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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엘리제를 위하여(PART. B)

2016.04.28 15:3404.28

 
 남자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붉게 물든 채로,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수정을 향해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남자의 이성은 세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자신이 벌이고 있는 짓을 3인칭화하여 바라보는 듯한 감각. 기묘한 부유감이 기분 나쁘다.
 손이 부러졌다. 고통이 육신과 정신을 잇는다. 핏발 선 남자의 눈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부유감이 삽시간에 사라진다.
 알겠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번을 시도해도 소용없어. 너는 결국 미칠 테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공격하게 돼. 내가 설계한 대로.
 남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목소리를 무시하고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검은 방.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장소. 목소리는 아직도 재잘거린다.
 그러니까 후회할 필요 없어. 자책할 필요 없어. 내가 만든 길을 얌전히 따라와.
 웃기지 마. 남자는 이를 으득 갈았다.
 언제까지고 이용당할 줄 알고?
 남자는 검은 방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과는, 보시는 대로.
 
 B. 마법사의 회고
 
 "후기라고 해야 할 지 잡담이라고 해야 할 지 판단이 안 되니 그냥 경험담이라고 하자. 어차피 차원교차에 대한 논문은 이것으로 종결지었고 양식 밖으로 벗어난 이 부분은 재고할 가치도 없는 낙서 쪼가리가 되어 결국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인용될 리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깨에 힘 빼고 보아라.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 너무 진지해지지 마라. 어떠한 논리적인 전개도 합리적인 설명도 없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을, 말하자면 침대맡에 누워 듣는 늙은이의 옛날 무용담 같은, 딱 그 정도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신은 베티나라는 마법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불, 물, 흙, 바람 모두에 능통한 원소마법사? 용사 루트비히와 함께 마왕을 무찌른 대마법사? 좋다.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자를 판단하는 재료는 세간의 풍문뿐일 테니. 물론 그런 걸 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나 본 베티나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주 옛날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그녀의 전성기, 용사와 함께하던 그 시절의 베티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디 보자. 지금은 도플갱어의 숲이라고 부르는 듯하지만, 당시 그 숲은 유령의 숲이라고 불렸다. 나는 그곳에서 베티나와 루트비히, 둘 모두를 만났었다. 베티나가 아직 혼소(混素) 마법을 개발하지 않았고, 루트비히의 목덜미에 새겨진 마녀의 낙인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때니까, 아마 성전 초기 때였을 것이다. 루트비히에게 용사라는 칭호가 붙지 않았던, 혈혈단신으로 여신을 되찾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몽상가가 있다는 소문이 가끔 들리던 시대. 어디를 가든 전운이 감돌았던 숨 막히는 날들.
 유령의 숲에서 만난 베티나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통곡의 마녀가 성 아니모레 축일을 성 아니모레 위령절로 바꾸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프리스 측에서 베티나에게 사람을 보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4원소를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다는 천재 마법사에게 마법을 경멸하는 신의 무리가 찾아온 이유는 어떤 사람 때문이었다.
 통곡이 일으킨 재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 그자와 마녀와의 관계를 알고 싶다. 그 재해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
 요점은 그랬다. 마법에 대해 무지하니, 마법사인 베티나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다. 베티나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마법에는 분야가 있다. 불과 물 같은 자연의 요소를 다루는 원소 마법과, 축복과 저주처럼 인과를 조율하는 후광 마법은 이론적으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에프리스는 실로 마법을 배척하기만 하고 알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무지한 척일지도 모른다. 고귀한 나는 그런 사악한 것은 모르겠다는 퍼포먼스일지도 모른다.
 베티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에프리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마녀의 세례를 받고 살아남았다고 하는 작자에 대한 학문적인 호기심이 주 동기였다.
 통곡의 마녀 테레제. 성 아니모레 대학살 이래로 일약 유명해진 마법사다. 사용하는 건 후광 마법의 일종으로 그 효과는 매우 잔혹하고 실로 마녀답다고 일컬어진다. 소문으로만 무성할 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던 금지된 마법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 마법사는 없을 것이다. 마법사는 마법학자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그리고 베티나는 분명 '존재하지 않는 마법'에 무척이나 관심이 있었으니, 소문의 생존자를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바람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 바람은 미미한 기대감이었고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이 그 기대감은 금방 사그라졌지만, 공교롭게도 그 호기심이 베티나를 용사와 함께하게 했고 결국 베티나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생존자는 온몸이 구속당한 채 에프리스 본교 지하 묘지에 갇혀 있었다. '묘지'와 '갇혀 있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으나, '신은 사람이 사람을 가두도록 만들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섬기는 사람들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철창을 보며 베티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존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제 몸무게보다 더 나갈 것 같은 쇠 구속구. 온몸 구석구석 보이는 메마른 피. 그리고 피의 붉은 색보다도 더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검고 끈적한 무언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구속구가 있었지만, 체구로 보았을 때는 남자다. 남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외고 있었는데 베티나가 아무리 들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베티나는 타의에 의해 무릎 꿇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흠칫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그의 등에 꽂혀 있었다.
 수많은 주삿바늘과, 그 바늘과 이어진 선, 그리고 그 끝에 수액 따위가 들어 있는 통. 남자의 목소리를 베티나는 알아들었으나 못 알아들었다. 남자가 하는 말은 파편적인 단어의 나열 이상이 되지 못했다. 두서없고 지리멸렬한 헛소리. 환각제 등 마약 투여의 흔한 증상이다. 베티나는 이유도 없이 남자의 말을 몇 분간 들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엘리제. 그다음은 테레제다.
 베티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 남자의 모습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작품의 주인은 악질적인 취향을 갖고 있을 테고. 베티나는 뒤에 선 말끔히 차려입고 정갈한 척하는 교도 두 명을 곁눈질하고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신의 고귀하고 악질적인 취향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실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신의 추종자는 베티나의 고갯짓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약간 낙담하는 기색이다. 천재 마법사도 마녀의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걸까, 하고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베티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 생각했었다. 마법에는 분야가 있고, 원소 마법과 후광 마법은 동떨어져 있다고. 그리고 본래라면 원소 마법사인 베티나는 후광 마법에 대해 잘 몰라야 한다.
 하지만 그따위 사실과는 상관 없이 베티나는 이미 모든 걸 알아버렸다. 첫눈에 알아차려 버렸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알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만이 살아남은 이유와 이 남자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이것 하나 판단하지 못하다니, 에프리스는 정말 마를 멀리하는구나. 그 우직함 때문인지, 그 순진함 때문인지, 그 어리석음 때문인지. 베티나는 한참을 웃고는 우매한 이들에게 한 마디 던졌다.
 '길항 상태네요.'
 
 모든 설명을 끝마치고 베티나는 철창 안에 주저앉았다. 교도들은 물러갔으니 철창 안에는 구속당한 남자와 단둘이다. 남자의 실루엣은 방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모습엔 조금 변동이 있었다.
 마약을 주입하는 주삿바늘이 사라져 있었다.
 베티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 남자에게는 분명 마녀의 저주가 걸려 있어요.'
 교도들은 그렇다면 왜 죽지 않았는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동시에 정반대의 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자마자 남자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었던 건, 베티나가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다.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두 힘이 부딪히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거뭇하고 불쾌한 마력은 필시 마녀 테레제의 것이다. 그렇다면 새하얗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마녀와 거의 대등한 다른 쪽의 마력은 누구의 것일까?
 성 아니모레 위령절에 행방불명된 여신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남자에게는 여신님의 축복과 마녀의 저주가 동시에 걸려 있다는 말입니까?'
 '여신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고……. 자세한 이야기는 저 남자에게 들어 봐야겠죠.'
 대학살의 현장에서 여신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녀가 납치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증거가 없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자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단 한 남자를 빼고.
 가능성은 반보다 조금 높다고 베티나는 판단했다. 마녀가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자를 살려두었다는 것, 그리고 아까 남자가 끊임없이 중얼대던 단어들. 이를테면 이 남자는 마녀가 보낸 살아있는 선전포고일 수도 있다.
 교도들은 멈칫했다. 그들은 남자에게 구속구를 채우고 마약을 주입했었다.
 '날뛰었겠죠. 극과 극의 후광을 견디다니 그런 건 사람이 아니니까요. 애초에 이런 상태가 성립된 게 이해가 가지 않지만……. 차갑고 따뜻한 물 같이 안일한 차이도 아니고 얼음장과 용암 수준이라고요. 두 곳에 손을 번갈아 담그면 사람이 어떻게 되게요?'
 어떻게 되긴. 죽는다. 짓눌려서.
 '마약이라……. 난폭한 처치긴 해도 시간 벌이는 됐네요. 제가 왔으니까 주삿바늘은 제거해도 좋아요.'
 베티나는 남자의 정신을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왜? 이유를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마법학자 특유의 호기심과 마법사 특유의 호승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후광 마법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론 모른다. 몰랐다.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알고 있지 않겠는가? 베티나는 두 눈으로 남자를 보았으니까. 후광 마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내가 말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만 베티나는 천재 마법사다. 달리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괴물 같은 이해력, 괴물 같은 습득력, 괴물 같은 마력. 그 모든 요소가 한 사람 안에 들어 있었으니, 많은 사람이 선망하고 기피하는 것이다.
 조금 우쭐했겠지. 방심도 했을 것이다.
 만약 이 남자가 정말 마녀가 하고픈 말을 전해줄 전서구라면 마녀가 전심전력으로 저주를 짜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 시간만 들이면 평범한 마법사도 충분히 해체할 수 있도록 해두었을 것이라는 추측.
 그 이상 사고를 진행하지 않은 게 패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남자의 저주는 봉인했다. 베티나의 소중한 것과 맞바꾸어서.
 
 '테레제는 선을 넘었지요. 교단뿐만 아니라 마법사 측에서 판단했을 때조차 말이에요. 이렇게 대놓고 학살극을 벌여버리면 교단이 마법을 악마적인 무언가라고 판단해 버려도 반박할 수 없게 돼요.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마법사로서 이런 사태를 그저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그러므로 성 아니모레 참사의 피해자인……이봐요, 이름이 뭐였죠? 아, 루드윅! 루드윅의 저주가 완치될 때까지……뭐가 그렇게 불만인데요? 아, 루트비히라고 읽는 거군요. 루드윅인가 루트비히든……. 아무튼 이 녀석의 완치까지 제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중요참고인을 이런 식으로나마 빼 올 수 있었던 건 교단의 '대의를 중요시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트비히가 정신적으로 피폐하여 완치 후 다시 조사할 예정이기도 했고.
 교단은 루트비히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마녀의 여신 납치. 에프리스를 향한 선전포고. 신과 마의 전쟁. 마왕.
 마녀는 사람들을 유린하며, 오로지 루트비히만을 향한 말을 뱉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테레제는 루트비히에게 여신의 축복이 있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를 전서구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게 거의 틀림 없다.
 루트비히의 말은 그럭저럭 믿을 만했지만, 교단은 완전히 신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야 그의 어떤 말 하나가 신뢰성을 무너뜨렸으니까. 와르르르.
 '마녀는 저를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제 님을 구할 수 있는 건 저뿐이라면서.'
 아니모레를 쑥대밭으로 만든 마녀를,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마왕을 별 볼 일 없는 남자 하나가 상대한다고?
 못 믿을 말. 오히려 마녀에게 정신 조종을 당하는 게 아니냐며 의심이나 할까.
 마녀의 저주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여신 외에 누가 있겠느냐며, 마녀의 힘과 길항에 놓인 힘은 필시 여신의 힘이라며, 여신이 인정한 분이니까 그 일은 없을 거라며.
 베티나는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그래도 못 미더워하는 교단에게 결국 천재 마법사의 의무 운운하며 자신이 직접 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베티나의 입장에서 루트비히가 교단의 관리하에 들어가면 곤란하게 됐다. 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베티나는 루트비히로부터 용사의 휘광을 본 게 아니다. 마녀 테레제에게 속아(속았다기보단 제멋대로 넘겨짚다 당한 것이지만 베티나의 의견으로는) 어쩔 수 없이 루트비히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말했던 천재의 조건이었나? 이해력과 습득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마력. 이 중에는 성격이 다른 게 하나 있다. 이 셋 중에서도 빠지면 안 되는 단 하나. 짐작했다시피 마력이다. 이해력이나 습득력 중 하나 정도는 빠져도 좋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둘 다 빠져도 괴물 같은 마력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마력이 빠진다면? 모든 마법을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마법을 실현할 마력이 없다면?
 마법은 마력이라는 자원을 소모하여 효과를 발휘하는 기술이다. 즉 마력은 마법의 존재근간이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는 반푼이일 뿐이며 마법학자라고 칭하기조차 애매해진다.
 이 말에 여러분은 꽤 동의할 텐데 그렇다면 질문이다. 굳이 이런 타이밍에 이런 얘기를 꺼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베티나가 어쩔 수 없이 루트비히와 동행하게 됐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후에 마력이 없는 마법사는 반푼이라는 이야기를 한 저의가 뭘까?
 뭐, 그런 거다.
 빼앗겼다, 소중한 것을.
 
 베티나가 루트비히에게 휘감긴 저주의 술식을 역순으로 추적해 나가자 마녀의 함정이 진가를 발휘했다. 마녀는 치밀하게도 저주를 짜 넣을 때 어떤 구절을 같이 짜 넣었다. 이를 올바른 순서로 읽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술식에 필요 없는 군더더기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베티나는 괴물 같은 이해력을 바탕으로 처음 보는 후광 마법을 해독하는 데에 성공했고 마녀가 짜 놓은 술식에 의미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조금만 더 경험이 있었다면, 하다 못 해 저주 계열의 후광 마법에는 해제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는 상식이라도 알았더라면 베티나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으리라.
 마녀는 역순으로 읽으면 또 다른 저주가 되는 구절을 용사의 저주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베티나는 그 구절을 정확한 발성으로 읽어버렸다. 저주 대상은 술식을 읽은 자기 자신. 저주 형태는 거래 강제이행. 거래 내용은 마력 상쇄다.
 베티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마력은 마녀의 저주를 상쇄하기 위해 루트비히에게 흘러들어 가야 한다.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의 저주였다.
 베티나는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그 의미 없어 보였던 부분의 의미를 깨달아버렸고 자신의 원천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드러내 버린 것이다. 왼쪽 눈에 새겨진 화상 자국을.
 
 지금이야 유명한 얘기지만, 당시 베티나에게 화상 자국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전무했다. 왜곡마법이라는, 어느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마법을 이용해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의 저주에 엮이면서 왜곡 마법을 유지하는 마력마저 빼앗겨 버렸다. 베티나는 루트비히에게 비밀을 들켜버렸다. 맞바꿨다는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비밀이다.
 마력? 마력도 물론 중요하긴 한데, 되돌려 받을 방법은 있었다.
 바로 용사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다. 저주의 내용은 용사가 짊어지는 저주의 무게 만큼의 마력을 베티나가 부담하는 것이다. 즉, 용사가 강해지면서 저주에 면역이 생길수록 베티나가 소모해야 하는 마력도 줄게 된다.
 그런 연유로 베티나는 루트비히의, 스승이 되었다. 바야흐로, 용사 루트비히와 대마법사 베티나의 여신 구출기의 서막인 셈이다.
 한동안 베티나는 칙칙한 후드를 눌러 쓰며 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마녀의 저주는 동료, 그것도 꽤 실력 있는 동료를 용사에게 붙이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실력이 좋은 마법사, 그러나 마력을 빼앗겨 용사와 같은 수준으로 있을 수 있고, 용사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그런 동료.
 하하. 농담이다. 설마 그럴 리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왕 길어진 김에 베티나의 화상 자국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당신도 알다시피 베티나는 천재 마법사이며, 새로운 마법을 창시하는 마법학자로서도 꽤 유명하다. 이를테면 원소 하나만을 파고들수록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정론을 부수어 버린 혼소 마법이나, 다룰 수 없다고 믿어져 왔던 빛을 이용해 대상물을 굴절시켜 착시를 일으키는 왜곡 마법같이 기존의 이론을 뛰어넘는 마법들을 개발했다.
 이런 베티나의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만큼 천재적이지는 않았고, 어떤 실험의 결과로 파탄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실험으로 베티나는 어머니를 잃었고, 눈에 화상을 입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베티나가 소환계 마법에 신경질적으로 무관심했던, 전혀 다른 갈래인 원소 마법을 주류로 사용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트라우마. 이 이야기는 사실상 베티나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용사와 마법사는 모험하면서 마왕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그러던 중 마왕이 에프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교단은 용사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용사는 강해졌다. 베티나가 부담해야 하는 마력의 절대량도 꽤 준 상태였다.
 드디어 이야기의 무대, 유령의 숲이다. 그 근방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시 거대한 지진과 함께 숲 절반이 파괴되었던 적이 있었다. 귀신지기 내지는 시체지기라고 불리는 마물 때문이었는데, 이 마물은 자신의 영역에서 죽은 마물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강화하는 악질적인 녀석이었다. 악질적이긴 해도 강해진 용사와 마법사의 조합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규격을 벗어난 재앙이었다. 숲이라서 초록색 나뭇잎으로 의태를 했던 그 녀석은, 마치 끔찍해지는 저주라도 걸린 듯이 모든 것이 규격 밖이었다. 고목 뿌리 같은 외골격도, 충혈되어 붉게 빛나는 네 개의 눈도, 수족을 대신하는 열 아홉 개의 뼈 촉수도, 외관은 변한 게 없는데 그 강함은 도를 넘어섰다.
 마력을 한계치까지 담은 플레임벌쳐를 쏴 보내고 그 뒤를 이어 용사의 검기를 담은 직검이 내려쳐지면, 모든 것이 끝날 예정이었다.
 끝나기는 개뿔.
 끝날 뻔한 것은 오히려 용사 쪽이었다.
 귀신지기는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입 두 개를 쩍 벌리고 괴성을 토해냈다. 종이 달라도 '분노'라는 감정의 표현은 대동소이한 편이다. 귀신지기는 극히 흥분한 상태였다.
 촉수 다섯 개가 똘똘 뭉쳐진 거대한 주먹이 용사를 향해 뻗었고, 용사는 가까스로 이를 피했으나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용사가 전장에서 이탈하자 귀신지기의 목표는 베티나 하나로 좁혀졌다.
 베티나는, 훗날 그것이, 일생 겪은 공포 중, 1, 2위를 다툰다고 평했다.
 공포로 인해 감정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냉정해진 이성이 제멋대로 활로를 구축한다.
 세계는 감각적으로 느려지고, 생각은 빨라진다.
 찰나의 명령에 반응하는 신경을 가진 몸뚱어리조차 느릿하게 느껴져서 답답하다.
 트리거 설정, 차원 도약을 응용한 공간 전이. 대상은 시전자 본인. 위치는 사물과 겹쳐지지 않는 공중이 안전하겠지.
 이론 구축 완료. 영창 설계 완료. 실현 가능성 검토.
 안 된다. 너무 길어. 다 외기도 전에 몸이 부서진다. 거대한 주먹에 맞아 산산이 조각나 버릴 거야.
 다듬기. 설계된 주문 속에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잘라낸 만큼 무너져 버린 밸런스를 재조정한다.
 한계까지 밀어붙여 완성된 영창을 입에 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세 음절로 된 마법이었으며,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설계된 공간이동 마법이었다. 단축된 길이 만큼 부족한 출력은, 베티나의 괴물 같은 마력으로 때웠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되었다.
 마력 전량 소모.
 당신도 이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플레임벌쳐라는 마력 소모량이 큰 불의 원소 상급 마법을, 그나마도 마력량을 기본보다 두세 배는 부어 넣어서 사용했다. 그 직후 비효율적인 단축 영창으로 고위 마법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자연스레 마력은 동이 나버렸고, 베티나의 상처를 가려주던 왜곡 마법이 해제되어 버렸다.
 신의 장난인지, 무려 두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들켜 버렸다.
 한 사람은 판이라는 검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베티나라는 마법사였다.
 신의 장난인지.
 
 그렇다. 이 이야기에는 베티나가 두 명 등장한다. 편의상 한 사람을 베티, 또 다른 한 사람을 티나라고 표기하겠다.
 언급했듯이, 베티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하지 않는 마법'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마법이 아닌 현상이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여버린 이후 매달렸던 또 하나의 마법.
 많은 이들이 유사 마법이라 비웃는 그것.
 베티가 소환 마법, 아니 소환이라고 하기엔 이미 정도를 넘어선, 창조 마법에는 극심한 거부감을 드러냈었지만, 그와 관련이 없는 다른 분야는 관심이 있었다. 조수로서 솔직히 연구의 나날은 즐거웠다.
 도플갱어.
 다차원 상에 존재하는 평행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의 집합체.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구체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진 마법.
 그 현상을 이 유령의 숲에서 겪게 된 것이다.
 베티는 본능적으로 깨닫게 됐다.
 이 숲은 지금 특수한 상황에 처했다.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차원이 붕괴되어서 특정 시점의 가능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래서 도플갱어가 나타나게 되었고, 베티는 티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현상을 연구하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플갱어 마법을.
 
 베티의 첫 감상은 어색함이었다. 자기 자신과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아 있는 채로 영혼만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티나도 마찬가지인지 화상 자국이 남아 있는 눈동자를 크게 치뜨고 베티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때 베티는 위화감을 느꼈다. 뭘까, 이 느낌은?
 검격이 날아오는 바람에 그 위화감의 정체가 뭔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베티와 티나는 급히 몸을 비틀어 피했다.
 탈을 쓴 검사였다.
 의문이 들기도 전에 이해했다. 베티와 티나는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서로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순식간이었다. 마력이 전무한 베티가 페인트 모션을 취해 의문의 검사를 멈칫하게 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티나가 판으로부터 검을 빼앗고 포박의 저주를 걸었다. 검사는 당황했는지 기성을 내며 몸을 떨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티나였다.
 '어휴. 또 어디서 이상한 저주에 걸린 탈을 주워 쓴 건가요.'
 베티가 말을 받았다.
 '주운 물건은 식별하기 전에 함부로 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말이에요.'
 익숙한 체격에 익숙한 검을 든 사람.
 당연히 루트비히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느 세계의 루트비히지, 하는 것뿐.
 
 결론만 말하자면 베티의 동료도, 티나의 동료도 아니었다. 루트비히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해져서 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베티, 티나라는 명칭도 이 때 정했다.
 판은 여러모로 이상한 루트비히였다. 베티와 티나가 아는 루트비히는 웃음이 헤프고 조금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판은 탈 뒤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도 알 수 있을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과묵했다.
 더 이상한 건, 티나가 부여한 저주도 스스로 쉽게 풀어버렸고, 더 더 이상한 건 베티와 티나라는 세기의 천재 마법사가 둘이나 달라붙었는데도 떨어뜨릴 수 없는 저주가 걸린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우리를 공격했죠?
 하는 티나의 물음에
 적이 둘이나 있으니까.
 그렇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같은 모습을 했으니 의태에 특화된 마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이해한 베티는 말했다.
 '둘 중 하나가 진짜였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죠?'
 이미 셋은 이곳이 일종의 차원교차공간이고, 서로 도플갱어라는 현상 속에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걸 감안한 판의 대답이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 베티나라는 마법사는 적이었거든. 아주 고약한 마법을 사용하는.'
 그건 도대체 어떤 가능성의 세계인지.
 베티와 티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행은 길을 잃었고, 베티와 티나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가, 그러니까, 자신들의 세계의 루트비히가 걱정된 것이다.
 불을 지피고 휴식을 취하며 이후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최우선은 루트비히를 찾아 탈출하는 것, 둘째는 절대로 귀신지기와 마주치지 말자는 것.
 귀신지기의 말도 안 되는 강함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가설이 세워진 상태였고, 결론적으로는 절대로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마물은 극히 호전적이고 지능이 낮다.
 혹시 당신은 도플갱어에 관한 전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둘은 마주치면 서로를 인정할 수 없어 죽이려 든다는 것. 대화라는 이성적인 소통수단이 있는 인간도 그러할진대 한낱 미물은 어떻겠는가.
 수많은 차원의 귀신지기가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를 향한 살육전이 벌어진다.
 서로를 집어삼키며 강해진다.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시체를 먹어치우며 강함의 밀도가 높아져만 간다. 그리고 그 최종형태가 바로 그 귀신지기다.
 어쩌면 세계는 미증유의 위기를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강대한 마왕도, 그 잔혹한 마녀도 그 귀신지기 앞에서는 색이 바랠 것만 같다. 마와 신이 어쩌면 이를 계기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막강한 존재였다.
 어쨌건 이 숲을 빠져나가 현 사태에 대해 외부에 알려야만 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베티와 티나는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슨 마법을 잘 사용하고 무엇이 특기이고 하는 것……. 다른 가능성의 세계……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베티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베티와 티나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베티는 원소 마법의 전문가였지만 티나는 원소든 후광이든 두루 사용할 줄 알았다. 그제서야 베티는 처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지금,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건 그 외모. 베티의 얼굴은 깨끗했고, 티나의 얼굴엔 여전히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티나는 베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베티가 지나쳐버린 어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티는 허탈해져서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눈물도 흘렸을지도 모른다.
 티나는 베티가 묻지 않았던 질문 하나를 아버지에게 던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이 마법에 매달리는 거야?'
 아버지는 약간 놀란 듯이 떨었다고 한다. 같이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과거 실험이 실패했던 이후로 사무적으로 변해버린 딸이 갑작스레 그런 말을 꺼내왔으니까.
 '처음에는……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어.'
 묻지 않았기에 베티는 듣지 못했던 말.
 '실험에 성공한 내 모습, 혹은 아내를 잃지 않은 내 모습. 수많은 모습을 상상했지. 근데 생각해보니까 결국 그건 내가 아니잖아? 그런 걸 보더라도 내 세계는 변하지 않아. 실험에 실패하고 아내를 잃은 내 모습은…….'
 '그럼 왜? 아직도 매달리는 건 뭐 때문이야?'
 '베티나,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낳은, 내가 사랑하는 딸.'
 아버지는 티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단다. 그 날 아내를 구하지 않고 너를 구한 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그렇게.
 '그래도, 망설임은 있었더라도, 다시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어. 그러니까,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리고 묻고 싶었어.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티나는 몇 년 만에 그의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베티는 모르는 모습이다.
 '물론 나는 멋지게 대답하겠지. 후회하지 않아, 하고.'
 
 왜. 왜 진작 묻지 않았을까. 베티는 속으로 후회하고 후회했다. '네 모습을 보니, 역시 아버지는 같은 선택을 하셨나 보구나.' 티나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미웠다. 딸을 택하고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가 미웠다. 차라리 베티를 버리고 어머니를 구했다면 좀 더 행복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딸이야 또 낳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선택으로 아버지의 미래는 꽤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망했다. 제멋대로 자신을 구해놓고 후회하고 있는 아버지가 구역질 날 정도로 불쾌했다. 도플갱어에 매달리는 건, 또 다른 가능성을 바라는 행위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현재를 후회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티나는 아버지가 싫었고 아버지가 남긴 화상 자국을 지워버렸다.
 베티는 묻지 않았고 티나는 물었다.
 차이는 그뿐. 가능성의 차이는 그뿐.
 그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다.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그걸 확신하기 위해 도플갱어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다.
 왜 진작 묻지 않았을까.
 
 베티는 자신의 얼굴 일부에 감긴 마력의 흐름을 해제했다. 붉은 화상 자국이 눈 주변에 돋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티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베티는 루트비히를 따라와서 다행이라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다.
 좋아. 이 숲을 빠져나가 상황을 알리고 모든 게 끝난 뒤에 아버지의 묘소에 들르자. 거기서 마음껏 화를 내는 거다. 진작 알려주지 그랬느냐고. 그리고 자랑하는 거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몰두하던 도플갱어를 내가 만났다고. 아버지가 구하던 답을 내가 구했다고.
 그건 꽤 즐거운 상상이었다.
 가능하면 방해받지 않고, 좀 더 감상에 젖고 싶었는데.
 굉음이 들리고, 땅이 거대하게 울었다.
 밤을 지내던 사이에 바짝 뒤쫓아 왔나 보다.
 귀신지기.
 양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무지막지한 존재감에 짓눌릴 것만 같다. 몇 번을 봐도, 이 느낌은 빛바래지 않을 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물이 존재하다니 이 세상은 뭔가 잘못 설계된 것은 아닐까?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나오는 광경이다.
 베티와 티나는 서로 눈을 맞추고 고민했다. 공간 이동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단축 영창은 불안정해서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하지? 발을 묶는다. 천재 마법사 두 명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낙관적이라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베티가 플레임벌쳐 두 마리를, 티나가 플레임벌쳐 한 마리를 만들어낸다. 세 마리가 얽히고설켜 거대한 화염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그 흐름에 베티가 흙 계열 원소 마법을, 베티나가 중력 마법을 사용하여 응축된 바위 덩어리 수백 개를 만들어 던져 넣었다.
 바위는 용암이 되어 흩날렸으나 그 본체는 녹아도 녹아도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아 마치 유성우가 휘도는 모양새가 되었다.
 바람.
 흐름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거대한 귀신지기 만큼이나 막대한 혼소 마법이었다. 유령의 숲 절반이 날아가 버리는 초유의 살상 마법.
 두 천재가 전심전력을 다 한 일격이었다.
 즉, 귀신지기는, 두 천재가 전력을 다해도 쓰러뜨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염의 폭풍 속을 버티고 선 귀신지기는 무척이나 화가 난다는 듯이 포효했다.
 하하.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이 세계는 저 괴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 괴물을 쓰러뜨릴 방법은 과연 존재할까.
 그보다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제 마력도 없는데.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판이, 다른 가능성의 루트비히가 전부 끝내버렸다.
 다른 차원의 용사는 유유히 걸어가 매우 낡은 직검을 수직으로 들어 기합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대로 내리그어 희대의 괴물을 일도양단해 버렸다.
 그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뭐야. 거짓말. 네 어디가 루트비히야? 어벙하고, 수다스럽고, 못 미덥고, 잘 웃어야 루트비히지. 무슨 마물이기에 용사를 의태한 거야? 귀신지기보다 강한 마물이라니, 이 세계, 가망이 없잖아.
 용사는 뒤돌아 이쪽을 바라본다.
 탈 속에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은 마물 따위가 아니라 네가 아는 그 루트비히가 맞노라고 격렬하게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생각했다.
 그건 어떤 가능성의 세계일까? 그 유약한 용사가 이 정도로 강해지려면 어떤 세상이어야 할까? 루트비히, 넌 뭘 위해서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무심코 물어봤을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베티나가 물었을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리는 탈 뒤에 표정을 감춘 용사는 고요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엘리제를 위하여.'
 
 
 자, 무용담은 여기서 끝이다. 이야기에 명확한 인과를 부여할 수 없는 건 내가 신이 아니기에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이 이야기에는 논리적인 전개도, 합리적인 설명도 없노라고.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 내가 베티인지 티나인지 그것이 궁금한가? 하하. 지금까지 뭘 읽은 건가?
 나는 마법사 베티나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계속>
초고 완성 2016/3/14
최종 퇴고 201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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