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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장

2021.10.31 01:4810.31

동준은 집으로 뛰쳐 들어가 할머니를 찾아 소리를 질렀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슬리퍼가 나뒹굴자 엄마가 큰 소리로 동준을 불러 세웠다.

 

 

준아, 돌아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동준은 방들을 빙 돌면서 할머니가 계신 티비 방으로 돌진하였다.

 

 

할머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좀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리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고, 서로 살가운 말을 하지도 못하였다. 부모님의 휴가 덕에 바다 집으로 와서야 잠깐 뵐 수 있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대화 한 적이 없었지만. 인어를 본 그의 가슴이 콩닥거린 탓에 할머니를 불렀지만, 동준의 입이 얼어붙고 만다.

 

 

뭐니?

 

 

날카로운 인상과 곧은 허리. 얇은 어깨에서 나오는 강직함. 코끝에 걸린 작은 안경 그리고 좀약 냄새. 어린 동준은 겁을 먹어 차렷 자세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아, 아.

 

 

벙어리처럼 입을 벌리고 선 그의 뒤로 엄마가 다가온다. 불쑥 주먹이 그의 머리를 때린다.

 

 

아얏!

 

 

홀딱 젖어선 뭐하는 거니.

 

 

동준의 발밑으로 물이 고이고 젖은 양말이 작은 발자욱들을 만들어 온 곳으로 활개치고 있었다. 동준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욕실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뚜벅뚜벅 티비 방을 빠져 나가며 할머니의 눈을 살폈다. 할머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할머니 인어를 만났어요. 언젠가 저에게 해주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 친구 말이에요. 저녁 해가 저물고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할 때도 동준은 늘 할머니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안절부절 여러 곳을 꼬집는다. 제 반대쪽 손에서부터 젓가락과 식탁보에 까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며 동준은 낮에 본 인어 누나를 그려보았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께로 뺨이 달아올라 동준은 물을 끼얹으며 벅벅 얼굴을 씻었다.

 

 

폴폴, 연기를 흘리며 동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늘상 계시던 티비 방의 장지가 열려있다. 할머니는 없었다.

 

 

엄마, 할머니는?

 

 

글쎄.

 

 

머리에 두른 수건을 양 손에 잡은 채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준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건 고물 텔레비전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유리 화면과 딸깍거리며 돌아가는 단추들. 쓰이지 않지만 할머니는 꼭 간직하고 계셨다. 동준은 낡은 텔레비전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줄곧 만지고 싶었지만 할머니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할머니는 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 동준이가 단추를 돌린다.

 

 

달칵.

 

 

화면이 켜진다. 색이 바래 녹이 낀 해변으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다. 모래사장을 발로 차던 아이들이 고개를 돌리고는 화면 쪽으로 달려온다. 화면으로 젊은 여자와 남자가 웃으며 아이들을 반긴다.

 

 

어머, 오랜만이네.

 

 

동준이가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등 뒤에 서있다.

 

 

으앗.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인다. 움츠러든 동준을 보고서 엄마가 허탈한 웃음을 낸다. 동준이의 젖은 머리칼이 엄마의 손에 헝클어진다.

 

 

마을 해변에서 찍은 거래.

네 아빠 가족들이 찍힌 거란다.

 

 

동준이가 화면을 가리켜 묻는다.

 

 

저게 아빠야?

 

 

동준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짓궂게 웃으며 모래를 사방으로 흩뿌려대고 있다. 엄마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래, 아빠도 너처럼 아이였을 적이 있단다.

 

 

엄마가 동준을 끌어 곁으로 안는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이걸 버리지도 않고,

잘 간직하고 계셨네.

 

 

할머니 말이야?

 

 

그래 저기 있는 예쁜 여자 말이야.

 

 

곱상하게 서있는 여자가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모래밭으로 쓰러진다. 웃음을 터뜨린다. 환한 웃음이 가득 얼굴에 번져 어여쁘게 빛이 난다. 동준이는 할머니가 처음으로 예쁘다고 생각하였다. 저 사람이 정말 할머니가 맞을까.

 

 

정리하고 잘 준비하자, 준아.

 

 

엄마가 낡은 브라운관 티비를 끈다. 빛이 바랜 해변 속 가족들이 모습을 감춘다.

 

 

 

 

동준은 밤 중 홀로 일어나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었다. 할머니가 있는 티비 방의 장지문을 살짝 연다. 창을 열어 바닷바람이 불었고 할머니는 안락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동준은 용기가 샘솟았다. 아까 본 예쁜 여자 덕일까. 할머니의 옛 적 모습을 보고 있으면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할머니도 웃어줄지도 모른다. 내 얘기를 들어주실 지도 모른다. 게다가 할머니가 그러셨는걸. 동준은 용기를 내어 안락의자로 숨죽여 걸어갔다.

 

 

할머니.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쥔 채 말을 건다. 눈을 감고 있던 할머니가 눈을 떠 동준을 본다.

 

 

무어냐?

 

 

꼴깍.

 

 

침을 삼키며 동준은 겨우내 입을 떼었다.

 

 

나 인어를 만났어.

할아버지가 이야기하시던 인어 말이야.

 

 

할머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동준은 할머니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그의 입이 줄줄 문장을 뱉어낸다.

 

 

아직도 그곳에 있었어.

할아버지가 말했잖아.

어렸을 적 친구였다고.

그리고.

 

 

조용히.

 

 

할머니?

 

 

고개를 드는 동준에게로 할머니는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질책을 하듯, 벌을 주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입가를 내리 누른 채로. 동준은 따지듯 팔걸이를 흔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도 말했잖아.

할머니도 인어 누나를....

 

 

조용히 해!

 

 

고함 소리. 동준이의 말소리가 소라 껍데기 속으로 쏙 숨어 들어간다. 할머니의 무서운 얼굴이 그의 몸을 꽉 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린다. 울음이 벤다. 동준이의 눈과 목 어쩌면 그의 걸음에서 까지. 낡은 화면 속 젊은 여자의 환한 웃음이 바닷물에 쓸려 자취를 감춘다. 할머니의 고함이 한 밤의 악몽이 되어 동준은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죽이려 애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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