨은 무수히 많은 두려움과 자신도 모르는 동기, 수년간의 정신과 상담으로도 파내지 못할 비밀이 숨어있다. 양자두뇌에게 이런 것들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는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란 건 없다. 이미 말했듯이, 그걸 확인 하는 게 내 일이다.
카메라를 통해 말없이 스크롤의 위성 수신 안테나를 펜으로 톡톡 건드리던 나를 보던 에이프릴이 입을 열었다.
“APO들이 항상 주변과 상대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려 하는 건 정상적인 행동이긴 해. 얘는 좀 다른 애들보다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객체간의 개성이 허용하는 범위에 있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말하면서 ‘내말이 맞는다고 해줘’ 라는 표정 짓지 마.”
에이프릴이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M-Port에 연결되면 로그덤프부터 보내줘. 소일거리로 괜찮겠는데?”
“알았어, 들어온다. 나, 가볼게.”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흰색 밴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하다못해 ‘만테크닉스’라는 로고 조차도 박혀있지 않다. 회사가 한 대의 인공인격체를 관리하기 위해 붙이는 장비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다양한 고가의 물건들이다. 인공인격체 자체가 고가의 물건이다 보니 관리를 위한 부수적인 장비들도 그처럼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인공인격체를 대여하여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관리를 위해 지출되는 비용이 역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발생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어차피 회사에서도 장기적인 투자의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공인격체들은 애초에 본사가 있는 자유인민연합에서만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다. 지난 두차례의 대전쟁에서 자유인민연합이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을 굴복시킨 것도 그 역할이 컸다. 2억의 지구외 행성에 흩어져 사는 인류가 지구상의 70억 인류를 굴복 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인공인격체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전쟁이후 인민연합은 지구와의 외교를 복구 하면서 지구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그들이 통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주기로 하였다. 인공인격체를 생산하고 임대 할 수 있는 기술과 권리였다. 인민연합은 지구의 국가들에 생산공장을 세우고 양자두뇌와 그것을 탑재 할 수 있는 의체의 생산 기술을 이전했다. 물론 이전에도 US로봇과 같은 지구에 본사를 둔 양자두뇌 제조사가 있었지만 성능과 모델의 다양성으로는 자유인민 연합에 본사를 둔 만테크닉스가 시장의 8할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양자두뇌의 설계와 제조기술은 인민연합에서 수출통제품목으로 지정된 기술이었지만 연합과 각국 정부의 협력 하에서 기술유출을 통제한다는 조건으로 일부 이전되었다. 때문에 인공인격체의 정비는 각국 지사에서도 그 인력을 엄격하게 관리 하고 있었다.
윤지수를 따라다니며 혹시 모를 비상수리와 일반정비를 담당하는 한 진규 대리 역시 연방공안국의 신원 보증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이일을 하고 있을 정도다. 그녀가 도서관 사서일을 통해 받는 봉급은 그녀의 관리를 위해 투입되는 비용의 1/10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별도의 레지던스를 회사가 임대해준 윤지수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혼자사는 아가씨 집에 외간남자들이 들락거리면 오해 좀 받겠는데.”
나는 현관을 들어서며 기분이 멋쩍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여긴 회사에서 통째로 임대한곳이라서 입주자 대부분이 직원들입니다. 저도 식구들이랑 같이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그랬는데 거절했죠.”
제법 널찍한 내부를 둘러보며 나는 ‘대체 왜?’라고 묻는 표정으로 한 대리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저녁마다 저런 아가씨랑 딴집살림 하는 걸 좋아 할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내 업무에는 인공인격체를 조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녀와 접촉하는 ‘인간’들이 대상제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조사하는 것도 포함된다. 늘 가까이 있는 한 대리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된다.
“제품은?”
“샤워중입니다.”
인간이 물로 의미하는 샤워가 아니다. 그녀의 의체에 맞춰 제작된 특수 샤워 부스에서 전용세정액과 건조기로 하는 세정작업을 의미 한다. 나는 집안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위치들을 확인 한 다음 그것들을 통제하는 콘솔을 찾았다. 콘솔의 봉인이 정상인 것을 확인 한 다음 봉인을 떼어내고 데이터 링크를 연결해 지난 1년간 촬영된 방안의 감시 영상과 M-Port의 데이터들을 스크롤에 다운로드 받았다. 작업 중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대리가 입을 열었다.
“저, 조사관님. 조사관 시험 보려면 정비사 경력이 도움이 되나요?”
나는 데이터 다운로드 상태를 확인한 다음 링크 포트를 뽑아내었다.
“글쎄요. 나 때는 운이 좋아서 경력 없이도 들어왔는데. 왜요? 이쪽일도 꽤 괜찮지 않아요? 보수나, 대우나.”
한 대리는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 뭐 딱히 지금 일에 불만 있어서는 아니고요. 앞으로의 생각도 하다 보니 욕심도 좀 나고…….”
나는 콘솔 커버에 봉인태그를 붙이고 난 다음 몸을 일으켰다.
“난 이 일 하다가 이혼 당할 뻔했어요. 하지만 이번 조사결과 봐서 큰 문제 없으면 나중에 추천서정도는 써줄 수 있겠죠.”
한 대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아까 조 성화 부장에게 짓던 영업사원 미소는 아니었다. 잠시 후 윤 지수가 샤워부스에서 나왔다.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채 나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뱉지 않기 위해 신경 썼다. 지수는 나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거실 한가운데의 M-Port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으면 내가 점검작업 과정을 옆에서 지켜봐도 될까요?”
한 대리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지수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는 미소 지었다.
M-Port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치과 환자의 악몽 속에나 나올법한 물건이었다. 치과의 진료의자와 비슷하게 생긴 메인체어의 주변에는 세대의 카메라와 두 종류의 스캐너가 달려 있고 70여개의 커넥터가 달려 있다. 인공인격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몸을 세척하거나 정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HFP의 프로그램 특성상 투입된 제품들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자잘한 사고나 돌발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일 정비를 받고 있다.
비록 인공의체라 하더라도 20대 여성의 나체형상을 두 명의 남성이 함께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혼자서 지켜보는 게 더 편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한 대리는 장갑을 낀 다음지수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목 뒷덜미를 살펴보았다. 커넥터가 연결되는 피부 접합점의 끝을 찾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다 안 말랐네? 마저 말리고 눕자, 응?”
한 대리는 마치 어린 딸을 대하는 말투로 지수에게 말 했다.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메인체어에 걸터앉아 드라이어로 한 대리가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타월을 가슴까지 끌어 올린 채  앉아있는 그녀의 훤하게 드러난 등을 보면서 나는 상해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달빛보다 창백했던 그녀의 등을 말이다.
지수의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한 대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방안의 침묵이 불편했는지 말을 꺼냈다.
“집에서도 마누라한테 이렇게 해주곤 합니다.”
“좋아 하겠네요.”
“안 쫓겨나려면 그래야죠.”
그의 말처럼, 지수의 머리를 말리는 한 대리의 손길은 제법 능숙해 보였다. 흡사 미용사처럼 보일 정도로 능숙하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머리를 다 말린 후 한 대리는 무릎을 굽혀 지수의 눈높이로 자세를 낮춘 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됐다. 이제 시작할까?”
지수는 다리를 메인체어 위로 올려 놓았다. 자리에 눕기 전 머리를 들어올려 한 대리가 커넥터를 목 위로 연결하도록 했다. 곧 흘러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타월을 한 대리가 다시 매만져 그녀의 몸을 덮었다.
의체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형 의체를 가진 인공인격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나체에 대한 수치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인공인격체에게 옷을 벗으라고 요구한다 하여도 대부분은 그 요구를 정중 하게 거절하거나 무시 할 것이다. 여성형 의체를 가진 인공인격체들은 여성이 다른 이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다. 때로 이것은 자존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인공인격체를 보호하는 심리설계의 최외각 방어막은 자존감이다.
“위장청소랑 구강세정은 했어?”
지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 대리는 잠시 스캐너의 작동을 위해 메인체어 상단을 가로지르는 활대의 위치를 조정했다. 스캐너 위치 조정이 다 끝난 다음에도 한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스크롤을 M_Port의 콘솔에 연결하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 대리가 지수에게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하면 스캐닝은 나중에 할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수가 대답했다.
내가 스크롤과 데이터 링크를 연결하느라 몸을 숙였다가 일으켰을 때 지수의 몸을 덮고 있던 타월은 걷어진 상태였다. 한 대리는 지수의 나체를 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M-Port의 컨트롤 패널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메인체어 상단에 설치된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하며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지수의 의체는 그 설계자가 얼굴에 공들인 것만큼이나 세심하게 설계했음을 알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여성이 갖는 평균 신장에 맞춰 설계되었지만 그녀의 몸은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움이 비로소 터져 나오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동결시켜 놓은 것 같았다. 그저 꼬맹이인줄 알았던 소녀가 ‘언제 쟤가 저렇게 예뻐졌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그 순간 말이다. 풍만함과 관능으로 가득한 의체나 대놓고 소아성애 취향을 드러내는 의체는 여러 번 보아 왔지만 지수와 같은 의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양산형 모델에서 이런 걸작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캐닝이 진행되는 동안 한 대리가 말했다.
“전에는 군사용 모델들을 맡았었는데 일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거의 야전병원 같은 분위기였거든요. 그에 비하면 지수는 얌전해서 좋은데, 대신 같은 일만 반복되니까......”
“지겨워요?”
지수가 말을 가로채었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말없이 한 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대리는 잠시 말을 고르려는 듯 머뭇거렸다.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편해서 좋다는 거지.”
“말썽을 부릴 줄 몰라서 안 부리는 건 아니에요.”

일일정비작업은 한 시간에서 조금 모자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수의 피부에 코팅액을 다 바른 뒤 한 대리는 장갑을 벗고 욕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타월을 그냥 손에 든 채 나체로 거실 안을 돌아다니는 지수와 눈이 마주치기 싫어 나는 스크롤만 쳐다보며 데이터의 다운로드 진행 막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입으러 들어간 줄 알았던 지수는 여전히 벗은 채로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두벌의 원피스가 있었다.
“어떤 게 더 나아 보여요?”
나는 곁눈질로 그녀가 들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둘 다 심플한 디자인이다. 나에게 여자옷을 구분하는 능력은 바지와 치마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정도이다. 지수가 들고 있는 옷도 한쪽은 붉은 색이고 다른 하나는 노란색이라는 점만 제외 하면 차이를 알기 힘들었다.
“노란색.”
지수는 노란색 원피스를 들어올려 보더니 소파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붉은색 원피스를 그 자리에서 입었다. 지수는 그대로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데이터 확인작업을 하는 나를 보며 지수가 말했다.
“미네르바쪽 분석담당이 닥터 부이죠?”
나는 가끔 에이프릴이 자신의 풀네임을 외우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그리스, 한국, 러시아, 캐나다계의 피가 복잡하게 엉긴 그녀의 가계만큼이나 그녀의 이름도 그런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적어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에이프릴의 풀네임은 ‘에이프릴 안드레아 수진 부이’였다. 수진과 부이 사이에 그녀의 친, 외가 할머니 이름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언뜻 들은 기억이 있지만 베트남 출신의 할머니 이름은 발음을 듣고도 도저히 맞게 쓸 자신이 안 나는 이름이었다.
“응, 만나본적 있어?”
“아뇨, 전 지구에서 제조 되었는걸요. APO를 기준으로 하면 미네르바에서 태어났지만.”
지수는 자기 치맛자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자료는 찾아봤어요. 대단한 미인이던데요? 조사관님이랑은 일로만 아는 사이인가요?”
“아, 지구에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났어. 쓰던 논문 때문에.”
“어땠어요?”
“뭐가?”
“첫인상이나 ‘느낌’같은 거 말이에요.”
데이터 다운로드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슬슬 퇴근이 눈앞에 보인다.
“그냥, 키가 크다? 루나리안이다 보니까 중력증후군 때문에 몇 달 동안은 고생 좀 했지.”
그녀는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는지 ‘흐-응’하는 콧소리만 내었다. 저런 못된 버릇은 누가 집어넣은 거지?
“재미없네.”
손 씻는 김에 세수까지 하고 욕실에서 나오는 한 대리에게 고개를 돌린 지수는 소파에 몸을 한껏 기대며 물었다.
“퇴근 안하세요?”
“이제 해야지, 조사관님은요?”
“저는 인터뷰 할게 있어서요.”
내가 스크롤을 펼쳐 데이터들을 확인 하는 동안 한 대리는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챙긴 다음 집을 나섰다. 딱히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은근히 자리를 빨리 피하려는 눈치였다. 한 대리가 나가고 난 다음 나는 스크롤의 데이터들을 미네르바에 있는 서버로 전송을 걸어놓고 잠시 M-Port옆에 기대어 앉아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M-Port가 거실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인간이 사는 집이 아니니 그 특별함이 없다는 것이 특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책들이었다. 집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눈에 안 띄던 것들이 구석구석 시선을 돌릴 때마다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는‘저기에 책이 있었나?’하고 새삼 놀랄 만큼 구석구석이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니 책들은 마치 자가 증식했던 것 마냥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종이박스를 세워 만든 임시 책장에 쌓인 문고판 책들로 눈길을 돌렸다. 거리가 좀 있어서 알록달록한 책등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가 책들을 한 두 권 뽑아 살펴보았다.
“청춘의 빛, 두근거리는 키스, 그에게 한걸음 더…….”
제목들을 소리내어 읽고 있는 나를 본 지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의 책을 빼앗았다.
“그렇게 비웃을 건 없잖아요!”
“안 비웃었는데? 너 또 스캔 했어?”
지수는 대답 없이 몸을 홱 돌리고는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 도서관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차분한 얼굴로 사람을 잡아끌어 당기는 매력적인 아가씨는 온데간데없다. 버릇없는 망아지 하나만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들은 다 네가 읽는 거야?”
“네, 전부 제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산거에요.”
‘쥐꼬리만 한’에 강세를 두어 말하는 지수를 보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녀는 인간 직원 들보다도 적은 임금으로 대여되고 있다. 그나마 그녀가 받는 임금의 대부분은 만테크닉스측에 대여비로 회수된다. 자신의 생명의 값을 스스로 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책이라면 기본적으로 메모리에 내장되어 있지 않나? 그리고 신간이라고 해도 파일을 직접 받는 게 더 빠를 거고.”
“독서는 책의 내용을 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요.”
지수는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아 허공을 향해 발끝을 뻗었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흙장난 하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흔들었다. 원피스의 치맛자락은 흘러내려 허벅지를 간신히 가릴 정도였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이 전부인 행위가 아니에요. 책장을 넘기는 과정 속에서 글에 동화되고, 읽는 다는 행위를 통해서 단순한 문자의 나열들이 비로소 음성과 영상처럼 하나의 흐름으로서 머리에 각인되는 거니까요. 문자는 터무니없이 불완전한 의사전달 체계잖아요? 특히 한글처럼 문장의 시작과 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언어는. 책장을 넘기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순한 문자로 된 정보들만 있는 게 아니죠. 그 안에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도 있고 망설임과 주저함도 있어요. 때로는 혼란도 있고요. 책장을 하나하나 넘겨가며 읽을 때에만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어요. 그걸 느껴야 비로소 한권의 책을 다 읽는 거죠. 메모리에 바로 파일을 저장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건 온전하게 책을 소유하는 게 아니죠. 서재에 꽂아두기만 하는 책은 소유한 게 아니에요. 비록 세상에 한권밖에 없고, 그 책이 저어기 가니메데 기지의 어느 창고에 있고, 그 책을 읽은 나는 여기, 지구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책의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읽던 시간들과 경험들은 온전히 나의 것이죠. 책을 소유한다는 건 그런거에요. 시간이 오래 흘러 설사 그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도,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 만큼은 불변이죠. 그 책과 함께 했던 시간들도요. 책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죠. 저장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건 사서들의 꾸란 같은데서 나오는 말인가? 하루에 다섯 번씩 서가를 향해 절을 하라던가.”
시답잖은 내 농담에 그녀는 킥킥거렸다.
나는 녹화기로 그녀의 말을 담아 미네르바에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물론 방에서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의 대화 내용을 덤프파일로 만들어 전송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나?”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도서관에서는 오히려 읽을 시간이 적어요.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처럼 한가롭게 대출대 앞만 지키는 일은 아니라 서요.”
“로맨스 소설들?”
나는 종이박스에 있는 다른 책들을 들춰보며 말했다. 표지에는 주로 수줍은 처녀와 그녀의 속옷을 벗길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는 표정의 남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요즘에는 주로 데이지 문고들을 읽어요. 잡히는 대로 읽다보니까 그쪽까지 흘러갔네요.”
종이상자 안은 전부 데이지문고 시리즈로 가득 차 있었다.
“조사관님은 전공이 양자두뇌학이었나요?”
“아니, 학부 때는 불문학.”
“정말요?”
지수는 용수철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들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정교한 인간형의 의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공인격체들은 호기심을 보일 때 가장 적극적이다.
“그런데……왜?”
“왜 이일을 하느냐고?”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딴 데로 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병원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난독증 환자가 되어 버렸거든. 읽고 쓰는 게 모두 불가능했어.”
“상해에서 말인가요?”
“역시 내 의료기록을 뒤져봤나 보네?”
힐난하는 듯한 내 말투는 지수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주었다.
“네, 참전용사를 실제로 본건 처음이거든요.”
“용사가 아니야. 포로였지.”
쓴웃음을 짓는 나를 보는 지수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 잡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라오차이 북부에서 배틀로이드 분대를 수색지까지 실어 나르는 게 내 임무였는데 세 번째 출격 때 격추되었어. 구형 RPG에. 박물관에나 들어가 있어야 할 무기였는데, 왼쪽엔진에 맞아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지. 하루정도 구조대를 기다리며 버텼지만 다음날에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혔어. 그리고는 6개월 정도 수용소에 있다가 종전 직전에 석방된 거고. 그다음에는 상해의 연방군 병원으로 갔지. 거기서 전역하고 학교로 돌아간 거야.”
“양자두뇌 쪽으로 바꾼 거는요?”
“문학이 무용無用하다고 생각했거든. 시시한 이야기야.”
서둘러 말을 끊자 지수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나다.
“아까 낮에 나한테 했던 말 말야. 평소에 군사관련 책들도 읽었나보지?”
“남중국전쟁 관련된 책들은 거의 다 읽었어요. 잡지나 기사, 전부요. 시계잡지도 가끔 읽거든요.”
“하필이면 왜 남중국전쟁이야?”
“근 100년 동안 벌어진 전쟁 중에서 가장 바보 같은 전쟁이었으니까요.”
지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마실래요? 캔 음료들 밖에 없지만.”

화면속의 에이프릴은  앞 머리카락을 끌어내려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하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찮겠지 하고 덮어두면 어디선가 큰 게 터질 거 같은 기분이야. 단어 사용 빈도도 마음에 걸리고. 얘는 왜 이렇게 ‘느낌’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보고서에 ‘그냥 개성이 강한 애임’ 이라고 한 줄만 박아 넣고 싶어.”
“얘 조사기간이 언제까지였지?”
“잠깐만, 24일까지네. 아직 며칠 남았어.”
일할 때 서재의 불을 모조리 꺼두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때문에 서재안은 모니터의 불빛뿐이었다. 모니터속의 에이프릴은 잠시 자신의 모니터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입모양만으로도 무슨 단어인지 알 수 있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 아무 말도 안했어.”
“아냐, 했어. 바이폴러 디스오더(Bipolar Disorder)라고 했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APO에서 어떻게 바이폴러가 일어나?”
“네 논문주제도 그거 아니었어?”
에이프릴은 아직 걸음마단계인 양자두뇌 병리학의 주요 연구자였다.
“그건 아직 가설일 뿐이야. 그냥 파형의 낙차가 비슷한 거지 패턴이 일치하는건 아니니까. 그리고 논문사례하고 얘는 비슷하지도 않아.”
에이프릴은 카메라 앞으로 자신의 모니터 두 개를 끌어다 놓고 말을 이었다. 분명히 영상공유 방법을 모르거나 아니면 귀찮아서 그런 것이다.
“여기 좀 봐. 도서관에서 나와서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인데, 자기를 처음 볼 때 하고는 완전히 달라. 뇌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나 마찬가지고 주변에 대한 정보수집 반응도 거의 없어. 인간 식으로 말하자면 한마디로 멍 때리고 있었다는 거지. 자기를 만나기 직전까지의 반응 볼까? 아주 화려하지?  의체에서 사용 가능한 모든 감각장치는 다 동원해서 주변 정보를 수집 하고 있었어, 적외선 투시, 열화상 투시로 자기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건 물론이고. 음성분석에 미세표현 분석까지 다했어. 이 패턴이 나타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지는 않는 건데…….”
“잠깐만, 잠깐.
나는 에이프릴의 말을 끊었다.
“바이폴러는 아니지만 바이폴러랑 파형의 낙차는 비슷한 거 아니야?”
“난 분명히 패턴은 일치 하지 않는다고 말했어.”
“알아, 알았어. 하나씩 정리해보자. 일단, 바이폴러 디스오더 병증의 인간 환자와 두뇌 활동 패턴이 일치 하지는 않지만 낙차는 비슷하단 말이지? 급격한 행동능력 저하와 또...... 뭐가 있지? 갑작스런 과잉행동 사이의 낙차가 비슷하다는 거잖아? 인간의 경우는 일단 생각 하지 말고 양자두뇌만 놓고 보자고. 양자두뇌를 폐쇄된 환경에 놓아두면 이런 그래프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던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던 에이프릴이 대답했다.
“아니, 그랬다가는 우리제품의 80%가 모조리 리콜 될걸. NRX모델은 정교하고 예민하지만 스트레스에 강해. 아주 강력한 외부요인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낙차가 커질 일은 없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강력한 외부요인이라…….”
“주변에 그런 영향을 끼칠만한 요소가 없었을까? 예전 사고 중에 제시카도 그랬잖아.”
“걔는 일하는 환경부터가 달랐잖아. 포르노 배우랑 도서관 사서가 같나? 한 대리는 어때? 레지던스 화면들 분석해봤어?”
양자두뇌에 결함이 생겨 문제가 발생 할 때 가장 먼저 의심을 받는 것은 그들을 정비하던 정비사들이다. 특히나 여성형 의체를 가진 인공 인격체들의 경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최악의 사건은 담당 정비사가 밤에 친구들을 불러들여 인공인격체를 강간하고 난교파티를 벌였던 케이스다. 인공인격체의 정비사가 하는 정비작업을 모두 녹화하도록 하는 규정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이프릴은 등 뒤의 모니터를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감시 영상들 스캔중인데 아직 문제는 없어. 리포트 보면 꽤 성실한 사람 같던데. 근무 중에 전화 통화가 잦은 거 빼면. 통화내용 조사 해 보니까 부인이랑 통화한 게 거의 다야.”
나는 한 진구 대리의 인사기록을 한쪽 모니터에 띄워 놓았다.
“꼼꼼하고 성실해. 인사 평가도 좋은 편이고. 일단 한명은 리스트에서 지워도 될 거 같고, 그 다음은 도서관 사람들인가?”
“내일부터 만나 볼 거야? 놀멘놀멘 하는 일 일줄 알았더니. 좀 꼬이네.”
“응, 좀 꼬였네.”
나는 들고 있던 펜으로 모니터에 나타난 지수의 두뇌 활동 그래프를 툭 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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